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436f4d><colcolor=#fff> 비테즈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페렌츠 Vitéz Feketehalmy-Czeydner Ferenc[1] | ||
출생 | 1890년 11월 22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헝가리 왕국 피스키 (現 루마니아 시메리아) | ||
사망 | 1946년 11월 5일 (향년 55세) | |
유고슬라비아 FNR 세르비아 NR 자발 | ||
국적 | [[헝가리|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테레지아 사관학교 | |
직업 | 군인 | |
최종 계급 | 상장 무장친위대 대장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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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군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비사드 학살의 책임자이며 전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2. 초기 행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페케테헐미는 트라이스키르헨의 포병 사관학교와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1910년 중위가 됐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포병, 참모장교로 참전하여 대위가 되었고, 전후 헝가리 왕국군에서 복무하였다. 1938년에 소장, 1941년에 중장으로 승진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1942년 헝가리 왕국이 점령한 유고슬라비아에서 페케테헐미의 군대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진압했고, 노비사드에서 약 4,000여명을 학살했다. 이로인해 당시 헝가리 야당의 엔드레 버이치질린스키 의장은 시위를 벌였으며 페케테헐미는 군에서 은퇴했지만 처벌받지 않았다. 1943년 9월 헝가리가 연합국과 협상을 할때 전쟁범죄 책임이 있는 장교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었고, 1943년 12월 14일 재판이 열렸다. 페케테헐미는 15년 형을 선고받았고, 1월 15일 다른 피고들과 빈으로 도피하여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헝가리 정부는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였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거부하였다.친위대 집단지도자 시기의 페케테헐미 |
1944년 3월 페케테헐미는 무장친위대에 입대하였고, 판처파우스트 작전으로 살러시 페렌츠의 화살십자당이 정권을 잡자 페케테헐미는 헝가리로 돌아가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