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요하네스 헨드릭 펠드메이어르 Johannes Hendrik Feldmeijer'[1] | ||
출생 | 1910년 11월 30일 | |
네덜란드 드렌터주 아선 | ||
사망 | 1945년 2월 22일 (향년 34세) | |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랄터 | ||
국적 | [[네덜란드|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
직업 | 군인 | |
최종 계급 | 슈츠슈타펠 대령 무장친위대 대위 | |
주요 서훈 | 철십자 훈장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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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헹크 펠드메이어르 (Henk Feldmeijer) |
2. 초기 행적
네덜란드의 드렌터주 아선에서 육군 상사의 아들로 태어난 펠드메이어르는 중간 이름인 "헹크"만을 사용하여 헹크 펠드메이어르를 이름으로 썼다. 1928년에 고교를 졸업한 후 흐로닝언 대학에 입학해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3. 정치 활동
1931년에 병역 의무로 휴학해 포병 장교가 되었다. 이 때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NSB)의 돌격대(WA)와 접촉하여 나치즘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932년에 펠드메이어르는 NSB 당원이 되어 479번의 번호를 받았다. 최초의 1,000명 멤버 중 한 명으로서 NSB의 리더인 안톤 무세르트와 직접적인 연줄이 있었던 그는 흐로닝언 시내에서 연설하며 리더의 필요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을 역설했다. 펠드메이어르의 화술은 곧 먹혀들어, 선전부의 요직에 취임해 독일과 이탈리아도 방문하여 SS 대원 및 파시스트 당원과도 접촉했다.1935년에 대학에서 치러진 전공 시험에서 낙제하자 그대로 대학을 퇴학하여 이후 정규 당원의 자격으로 유트레히트의 본부에서 본격적인 나치즘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NSB에서 펠드메이어르는 네덜란드 역사속의 독일적인 요소를 개발하여 민족우월주의와 반유대주의적인 역사관을 고무시켰다. 그는 독일의 슈츠슈타펠과 많은 극비 라인을 가지고 있어, NSB 내부에서 당 견해의 과격화를 주도했다. 펠드메이어르는 네덜란드인의 선조인 게르만 민족혈통의 유지를 이상화하여 1937년에 안톤 무세르트와 마찰을 빚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5월 3일에 네덜란드 정부는 나치 독일에게 기밀을 누설한 혐의로 펠드메이어르를 체포하여 벨기에를 경유해 프랑스로 호송했지만 5월 30일에 칼레를 침공한 독일군에 의해 풀려났다. 6월 2일, 네덜란드 침공 직후 독일의 수중에 떨어진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친위대 국가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 및 네덜란드 국가판무관인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만났다.한스 라우터와 헹크 펠드메이어르 |
이 네덜란드 SS는 NSB의 하부 조직이었지만 나치 친위대의 하부 조직이기도 했다. 표면상의 책임자는 NSB의 수장인 안톤 무세르트였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는 펠드메이어르와 그를 지지한 힘러, 그리고 라우터였다. 펠드메이어르는 독일의 유럽 정복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자신도 최전선에서 종군했다.
무장친위대 소위 (하급돌격지도자) 헹크 펠드메이어르 |
친위대 연대 지도자 펠드메이어르 |
펠드메이어르는 NSB의 저항활동에 대한 나치 독일의 보복 조치에 가세한 후, 1943년 9월부터 1944년 9월까지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의 체포에 나서 적어도 20명 이상을 처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