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5대 참모총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 Friedrich von Beck-Rzikowsky | |
이름 | Friedrich Beck 프리드리히 벡 ↓ Friedrich Ritter von Beck 프리드리히 리터 폰 벡[1] ↓ Friedrich Freiherr von Beck 프리드리히 폰 벡 남작[2] ↓ Friedrich Graf von Beck 프리드리히 폰 벡 백작[3] ↓ Friedrich Graf von Beck-Rzikowsky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 백작[4][5] |
출생 | 1830년 3월 21일 |
바덴 대공국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 | |
사망 | 1920년 2월 9일 (향년 89세)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빈 | |
복무 |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
1846년 ~ 1867년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 |
1867년 ~ 1917년 | |
최종 계급 | 제국상급대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
주요 참전 | 1848년 혁명 이탈리아 통일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
주요 서훈 | 검은 독수리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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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 참모총장으로 25년을 복무하였었다. 에두아르트 폰 파어, 아르투어 폰 볼프라스와 함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3명 중 1명이다.2. 생애
벡지코프스키는 원래 프리드리히 벡(Friedrich Beck)이라는 이름으로 바덴 대공국의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는데, 부친 카를 요제프 벡(1794-1838)이 그 곳에 외과의사로 일하던 때였다. 벡은 합스부르크 황실에 대한 충성심[6]으로 1846년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입대했다. 그는 당시 소위로 임관하여 보병 중위, 공병 정찰대를 거쳐서 일반참모부에서 복무했다. 1848-49년 헝가리 반란과 1848-49년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요제프 라데츠키 휘하 부대에서 브레시아 점령 당시 전투에 참가하였다.1854년 제국의 수도에 현대적 의미의 최초의 고급 장교 양성 기관인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k.u.k. Kriegsschule)이 신설되었고, 벡은 새롭게 설립된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참모 상위(Stabskapitän)[7]로 진급했다. 졸업 후 곧바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점령군으로 파견되었다. 1857년에는 헝가리 남부에서 지형 측량 및 지도 제작 작업을 수행하였다. 1859년 사르데냐 전쟁에서 벡은 지기스문트 폰 라이샤흐 중장의 제1예비기병군단(구 제13군단)에서 한 사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벡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마젠타 전투에서 무릎에 총상을 입었고, 부상으로 인해 이후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패배한 후 벡은 기사 작위를 받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1861년 벡은 안나 마리아 지코프스키 폰 도브리 도브지츠(Anna Maria Rzikowsky von Dobrzicz)와 결혼했다.
활기차고 잘 조직된 프로이센 왕국군에 감명받은 벡은 헬무트 폰 몰트케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1862년 오스트리아 제국군 참모총장인 하인리히 폰 헤스(1788-1870)원수의 부관으로 일반참모부에 복무하게 되었다. 1864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덴마크 전쟁때는 루트비히 폰 가블렌츠 장군의 연락장교로 임명되었다. 1865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부관이 되었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황제의 특사 자격으로 일반참모에서 일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후에도 벡은 계속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수립되자 벡은 황제의 군사 사무국(Militärkanzlei)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오스트리아 육군과 헝가리 왕국군을 통합하는 군 개혁을 주도했다. 1874년에는 황제의 일등 부관(Generaladjutant)으로 승진했다.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가 보스니아를 점령했을 때, 벡은 중장 진급과 동시에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점령 비용과 1차 목표물을 독자적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점령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고,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1881년 마침내 참모총장으로 승진한 벡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높은 신임을 얻었다. 침착하고 신중한 그의 명확한 판단력과 실용적인 상식은 사람과 사물을 편견없이 순전히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군사 문제에 대해 진보적 자유주의 근대화주의자들과 야전 사령관 알브레히트 대공 주변의 반동 진영 사이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지휘하의 일반참모부는 제국군의 실질적인 최고 사령부가 되었으며, 제국 전쟁부에 대한 일반참모부의 종속은 거의 명목상의 수준에 불과했다. 벡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동갑인데다 성격도 비슷하고 군사 정책 면에서도 그와 매우 잘 어울려 1906년까지 "부황제"(Vizekaiser)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벡은 25년간 참모총장직을 수행하면서 프로이센식으로 참모부를 개편하여 전쟁부로부터 독립시켰다. 또한 참모들의 야전 훈련을 강조하고 대규모 기동 훈련을 실시했으며, 전략적으로는 프로이센 왕국과 협력하여 러시아 제국에 대한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1880년대에는 병력의 지역화(Territorialisierung) 정책을 추진하여, 16개 군단 관할 구역을 설정하고 각 지역의 청년들을 우선 자기 고장 부대에 배치했다. 1885년부터는 중앙 유럽 전도(Generalkarte)의 제작을 주도했고, 군사 지도 제작에 사진 측량법을 도입했다. 1889년 1월 벡은 육군 야전대포장(Feldzeugmeister)로 진급했다.
1880년대 후반 발칸반도의 불안정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위기에 처하자, 벡은 이에 적극 대응했다. 1885년 동부 루멜리아의 반란으로 불가리아가 사실상 통일을 이루자, 그는 부분 동원령을 내려 세르비아를 구원했다. 한편 그는 동맹국 세르비아의 덕분에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의 세력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진행된 러시아-튀르크 전쟁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군을 동원해 러시아군을 견제했다. 1890년대에 벡은 징병제와 군수 체계의 개선에 주력했다. 특히 그가 1889년에 입안한 국방법은 제국 말기까지 시행되었다. 그러나 강대국 지위 유지와 전쟁부의 제한된 예산 사이에서 벡은 어려움을 겪었다. 1893년, 그는 빌헬름 2세에 의해 프로이센 왕국의 검은 독수리 훈장을 받았다. 재임 기간의 마지막 몇 년은 군사 기술 및 보급에 대한 개혁에 집중되었다. 1890년대 후반부터 제국군의 총감찰관(Generalinspektor)에 임명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자국 해군과 군의 보급제도에 대한 현대적인 개선과 황립 및 왕립 해군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에 해군력 증강과 함께 군 근대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육군의 중무장에만 몰두했던 벡은 페르디난트 대공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노령의 벡을 참모총장에서 물러나게 할 것을 황제에게 건의했다. 황제는 거부했지만 페르디난트는 계속 압박했다.
4년 동안의 줄다리기 끝에 황제는 제위 계승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06년 10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76세의 벡을 해임하고 왕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추천한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후임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벡은 여전히 황제의 측근으로 남아 있었고, 세간에서는 "부황제"(Vizekaiser)로 불렸다. 황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백작 작위를 수여하고 근위 궁수대(Erste Arcièren-Leibgarde) 대장에 임명했다. 1916년 2월 26일, 전년에 신설된 제국상급대장 계급이 벡에게 수여되었다. 그는 원수 계급은 받지 못했다. 이미 실무에 몇년동안 떠나 있었던 벡지코프스키였기에 제국상급대장 수여가 황제한테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1917년 1월 그는 현역에서 완전히 퇴역했다. 1920년 2월 9일 빈에서 사망했다.
[1] 1861년 귀족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2] 1878년 남작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3] 1906년 백작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4] 1913년 성씨를 아내의 이름 안나 지코프스키에서 따와 개성한 후의 이름[5]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벡지코프스키'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6] 프라이부르크는 원래 빈 회의 이전까지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라는 이름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랫동안 통치해온 월경지의 중심지였다.[7] 영어로는 staff captain, 독어로는 Stabshauptmann인 이 계급은 오래 전부터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에서 쓰인 계급으로 위치는 중위보단 높고 대위보단 낮다. 북한식으로 상위라고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