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왕국 동부 루블리니츠에서 수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라머스는 브레슬라우와 하이델베르크의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12년에 보이텐에서 재판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1급 철십자 훈장과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한 라머스는 전후 변호사가 되어 독일국가인민당(DNVP)에 입당했다. 그 후 1922년에 내무성 차관으로 일하다가 1932년에 나치당에 입당하여 간부가 된 라머스는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엔 총통관저 장관, 국무장관의 요직에 앉았다. 1933년9월 29일에는 친위대의 명예지도자가 되어 친위대 상급대령의 계급도 부여받았다. 친위대 계급은 1940년에 대장까지 올랐다.
1937년부터 히틀러 내각의 무임소 장관으로 일한 라머스는 국가방어 장관협의회의 구성원, 독일정부의 고문관으로도 일했다. 그리고 모든 정치문서를 히틀러가 보기 전에 검수하여 1943년1월부터는 히틀러가 부재시 내각의 각료회의에서 라머스가 히틀러의 대리인으로 고정되었다. 라머스는 마르틴 보어만과 함께 총통의 면회상대를 조정했기 때문에 큰 권력을 쥐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인 1943년2월에는 보어만과 라머스가 각각 당과 정부를 대표하고 군을 대표하는 빌헬름 카이텔 원수와 함께 <3인 회의>를 창설하는 것을 계획했지만 괴벨스와 슈페어, 괴링, 힘러 등 나치당 간부들의 경계로 무산되고 말았다. 더욱이 전황이 악화되면서 라머스의 영향력은 점점 약화되었고 전쟁말기인 1945년4월에는 헤르만 괴링에 의해 반역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히틀러가 라머스의 사형에 반대했기 때문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라머스의 아내와 딸은 그가 투옥된 후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