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11:04:46

요제프 라데츠키



Joseph Radetzky (1766 11.2~1858 1.5)

오스트리아의 군인. 나폴레옹 전쟁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라데츠키 행진곡의 바로 그 사람이다.

1784년 입대하여 나폴레옹 전쟁 초기에는 저지대 국가[1]에서 싸웠다. 나폴레옹이탈리아 원정이탈리아 전역에서 프랑스군에 맞섰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05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주둔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809년에는 육군 부원수가 되어 테셴 공작 카를과 함께 바그람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이 전투의 결과 쇤브룬 조약이 체결되어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굴욕을 맛봐야 했으며, 테셴 공작 카를은 은퇴를 강요당했다. 이후 라데츠키는 1813년의 제4차 대프랑스 동맹군 회의에 참가해 라이프치히 전투를 입안함으로써 나폴레옹에게 그 자신과 상관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 빈 회의메테르니히베센베르크 남작을 수행하여 군사 관련 자문을 했으며, 이후 오스트리아의 군제 개혁을 꾀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1831년부터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주둔군 총사령관을 다시 맡았으며, 사르데냐 왕국의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도전이 거세지자, 1848년 쿠스토차 전투에서 사르데냐군을 격멸했다. 이 공적으로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총독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1849년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운동이 중대한 국면을 맞고 있던 시기에 노바라 전투에서 다시 10만의 사르데냐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사르데냐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책임을 지고 퇴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당분간 오스트리아령 북부 이탈리아의 안전은 보장받게 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운동을 철권으로 억압한 보수적 인물로 비판받기도 하며, 역시 보수주의자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라데츠키 행진곡를 작곡하여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인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그에게 비판적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들 항목 참조.


[1] 오늘날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북부 및 독일 서부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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