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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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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혁명 당시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의 모습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프랑스3.2. 독일3.3. 이탈리아3.4. 폴란드3.5. 헝가리3.6. 교황청
4. 결과5. 왜 실패하였는가?6. 의의7. 여담

1. 개요

1848년 유럽을 뒤흔든 일련의 혁명들. 빈 체제에 반항하는 전유럽적인 자유주의 운동이었다.

2. 배경

혁명의 배경은 정치적, 경제적 원인으로 나누어 봐야 한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빈 체제 수립 이후 30년 가까이 억눌린 자유주의내셔널리즘 사상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1848년 당시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극소수 계층을 차지하고 있었던 부르주아들의 전유물격인 사상이었기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1] 결국 관건은 대중 동원 여부였는데 경제적 위기가 이를 해결해 주었다. 당시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아직 산업화가 본 궤도에 오르기 전이었고 주요 산업이 여전히 농업이었는데 1847년부터 시작된 흉작은 농민들까지 혁명에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3. 전개

혁명의 불꽃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됐다. 1월에는 시칠리아에서 양시칠리아 왕국의 강압 통치에 항거하는 농민 중심의 민중 봉기가 폭발했고, 2월에는 루이필리프7월 왕정에 맞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파리 시민들이 봉기해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프랑스 2월 혁명) 한 번 일어나기 시작한 혁명은 걷잡을 수 없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3월에는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에서 혁명이 폭발해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같은 독일 연방의 나라들에서도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에서는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이 잇따라 봉기해 독립을 요구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에서는 코슈트 러요시가 독립선언과 함께 공화정을 선포하였고 헝가리 독립군은 오스트리아군과 황제에 충성하는 크로아티아 왕국[2] 총독 요시프 옐라치치의 군대를 무찌르고 헝가리 전역을 장악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군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분열을 호기로 삼아 오스트리아가 점유한 북이탈리아 지역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은 해체 직전까지 내몰렸다.

이곳 이외에도 혁명은 교황령[3], 토스카나 대공국, 영국령 아일랜드에서도 폭발했고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체코인의 주동으로 슬라브민족회의가 소집되어, 체코인과 폴란드인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영국을 제외한 주요 유럽 열강에서 혁명 운동이 폭발한 셈. 러시아와 영국에서 혁명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상이한데 러시아의 경우 아직 사회구조가 농노 해방도 이루어지지 않은 앙시앵 레짐 그 자체였기 때문에 입헌군주제나 공화정 같은 사상을 추구하는 세력 자체가 극소수의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전무하다시피 했다. 거기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여 그나마 외부에서 들여온 자유주의 등에 대해 미리 김이 빠진 탓도 있다. 반면 영국은 러시아와 정반대의 경우로 당시 단연 산업화의 선두주자였고 이미 대중들의 대부분은 농민이 아니라 노동자였기 때문에 흉년으로 인한 불만이 클래야 클 수 없었다. 게다가 영국은 당시 이미 자유주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의 불만조차도 없었다.[4]

3.1.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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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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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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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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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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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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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과

혁명의 결과는 엇갈려 프랑스에서는 공화정이 수립[5], 스위스에서는 중앙집권화, 덴마크의 입헌군주제 전환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 이탈리아를 비롯한 대다수 지역에서는 혁명이 짓밟혔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1848년 12월에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통치능력이 없는 백부인 페르디난트 1세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 혼란 상태에 놓인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듬해 11월 러시아 제국군이 헝가리에 개입하였다. 오스트리아군 20만과 헝가리군 20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군 20만이 오스트리아 편으로 참전하자 균형추는 한순간에 오스트리아군으로 기울었으며 헝가리의 독립전쟁은 결국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무참히 진압되어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1850년대 소위 '바흐 절대주의(신 절대주의)' 시대로 전환되었다.

오스트리아는 가장 애를 먹인 헝가리에 대한 보복을 잊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왕국과 보이보디나&바나트, 에르데이 대공국 등은 별개의 영지로 떼어내 헝가리 왕국의 영토를 대폭 줄인 뒤 나머지 영토는 오펜, 외덴부르크, 프레스부르크, 카샤우, 그로스바르다인[6]의 5개 군관구로 재편되어 군정 치하, 쉽게 말해 계엄령 상태에 놓였다. 이 상태는 1868년 대타협으로 헝가리 왕국의 지위가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등하게 격상되기 까지 무려 20년 간이나 유지되었다. 헝가리 공화국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처형되거나 망명해야 했다. 헝가리어의 사용과 교육은 금지되었고 독일어 교육과 독일계 이민자의 정착을 통해 헝가리 전역의 독일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20년 뒤 결국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도 더이상 구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타협했다.

여담으로 오스트리아는 이때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불과 5년 뒤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편을 들어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 통수 덕분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크게 틀어져 버렸다. 러시아는 이를 잊지 않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 편을 들어줘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가 축출당하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가 선택한 타개책이 바로 위에서 나온 헝가리와의 대타협.

독일 연방에서는 1849년 프로이센에서 오스트리아의 혁명이 일시 성공한 틈을 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자유주의 헌법을 수용하는 등 여러 제후국에서도 혁명이 성공하는 듯 했으나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입헌과정에서 소독일주의, 대독일주의와 세습황제파, 선출황제파, 공화제파의 병림픽이 오래 지속되면서 군주제주의자들이 반격하여 혁명이 진압되었다. 이미 혁명이 용도폐기된 시점에 프로이센 국왕에게 황제관을 바쳤지만 '돼지들의 머리에나 어울리는 관'이라는 빈정거림과 함께 거부당했다.[7] 이후 독일 제국 성립의 주축이 된 비스마르크는 그 유명한 철혈 연설에서 1848년 혁명을 "거대한 실수"(große Fehler)라고 언급했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라데츠키[8]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참패해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퇴위하는 일이 일어났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혁명가 주세페 마치니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은 교황령에서 교황 비오 9세를 축출하고 일시적으로 로마 공화국이 수립되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교황령 자체는 21년 뒤 찾아온 리소르지멘토에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혁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시칠리아에서는 양시칠리아 왕국 정부에 의한 유혈 진압이 일어났고 혁명 직후 일어난 반체제 인사 색출에 의해 2년간 왕국 전역에 걸쳐 2천 명에 달하는 반체제 인사가 투옥되었다.

덴마크에서는 새로 즉위한 프레데리크 7세가 자유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양원제를 설치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이와 관련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들의 귀속에 관한 문제 및 해당 지역의 반발로 전쟁이 벌어졌고 이는 국제적인 외교적 위기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이어졌다.

5. 왜 실패하였는가?

1848년 혁명은 분명히 초기 단계에서는 성공적이었다. 1789년의 기억을 생생히 지니고 있던 구체제의 군주들이 식겁을 하며 황급히 퇴위하였기 때문. 그렇지만 상술되었듯이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혁명은 실패하고 구체제가 복귀하였으며 그나마 공화정이 유지된 프랑스 역시 몇년 지나지 않아 다시 제정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혁명이 급속히 실패로 돌아간 가장 큰 원인으로 역사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점은 부르주아대중 사이의 분열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부르주아 출신의 자코뱅과 대중들이 주축이 된 상퀼로트의 연합에서 보이듯이 본디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은 그것이 설령 동상이몽일지언정 정치적으로는 동맹 관계였다. 이는 부르주아들의 자유주의 이념을 대신할 대중들 본인의 이데올로기가 부재했던 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몇 주 전에 발표된 공산당 선언이 상징하듯 1848년에는 공산주의를 비롯한 각종 사회주의 사상이 꽃피기 시작하고 대중들은 단순히 입헌군주제를 넘어서서 사회주의, 민주주의 공화국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한 자코뱅/상퀼로트 연립정권의 공포정치를 경험한 바 있었던 부르주아들에게 이러한 대중들의 급진화 경향은 공포 그 자체였고 결국 부르주아들은 대중들에게서 이탈하면서 혁명은 동력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대중 안에서도 농민들은 여전히 열렬한 왕당파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성향을 지닌 대중들은 아직 소수였던 도시 노동자에 국한됐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프랑스의 상황이다. 7월 왕정이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부터 노동자들이 더이상 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삼색기 대신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적기를 국기로 사용할 것을 요구한 것에서 보이듯이 이미 민중들은 더 이상 단순히 부르주아들의 혁명을 위해 동원되는 객체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의 경우 공화주의 이념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구체제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노동자를 비롯한 대중들을 강하게 탄압하였고 이러한 탄압은 수만의 사상자를 불러낸 노동자들의 1848년 6월 봉기[9]를 야기했다. 다른 곳에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전개됐다. 프랑스만큼이나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의식이 왕성했던 곳은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이었는데 여기서는 아예 부르주아지들이 입헌군주제를 포기하고 전제군주제의 부활을 수용하면서까지 대중들을 억압했다.[10]

헝가리에 이탈리아와 같이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던 곳 같은 경우에는 내셔널리즘이란 대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부르주아들과 대중 사이의 연합이 크게 균열이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그 덕에 혁명이 거의 성공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혁명이 진압되면서 정신을 추스린 구체제 지배층들에게 결국 무력으로 진압되었다.[11]

6. 의의

비록 혁명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혁명의 결과 보수로의 회귀인 '빈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프랑스 혁명으로 고조되었던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이 48년 혁명 이후 20년도 지나기 전에 유럽 전역에서 거부할 수 없는 대세[12]가 됐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혁명 그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궁극적으로 혁명이 추구하였던 목표는 이루어진 셈. 에릭 홉스봄은 그래서 이 혁명을 놓고 '1848년 혁명의 실패로 유럽이 전환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부당하다. 유럽은 분명히 전환하였다. 단지 혁명적으로 전환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체제에 의해 억눌려 있던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다시 개시되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발생하진 않았지만 대신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폭발한 헝가리 독립 운동 진압에 러시아군 20만 명이 파병되기도 했다. 이때 맞붙던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헝가리 혁명군이 각기 20만 가량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팽팽하게 유지되던 양측의 균형이 와장창 기울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혁명을 수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혁명 직후 불과 5년 뒤 벌어진 크림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뒤통수를 쳤고 양국 관계는 크게 틀어져 버렸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내란 진압을 지원했으니 오스트리아를 우방으로 만들었다는 인식 하에서 벌인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에 대한 이 폭발적인 확산은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약체화를 초래했으며,반대로 단일민족이었던 독일 연방이탈리아반도가 통일을 향해 달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둘 모두 프로이센의 제관 거부와 탄압, 오스트리아의 간섭으로 민족통일의 움직임이 일단 좌절되었고 통일운동의 주체가 혁명적 부르주아, 지식인 계층에서 통일이란 의제만 받아들이고 다른 사회적, 정치적 자유주의 이념을 수용하는 건 원칙적으로 배격한 보수적인 프로이센, 피에몬테 양국의 국가 지도자 계층으로 이동하면서 19세기 초기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의 보편적 이상주의적 면모는 퇴색되고 대신 국가주의적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기원이 되었다.

유럽 열강 중 영국은 혁명의 여파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었지만 참정권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이 당시 종말을 맞은 뒤 결국 '2개의 국민'을 통합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를 낳았다. 이 때문에 사실상 이 역시 하나의 혁명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아일랜드까지 포함하면 영국에서도 혁명이 터진 게 맞다. 1848년 청년 아일랜드당의 봉기인데 규모야 아일랜드 대기근이 한창이라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는 마당에 혁명이고 나발이고 할 상황이 도저히 안 됐기에 전시대 애국당의 봉기나 다음 세기 부활절 봉기와 비교해도 초라한 규모였지만 이 시기 투옥된 아일랜드인들이 단순한 무력 봉기로는 영국 제국주의에 맞설 수 없는 걸 깨닫고 아일랜드어 부흥 운동을 필두로 문화계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면서 결국 훗날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닦았으니 나름 중요한 사건이다.

7. 여담

  • 카를 마르크스가 주창한 세계 혁명이 연쇄적으로 발발한 첫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본인도 혁명에 전재산을 쏟아부었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만다.


[1] 대중들이 참여하는 혁명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다 처절히 진압된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도 묘사되는 1832년 6월 봉기가 대표적인 사례.[2] 크로아티아는 헝가리 봉기 당시 봉기에 가담하지 않고 합스부르크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였는데 이 공로로 봉기 진압 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크로아티아를 헝가리에서 떼어내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인들과 대타협을 맺고 오스트리아-헝가리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크로아티아가 다시 헝가리의 일부로 귀속되자 크로아티아에서 반발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헝가리 역시 크로아티아와 대타협을 맺고 크로아티아에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했다.[3] 교황령을 전복하고 주세페 마치니를 대통령으로 하는 로마 공화국이 잠시 세워져 교황 비오 9세양시칠리아 왕국으로 도망가야 했다.[4] 영국에서도 당시 차티스트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긴 했는데 별다른 급진주의 경향을 보이지 않고 유야무야됐다. 물론 영국의 높으신 분들은 차티스트 운동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이될까봐 노심초사했다만.[5] 하지만 그 공화정의 대통령은 별명이 왕자 대통령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로, 얼마 안 가 친위 쿠데타로 제2제정으로 전환되었다.[6]루마니아 오라데아.[7] 이후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민갔고 상당수가 남북전쟁에 북부 연방군으로 참전했다. 아예 카를 슈르츠(Carl Schurz)처럼 공화당에 입당해 연방군 장성을 지낸 다음 미국 내무부 장관까지 지내는 경우도 있었고.[8] 열악한 상황에서도 피에몬테군을 무찌른 공로로 전쟁영웅이 되었다. 그에게 헌정된 곡이 그 유명한 라데츠키 행진곡이다.[9] 부르주아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6월 '폭동'.[10] 당연한 일이다. 부르주아들의 입장에서는 핏줄을 잘 타고났다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는 왕족과 귀족들이 꼴보기 싫었겠지만 왕정체제는 어쨌든 세금만 납부하면 자신들의 재산권은 보증해 주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경우 재산권에 심각한 침해가 이루어질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국유화, 토지개혁 등) 시민들을 탄압한 것이다. 이는 훗날 냉전 시기에 서유럽, 미국에서 유학하며 민주주의를 체감한 개발도상국의 엘리트들이 독재 정권을 옹호한 이유와 똑같다.[11] 특히 코슈트가 이끈 헝가리 독립 혁명의 경우 오스트리아의 자력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나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도와주는 바람에 결국 진압되었다.[12] 융커가 권력을 독점한 독일 제국조차도 정치 권력을 융커들이 독점하였을 뿐이지 경제/사회적으로 보자면 부르주아가 헤게모니를 쥐었다. 비록 명목상이지만 사사건건 총리와 대립한 라이히스탁이 좋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