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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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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chluss(안슐루스/Anschluß(옛 철자법), 혹은 Anschluss Österreichs)
"지금 생각해 보니, 운명이 나의 출생지를 린츠로 택한 것은 신의 섭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작은 마을은 두 개의 독일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 이 땅을 결합시키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으라는 신의 지시였으니 말이다."
-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1. 개요2. 기원3. 발단4. 전개5. 결말6. 이모저모7. 관련 문서

1. 개요

1938년에 이루어진 나치 독일오스트리아 연방국과의 정치연합. 사실 상 통일을 가리킨다. 원래 안슐루스는 통합 등을 뜻하는 독일어 보통명사이지만, 이 사건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이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도 통한다.

2. 기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독일오스트리아는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민족성과 언어를 공유하는 독일 문화권이었고, 독일 민족과 독일 문화권에 속해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나라들이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뤄야 한다는 관념은 신성 로마 제국 시기부터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자 정치적 운동으로 나타났다. 사실, 신성 로마 제국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실질적으로 해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느슨한 국가 연합과 비슷한 형식으로 남았으니 아직까지는 단일국가라고 주장할 만했으나, 나폴레옹 전쟁에 따른 이름만 남은 제국의 해체[1]로 더 이상 "통일된 독일인의 국가"가 없자 통일 국가를 만들기 위한 운동(1848년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19세기의 독일 정치지형은 합스부르크 왕조오스트리아 제국호엔촐레른 왕조프로이센 왕국이라는 2대 강국 중심인 다수의 소국가였다. 이 두 나라 모두 자국 중심의 독일 통일을 원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유럽 안에서 여러 이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영토를 거느린 나라였다는 점이다. 당연히 오스트리아는 이들 영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도 형식상으로라도 호엔촐레른 가문의 아래로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때문에 통일에 대한 정치적 관념은 다민족 연합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대독일주의와 단일한 독일인만으로 이루는 국민국가를 건설하자는 소독일주의로 나뉘었다.[2]

이 가운데 소독일주의자들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로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의 해산과 함께 통일운동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프로이센 중심의 북독일연방과 바이에른 중심의 남독일연방은 1870년에 발발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합한 뒤, 정치 협상을 거쳐서 통일 독일을 만들기로 합의해 1871년 소독일주의에 기초한 독일 민족의 통일 국가인 독일 제국이 탄생했다.[3][4]

그러나 독일 제국이 들어선 후에도, 통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 지역의 통합에 대한 담론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양쪽 모두 궁극적으로는 언젠간 오스트리아의 독일어권 지역이 통일독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상당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함께 패망하면서 이런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종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완전히 분해되어 다른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들은 전부 독립해 버리고 독일어권의 일부 지역만 남아[5] 오스트리아 공화국이라는 소국이 되었다. 그간 오스트리아의 독일 통합에 걸림돌이 되었던 다민족적인 요소가 사라져버린 만큼 오스트리아에서는 독일과의 통합으로 독일민족의 통합국가를 만드는 것이 큰 이슈로 떠올랐다. 때마침 불어닥친 민족자결주의 열풍은 이런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했고 결국 새로 들어선 오스트리아 공화국 의회는 독일과 통합을 의결했다. 그러나 독일이 강국으로 다시 일어서길 원치 않았던 연합국들이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합은 일차적으로 좌절되었다. 그렇게 전간기가 흘러가는 동안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직격탄을 맞은 와중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게 되었다.

3. 발단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은 해체되었다. 독일인들이 집중되었던 오스트리아 일부에서는 방대한 영토, 특히 상공업이 발달한 보헤미아(체코, 즉 당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를 잃어 나타난 경제적 곤란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감과 전통적인 통일 독일 관념이 결합해 다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통합시켜야 한다는 관념이 나타났다.[6] 하지만 연합국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단일한 국가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였고, 1919년의 생 제르맹 조약과 1922년의 제네바 의정서로 독-오 합병은 20년간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 정계는 기독교 사회당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라는 2대 정당이 정치했으나, 대공황기에 독일과의 관세동맹을 통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기사당 출신 수상인 쇼버의 노력이 독일의 동의 및 독일과의 통일을 향하는 첫걸음으로 인식한 국내의 통일된 지지에도 국제적인 압력으로 포기했다. 그리고 "저자세 외교"라고 비판한 사민당과 이를 부당하다고 여긴 기사당과의 알력은 나치당의 대두를 허락했다.

그렇게 오스트리아 나치당1932년의 지방선거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내의 우익집단인 호국단의 쿠데타 실패로 기존의 보수층들을 흡수하면서 성장했는데, 1933년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를 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독일과의 통일을 과격하게 주장하는 분위기가 팽배, 테러 행위가 빈발했다. 이에 대응하여 기사당 출신의 수상인 돌푸스는 독일과의 통일을 반대하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외교적 후원과 호국단과의 연합을 통한 권위주의 체제를 실시하여 사민당과 나치당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1934년 돌푸스가 수상관저에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에게 습격을 받아 사망하고, 나치당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독일과의 통일 논의가 급락했다(기사당의 쿠르트 슈슈니크 장관이 후임 총리가 되어 쿠데타를 진압했다). 거기다 무솔리니는 4개 사단을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선에 전개시켜서 독일의 행동을 견제했고, 나아가 히틀러를 매도했다.[7]

그러나 1935년에 영독해군협정을 맺으면서 독일이 국제적 지위를 개선했고, 다시 1936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무솔리니를 히틀러가 지지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가 좋아졌다. 또한 1936년에 독일-오스트리아 협정으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사면과 정치 활동의 재개를 보장받았다.[8]

4. 전개

1938년에 이르러 히틀러는 자신의 산장으로 2월 12일 슈슈니크를 초빙하여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를 요구했다. 슈슈니크가 도저히 못 수용할 제안이었지만, 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데는 동의했다.[9]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독일에 합병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저 독일의 외교를 적극 지지할 나라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고, 무솔리니가 1934년처럼 나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이만한 합의라도 히틀러에게는 만족스러웠으며, 오스트리아 나치당에게 보낸 공개적인 지시에서도 "슈슈니크와의 합의는 매우 광범위한 것이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는 어떠한 마찰도 해소되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허나, 위의 생각과는 달리 아래인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말단들은 독일과의 통합이 다가왔다 여기고 과격한 폭력 활동에 돌입했다. 국내의 치안불안에 말려든 슈슈니크는 국민투표를 제안하여 독일과의 합의를 무시하며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국민투표 제안이 히틀러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것을 안 히틀러는 격노해 "이건 사기투표이니 독일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민투표의 중지와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수상직 이양을 요구하는 한편, 3월 10일에 오스트리아 제압 작전을 지시했다. 3월 12일에 독일 국방군을 월경시켜 무력으로 오스트리아 국토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이 정보는 오스트리아에 누설되어 오스트리아 정부에 충격을 주었다. 3월 10일 오후 4시, 슈슈니크는 국민투표의 중지와 총리에서 사퇴할 것임을, 즉 '굴복'의 뜻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슈슈니크는 자이스-잉크바르트를 후계로 추천했지만, 대통령인 미크라스는 승인을 꺼렸다. 그러나, '굴복' 방송에 힘이 난 각지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원은 , 린츠, 그라츠, 인스부르크 등의 지방 정부의 시설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걸었다. 다시 독일은 아직 내무장관이던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파병 요청"을 강요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오후 9시 45분에 파병 요청을 하였다. 끝내 12일이 되기 조금 전, 미크라스는 마침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독일 육군은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으나, 그 과정이 근대 육군의 교과서라던 예전의 명성은 못 찾을 어설픈 모습이었다. 히틀러가 조급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와 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3일 만에 작전안을 짜서 움직여야 하였으며, 보급과 행군 모두 착오의 연속이었다.[10]

그러나 끝내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 대통령에게 사임을 강요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자이스-잉크바르트는 3월 13일 빈에서 히틀러와 만나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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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수도 에 입성하는 독일군. 사진에서도 보이지만, 군인들이 탄 자동차가 군용이 아니라 민간용이다. 준비없는 독일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독일 군부가 초기에 막가는 히틀러를 제지하려고 한 것은 다 까닭이 있어서였다.[11]


빈에 입성, 할덴광장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이후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전역을 접수한 가운데, 형식적인 법 절차로 나치당 감독 아래 4월 10일 국민투표를 했다. 이 투표는 투표지부터 병합 찬성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투표소를 경비하는 독일군 앞에서 공개투표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결과는 97% 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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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 쪽의 동그라미를 크고 아름답게 그린 불공정한 투표용지.
Volksabstimmung und Großdeutscher Reichstag
국민투표와 대독일 국회의사당.

Stimmzettel
투표용지.

Bist du mit der am 13. März 1938 vollzogenen
당신은 1938년 3월 13일에 실시된
Wiedervereinigung Österreichs mit dem Deutschen Reich
오스트리아독일의 재통일[12]
einverstanden und stimmst du für die Liste unseres Führers Adolf Hitler?
동의하고 우리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후보자 명단을 지지하는가?

Ja / N e i n
/ 아 니 오

싫다고 적은 사람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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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 후 국경표지판을 떼어내는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 관계자들.

5. 결말

사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들이나 주민들은 신교도적인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삼킨다고 우려하는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을 빼면 공통적으로 독일과의 통합을 지지했다. 그들이 반대하는 까닭은 독일사의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합스부르크의 전통인 오스트리아가 이질적인 나치에게 삼켜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당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주민들이 가지는 충성의 대상은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왕조가 만든 "대독일"국가였기 때문에 독일과의 병합으로 "대독일주의인 통일독일"이 목전에 다가오자 압도적인 지지로 병합을 지지했다. 반나치주의자이던 사민당 출신의 전 수상인 카를 렌너가 "나치는 싫지만 독일과의 통합은 필요하다"고 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봐야만 한다. 지지율이 높았던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따라서 독일이 오스트리아인들을 잘 대해줬더라면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전쟁 이후에도 독일에 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국-영국-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해 독일에 강제 병합된 국가들은 해방시켜 줬지만 그렇지 않은 기존의 독일 영토는 정치적 이유로 소련이 폴란드에 강제 편입시킨 동프로이센오데르-나이세 선 이동(以東)의 영토를 제외하고는 그 영유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병합은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설치기 전에 일단 합법적으로 체결되었기 때문에 연합국도 손댈 수 없었다.[13] 그러나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전통을 부정했으며, 오스트리아 청년들은 독일군에 강제 편입되어 반인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강요받아야 했다. 독일과의 통합을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되찾고 좀 더 강한 국가의 국민이 되자는 꿈이 악몽으로 바뀐 것이다.

연합국은 독-오 합병에 대해서는 그 정당성을 인정했고, 그렇기에 오스트리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과의 통일 금지, 영세중립국으로 남는다는 조건 하에 1955년 독립하였다.

최근에도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기사당의 후신인 오스트리아 국민당이 게르만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극우 정당과 연립을 짜던 것처럼, 오스트리아 국내에서는 게르만 민족주의가 떠올라서 자신들이 "독일인"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인"인지를 묻는 독-오통일 의식은 지금도 잔존한다. 또한 유럽연합을 연결하던 솅겐 및 자유교류 정신의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유럽연합의 일부가 아니라 다시 소국 오스트리아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자 독일과의 병합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도 늘어나고 있으며, 독일 입장에서도 인구 문제가 심각하고 무엇보다 과거사 문제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안이다 보니 오스트리아와의 통합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적어졌다.
한편으로는 독일민족의 통합을 내세웠던 오스트리아 합병이지만 무솔리니가 이를 묵인해주는 대가로 1차대전 후 이탈리아로 넘어갔던 쥐트티롤[14] 지방에 대해서 히틀러는 어떠한 영유권도 주장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쥐트티롤의 오스트리아계의 흔적은 파시즘 치하 21년간 철저히 금지된다. 이에 대한 히틀러의 대응은 기껏해야 이주를 받아주는 것 뿐이었다. 이후 이탈리아 항복 후에 아니나 다를까 얄짤없이 독일 영토에 편입된다. 그리고 독일 패전으로 도루묵(...).

6. 이모저모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이 사건이 배경이다. 주인공 게오르크 폰 트라프 소령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의 U보트 에이스였으나, 나치에는 반대했다. 나치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 오스트리아 전현직 군인들을 독일 국방군에 입대시켰고, 트라프 소령에 독일 해군의 요직을 제의했지만, 나치에 반대했던 트라프 소령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 오스트리아군은 대체로 산악사단(Gebirgsdivision)으로 바뀌어 독일 국방군에 편입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다시 분리되긴 했지만 이 때 편입된 오스트리아군 부대 편제 자체는 그대로 독일군에 남아있다. 그리하여 독일군 산악사단의 문장은 오스트리아의 국장인 에델바이스다.
  • 이 사건으로 대대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거주하던 신성 로마 제국 최후의 제후 리히텐슈타인 공가가 리히텐슈타인으로 영구 이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리히텐슈타인의 국방, 주변국과의 관계를 제외한 외교는 스위스가 대행하게 되었다.
  • 여러 국가들이 나치 독일의 영토욕에 우려했지만 국제연맹에서 실제로 오스트리아 병합을 비판한 국가는 멕시코밖에 없었다. 1956년 이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으로 의 한 광장이 Mexikoplatz(멕시코 광장)로 개칭되었다.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모두 예선을 통과했기 때문에 두 팀 모두 이 대회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회 몇 달 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되면서 오스트리아의 상대였던 스웨덴부전승으로 8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대표팀 선수들을 강제로 독일 대표팀에 편입시켰는데 오스트리아 출신 선수들은 남의 나라를 위해 뛰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경기 중에 대놓고 태업을 했다. 그 결과 독일은 스위스에 졸전 끝에 패배하며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15]

7. 관련 문서



[1] 단, 빈 회의신성 동맹으로 독일 연방은 부활하였다.[2] 여기에 대독일주의에서도 소독일주의에서도 의견이 갈렸다.[3] 단 소독일주의에 의거해 탄생한 독일 제국이 단순히 독일 민족으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었던 게 프로이센 영토에 폴란드인 등 비독일계 민족이 살고 있었다. 단지 그 정도가 오스트리아보단 낮았을 뿐.[4]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독일을 만들고자 외교적으로 전력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했다.[5] 당시 독일어권은 오스트리아 뿐 아니라 수데텐란트와 쥐트티롤도 있었으므로, 독일어권 지역 모두가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아니었다.[6] 이는 오스트리아만이 아니라 독일도 마찬가지여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에는 오스트리아와의 통일을 암시하는 조문이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2조(영토) 제국의 영토는 독일 각 주(州)의 영토로써 성립된다. 만일 다른 지역의 인민으로서 그 자결권에 의하여 병합을 원할 때에는 제국법률에 의하여 이를 제국에 편입할 수 있다.[7] 당시 돌푸스와 그의 가족들은 무솔리니의 초청을 받아서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가족들이 먼저 이탈리아로 출발했는데, 돌푸스가 암살당하자 무솔리니는 자신이 초대한 가족들에게 가장의 부고를 알리면서 비탄에 빠진 돌푸스의 유족들을 보아야만 하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이러니 안 빡칠 수가 있나(...).[8] 이는 1938년에 무솔리니가 슈슈니크를 방관하는 계기였다.[9] 자이스-잉크바르트와 슈슈니크는 친구였다![10] 차량들이 오스트리아의 민간 주유소에서 돈을 주고 가솔린을 조달함은 기본이었고, 보병사단들의 행군상황은 사단장이 예하 제대의 현 위치를 못 파악하였으며, 선봉은 오스트리아 영내에 있는데 후방지원 부대는 병합작업을 진행하는 그 순간에도 독일 국내에서 오스트리아로 행군하는 도중이었다. 이 꼴을 본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주재무관이 "독일군의 행군 군기는 극히 열악하다."뭐? 지당한 말을 했다. 만약 오스트리아 주민과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이 격렬했다면 병합은 완전히 물건너가는 정도가 아니라 히틀러의 권력조차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11] 독일군의 무적신화는 사실 폴란드-노르웨이-프랑스-발칸 전역을 거치면서 (폴란드를 뺀) 다른 나라보다 많이 쌓은 실전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12] 원래 하나였던 것이 다시 합치기 때문에(독일오스트리아역사 참조) 재통일이라는 단어를 쓴다. 따라서 1990년의 동서독 통일도 독일에선 재통일이라고 부른다.[13] 실제로 2차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1차대전 당시 신탁통치 등으로 상실한 라인란트, 자를란트 등 영토의 상당 부분을 되찾은 상태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동프로이센 절반도 냉전 상황에서 소련과 정면충돌할 수 없던 연합국이 또 다른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모른 척한 것이지 인정한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영유권을 폴란드가 정식으로 인정받은 건 당사자인 독일이 통일을 위해 스스로 포기한 1990년 이후의 일이었다.[14]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 1절에 나오는 독일의 범위에서 에치 강이 의미하는 것이 쥐트티롤 지방이다.[15] 참고로 이것이 2017년까지 독일 축구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 1라운드 탈락이었다. 그러다가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에 0 : 2로 패배하며 사상 첫 조별리그 탈락이자 80년 만의 1라운드 탈락이라는 기록을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