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Josef Albert Meisinger 요제프 알베르트 마이징거 |
출생 | 1899년 9월 4일 |
바이에른 왕국 뮌헨 | |
사망 | 1947년 3월 7일 (향년 47세) |
폴란드 바르샤바 | |
복무 | 슈츠슈타펠 (1933년 ~ 1945년) |
최종계급 | 슈츠슈타펠 아인자츠그루펜 IV 대령 (연대지도자) 질서경찰 대령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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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 대령 및 질서경찰 대령.2. 초기 행적
바이에른 왕국 뮌헨에서 태어난 마이징거는 뮌헨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6년 12월에 독일제국군에 지원해 포병연대 소속으로 서부전선에서 종군했다. 그는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했는데 전후에 의용군에 참가했으며 뮌헨의 은행 및 지방재판소, 경찰본부 등에서 일했다.3. 친위대 입대
1923년에 히틀러가 일으킨 뮌헨 폭동에서 의용군 <오버란트>의 일원으로 참가한 마이징거는 1933년 3월에 친위대에 입대해 5월에 정식으로 나치당 당원이 되었다. 1933년 11월에는 뮌헨 폭동 참가자에게 주어진 기념메달도 받은 그는 바이에른 주의 정치경찰장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직속으로 일했다.4. 게슈타포에서의 활동
1934년 4월에 하이드리히가 게슈타포 정치경찰부장이 되면서 베를린으로 이동한 후 마이징거는 곧 하이드리히의 추천으로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로 이동했다. 1934년 6월의 장검의 밤 사건 당시에 가톨릭 정치가였던 에리히 클라우제너의 조사를 담당한 그는 하이드리히에게 위험인물로 보고하기도 했다. 그 결과 클라우제너는 6월 30일에 친위대원에게 총살당했다. 1935년 초에 게슈타포 제2부[1]의 NSDAP, 낙태, 175조(동성연애금지), 순혈문제 담당과의 과장으로 부임한 마이징거는 반히틀러파와 임신중절, 동성연애, 유대인 분리정책을 담당하여 1936년 7월에는 육군 총사령관인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의 동성연애 의혹사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이 때 마이징거의 조사는 2년 후 프리치 장군의 사퇴에 사용되었다. 1936년 4월에 친위대 소령으로 승진한 마이징거는 1937년에 다시 중령으로 승진했지만 다소 오만한 성격 탓에 게슈타포 내부에서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상사였던 하이드리히조차 그를 Widerling[2]으로 부를 정도였다. 결국 마이징거는 게슈타포를 떠나 1938년에 친위대의 공문서보관소 국장으로 좌천되고 말았다.5.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아인자츠그루펜 IV의 부사령관으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불순분자와 유대인의 총살처리를 담당한 마이징거는 1941년 3월까지 바르샤바의 보안경찰 및 친위대 지휘관으로 일하면서 1940년 1월에 친위대 대령으로 승진했다. 바르샤바에서 재임 중 마이징거는 대량의 폴란드인 및 유대인 학살에 관여하여 <바르샤바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떨쳤다. 1941년 3월에 일시적으로 베를린의 국가보안본부로 돌아온 마이징거는 4월부터 일본주재 독일대사관의 경찰무관 및 친위대 대표로서 도쿄에 부임했다. 일본 제국으로 취임직후 마이징거는 일본 제국의 특별고등경찰과 헌병대와 연락을 취하여 리하르트 조르게의 신병조사를 실시했다. 한편 일본정부의 <관대한> 유대인 정책에 불만을 가진 마이징거는 1942년 7월에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상하이를 방문하여 상하이 주재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3가지 안건을 상하이의 일본영사에게 제안했다. 그것은 첫째, 폐선에 유대인을 태운 후 동중국해에서 일본해군으로 격침케 한다, 둘째, 탄광에 보내 혹사시켜 죽인다, 셋째 양쯔강 하구에 수용소를 만든 후 인종실험 후 처분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1938년에 타국의 유대인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운 직후여서 마이징거의 제안을 거부했다. 상하이 등 일본이 점령한 지역의 유대인들은 게토에 강제 수용되어 생활하였으나 학살은 없었다.6. 전후 재판과 최후
재판에 회부된 마이징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