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k.u.k. Feldmarschälle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
▲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제국원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원수 칼라장을 착용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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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최종 계급인 제국원수에 올라섰던 인물들에 대한 문서이다. 따라서 군주가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9인을 다룬다. 황제인 카를 1세의 경우 군주로서 자동적으로 제국원수 직위를 가졌기에 본 문서에서는 제외한다.2. 계급의 발전
2.1. 육군
오스트리아 육군, 일명 제국 및 왕국 원수(독: Kaiserlicher und königlicher Generalfeldmarschall, 헝: Császári és királyi tábornagy) 계급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k.u.k. 육군의 최고 계급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설립된 직후인 1805년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는 1918년까지 존속했다. 오헝 제국 육군 장성급 장교 계급은 준장이 없이 소장-중장-병과대장, 그리고 바로 제국원수로 넘어가는 구조였다.[1]오스트리아의 원수 계급은 19세기 내내 유능한 군인들을 꾸준히 원수들로 진급시켰던 이웃 독일 제국군과 달리 실질적인 계급으로 기능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폴레옹 전쟁부터 보오전쟁까지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던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야 이런저런 군인들이 원수로 진급했으나, 대타협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때 까지 약 50년 동안 새로이 원수에 임명된 오헝 제국의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제외하면 이탈리아 독립운동들을 진압한 공으로 1867년에 진급한 에드문트 추 슈바르첸베르크 원수, 그리고 1863년에 진급하여 36년간 제국군 감찰관으로 복무했던 테셴 공작 알브레히트 대공만이 1차 대전 이전까지 존재했던 이중제국의 유이한 육군원수였다. 그마저도 이들은 전부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 진급해서 이중제국 시절까지 복무한 이들이었다. 그 외에는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와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에게 친선우호 명목으로 명예 원수 칭호를 준 것이 다였다. 그래서 사실상 오헝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단은 소장-중장-병과대장 세 개로 구성되었다.
참고로 여기서 오헝제국군의 중장은 독일과 달리 Feldmarschallleutnant, 직역하면 부원수로 번역되기 때문에 수관급 장교로 오해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근세에 사령관인 제국원수를 보좌하는 부장들에게 주어지던 직책명에서 유래한 만큼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19세기 시점에서는 그 위치 상, 그리고 업무 상 엄연히 중장으로 부르는 게 적절하다. 그리고 오헝 제국군에는 준장이 없었기에, 이 계급은 현대 한국군 계급에 대입하면 일개 소장급 계급에 불과하다.
어찌되었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에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총사령관인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이 리마노바-와파누프 전투에서의 승리를 거뒀다는 이유로 1914년 12월 8일에 대타협 이후 군주가 아닌 사람으로써는 최초로 원수로 진급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공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었고, 그의 총사령관 직책은 명예직일 뿐이었다. 실제로 전반적인 지휘 통솔은 참모총장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보병대장이 하고 있었기에 그의 원수 계급 또한 총사령관 직책과 마찬가지로 사실상의 명예직이었을 뿐, 프리드리히 대공의 원수 진급은 그저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치적 의미가 강했다.
1915년, 병과대장과 제국원수 사이에 타국의 대장에 대응하는 제국상급대장(k.u.k. Generaloberst) 계급이 도입되면서 최종적인 계급 체계가 완성된다. 참고로 상급대장이 뒤늦게라도 도입된 이유는 독일 제국군 때문이었다. 한창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지휘를 받기 싫었던 독일 제국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장성 계급중에 상급대장이 없다는 걸 떠올리고 이를 이용해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상급대장을 제9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꼼수를 썼다. 오헝군에는 없는 계급이지만 명목상 병과대장보다는 한단계 높은 직급이기 때문에 이를 구실로 동맹군의 지휘권 확보에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지휘부측은 독일군에 대한 지휘권 확보라는 목적을 위해 황실의 인원인 오이겐 대공을 급히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시켰으며, 한달이 지나고서는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서 승리했다는 명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실질적인 지휘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보병대장을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1916년, 야전에서 구르던 오이겐 대공[2]과 콘라트가 원수로 진급하면서 제국원수 계급은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계급이 되었다. 그리고 카를 1세의 즉위와 함께 군 지휘부가 재편이 되면서 아르츠 제국상급대장이 참모총장이 되었다. 카를 1세와 아르츠는 제국군 전체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정치적 결정으로 카포레토 전투의 성공과 케렌스키 공세의 성공을 기념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크로바틴과 쾨베시를 동시에 진급시켰다. 이들은 야전에서 구르던 지휘관들로 제국원수들은 이름에 걸맞게 각각 전선의 방면군을 야전에서 지휘하게 되었다.
특히 1918년 초에 집중적으로 이뤄진 제국원수 승진은 전쟁 막바지의 위기 상황과 관련이 있다. 카를 1세는 제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능력 있는 지휘관들을 대거 승진시켰고, 이는 로어, 뵘에르몰리, 보로예비치 등의 제국원수 임명으로 이어졌다. 특히 非독일계인 쾨베시[3] 와 보로예비치의 승진은 제국 내 여러 민족의 충성심을 확보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된다. 이후 1918년 10월 24일, 제국의 멸망이 확정되었을 때 카를 1세는 헝가리만이라도 남기기 위해 당시 헝가리인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을 제국원수에 진급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1918년까지 총 9명의 장성만이 이 계급에 올랐다. 제국원수들은 제국의 다민족적 특성을 반영하여 다양한 민족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대다수가 오스트리아의 지배 계층이었던 독일계였지만 헝가리계도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고, 소수의 슬라브계도 있었다. 대표적인 독일계 인물이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 프란츠 사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헝가리계로는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체코계로는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가 그리고 크로아티아계로는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 사령관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가 있다. 또한 상술한 대로 타국의 군주들에게 수여된 사례도 존재한다. 이는 당대 국가들의 특징 중 하나였다. 상술한 빌헬름 2세, 에드워드 7세 말고도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5세가 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전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는 영국 총리이자 육군 원수인 아서 웰즐리도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원수 계급을 받았는데, 군주가 아닌 일개 외국 군인이 무공을 인정받아 수여받은 케이스로는 유일하다.[4]
2.2. 해군
한편 해군의 대제독(독: Großadmiral, 헝: Főtengernagy) 계급은 독일의 대제독과 달리 상급대장에 해당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에는 원수가 없었다.3. 제국의 멸망 이후
제국 패망 이후 오스트리아 연방군에는 원수 계급이 없기에 신규 진급자도 없다. 다만 제국군 원수였던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가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나치 독일에서도 명예원수 계급과 예우를 받았던 적은 있다.오헝 제국의 원수들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은 1962년에 사망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다.
4. 목록
<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9인의 제국원수 | ||||||||
순서 | 사진 | 이름 | 임명 | 출생-사망 | 최고 직위/보직 | 민족/출신 | 대표 전투/공적 | 비고 |
1 | 프리드리히 | 1914년 12월 8일 | 1856년 6월 4일 * 1936년 12월 30일 † | k.u.k. 육군 총사령관(1914-1916)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세르비아 전선 지휘 | 명목상의 총사령관, 실권은 콘라트가 장악 | |
2 | 오이겐 | 1916년 11월 23일 | 1863년 5월 21일 * 1954년 12월 30일 † | 티롤 방면군 사령관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 이탈리아 전선 방어 작전 지휘 | 발칸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성공적 지휘 | |
3 | 콘라트 | 1916년 11월 25일 | 1852년 11월 11일 * 1925년 8월 25일 † | k.u.k. 육군 참모총장(1906-1917) | 독일계 |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전략 수립, 갈리치아 전투 | 실질적인 제국군 최고 지휘관 | |
4 | 쾨베시 | 1917년 11월 5일 | 1854년 3월 30일 * 1924년 9월 22일 † | k.u.k. 육군 총사령관(1918) | 헝가리계 | 발칸 정복 작전 성공적 수행 | 제국 최후의 총사령관(1918) | |
5 | 크로바틴 | 1917년 11월 5일 | 1849년 9월 12일 * 1933년 12월 28일 † | 전쟁부 장관(1912-1917) | 슬로베니아계 | 카포레토 전투 승리 | 전쟁부 장관 출신 제국원수 | |
6 | 로어 | 1918년 1월 30일 | 1854년 10월 30일 * 1927년 12월 9일 † | 제1군 사령관 | 독일계 | 이탈리아 전선과 동부전선 방어 성공 | 가장 낮은 출신 성분의 제국원수 | |
7 | 뵘에르몰리 | 1918년 1월 31일 | 1856년 2월 12일 * 1941년 12월 9일 † | 제2군 사령관 | 체코계 | 세르비아 침공, 동부전선 지휘 | 나치 독일 명예원수 | |
8 | 보로예비치 | 1918년 2월 1일 | 1856년 12월 13일 * 1920년 5월 23일 † | 이손조 방면군 사령관 | 크로아티아계 |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 격퇴 | 슬라브계 출신 유일 제국원수 | |
9 | 요제프 아우구스트 | 1918년 10월 24일 | 1872년 8월 9일 * 1962년 7월 6일 † | 티롤 방면군 사령관 | 헝가리 합스부르크 | 이탈리아 전선 지휘 | 마지막으로 임명된 제국원수 |
5. 특징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부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적 승진이 가능했지만, 여전히 신분제의 영향력도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순수 군사적 공적으로 원수가 된 경우[5]와 군사적 공적과 신분이 모두 고려된 경우[6], 그리고 신분이 주된 요인이었던 경우[7]를 통틀어 봤을 때, 4:3:2 비율이었다.6. 같이 보기
[1]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Reichsmarschall 또한 제국원수라고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혼동하기 쉬운데, 사실 Reichsmarschall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기엔 제국원수는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다만 번역어 문제는 비록 오류를 내포하더라도 한 번 정착을 하면 변경이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부득이하게' 제국원수로 표기하는 것이다. 반면에 k.u.k. Feldmarschälle의 k.u.k.는 Kaiserlich und Königlich를 줄인말로, 번역하자면 제왕국(帝王國)이라고 읽는다. 따라서 이쪽이 더 제국원수라는 의미에 들어맞는 번역이다.[2] 테셴 대공 프리드리히의 동생. 당시 이손초 전선의 3군과 11군 사령관이자 튜튼 기사단 단장.[3] 그런데 쾨베시는 좀 달리 봐야하는 것이, 부계쪽은 헝가리 귀족 출신의 헝가리계였으나, 그 중에서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분파의 후손이었다. 또한 모계로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의 혈통이 흐르고 있었다. 이처럼 독일어로 교육받으며 독일계 문화에서 자란 쾨베시는 분명 헝가리인의 정체성도 갖고 있었지만,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좀 더 강한 편이었다. 따라서 쾨베시는 주로 독일계로 간주된다고 할 수 있다.[4] 사실 웰즐리는 모국 영국과 오스트리아 말고도 하노버, 네덜란드, 포르투갈, 프로이센, 러시아 그리고 스페인군 원수 계급도 받은, 8개 국군의 원수다.[5] 콘라트, 쾨베시, 로어, 보로예비치[6] 오이겐, 크로바틴, 뵘에르몰리[7] 프리드리히, 요제프 아우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