최근 수정 시각 : 2023-08-17 23:45:20

지크문트 라셔

[[독일의 전쟁범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000> 전범과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루돌프 헤스 | 마르틴 보어만궐석재판 | 발두어 폰 시라흐 | 발터 풍크 | 빌헬름 카이텔 | 빌헬름 프리크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알베르트 슈페어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알프레트 요들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에리히 레더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카를 되니츠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프리츠 자우켈 | 한스 프랑크 | 헤르만 괴링자살

카를 브란트 | 카를 게프하르트 | 볼프람 지퍼스 | 루돌프 브란트 | 발데마르 호펜 | 카를 겐츠켄

에르하르트 밀히

오스발트 폴 | 아우구스트 프랑크 | 게오르크 뢰르너 | 한스 뢰르너| 프란츠 아이렌슈말츠

빌헬름 리스트 | 로타르 렌둘릭 | 발터 쿤체

울리히 그라이펠트 | 베르너 로렌츠 | 리하르트 힐데브란트

오토 올렌도르프 | 에리히 나우만 | 파울 블로벨 | 베르너 브라우네 | 에두아르트 슈트라우흐 | 마르틴 잔트베르거 | 오이겐 슈타이믈레 | 발데마르 클링겔회퍼 | 하인츠 요스트 | 구스타프 아돌프 노스케 | 프란츠 직스

헤르만 호트 | 빌헬름 리터 폰 레프 | 게오르크 폰 퀴힐러 |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학살 사건 홀로코스트 |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 바비야르 학살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 말메디 학살 | 그래뉴 학살 | 르 파라디 학살 | 바르샤바 봉기 진압
생체 실험 T4 작전
생체실험 관련인물
요제프 멩겔레 |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 | | 카를 브란트 | 카를 게프하르트 | 호르스트 슈만 | 아리베르트 하임 | 카를 클라우베르크 | 지크문트 라셔
강제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수용소
기타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 | 정치장교 명령 | 국방군 무오설
※ 문서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서술. 기소 여부 및 판결에 대해서는 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서를 참고
※ 둘러보기: 틀:파시즘, 틀:나치즘, 틀:뉘른베르크 군사법정 전범재판 }}}}}}}}}

파일:1_jFDucGJcEBJgKo6yp3aDPA.jpg
파일:Dachau_cold_water_immersion.jpg
나치의 생체실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로 오른쪽 인물이 지크문트 라셔다.

1. 개요2. 생체 실험
2.1. 감압 실험2.2. 저체온 실험
3. 최후

1. 개요

지크문트 라셔 (Sigmund Rascher)
(1909년 2월 12일 - 1945년 4월 26일)

지크문트는 뮌헨에서 의사를 하던 한스 아우구스트 라셔의 셋째 아들로 1909년 모나코에서 태어났다. 콘스탄츠 및 뮌헨의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지크문트는 뮌헨에 있던 1933년에 나치당에 입당했고 그 후 이혼한 아버지와 함께 스위스의 바젤로 이주한 후 스위스군에서 일한 지크문트는 1934년에 뮌헨으로 돌아와 의학 공부를 재개했다. 1936년에 의사 자격을 취득한 후 돌격대에 배속된 지크문트는 뮌헨의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암 연구에 매진했고 1939년에 친위대로 이적한 지크문트는 독일 공군에 군의로도 입대했다. 그는 유명한 가수이던 니니 딜과 결혼했는데, 니니는 지크문트보다 연상이었지만 친위대 전국지도자이던 힘러가 아끼던 애인 중 한 명이어서 이 결혼으로 지크문트는 힘러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1944년에는 스트라스부르고에서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지크문트는 친위대 내부에서 큰 권력을 쥐게 되었고 스스로 암의 연구를 위해 인간을 실험체로 사용하는 의견을 하인리히 힘러에게 제안하여 이를 승낙 받은 후, 다하우 수용소에서 인체실험용 시설을 만들게 되었다.

2. 생체 실험

2.1. 감압 실험

1942년 초에 지크문트는 공군 군의대위 신분으로 다양한 실험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실험이 바로 감압 실험이다. 일명 초고도 실험이라고도 불리며 또는 저기압 실험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실험은 전투기 조종사가 고도의 저기압에 어느정도 견딜 수 있는가를 조사하기 위해 시작된 실험이다.

당시에 지크문트 박사를 보좌한 사람의 증언을 보면 당시에 실험 대상자들은 감압실에 발가벗은 채로 갇혔고 실험 대상들은 점차 압력이 감소해가자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거나 유리창과 벽을 들이받거나 또는 자신의 몸을 할퀴거나 물어뜯었고. 이 실험은 몇 시간 후 종료되었다고 한다. 또한 실험자에게 일부러 손목에 상처를 낸 후에 시행된 압력실험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손목이나 다른 부위에 상처가 있을 때 외부압력을 받으면 그 상처를 통하여 피가 얼마나 쏟아져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지크문트가 압력실의 압력을 높이기 시작하자, 실험 대상자는 처음에는 심한 경련을 보이더니 압력을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자 코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했고, 입술 사이에서도 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처음에는 손목의 상처 부위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았는데, 그러다 갑자기 상처가 난 손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서 실험장이 피 범벅이 되었고, 실험자는 끔찍하게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렇게 다하우에 감금되었던 유대인, 폴란드인, 소련군 포로 등 약 80여명이 저기압 실험실에서 실험에 사용된 후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2.2. 저체온 실험

파일:11736_800x.jpg
초고도 실험에 이어 저체온 실험도 악명이 높다. 이른바 한랭 실험이라는 이 실험은 극한의 바다에 떨어진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실험이었다.

당시에 실험을 참가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실험에는 포로로 잡힌 2명의 소련 장교들이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찬 물에 벗은 채로 들어갔고 시간은 흘러갔다. 두 장교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정신을 잃지 않으려 했지만 너무도 고통스러운 실험이었기에 당시 한 소련 장교는 다른 장교에게 실험을 주관하는 박사와 장교들을 가리키며 '동무. 저 독일 장교에게 차라리 총살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떨까?' 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장교는 '저 개같은 파시스트 놈들이 그런 자비를 주진 않을 거 같네.' 라고 말했으며 결국 두 소련 장교는 서로 "잘 가게. 동무." 라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약 5시간[1]은 넘게 흘렀다.

그 외에 가온 실험도 실시했는데, 이 실험의 의도는 용감한 독일 조종사와 해군 선원들이 북극해 부근처럼 추운 곳에 실종되었을 때 그들을 구하기 위한 빠른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지크문트는 1명의 여자와 2명의 여자를 놓고 실험을 하였는데, 실험의 결론은 바다에서 2명이 있으면 일종의 도덕적 자제력이 생겨 1명이 있을 때보다 체온 상승이 낮았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최종 결론은 '극히 어렵고 힘들다. 차라리 온열 찜질을 하는 게 훨씬 좋다.'였다 도표나 확률도 없이 그냥 이렇게 적은 것만 봐도 제대로 된 의학자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실험에서 약 90명 정도의 수형자들이 실험에 끌려나가 동사했다고 한다. 라펜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서 이송되어 온 4명의 집시 여인 중 2명을 동사시킨 후 다른 두명의 여성을 발가벗긴 후에 껴안게 하여 덥힌다[2]는 광기 어린 실험도 실시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자신을 아우슈비츠로 전출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그 이유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매우 넓어서 일하는 동안 사람들의 주의를 덜 끌 수 있을 것이다. 실험 대상들이 몸이 얼 때 너무 소리를 지른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지크문트의 이런 악행은 곧 끝나게 된다.

3. 최후

지크문트의 아내 니니는 48세가 된 후에 아이 셋을 낳았기에 힘러는 라셔 일가를 인구 증가 목적의 선전에 이용했다. 당시에 40세가 넘었어도 아이를 계속 가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므로 당시 독일인들을 그들의 출산을 놀라워했다. 그러나 니니가 네번째 아이를 임신했다고 밝혔을 때 그녀가 아이를 유괴하다가 체포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니니는 실제로 임신한 것이 아니었고, 지크문트와 공모해 몰래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일정 간격으로 교묘하게 빼돌려서 데려온 것이었으며, 세번째 아기도 유괴 및 매수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지크문트는 힘러의 눈 밖에 났고 1944년 4월 지크문트 부부는 게슈타포에 의해 아동 유괴 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뇌물을 받은 혐의와 부하 살해, 사기 혐의로 기소된 라셔 부부는 사형 판결을 받았고, 독일의 패전 직전인 1945년 4월 26일에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으로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1] 보통 사람들은 2시간 30분 정도.[2] 몸을 녹이는 실험에는 여러 실험 방법 중에는 성교를 통한 해동 방법도 실험하였는데 사실상 강간이 따로 없었고 이로 인해서 여러 여자들이 강간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