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Hans Heinrich Lammers 한스 하인리히 라머스 |
출생 | 1879년 5월 27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주 루블리니츠 (現 폴란드 루브니비엑) | |
사망 | 1962년 1월 4일 (향년 82세) |
서독 뒤셀도르프 | |
복무 | 슈츠슈타펠 (1933년 ~ 1945년) |
최종계급 | 슈츠슈타펠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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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라머스는 나치 독일의 법률가, 정치인이자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이다.
2. 초기행적
프로이센 왕국 동부 루블리니츠에서 수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라머스는 브레슬라우와 하이델베르크의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12년에 보이텐에서 재판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1급 철십자 훈장과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한 라머스는 전후 변호사가 되어 독일국가인민당(DNVP)에 입당했다. 그 후 1922년에 내무성 차관으로 일하다가 1932년에 나치당에 입당하여 간부가 된 라머스는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엔 총통관저 장관, 국무장관의 요직에 앉았다. 1933년 9월 29일에는 친위대의 명예지도자가 되어 친위대 상급대령의 계급도 부여받았다. 친위대 계급은 1940년에 대장까지 올랐다.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라머스 |
3. 제2차 세계 대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인 1943년 2월에는 보어만과 라머스가 각각 당과 정부를 대표하고 군을 대표하는 빌헬름 카이텔 원수와 함께 <3인 회의>를 창설하는 것을 계획했지만 괴벨스와 슈페어, 괴링, 힘러 등 나치당 간부들의 경계로 무산되고 말았다. 더욱이 전황이 악화되면서 라머스의 영향력은 점점 약화되었고 전쟁말기인 1945년 4월에는 헤르만 괴링에 의해 반역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히틀러가 라머스의 사형에 반대했기 때문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라머스의 아내와 딸은 그가 투옥된 후 자살했다.4. 전후 전범재판과 최후
패전 후인 1946년 4월에 열린 뉘른베르크 빌헬름 가 재판에서 증인으로 소집된 라머스는 나치 정권의 장관이었다는 이유로 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다시 10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52년에 은사로 인해 석방되었다. 풀려난 라머스는 1962년에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