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Freidrich Karl Freiherr von Eberstein 프리드리히 카를 폰 에버슈타인 남작 |
출생 | 1894년 1월 14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 할레 (現 독일 작센안할트주 할레) |
사망 | 1979년 2월 10일 (85세) 서독 바이에른주 테게른제 |
복무 | 슈츠슈타펠 (1929년 ~ 1945년) |
최종계급 | 슈투름압타일룽 중장 (집단지도자)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질서경찰 대장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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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남작, 정치인,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이다.2. 초기 행적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의 할레에서 퇴역 육군소령의 아들로 태어났다.[1]1904년부터 1912년에 걸쳐 프로이센 왕국의 나움부르크와 베를린의 리히터펠데 유년사관학교에서 공부한 에버슈타인은 도중 병으로 임관하지 못해 할레 대학에 입학하여 농업경제학을 공부했다.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때 프로이센 제75포병연대에 입대한 에버슈타인은 1915년에 서부전선에 종군하여 제17 보병연대 제3중대장으로 종군해 소위로 승진한 후 1, 2급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독일의 패전 후 일관되게 보수우익의 정치활동에 종사한 에버슈타인은 스스로도 <정치적 병사>라고 정의했다.4. 정치 활동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독일 인민당에 입당한 그는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철모단에 입대해 1924년에는 철모단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의 부관이 되었다. 1919년 2월부터 의용군에도 참가한 에버슈타인은 1919년부터 1920년 3월까지 할레의 은행에서 근무한 후 의용군 <로스바흐>에서 1920년 3월에 컵 봉기에 참가했다. 1921년 4월부터 5월 사이에 할레의 방위경찰로 잠시 일한 에버슈타인은 1921년 5월부터 9월까지 실레지엔 자위단에 참가하여 폴란드인의 실레지아 봉기의 진압전에 참가했다. 중부독일의 나치당 전신인 긴급동맹에 들어간 에버슈타인은 1922년 10월에 정식으로 나치당에 입당했지만 뮌헨 폭동 실패 후 나치당이 금지되자 나치당의 위장조직인 프로이센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에 참가한 후 돌격대의 위장조직인 프론트반에 참가했다. 1925년 8월 17일에 재건된 나치당에 다시 입당한 에버슈타인은 1925년 11월 30일부터 명목상 나치당적을 이탈하여 올드로프의 육군훈련장 민간관리인으로 일했지만 나치당 활동의 태만으로 인해 1927년에 해고되어 1928년부터 1929년에 고다에서 회사를 차려 자영업을 하다가 1929년 2월 1일에 나치당적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5. 슈츠슈타펠 입대
1929년 4월 1일에 창설된 친위대에 입대한 에버슈타인은 하인리히 힘러의 측근이 되어 힘러가 친위대 국가지도자가 되자 함께 친위대의 간부가 되었다. 힘러가 에버슈타인을 중용한 것은 그를 통해 귀족층의 지지를 나치당에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1931년 6월엔 같은 고향 출신인 해군제대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힘러에게 소개시켜 입당을 추천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양부모는 에버슈타인의 양친과 깊은 관계이기도 했는데, 1930년 5월부터 1931년 1월에 걸쳐 나치당의 고타 시 의원이 된 에버슈타인은 1932년 9월에 돌격대 중장이 되었지만 1933년 2월에 돌격대를 떠나 이후 친위대의 임무에만 전념했다.1933년 3월 5일에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에버슈타인은 제18 친위대 지구대표를 지냈는데 1934년 5월부터 1936년 4월에 걸쳐 친위대 상급지구 <엘베>의 지도자가 되었다. 또 이와 병행하여 1934년 12월부터 1936년 3월에 걸쳐 드레스덴과 바우쉔의 지사도 겸직했다.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시절의 사진 |
1936년 1월에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한 에버슈타인은 4월부터 1945년 4월 20일까지 친위대 상급지구 남방사령관으로 일했다. 이와 겸직하여 뮌헨의 경찰국장으로도 일했는데 1942년 10월부터 1945년 4월에는 바이에른 주 내무서에서도 근무했다.
이러한 위치로 바이에른 주와 뮌헨의 친위대 및 경찰을 지배하에 둔 에버슈타인은 뮌헨 교외의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운영에도 관여했다.
1938년 11월에 일어난 장검의 밤 사건당시 보안경찰국장이었던 하이드리히로부터 전보를 받고 일련의 반유대주의 폭동을 진압하지 말 것을 일선 경찰들에게 지시하기도 했는데 1944년 7월에 무장친위대 대장계급도 부여받은 에버슈타인은 1945년 4월에 총통관저 장관인 마르틴 보어만의 명령으로 패배주의자로 낙인찍혀 모든 관직을 박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