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09:59:42

쿠르트 발트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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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UN 사무총장
오스트리아 제9대 연방대통령
쿠르트 요제프 발트하임
Kurt Josef Waldheim
파일:DrKurtJosefWaldheim.jpg
<colbgcolor=#C8102E><colcolor=#ffffff> 출생 1918년 12월 21일
독일계 오스트리아 장크트안드레뵈르데른
사망 2007년 6월 14일 (향년 88세)
오스트리아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1918~1919)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1919~1934)
파일:오스트리아 연방국 국기.svg 오스트리아 연방국(1934~1938)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1938~1945)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1945~1955)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1955~2007)
임기 제4대 UN 사무총장
1972년 1월 1일 ~ 1981년 12월 31일
제9대 연방대통령
1986년 7월 8일 ~ 1992년 7월 8일
서명
파일:쿠르트 발트하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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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102E><colcolor=#ffffff> 부모 <colcolor=#373a3c,#ddd>아버지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어머니 알마 시볼트
배우자 엘리자베스 발트하임[1](1944~2017)
자녀 장녀 리젤로타 발트하임
차녀 크리스타 발트하임
장남 게르하르트 발트하임
학력 빈 영사학교
빈 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신체 192cm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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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외교관 시절2.3. 유엔 사무총장 시절2.4. 대통령 선거: 탄로난 나치 시절의 과거2.5. 당선 이후: 국제적 고립2.6. 최후
3. 기타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군인, 정치가, 외교관으로서 유엔 사무총장오스트리아 공화국 대통령을 지냈다.

유엔 사무총장과 오스트리아 대통령으로까지 재직하는 등 외교관과 정치가로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말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본인이 독일 국방군 시절 전쟁범죄에 가담한 전력이 드러나면서 이후에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고 몰락하게 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918년 12월 21일 오스트리아 북동부 장크트안드레뵈르데른 시에서 가톨릭을 믿는 중산층 가정에서 체코계 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2]. 아버지는 발트하임이 의사가 되는 것을 소망했으나 쿠르트는 피를 보는 것이 싫다고 외교관이 되는 것을 소망했다.

1936년에는 정확히 18세 생일에 오스트리아 육군에 자원 입대한 후 1937년부터 에서 법과 외교를 배우기 시작했고, 1938년에는 가족과 함께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반대하다가 나치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는 장학금이 취소되었고, 아버지도 게슈타포에 체포된 후 해고되었다. 발트하임은 한동안은 라틴어그리스어 교사로 일했고,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가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1941년 독일군[3]에 징집된 발트하임은 독일 육군 장교가 되어 소대장으로서 동부 전선에 참전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이 대패했던 1941년 12월 부상을 입고는 후방으로 빠져 1944년 결혼한 후 1945년에는 빈 대학교 법학과 학위를 수여받았다.

2.2. 외교관 시절

1945년 전쟁이 끝나자 그는 곧바로 전쟁으로 쑥밭이 된 오스트리아 외무부에 지원해 외교관 업무를 시작했다. 그 후 1948년부터 파리 대사관에서 근무한 후 1951년부터 외무부 본국에서 근무한 발트하임은 1956년부터 60년까지 캐나다 대사를 지냈고, 1964년에는 UN 주재 대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68년부터 1970년까지는 오스트리아 연방 외무장관 직을 맡았고, 그 후에는 UN 대사 직으로 다시 복귀했다. 1971년에는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패배하였다.

2.3. 유엔 사무총장 시절

그러나 발트하임에게는 더 큰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1971년 1월 미얀마 출신의 UN 사무총장 우 탄트가 폐암 등 건강 문제로 3선 도전을 하지 않겠다 밝혔는데[4], 거의 1년간의 고민 끝에 발트하임이 후임으로 낙점된 것이다. 그의 53번째 생일(이자 탄트의 임기 만료 10일 전)에 발트하임을 낙점했음이 발표되었고, 곧 그는 1972년부터 국제연합 사무총장 자리를 맡게 된다. 발트하임의 임기동안 UN은 제3회 국제 무역개발회의, 제1회 인간환경회의, 제3회 국제식량회의 등 여러가지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재선에 성공한 후에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함께 보이저에 실어보낼 음성파일을 녹음하였고, 1979년 5월 26일에는 UN 사무총장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으며, 동년 12월 26~29일에는 민주 캄푸치아 치하에서 피해를 입은 캄보디아 복구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폴 매카트니와 함께 캄보디아인들을 위한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를 기획하고 개최하기도 했다[5].

그러나 발트하임의 임기 내내 중동 문제, 특히 이스라엘 문제는 항시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당시 이스라엘은 뮌헨 올림픽 참사와 뒤이어 일어난 욤 키푸르 전쟁으로 인해 복수에 골몰해 있었고, 영화 《뮌헨》에서 보여준 것처럼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원들을 전세계에서 암살하는 중이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발트하임의 친 아랍적 입장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72년 9월 11일우간다 정부 명의로 뮌헨 올림픽 참사를 칭송하는 전보를 UN에 보낸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6] 비난하지도 않았고[7], 1975년에는 유엔 총회 결의 제3379호를 통해 시온주의를 인종주의로 규정했다.[8] 엔테베 작전 직후인 1976년 7월 7일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는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엔테베 공항 급습을 "우간다의 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한 행위"라며 비난하였다. 본인이 나치 부역자였음이 밝혀진 후 이런 행보가 단순히 개인의 정치 성향에 따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큰 논란으로 번진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논란, 그리고 강대국에게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한 행보만 계속한다는 비판[9] 속에서도 발트하임은 인기가 좋은 편이었고, 유엔 역사상 처음으로 사무총장 3선에 도전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이제는 제3세계권 외교관이 사무총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거부권을 걸어버림으로써 실패했고, 이후 UN 사무총장 임기는 2선 임기 제한이 설정되어 2022년 현재까지도 그 규정이 유지되고 있다. 그리하여 두번째 임기가 끝난 직후인 1982년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리고 1985년, 그의 숙원이던 오스트리아 연방 대통령 선거에 다시 나서게 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경력도 충분했다. 외교가 생명인 중립국 오스트리아에게 발트하임은 이상적인 후보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인들은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2.4. 대통령 선거: 탄로난 나치 시절의 과거

파일:external/ww2gravestone.com/image037_19.jpg
왼쪽에서 두번째가 발트하임, 맨 오른쪽의 인물은 무장친위대 대장 아르투어 플렙스이다.

1985년, 오스트리아의 유력 주간지 "프로필"의 편집부국장이자 발트하임이 몸담은 오스트리아 인민당(Österreichische Volkspartei, ÖVP)의 컨설턴트였던 알프레트 보름이 발트하임의 과거를 밝혀냈다. 이미 오스트리아에서 굵직한 스캔들을 연달아 발굴해냈던 보름이 파낸 것은 끔찍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자랑스러운 아들 쿠르트 발트하임이 나치, 그것도 민간인 학살에 깊숙히 관여한 독일 국방군의 전쟁범죄자였던 것이다. 그의 소속이 비록 SS가 아니라 독일 국방군 소속 육군이었지만, 국방군 역시 전쟁범죄에 자유롭지는 못했다.[10] 물론 국방군에 복무했다는 것만으로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국방군으로서 동부든 서부든 전선에서 전투부대였거나 후방 지원부대였을 수도 있고 방관이라는 측면에선 자유롭지 못하지만 모든 국방군이 직접적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발트하임이 복무한 부대는 주로 발칸 전선에서 활동하며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의 점령지에서 파르티잔을 상대했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잔혹한 범죄행위의 가해자이기도 했다. 발트하임은 이런 부대에서 간부로 활동했으니 당연히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통령 선거를 겨냥해 출간된 그의 자서전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는 대학교 시절 악명높은 나치 돌격대(SA)의 기마대원이었다. 뒤이어 진실들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그는 1941년에 부상을 입은 후에는 독일 육군 E군집단[11]으로 배치되었고, 그 곳에서 그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전선에서 통역장교와 통신장교, 그리고 그 후에는 정보장교와 탄약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성공적인 작전 수행"으로 독일 육군에서 포상도 받았으며, 역시 파시스트 정부였던 크로아티아 독립국[12] 정부의 훈장까지도 받았다. 1944년에는 전선의 소련 육군에게 투하할 반유대주의 삐라를 직접 검사하고 허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5년 부대가 와해되고 패망이 확실시되자 영국 육군에 항복했다.

발트하임 진영은 즉각 반박했지만, 이제는 국제 유대인 회의, 그리고 유명한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 등 전 세계의 반나치 조직들이 발트하임과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에는 발트하임 자신의 책임도 컸다. 발트하임은 "민간인이 살해당하는 줄은 몰랐다"고 발뺌했지만 그 직후 그의 사무실이 처형장 바로 옆이며 처형장 쪽으로 창문까지 나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추가로 그의 근무지가 '발칸의 아우슈비츠'라고까지 불렸을 정도로 악명 높은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13]에서 고작 35km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는 것까지 드러났다. 이에 대해 발트하임이 "나는 나치가 아니다"[14] 라고 항변하자 분노한 당시 오스트리아 총리 알프레트 지노바츠는 "그렇다면 발트하임이 탄 말만 나치라 믿어주자"고 빈정거렸고, 발트하임의 반대파는 유세기간 내내 나치 시절 독일 육군 정모를 쓴 목마를 유세장에 끌고 다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자신의 나치 부역 전력뿐만 아니라 아내인 엘리자베트와 처제, 장모, 장인을 비롯한 아내의 친정 일가 사람들의 나치당 협력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발트하임 부부에 대한 논란과 비판은 더욱 커졌다.

심지어 1987년 4월에 미국 법무부가 쓰고 1994년에 발표한 204쪽 분량의 발트하임에 대한 내부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발트하임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유대인을 포함한 민간인을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대량으로 추방한 행위와 반유대주의 선전[15]을 넘어서 심지어는 연합군 포로에 대한 학대 및 처형, 인질 및 기타 민간인에 대한 보복 처형에까지 가담했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발트하임이 직접 포로와 민간인을 처형한 것은 아니고, 자신의 부하들이 전술한 만행들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거나 아예 직접 처형을 명령한 것이었다고 한다. 1994년 3월 13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 중 그리고 이후 1988년 2월 18일에 6명의 군사 역사학자들의 국제 위원회는 연구 끝에 발트하임이 부당하다고 확실히 인지한 것을 실현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에 대해 반대, 항의 또는 중재의 징후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여러 차례 이러한 행위를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결론지었다.

이 사태로 모두들 발트하임이 낙선하고 오스트리아 정계에서 추방당할 것이라 믿었지만, 그러한 예측은 빗나갔다. 그동안 오스트리아는 1938년 자신들이 나치독일에게 강제 합병당했던 것을 내세워 나치 청산에 관한 모든 것은 이웃나라 독일만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은 피해자일 뿐이라고 반복하는 이른바 피해자의 신화"를 지켜왔다. 게다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던 오스트리아 내 반유대주의도 한 몫 했다. 유태인인 전 오스트리아 총리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유태인 단체들,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의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에 대해 "오스트리아는 외국의 유태인 놈들이 누가 우리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간섭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어대며 발트하임을 변호했다.[16]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지지율 우세를 꾸준히 지키면서 1차 선거에서 49.6%로 과반에 근접한 득표를 하였고, 2차 선거에서 같이 결선에 오른 사회민주당 슈타이어 후보를 7.8%차이로 제치고 53.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5년 내내 오스트리아를 국제적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발트하임 사건은 오히려 국내적으로는 오스트리아를 우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외국 단체들이 쉴새없이 오스트리아를 비판하는 것을 내정간섭으로 인지한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오히려 우파로 기울어져 갔고, 이는 1980년대 후반 캐른텐 주지사 외르크 하이더를 비롯한 극우파가 성장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1999년에 오스트리아 자유당이 국민당과의 연합정권 결성에 성공하면서 정권을 창출하는데 성공하고야 말았다.[17]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가 수십 년간 내세우던 "피해자의 신화"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고, 오스트리아 합병 50주기를 맞이한 1988년부터 시작된 흐름은 오스트리아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2.5. 당선 이후: 국제적 고립

대선 출마 직전에 드러난 나치 부역 행적으로 인해 발트하임은 국내외의 온갖 비판을 받으면서 1986년 6월 8일에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제9대 대통령직에 당선되고 그로부터 1개월 뒤인 7월 8일에 오스트리아 대통령직에 취임했으나, 당선, 취임 이후에 치르게 된 대가는 매우 가혹했다.

당시 사태에서 나치 전범을 옹호하는 오스트리아 정치권의 태도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인정하기는커녕 변명과 역사왜곡, 거짓말에만 급급했던 발트하임의 후안무치한 태도에 네덜란드, 그리스,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프랑스, 노르웨이, 덴마크, 유고슬라비아[18], 영국, 미국, 캐나다, 스페인제2차 세계 대전스페인 내전 시기 나치에게 크게 당하거나 나치와 전쟁을 치른 적이 있었던 유럽 및 서방세계의 국가들과 자국의 주류 민족들이 나치에 의해 대학살 피해를 입었던 이스라엘은 매우 분노했다. 게다가 제2차 대전 당시 추축국에 속해 있었던 독일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같은 유럽의 국가들조차도 나치군 시절의 행적을 부정하려는 발트하임을 비난하거나 배척하였으며[19] 2차대전에서 중립국을 표방하여 나치의 침략을 받지 않고 평화를 유지했던 오스트리아의 이웃나라스위스와 나치독일과 철광석 등 무역을 했던 국가인 스웨덴조차도 1986년 오스트리아 대선에서 나치 전범 전력이 드러난 오스트리아의 신임 대통령 발트하임과 정상회담을 하거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축전 하나 보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미국과 캐나다, 영국, 네덜란드,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서방/유럽 국가들이 발트하임 부부를 공식적으로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20]로 선포했다. 심지어 미국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1987년 발트하임 부부를 미국 입출국 워치리스트에 등록, 입국조차도 못 하도록 만들었다.[21] 이로써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이 미국, 캐나다, 기타 서/북유럽 국가 등 서방권을 방문할 기회가 원천 봉쇄된 셈이었다. 그리고 발트하임을 겨냥한 서방국가들의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대한 입국 금지 조치는 발트하임이 1992년 퇴임할 때까지 거의 5년간 지속되었는데 발트하임이 퇴임하고 토마스 클래스틸이 오스트리아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서방 각국에서는 이 입국 금지 조처를 해제하면서 발트하임 이후의 오스트리아 대통령들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북유럽 등 서방 주요 국가들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발트하임이 대통령으로 재직한 1986년부터 1992년까지 당시 모든 서방/유럽 국가들의 대통령이나 총리, 국왕 등 그 누구 하나 대통령이 된 발트하임을 자국에 초청하거나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고, 발트하임은 바티칸이라크, 요르단, 키프로스, 짐바브웨, 수단, 니제르 같은 몇몇 일부 중동 및 아프리카의 국가들과 소련, 중국 등 일부 공산권 국가들[22][23] 이외에 대다수의 서방권 주요국들을 방문하지 못 하고, 오스트리아 국내에서만 지방 순행을 하며 활동해야 했었다. 이는 오스트리아가 국제 왕따로 전락했음을 뜻하였다. 특히 유엔 사무총장까지 역임했던 고위 외교관 출신인 발트하임에게는 견딜 수 없는 굴욕이었다.[24] 1991년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로 날아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과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25] 전 이라크 부통령과의 협상을 통해 이라크를 탈출하지 못했던 오스트리아 국민 92명을 구해와 전문 외교관으로서의 노련함을 빛냈으나, 이듬해인 1992년 그는 대통령 선거의 재선 출마를 포기하였다. 자신의 모국인 오스트리아가 본인의 나치 전력으로 말미암아 외교적으로 서방/유럽 국가들로부터 고립이 지속되는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1992년 7월 8일에 퇴임한 이후로는 199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기사 작위도 받는 등 나름대로 왕성히 활동했으나, 1995년 UN 창설 5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을 때에도 전직 사무총장 자격의 초청은 물론이거니와 미국 입국마저 거부당하는 굴욕은 계속되었다. 결국 미국의 워치리스트에 등록된 그의 이름은 대통령직에서 퇴임하고 사망할 때까지도 삭제되지 않았다.

2.6. 최후

2007년 6월 14일에 발트하임은 심부전으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장례식은 그로부터 9일 후인 6월 23일에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치러진 후 비엔나 중앙묘지의 대통령 묘역에 안장되었다. 발트하임이 사망하였을 때, 조화를 보낸 국가는 일본시리아 두 나라가 전부이며,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낸 국가원수는 리히텐슈타인 대공 1명밖에 없었다.[26] 발트하임의 장례식에서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이던 하인츠 피셔(Heinz Fischer, 1938~)는 발트하임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부당한 비난'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를 '위대한 오스트리아인'이라고 칭송했고, UN 사무총장으로서 국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세계 평화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발트하임의 사망 다음 날에 오스트리아 언론은 발트하임이 쓴 두 페이지 분량의 유언장을 공개했는데, 발트하임은 '실수'를 저질렀음을 인정하며[27]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인정했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화해와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같은 날에 반기문 당시 UN 사무총장은 발트하임에 냉전 기간 동안 유엔을 '신중함, 인내, 정확성으로' 이끌었던 공로를 인정해 발트하임에게 추모패를 보냈다.

3. 기타

  • 발트하임 사태 당시 발트하임은 BBC 기자이자 훗날 BBC 국제부장 자리에 오른 존 심슨이 자신에게 다짜고짜 질문을 들이대자 이성을 잃고 심슨에게 주먹을 날린 전적이 있다.[28]
  • 1994년에 전 모사드 출신 이스라엘 작가 빅터 오스트로프스키(Victor John Ostrovsky, 1949~)는 그의 저서 The Other Side of Deception에서 모사드가 발트하임의 서류를 위조하여 그를 나치 범죄에 연루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전직 정보기관 출신 인사들은 오스트로프스키의 주장 중 많은 부분이 다른 출처에서 교차검증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고, 심지어 이 책을 소설 취급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수필인 "슬픈 외국어"에선 발트하임이 아시아 나라들이 급성장하자, 르네상스 이후로 유럽이 세계를 주도했는데 아시아가 성장할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했다며 네오 나치즘 같은 소리라고 비판했다.[30] 무라카미는 일본 극우는 물론 일본에 대해서도 굉장히 냉소적인 반응[31]을 글로 썼기에 일본 극우들에게 살해 협박도 받은 바 있다.
  • 해리 터틀도브의 나치가 승리한 후 21세기를 다룬 역사소설 "나의 적 앞에서"에서는 3대 총통 할트바임으로 나온다. 극단적인 나치 보수인사로 나온다. 이때 이미 체제 한계를 느꼈고 사후 민주화 조치가 시작된 것을 봐서 소련의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를 연상케 하는 패러디.
  • 이란계 프랑스인 만화가 마르잔 샤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에서도 쿠르트 발트하임에 대해 약간 언급된다. 작가가 오스트리아에서 살던 시절에 발트하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며 분개하는 저자의 친구들의 모습이 나온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파이퍼의 뒤를 이어 나치 독일의 5대 총통으로 취임하였고, 레마르크의 금서 조치를 해제하는 등 어느 정도 부분적 개혁을 하였다.


[1] 1922년 4월 13일생, 2017년 2월 28일 사망[2] 참고로 그의 아버지의 원래 성은 바츨라비크(Václavík, 독일식 표기로는 Watzlawick)였는데, 합스부르크 왕가가 물러난 후에 성씨를 독일식인 '발트하임'으로 변경했다.[3] 오스트리아는 1938년 독일에게 합병당했으므로 오스트리아 육군 출신인 발트하임이 독일군에 징집된 건 당연한 일.[4] 탄트가 폐암으로 고생하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미얀마의 네 윈 군사 정부가 탄트를 견제했던 탓도 컸다. 결국 그는 2년 후 뉴욕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다.[5] 이 콘서트에는 폴 매카트니는 물론 더 후 등의 유명 뮤지션들이 참석했으며, 공연 녹음은 1981년에 발매되었다.[6] 그것도 뮌헨에서 열린 이스라엘 올림픽 선수 학살에 박수를 보냅니다. 히틀러가 600만 이상의 유대인태웠던 독일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을 유엔에서 추방하고 모든 이스라엘인을 유대 국가를 만든 죄를 지은 영국으로 보낼 것입니다. 등의 엽기적인 내용들을 썼다. 아민은 원래 이스라엘서 받은 공수기장을 가장 아꼈고 자신의 친위대도 이스라엘 특공대 장교들에게 훈련받게 하는 등 골수 이스라엘 빠였지만, '철의 여인'이라고 불린 골다 메이어 수상이 탄자니아 침공에 필요한 무기 지원을 거부하자 하루 아침에 팔레스타인 지지로 돌아섰다. 이후로도 아민은 친나치 성향까지 갖게 되어 '독일에 히틀러의 동상이 세워지지 않았다'며 우간다의 수도인 캄팔라히틀러의 기념비를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불행 중 다행히도 이 엽기적인 계획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 특히 독일의 식민지배를 겪었던 우간다의 인접국인 탄자니아토고, 카메룬 같은 나라들의 거센 반발과 항의로 무산되었다.(사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으로 독일 제국의 식민지배가 종식되어서 그렇지, 탄자니아나 나미비아, 카메룬, 토고 등의 독일 제국 시기 독일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나라들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 또한 자기나라를 짓밟았던 독일 제국 못지않게 몹시 혐오한다. 자세한 건 아돌프 히틀러 문서 참조.)[7] 이 희대의 망언에 대해 국제적으로 항의가 빗발치자 유엔 대변인은 일일 기자회견에서 "정부 수뇌들이 그에게 보낸 전보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사무총장의 관례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발트하임 사무총장은 어떤 형태의 인종 차별과 대량 학살도 규탄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후술할 발트하임의 실체를 고려하면 참 아이러니한 발언이다.[8] 후임 사무총장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의 주재하에 1991년 46/86호 결의안이 통과되며 폐지된다.[9] 외교관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불같은 발트하임의 성격과는 심히 동떨어진 행보였고, 이 때문에 나중에는 소련이나 미국(후술할) 전시 복무기록 가지고 협박한 거 아니냔 이야기까지 나왔다.[10] 물론 나치군의 전쟁범죄 비율상으론 일반 친위대>무장 친위대>국방군이지만, 조직 규모는 그 반대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건수로 따지자면 국방군도 만만치 않은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11] 원래 그리스에 주둔하던 독일 제12군이었다. 전쟁 중후반부에 E집단군으로 승격되나 명칭상의 승격일 뿐이었고 종전시까지 야전군규모를 유지했다. 전쟁 말기에 발칸반도 남부에서 알바니아, 보스니아를 거쳐 북쪽으로 후퇴했고 이후 영국군에 항복했다.[12] 이름과는 정반대로 추축국괴뢰국이었으며, 실권자였던 안테 파벨리치는 자신이 지도하는 극우 사이비 종교 단체인 우스타샤를 이용해 크메르 루주조차 능가할 정도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13] 얼마나 잔혹한 곳이었는지 이곳을 방문한 나치 관리들과 SS 병사들조차 그 참상에 경악할 정도였다. 자세한 사항은 1944년 4월부터 12월까지 이 수용소의 지휘관을 역임한 딘코 사키치 문서 참조.[14] 물론 이게 말이 안되는게 SA 돌격대 기마대원은 나치당 소속 정치 깡패 역할을 했다.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폭력행위의 주축인 SA가입자라는 것으로 이미 확실한 나치이다.[15] 1944년에 발트하임은 반유대주의 선전 전단을 소련 전선 뒤에 투하할 것을 검토하고 승인했는데, 그 중 하나는 "유대인 전쟁은 그만하고 유대인을 죽이고 오십시오."라는 말로 끝났다고 한다.[16] 후일 이 사건은 비젠탈이 오스트리아 고위 관료들의 나치 전적을 까발리면서 비젠탈과 크라이스키 간의 감정싸움으로 격화됐고, 결국 크라이스키는 체코 정보부의 문서를 근거로 비젠탈이 게슈타포의 끄나풀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게 알고 보니 위조 문서로 밝혀졌다. 결국 크라이스키는 망신만 잔뜩 당했을 뿐만 아니라, 분노한 비젠탈에게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는 바람에 손해배상까지 해야하는 처지가 됐다.[17] 물론 이 사건만이 오스트리아 자유당을 약진하게 만든 것은 아니고, 경제 위기 및 사민당과 국민당이라는 양대 정당의 거듭된 실책이 주된 원인이긴 했다.[18] 발트하임이 나치군 시절 학살 등 전쟁범죄를 자행하며 군 복무를 했던 곳이 바로 과거 유고슬라비아에 속해있던 크로아티아였다.[19] 이들도 추축국으로서 전쟁을 일으켜 대량학살, 인권유린 등 전쟁범죄를 자행했거나(독일,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나치 독일의 강압과 위협으로 약소국의 국가생존을 위해 추축국에 합류하던 일이 있었기에(불가리아), 나치 전범의 이력이 있는 발트하임을 결코 외교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 및 홀로코스트의 가해 원흉으로서 패전 후 국제적인 신뢰 회복과 서방세계로의 복귀를 위해 오데르강 이동 지역과 동프로이센, 알자스-로렌 같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폴란드 등 연합국에게 할양된 구 독일령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매년 피해국가들에게 사과하는 등 나치 시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사과로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20] 본래 뜻은 '환영받지 못하는 자'. '외교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기피 인물' 정도로 번역되는 용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국가가 특정 외교관을 대상으로 "나 저 사람하고 상대 안한다"라고 공개 선포하는 것. 외교 협약, 특히 비엔나 협약에 따르면 강제출국의 의무는 없지만, 그 대신 외교관으로서의 특권(예: 면책)을 전부 잃는다. 외교관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으니 자국 외교관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 처분을 받으면 그 외교관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것이 관례다.[21] 페르소나 논 그라타 상태라도 "시민"으로서 입출국은 이론상 가능하지만, 이렇게 워치리스트에 올려버리면 아예 입국조차도 불허된다. 1996년 제정된 미국 이민법은 나치 부역자에 대해 철저히 입국을 거부토록 규정했으며, 이 규정을 근거로 이미 미국에 체류하거나 거주중인 나치 부역자들도 모조리 추방했다. 대한민국의 출입국관리법 제11조 7항에도 비슷한 규정이 있어서, 나치 전력이 있는 이 사람은 이론상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다. 해당 조항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나 그 동맹국 및 괴뢰정권 정부의 지시를 받거나 협력하여 학살이나 인권탄압에 가담한 사람의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일본 제국동맹 관계에 있던 정부 관계자였기 때문이다.[2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로 큰 피해를 입었던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의 경우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서방진영 국가들처럼 페르소나 논 그라타를 선포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발트하임 대통령을 ‘입국 제한대상’으로 지정하여 그의 자국 방문을 사실상 원천봉쇄했다.[23] 사실 굳이 특이점을 찾자면, 엄연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소련과 중국이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이다. 물론 이들도 추축국의 부역 전력이 있던 발트하임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입국을 금지)하지도, 입국 제한대상에 올리지도 않았다.[24] 외교관에게 자신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외교관 인생이 끝장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나라에서만 받아도 경력이 끝장나는 게 페르소나 논 그라타인데,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 등 서방권의 주요국가들 대부분과 (소련과 중국을 제외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공산권 국가들 모두에게 발트하임은 페르소나 논 그라타 또는 입국 제한대상으로 지정됐다. 게다가 대한민국에도 출입국관리법에 의해 이론상 입국이 금지되어있었다. 그로 인한 파장은 발트하임 개인의 입장에서도 엄청났다.[25] 미국의 이라크 전쟁 당시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 직후에도 일부 후세인 정권 잔당 세력들과 자신의 추종 지지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도주 생활을 이어가며 자신의 옛 주군이었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이나 알리 하산 알 마지드 전 국방장관 등 나머지 후세인 정권 시기의 전직 이라크 고위층 인사들과 달리 체포, 사형되지 않으며 끈질기게 살아남는 면모를 보였다.[26] 다만 이는 발트하임 본인이 죽기 전에 자신의 장례식에 외국의 국가원수들을 초청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27] 물론 발트하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나치 전쟁 범죄에 가담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28] 원래 BBC 기자들 중에서는 제러미 팍스먼처럼 좀 거칠게 질문하는 스타일이 많지만, 존 심슨은 거의 주먹을 부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개념을 말아먹은 위험한 짓을 워낙 많이 해서 주변인들에게조차 안 좋은 소릴 자주 들었지만 BBC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경력을 가진 기자 중 한 명이다. 이란 혁명 당시 귀환하는 호메이니와 동행 취재를 한 적도 있고 천안문 6.4 항쟁 당시에는 총알을 피하며 취재하고 시위자들을 폭행하는 군인을 말리기도 했으며, 바그다드에서 걸프 전쟁을 취재했고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서방 기자로서는 최초로 미군을 따라 카불에 입성했다. 짐바브웨 취재 중에는 정부군에게 쫓겼던 전적도 있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는 미군의 오폭으로 카메라맨이 죽고 자신도 한쪽 귀가 멀게 된 적도 있다.[29] 그런데 2001년에 공개된 기밀 문서에 따르면 CIA는 물론이고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관리들, 심지어는 이스라엘마저 발트하임을 유엔 사무총장에 앉히기 위해서 캠페인을 벌일 때 발트하임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30] 상술했듯이 발트하임은 민간인 학살에까지 가담한 나치당원으로, 네오나치 겸 진짜배기 나치당원이었으니 뼈 있는 비판인 셈이다.[31] 세계에서 크나큰 전투로 알아주는 할힌골 전투를 겨우 노몬한 사건이라 축소하는 유일한 나라라며 일본 우익을 깐다든지, 아시아에서 욕먹을 짓을 무지막지하게 저지른 일본의 군국주의 좀 그만 찬양하라는 반응을 보인다. 사실 이 양반의 글을 보면 조금 무정부주의적 색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