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09 16:45:16

쿠르트 발트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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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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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생애3. 외교관 시절4. 유엔 사무총장 시절5. 대통령 선거와 탄로난 나치 시절의 과거6. 대통령 당선과 국제적 고립7. 발트하임의 유산8.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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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t Josef Waldheim. 오스트리아대통령, 유엔 사무총장이자 나치 전쟁 범죄자였던 인물.
1918.12.21 ~ 2007.06.14

오스트리아의 군인, 정치가, 외교관으로서 UN 사무총장과 오스트리아 공화국 대통령을 지냈다. 1918년 근처에서 태어났고, 1936~37년에 오스트리아 육군에서 복무한 전적이 있다. 200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 초기 생애

1941년 독일군[1]에 징집된 발트하임은 육군 장교가 되어 소대장으로서 동부 전선에 참전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이 대패했던 1941년 12월 부상을 입고는 후방으로 빠져 1944년 결혼한 후 1945년에는 빈 대학 법학과 학위를 수여받았다.

3. 외교관 시절

1945년 전쟁이 끝나자 그는 곧바로 전쟁으로 쑥밭이 된 오스트리아 외무부에 지원했다. 그 후 파리 대사관 근무와 외무부 본국 근무 등을 거친 발트하임은 1956년부터 60년까지 캐나다 대사를 지냈고, 1964년에는 UN 주재 대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68년부터 1970년까지는 오스트리아 연방 외무장관 직을 맡았고, 그 후에는 UN 대사 직으로 다시 복귀했다. 1971년에는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패배하였다.

4. 유엔 사무총장 시절

그러나 발트하임에게는 더 큰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1971년 1월 미얀마 출신의 UN 사무총장 우 탄트가 폐암 등 건강 문제로 3선 도전을 하지 않겠다 밝혔는데[2], 거의 1년간의 고민 끝에 발트하임이 후임으로 낙점된 것이다. 그의 53번째 생일(이자 탄트의 임기 만료 10일 전)에 발트하임을 낙점했음이 발표되었고, 곧 그는 1972년부터 국제연합 사무총장 자리를 맡게 된다. 발트하임의 임기동안 UN은 제 3회 국제 무역개발회의, 제1회 인간환경회의, 제3회 국제식량회의 등 여러가지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재선에 성공한 후에는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과 함께 보이저에 실어보낼 음성파일을 녹음하였고, 1978년에는 UN 사무총장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발트하임의 임기 내내 중동 문제, 특히 이스라엘 문제는 항시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당시 이스라엘은 뮌헨 올림픽 참사와 뒤이어 일어난 욤 키푸르 전쟁으로 인해 복수에 골몰해 있었고, 영화 《뮌헨》에서 보여준 것처럼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원들을 전세계에서 암살하는 중이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발트하임의 친 아랍적 입장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실제로 1972년 우간다 정부 명의로 뮌헨 올림픽 학살극을 칭송하는 편지를 UN에 보낸 이디 아민[3] 비난하지도 않았고, 1975년에는 3379호 결의안을 통해 시온주의를 인종주의로 규정했다.[4] 그리고 1976년 엔테베 납치 및 특공작전[5] 직후, 발트하임은 안보리 회의에서 이스라엘의 행위를 "우간다의 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한 행위"라며 비난하였다.

이러한 논란, 그리고 강대국에게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한 행보만 계속한다는 비판[6] 속에서도 발트하임은 인기가 좋은 편이었고, 유엔 역사상 처음으로 사무총장 3선에 도전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이제는 제3세계권 외교관이 사무총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거부권을 걸어버림으로서 실패했다. 그리하여 두번째 임기가 끝난 직후인 1982년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리고 1985년, 그의 숙원이던 오스트리아 연방 대통령 선거에 다시 나서게 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경력도 충분했다. 외교가 생명인 중립국 오스트리아에게 발트하임은 이상적인 후보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인들은 무엇이 몰려오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5. 대통령 선거와 탄로난 나치 시절의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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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오스트리아의 유력 주간지 "프로필"의 편집부국장이자 발트하임이 몸담은 오스트리아 인민당(Österreichische Volkspartei, ÖVP)의 컨설턴트였던 알프레트 보름이 발트하임의 과거를 밝혀냈다. 이미 오스트리아에서 굵직한 스캔들을 연달아 발굴해냈던 보름이 파낸 것은 끔찍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자랑스러운 아들 쿠르트 발트하임이 나치, 그것도 민간인 학살에 깊숙히 관여한 나치였던 것이다. 그의 소속이 비록 SS가 아니라 육군이었지만, 육군 역시 전쟁범죄에 자유롭지는 못했고[7] 특히 발트하임이 한 짓은 SS를 욕할 게 못되는 수준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겨냥해 출간된 그의 자서전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는 대학교 시절 악명높은 나치 돌격대(SA)의 기마대원[8]이었다. 뒤이어 진실들은 연달아 터져나왔다. 그는 1941년에 부상을 입은 후에는 독일 육군 E집단군으로 배치되었고, 그 곳에서 그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전선에서 통역장교와 통신장교, 그리고 그 후에는 정보장교와 탄약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성공적인 작전 수행"으로 독일 육군에서 포상도 받았으며, 역시 파시스트 정부였던 크로아티아 독립국 정부의 훈장까지도 받았다. 1944년에는 전선의 소련 육군에게 투하할 반유대주의 삐라를 직접 검사하고 허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5년 부대가 와해되고 패망이 확실시되자 영국 육군에 항복했다.

발트하임 진영은 즉각 반박했지만, 이제는 국제 유대인 회의, 그리고 유명한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 등 전 세계의 반나치 조직들이 발트하임과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에는 발트하임 자신의 책임도 컸다. 그는 "민간인이 처형되는 줄은 몰랐다"고 발뺌했지만, 그 직후 그의 사무실이 처형장 바로 옆이며 처형장 쪽으로 창문까지 나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추가로 그의 근무지가 악명 높은 야세노바츠 절멸수용소에서 고작 35km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는 것까지 드러났다. 이에 대해 그가 "나는 나치가 아니다"라고 항변하자 분노한 당시 오스트리아 총리 알프레트 지노바츠는 "그렇다면 발트하임이 탄 말만 나치라 믿어주자"고 비아냥댔고, 발트하임의 반대파는 유세기간 내내 나치 시절 독일 육군 정모를 쓴 목마를 유세장에 끌고 다녔다.

이 사태로 모두들 발트하임이 대통령은 고사하고 매장당할 것이라 믿었지만,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오스트리아는 자신들이 나치에 강제 합병당했던 것을 내세워 나치 청산에 관한 모든 것을 옆나라 독일에 떠다넘기고는 "나는 피해자"라고 반복하는 이른바 "피해자의 신화"를 지켜왔고, 더군다나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반유대주의도 한 몫 했다. 유태인인 전 오스트리아 총리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유태인 단체들, 그리고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의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에 대해 "오스트리아는 외국의 유태인 놈들이 누가 우리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간섭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어대며 발트하임을 변호했다.[9] 결국 이 역풍으로 인해 발트하임은 1986년 간신히 대통령 직을 손에 쥐었다.

6. 대통령 당선과 국제적 고립

쿠르트 발트하임은 간신히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6대 대통령직에 올랐으나 그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발트하임 사태 와중에 오스트리아가 보여준 태도, 그리고 발트하임이 사과하기는커녕 변명과 거짓말에만 급급했던 그의 뻔뻔한 태도에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었거나 나치와 싸운 적이 있었던 유럽과 서방세계의 국가들은 몹시 분노했고, 심지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 속해 있었던 독일과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같은 유럽의 국가들조차도 발트하임을 비난했었다. 미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서방 국가들이 발트하임 부부를 공식적으로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10]로 선포했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에 한발 더 나아가 1987년에는 발트하임 부부를 미국 입출국 워치리스트에 등록, 입국조차도 못 하도록 만들었다.[11] 이로써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타국을 방문할 기회가 원천 봉쇄된 셈이었다.

결국 발트하임이 대통령으로 재직한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서방국가들은 그 누구도 발트하임을 초청하지 않았고, 발트하임은 바티칸과 이라크, 키프로스 같은 몇몇 중동 국가와 소련, 중국 등 공산국가 순방 외에는 오스트리아 국내에서만 지방 순행을 하며 활동해야만 했었다.근데 소련도 나치독일과 싸운 연합국의 일원이라는 게 함정. 이는 오스트리아가 국제 왕따로 전락했음을 뜻하였다. 직업 외교관 발트하임에게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12] 1991년 걸프전 직전에는 바그다드로 날아가 오스트리아 인질 92명을 구해와 전문 외교관으로서의 노련함을 빛냈으나, 1992년 그는 재선을 포기한다. 오스트리아가 서방 세계 전체에게 따돌림당하는 상황을 끝내기 위함이었다.

퇴임 이후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기사 작위도 받는 등 나름대로 잘 돌아다녔지만, 국제연합 창설 5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을 때에도 전직 사무총장 자격의 초청은 고사하고 미국 입국마저 거부당하는 굴욕은 계속 맛보아야 했다.[13]

7. 발트하임의 유산

1985년 내내 오스트리아를 국제적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발트하임 사건은 오히려 국내적으로는 오스트리아를 우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외국 단체들이 쉴새없이 오스트리아를 비판하는 것을 내정간섭으로 인지한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오히려 우파로 기울어져 갔고, 이는 1980년대 후반 캐른텐 주지사 외르크 하이더를 비롯한 극우파가 성장하는 발판이 된다.[14]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가 수십 년간 내세우던 "피해자의 신화"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고, 오스트리아 강제합병 50주년을 맞이한 1988년부터 시작된 흐름은 오스트리아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8. 기타

  • 발트하임 사태 당시 발트하임은 BBC 기자 존 심슨이 다짜고짜 질문을 들이대자 이성을 잃고 심슨에게 주먹을 날린 전적이 있다.[15] 물론 이미지 개선에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하필하면 미국 카메라맨 팀도 옆에 같이 있었기 때문.
  •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수필인 "슬픈 외국어"를 보면 이 발트하임이 아시아 나라들이 급성장하자 르네상스 이후로 유럽이 세계를 주도했는데 아시아가 성장할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했다는 걸 쓰면서 네오 나치즘같은 소리한다면서 비판했다. 무라카미는 일본 극우라든지 일본에 대해서도 굉장히 냉소적인 반응(세계에서 크나큰 전투로 알아주는 할힌골 전투를 겨우 노몬한 사건이라 축소하는 유일한 나라라고 일본 우익을 깐다든지, 아시아에서 욕먹을 짓 한 일본 군국주의 찬양 좀 그만해라...같은 반응, 사실 이 양반의 글을 보면 조금 무정부주의적 색채가 있다.)을 글로 썼기에 일본 극우들에게 살해 협박도 받은 바 있다.
  • 2007년 발트하임이 사망하였을 때, 조화를 보낸 국가는 일본시리아 두 나라가 전부이며,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낸 국가원수는 리히텐슈타인 대공이 전부. 애시당초 국가 원수들은 초청하지 말라고 유언으로 그랬다.
  • 해리 터틀도브의 나치가 승리한 후 21세기를 다룬 역사소설 "나의 적 앞에서"에서는 3대 총통 할트바임으로 나온다. 극단적인 나치 보수인사로 나온다. 이때 이미 체제 한계를 느꼈고 사후 민주화 조치가 시작된 것을 봐서 소련의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를 연상케 하는 패러디.
  • 이란계 프랑스인 만화가 마르잔 샤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에서도 쿠르트 발트하임에 대해 약간 언급된다. 작가가 오스트리아에서 살던 시절에 발트하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며 분개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 오스트리아는 1938년 독일에게 합병당했으므로 오스트리아 육군 출신인 발트하임이 독일군에 징집된 건 당연한 일.[2] 탄트가 폐암으로 고생하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미얀마의 네윈 군사 정부가 우탄트 총재를 견제했던 탓도 컸다. 결국 그는 2년 후 뉴욕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다.[3] 그것도 히틀러가 600만 이상의 유대인을 태웠던 독일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썼다. 아민은 원래 이스라엘서 받은 공수기장을 가장 아꼈고 자신의 친위대도 이스라엘 특공대 장교들에게 훈련받게 하는 등 골수 이스라엘 빠였지만, 철의 여인 골다 메이어 수상이 탄자니아 침공에 필요한 무기 지원을 거부하자 하루 아침에 팔레스타인 지지로 돌아섰다.[4] 후임 사무총장 하비에르 페레스 데케야르의 주재하에 1991년 46/86호 결의안이 통과되며 폐지된다.[5]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납치, 팔레스타인 지지로 돌아선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착륙해서는 105명의 유대인들을 인질로 잡고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에서 거의 2,000km 이상 떨어진 동네이니 이스라엘도 어쩌지 못하리라는 것이 그들의 예상이었으나,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한밤중에 수송기로 특공대원들을 공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과 같이 경비 중이던 우간다 병사들을 제압해 인질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스라엘은 인질 1명과 특공대 지휘관 요니 네타냐후만 잃었지만, 우간다-팔레스타인 측은 납치범 8명 전원과 우간다 병사 45명을 잃었고, 추가로 미그기 11대도 엔테베 공항에서 앉은 채로 박살났다. 이에 격분한 아민은 인질 중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70대 할머니를 사살해서 병원 근처에 내다버리는 치졸한 방법으로 화풀이를 했다.[6] 외교관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성격 불같은 발트하임의 캐릭터와는 심히 동떨어진 행보였고, 이 때문에 나중에는 소련이나 미국이 (후술할) 전시 복무기록 가지고 협박한 거 아니냔 이야기까지 나왔다.[7] 물론 나치군의 전쟁범죄 비율상으론 일반 친위대>무장 친위대>육군 이지만, 조직 규모는 그 반대기 때문에 절대적인 건수로는 결국 다같이 전범이었다.[8] 당시에는 뭐 그냥 클럽 하나 드는 수준으로 치부되던 거지만 원체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9] 후일 이 사건은 비젠탈이 오스트리아 고위 관료들의 나치 전적을 까발리면서 비젠탈과 크라이스키 간의 감정싸움으로 격화됐고, 결국 크라이스키는 체코 정보부 문서를 근거로 비젠탈이 게슈타포 끄나풀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게 알고 보니 위조 문서로 밝혀졌다. 결국 크라이스키는 망신만 잔뜩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분노한 비젠탈이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바람에 크라이스키는 비젠탈에게 손해배상을 하는 처지가 됐다.[10] 간단하게 말하자면 국가가 특정 외교관에게 대해 "나 저 사람하고 상대 안한다"라고 선포하는 것. 외교 협약(특히 비엔나 협약)에 따르면 강제출국의 의무는 없으나, 그 대신 외교관으로서의 특권을 전부 잃는다. 그리고 웬만해서 자기네 외교관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 먹으면 외교행위 자체를 못하는 아무 쓸데 없는 그 외교관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게 불문율.[11] 페르소나 논 그라타 상태라도 "시민"으로서 입출국은 가능하지만(어디까지나 이론상), 이렇게 워치리스트에 올려버리면 아예 입국조차도 불허된다.[12] 원래 외교관으로써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외교관 인생이 끝장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나라에서만 받아도 그런데 서방 선진국들이 죄다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선언했으니, 그 파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13] 결국 미국의 워치리스트 지정은 죽을 때까지 그의 이름이 삭제되지 않았다.[14] 유사사례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결과 영-프가 이탈리아에 부과한 경제제재가 오히려 이탈리아인들을 애국 단결하게 만들어 금모으기 운동을 하게 만든 바 있다.[15] 원래 BBC 기자들 중에서는 제러미 팍스먼처럼 좀 거칠게 질문하는 스타일이 많지만, 존 심슨은 거의 주먹을 부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개념을 말아먹은 짓을 워낙 많이 해서 주변인들에게조차 안 좋은 소릴 자주 들었지만 이래뵈도 BBC 역사상 가장 먼치킨스러운 양반 중 하나. 이란 혁명 당시 귀환하는 호메이니와 동행취재를 한 적도 있고, 천안문 사태 당시에는 총알을 피해다니며(!) 취재했으며, 바그다드에서 걸프전을 취재했고 아프간 전쟁 당시에는 서방 기자로서는 최초로 미군을 따라 카불에 입성했다. 짐바브웨 취재 당시에는 짐바브웨 정부군에게 쫓겼던 전적도 있다. 2003년에는 미군 오폭으로 카메라맨이 죽고 자신도 한쪽 귀가 멀게 된 적도 있다. 문자 그대로 진정한 열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