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7 12:47:08

파울 폰 힌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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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파울 폰 힌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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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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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제국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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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제2대 국가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Paul von Hindenburg
파일:9619e63996693.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cd00> 본명 파울 루트비히 한스 안톤 폰 베네켄도르프 운트 폰 힌덴부르크
Paul Ludwig Hans Anton von Beneckendorf und von Hindenburg[1]
출생 1847년 10월 2일
프로이센 왕국 포젠
(現 폴란드 비엘코폴스키에 주 포즈난)
사망 1934년 8월 2일 (향년 86세)
나치 독일 노이데크
(現 폴란드 오그로지에니에츠)[2]
재임기간 바이마르 공화국 제2대 국가대통령
1925년 5월 12일 ~ 1934년 8월 2일
서명
파일:파울 폰 힌덴부르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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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cd00> 부모 아버지 로베르트 루트비히 폰 힌덴부르크[3]
어머니 루이제 슈비카르트(Luise Schwickart)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배우자 게르트루트 폰 슈페를링(Gertrud von Sperling)
친인척 처조카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학력 육군 유년학교 (졸업)
신장 198cm
종교 개신교 (루터회)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군사 경력
복무 독일 제국 육군
1866년 ~ 1911년
1914년 ~ 1919년
주요 직위 제91보병연대장
제8군단 참모장
제28사단장
제4군단장
제8군 사령관
동부전선 총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최종 계급 원수 (독일 제국 육군, 1914년 진급) }}}}}}}}}
1. 개요2. 생애
2.1.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2.2. 제1차 세계 대전까지2.3. 제1차 세계 대전
2.3.1. 1914년2.3.2. 1915년2.3.3. 1916년2.3.4. 1917년2.3.5. 1918년
2.4. 패전 이후2.5. 대통령
2.5.1. 대통령 당선2.5.2. 제왕적 대통령2.5.3. 재선 성공2.5.4. 파펜 총리2.5.5. 슐라이허 총리2.5.6. 히틀러와 공화국 붕괴
2.6. 죽음
3. 평가4. 선거 이력5. 서훈6. 기타7.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독일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 육군 참모총장[4]으로 전쟁을 지휘하며 국민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전역 후 높은 인기를 기반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바이마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임기 초반 국정 지지도를 바탕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안정화했다는 호평을 받았고 이 덕에 재선에도 성공하여 대통령직을 연임했지만, 두 번째 임기 내내 노쇠한 체력 탓에 정치에 흥미를 잃은데다 전제군주정 향수에 빠져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좌파와 중도 자유주의자들에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임기 중에 나치당의 급부상을 사실상 용인했으며, 그 당을 이끈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나치 독일의 탄생에 일조하고 말았다. 이러한 인연으로 총통 히틀러가 군림한 나치 독일 시기의 라이히스마르크[5] 동전에 얼굴이 새겨지기도 했다.

2. 생애

2.1.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파일:Lt._Hindenburg.jpg
1870년 중위였던 힌덴부르크
보통 20세기의 인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 뿌리는 19세기의 인물이다. 1847년 포젠(오늘날 폴란드 비엘코폴스키에포즈난)에서 태어나, 젊을 적인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이때에 총알이 그의 헬멧을 뚫고 두개골에 주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총알을 맞자마자 의식을 잃었지만,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계속 싸웠다. 그 일로 힌덴부르크는 훈장을 받았다.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도 참전했을 때는 한 대대의 부관이었다. 그의 대대는 메스 근처에 있는 마을을 공격하였는데, 완만한 경사를 오르는 동안 프랑스군의 맹렬한 소총공격을 받았고, 프로이센의 포병은 프랑스의 방어선을 파괴하였다. 이때 그의 연대는 1,096명의 사망자를 냈고, 힌덴부르크는 연대의 부관이 되었다. 이후 소속 연대의 대표로서, 베르사유 궁전에서 있었던 빌헬름 1세독일 제국 선포식에도 참여했다. 둔한 곰 같은 외모와 달리 신경질적이고 눈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군사분야를 제외한 다른 분야(정치 포함)엔 지적인 관심이 전혀 없었다.

2.2. 제1차 세계 대전까지

파일:300px-Paul_von_Hindenbug_als_Generalmajor_im_Generalstab_1897.jpg
1897년, 소장의 힌덴부르크
1873년 일반참모 과정을 교육하는 프로이센 전쟁대학에 어려운 시험을 뚫고 입학하여 3년 내내 높은 성적을 유지하였다. 1878년 대위로 진급하여 제2군단의 참모가 되었다. 이후 그는 결혼하여 두 딸과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나중에 독일 국방군의 중장이 되었다. 1885년 소령진급과 함께 일반참모로 옮겼다. 그의 집단은 슐리펜 백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힌덴부르크는 5년 동안 전쟁대학에서 전술을 가르쳤다. 이후 힌덴부르크는 1891년에는 중령, 2년 뒤에는 대령이되었다. 1896년에는 제 8군단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힌덴부르크는 1900년 중장이 되었다. 5년 후 보병대장으로 마그데부르크에 주둔한 제 4군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1909년 슐리펜은 그를 참모총장으로 추천하지만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가 참모총장이 되었다. 이후 1911년, 37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새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퇴역하였다.

2.3. 제1차 세계 대전

파일:빌헬름 2세와 힌덴부르크.jpg
Deutschlands stolz!
독일의 자랑!
빌헬름 2세와 파울 폰 힌덴부르크.

2.3.1.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하던 1914년에는 이미 퇴역한 상태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다시 현역으로 돌아와 동부전선으로 갔다. 원래 제 8군 사령관은 막시밀리안 폰 프리트비츠였지만, 그가 러시아 제국군의 공세에 당황하여 서프로이센으로 후퇴한다고 했을 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가 그를 해임시켰다. 이후 힌덴부르크가 그의 후임이 되었다. 힌덴부르크는 당시 8군의 참모총장이었던 게오르크 그라프 폰 발더제 소장도 해임시켜 버렸다.

8월 23일, 마리엔베르더에 도착하여 막스 호프만 육군 중령이 이끄는 참모진을 만났다. 호프만은 제8군의 일부를 남쪽으로 이동시켜 진군하는 러시아 제2군의 노출된 왼쪽 측면을 공격할 계획을 힌덴부르크에게 알렸다. 힌덴부르크는 그에 대해 동의하였고, 제 8군 대부분을 남쪽으로 옮겼다. 전투 당일, 제 8군은 러시아 제 2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러시아 제2군을 격파시킨 후 남아있던 제1군을 격파시키기 위해 병력을 이동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제1군마저 제8군에 의해 격파당하였다. 그렇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동프로이센을 지켜냈다.

힌덴부르크는 절대적인 열세였던 타넨베르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개명(改名)한 도시도 있었을 정도.[6]

타넨베르크 전투의 가장 큰 공헌은 막스 호프만 육군 일반참모 중령이 낸 기획안을 참모장이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자신의 작전안을 버리고 과감하게 채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가 아예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었다. 작전 중 파울 폰 렌넨캄프의 이동에 대해 보고받고 루덴도르프가 공포에 질려 작전변경을 고려하고 있을 때, 렌넨캄프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여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해 불안감을 덜어주고 중심을 잡아주는 일은 했다. 이에 대해 바바라 터크먼은 힌덴부르크가 바위처럼 장중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루덴도르프의 불안감을 덜어주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또 자기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장군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루덴도르프가 작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도록 자리를 비켜준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전부터 명성이 높았던 힌덴부르크는 이 두 장교보다 더욱 범국가적으로 알려졌고, 영웅이 필요했던 전시에 국가 영웅으로 추대되었다. 여기서부터 에리히 루덴도르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인연은 뮌헨 폭동까지 이어졌다.

이후 그는 폴란드 비스툴라 강 동쪽에서 있는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힌덴부르크는 먼저 강의 서쪽부터 점령하였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진격할때마다 그들을 저지하였다. 이는 러시아군이 독일 국경을 밟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일로 카이저를 또 한번 놀래켰고, 원수 진급과 함께, 동부전선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타넨베르크의 영웅, 파울 폰 힌덴부르크

2.3.2. 1915년

힌덴부르크는 동부전선에서의 승리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에리히 폰 팔켄하인 보병대장은 이를 반대하였다.[7] 하지만, 힌덴부르크는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함께 빌헬름 2세에게 항의하였다. 카이저는 처음에는 에리히 폰 팔켄하인의 편을 지지했다. 심지어 힌덴부르크를 군법재판에 회부하고 싶었으나, 이미 전쟁영웅이었기에 그러지는 못했다.

힌덴부르크는 다행히 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군을 상대로 엄청난 공을 세웠다. 6월에는 바르샤바 북쪽의 나레프 강을 향해 폴란드에서 전면 공격을 시작하라고 명령받았다. 그렇게 폴란드에서 러시아군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가 회고하기를, 붉은 곰이 독일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라고 표현하였다.

1915년 8월 5일, 힌덴부르크는 힌덴부르크 집단군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다. 힌덴부르크 집단군에는 오토 폰 벨로의 니멘 군, 프리드리히 폰 숄트츠의 제 8군,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의 제 10군과, 막스 폰 갈비츠의 제 12군으로 구성되었다.

1915년 7월 ~ 8월 6일 동부 전선의 오소비에츠 요새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이 장악한 요새를 점령하고자 여러 공세를 퍼부었으나 러시아군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난관에 빠지게 되면서, 제3차 공세를 치를 때 염소 가스를 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3.3. 1916년

1916년 초에는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여전히 참모총장이었다. 힌덴부르크는 팔켄하인을 해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팔켄하인을 해임시키지 않는다면, 자신이 전역한다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 해군 대제독이었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도 사표를 썼다. 여기에 팔켄하인의 주도 하에 연합군 상대로 우세한 교환비를 내겠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베르됭 전투가 양측 모두 엄청난 사상자를 내는 도살장으로 변모하자, 이제 카이저마저 팔켄하인에게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8월 29일, 팔켄하인은 해임당했고, 선전포고를 한 루마니아로 전출되었다. 결국 그는 1916년엔 독일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서 종전까지 재임했다. 이때도 참모차장 겸 병참총감으로 임명된 루덴도르프가 실질적으로 전권을 행사했다.[8]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다양한 활동이 있었다. 1916년 8월 29일 힌덴부르크가 새로운 참모총장, 루덴도르프가 최고 참모차장이[9] 되어 사실상의 군부 독재 체제[10]를 출범할 때, 그는 전시 사회주의에 기초한 힌덴부르크 프로그램을 선언하였다. 이를 통해서 독일 전체의 경제적 산업 전반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독일의 전쟁 조직화가 절정에 달했다. 힌덴부르크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은 것은 타넨베르크 전투와 같은 전투적인 측면도 있지만 참모총장으로서 독일을 위해 노력했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선에서 힌덴부르크는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우크라이나 서남부로 진격할때 독일군은 대부분 베르됭 전투 때문에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지어놨던 난공불락의 참호가 브루실로프의 공세로 인해 뚫렸다. 펠릭스 그라프 폰 보트머의 군대가 조금이나마 저항을 했지만, 러시아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 덕분에 브루실로프는 명장으로 각인되었다. 참모총장이 되며 힌덴부르크는 원수지휘봉[11]을 받았다. 이후 힌덴부르크는 서부전선으로 가서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빌헬름 폰 프로이센을 만났다. 힌덴부르크는 두 왕세자에게 루마니아를 완벽하게 점령하기 전까지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동의하였고, 루마니아는 금방 정복되었다.[12]

힌덴부르크가 사령관이 된 후, 독일 총사령부는 방어에 대한 새로운 지침서를 마련했다. 그 핵심은 1차 방어선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소수의 병력에 의지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반면 주력 보병들은 상대의 포격으로부터 안전한 후방에 대기하다, 적군이 아군의 포격을 받으면서 1차 방어선을 돌파하면, 역공을 펼치는 방식이었다. 당시 1차 방어선에 집중적인 예비포격을 실시한 후 돌격하는 공격전술과 기관총의 위력을 고려하면 매우 효과적인 종심방어전술이었다. 이는 모든 계급이 배웠으며, 이 덕분에 솜 전투에서 베르됭 전투만큼의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독일 총사령부의 사령관이 힌덴부르크가 되며 일상도 달라져, 하루가 루덴도르프와 보고서에 대해 회의로 시작됐다. 루덴도르프는 약 40명의 장교로 구성된 장교들과 회의를 하고, 힌덴부르크는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며, 손님들과 의논하거나, 이야기를 나눴다. 루덴도르프와 다시 의논한 후, 그는 부서장들의 보고를 듣고 방문객들을 만나고 서신 작업을 했다. 정오에 루덴도르프는 힌덴부르크의 중요한 결정이 필요하지 않는 이상, 카이저에게 보고하였다. 이후 힌덴부르크는 육군 장교였던 사위를 포함한 개인 참모진과 점심을 함께 했다. 8시 저녁 식사는 모든 계급의 참모 장교들과 내빈들과 함께 했다.

힌덴부르크에게 1916년의 가장 큰 문제는 탱크의 부재와, 무기의 생산량이었다. 탱크의 부재는 포병을 더 약하게 만들었고, 장비의 부재는 결과적으로 독일 제국군을 약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것의 해결책으로 모든 15-60세의 남성과 여성을 징집하였다. 이렇게 여성도 직업을 갖게 되었다. 이는 힌덴부르크 프로그램이라고 불렸다.

2.3.4. 1917년

1917년, 힌덴부르크는 680,000명의 군인과 53개의 경기관총이 보급된 사단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였다. 힌덴부르크의 측근들은 무제한 잠수함 공격이 영국을 6개월 안에 항복시킬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 총리였던,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잘못된 격침은 미국을 전쟁으로 불러올 수 도 있기 때문이다.[13] 결국,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는 베트만홀베크와 일할 수 없다며 사표를 냈고, 빌헬름 2세는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의 계획대로 베트만홀베크를 교체하였다.

서부전선에서는 힌덴부르크는 많은 사단들을 철수시켰다. 결국 이는 힌덴부르크 라인을 42km나 줄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쉽게 진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는 전쟁을 거의 끝내놨다. 힌덴부르크 집단군과 해군의 합동공격과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은 끝에 가까워졌다. 힌덴부르크는 이탈리아 침공을 준비하였다. 산악 전문가이자, 포병대장이었던 콘타르 크라프트 폰 델멘징엔이 이탈리아의 산악지형을 분석하였다. 열악하다는 분석을 들은 힌덴부르크는 10개의 오스트리아 사단과 7개의 독일 제국군 사단으로 제 14군을 편성하였는데 충분한 항공기를 보유하였다. 14군은 오토 폰 벨로가 맡았다. 14군은 손쉽게 이탈리아 침공을 마친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는 일이 잘 안풀렸다. 영국군, 캐나다군, 미국군의 탱크를 이용한 공세로 인해 후퇴를 계속하였다. 6군이 비미 능선 전투에서 패배하며, 동시에 후퇴를 반복하자, 9군의 사령관이었던 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을 사임시켰다.

이 해는 힌덴부르크가 70세의 생일을 맞은 해이다. 독일 전역에서 성대하게 생일 축하를 받았다. 힌덴부르크는 테오발트가 자꾸 무제한 잠수함 공격에 반대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테오발트를 게오르크 미하엘리스로 교체하였다. 자신의 생일인 10월 2일은 공휴일이 되었다.[14]
파일:pah-39986642.jpg
1917년, 그의 생일에 꽃을 받는 모습

2.3.5. 1918년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서명으로 동부전선에서의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힌덴부르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 동부전선에 있던 숙련된 사령관, 오스카 폰 후티어 등을 서부전선으로 끌어 모은다. 미하엘 작전으로 전세를 바꿔보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유는 느린 이동이었는데, 이동해야 하는 곳이 솜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라서 진군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전세는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3월에서 7월 사이 무려 977,555명의 병사를 잃었다. 병사들은 기아에 시달렸고, 미군의 포로식단에 대한 삐라로 인해 항복하는 수가 많아졌다. 결국 카이저에게 전쟁의 패배를 알렸다. 결국 독일은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였다.

2.4. 패전 이후

결국 독일은 혁명이 일어나 전쟁에 졌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민간정부에게 전쟁 포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군인으로의 자존심 때문에 부관 빌헬름 그뢰너 장군에게 대신 통보하게 한다.

이후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이 통보되자 독일 전역에서 반대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사민당-중앙당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힌덴부르크에게 조약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자문을 구했는데, 그는 거부할 경우 협상국의 군사적 제재를 감당할수 없다고 통보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에서는 "우리는 1차대전에서 내부 배신 때문에 졌다"라는 음모론인 배후중상설이 유행했다. 힌덴부르크 역시 배후중상설을 옹호하여, 1919년에 바이마르 공화국 하원에서 1차대전 전쟁 책임을 묻는 위원회에 출석해 "우리는 내부의 적 때문에 졌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배후중상설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그 덕분에 결과적으로 패전했음에도 그는 독일 민족의 영웅으로 남았다.

베르사유 조약 직전에 군에서 퇴역했고, 그 뒤로 하노버에 거주하였다. 하노버에 거주하면서도 독일 전역을 여행했고, 특히 동프로이센에서는 큰 환영을 받았다. 개인 소유의 농장과 산업자본가들의 후원 덕에 은퇴 후에도 유복하게 생활할 수 있었고, 전후 출판한 회고록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1921년 아내 게르트루트와 사별하는 불행도 있었다.

2.5. 대통령

2.5.1. 대통령 당선

전후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1925년 4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임기 7년)이 되었다. 결과는 박빙이었다. 2차 투표 결과 힌덴부르크(무소속) 48.3% vs 빌헬름 마르크스(가톨릭 중앙당) 45.3%. 후보가 세명이라서 과반 득표는 없이 당선 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전 대통령(임기를 못 마치고 사망)은 바이마르 제헌의회에서 선출된 만큼, 이 선거는 바이마르 공화국 최초의 대선이었다. 1차 투표에서 우파 독일 인민당과 국가인민당의 지지를 받은 카를 자레스 부총리(1차 38.8% 득표)가 2차 투표에서 힌덴부르크를 지지하며 사퇴했다. 그러니까 1차 후보와 2차 후보가 바뀔 수 있었다는 소리다. 여기에 바이에른 인민당의 3.7%가 덧붙여졌다. 이렇게 되자 왕당파에 맞서기 위해 29%를 득표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오토 브라운과 5.8%를 득표한 독일 민주당이 중도 가톨릭 중앙당의 전 총리 빌헬름 마르크스(14.5%)에게 표를 몰아주기로 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치면 우파 42% 대 좌파 + 중도 47.2%로 힌덴부르크가 밀리게 되는데, 힌덴부르크의 인기가 좋아 사민당, 가톨릭 중앙당에서도 표가 꽤 빠져나갔다. 또한 독일 공산당에른스트 텔만이 계속 독자후보로 남으며 7%의 득표를 받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2.5.2. 제왕적 대통령

바이마르 공화국은 의회의 신임을 받는 총리와 내각이 정국을 이끌고 대통령은 원칙적으로 얼굴마담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었다.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초기 5년에는 고령과 귀찮음으로 인한 뒷방노인 역할을 충실히 했고[15] 소수 측근에 의지하는 경향이 짙었다. 측근이래봐야 예전 군 시절 부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비서실장 마이스너[16]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붕괴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가톨릭 중앙당이 주도하던 중도연립내각이 무너졌고, 힌덴부르크는 뒷방 늙은이에서 벗어났다. 당시 총리 헤르만 뮐러는 어떻게 해서든 내각을 유지하려고 대통령에게 대통령 내각[17] 구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뮐러는 육군원수 출신 대통령에게 군비 삭감을 주장해서 단단히 찍혀 있었다. 결국 힌덴부르크는 좌파 사민당 총리의 요구는 쿨하게 쌩까고 대신 중도우파 가톨릭 중앙당 하인리히 브뤼닝을 총리로 임명했다.[18]

바이마르 공화국은 평소 의회가 제대로 작동할 때에는 대통령이 나서서 설칠만한 근거가 없지만, 의회 내에서 고만고만한 의석수로 분산되고 노선 차이로 좀처럼 연립이 구성되지 않으면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이 가동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권한으로는
  • 군 통수권
  • 53조 - 총리 임명권, 내각 장관 임명권 (내각 구성원은 총리가 추천하나 임명권은 대통령이 가진다.)
  • 25조 - 의회 해산권 (60일 이내 재선거를 해야 한다.)
  • 48조 - 대통령 긴급명령권 (의회 동의 없이 긴급명령으로 의회제정 법안을 대신하여 통치)

    • 의회는 60일 내 과반수 의결로 대통령 명령을 무효화할 수 있다.
  • 48조 2항 - 국가 비상 시 대통령 포고령 (헌법상 시민권을 제한 가능)

이러한 권한을 바탕으로 의회에서 선출한 내각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경우 비상대권을 내세운 대통령이 무제한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선거로 뽑는 (어느 정도 권력이 제한되고 세습제는 아닌) 황제였던 것이다.

1930년 9월 총선에서 공화국 체제 전복을 공공연히 선동하는 나치당과 공산당이 원내 2, 3당으로 부상했다. 브뤼닝이 속한 중앙당은 원내 4당에 불과했고, 나머지 중도성향 정당들도 실업구제와 경제정책을 두고 병림픽을 벌였기 때문에 내각에서 내놓은 법안은 번번이 부결당하고 긴급명령 통치가 이어졌다. 원내 1당이던 사민당은 브뤼닝 내각이 무너지면 나치 혹은 공산당 내각이 들어설까봐 내각불신임만은 하지 않았고, 이렇게 불안한 내각이 2년 간 유지된다.

2.5.3. 재선 성공

이 와중에 1932년 봄, 7년 임기의 대통령 선거가 다시 열렸다. 3월에 열린 1차 투표에서는 힌덴부르크가 49.6%로 과반득표에 실패했고, 나치당의 히틀러 30.1%, 공산당 에른스트 텔만은 13.2%로 선전을 거두었다. 4월 초 2차 투표에서 53%로 득표로 당선됐으나, 36.8%를 득표한 히틀러는 사실상 독일의 넘버 투(실질적으로는 넘버 원) 정치인이 되었다. 이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아이디어였다.[19]

여기서 중요한 건 인기가 바닥을 치긴 했지만 원내 1당인 사회민주당에서 후보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민당은 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막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군주제 지지자이며 황제의 충신임을 자처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팔십 먹은 육군원수에게 공화국 지지 세력의 표를 몰아주었다. 한편 힌덴부르크는 나이를 너무 먹은 탓에 은퇴하고 싶어서 불출마를 검토했지만 주위의 등쌀에 밀려 출마한데다가 선거운동도 귀찮아서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난 중도 좌파의 연립 후보가 아니다." 라고 발언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은 시대착오적인 긴축 정책으로 경제침체가 심화되고 인기를 잃으면서 '기아(飢餓)내각', '기아 총리'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가 떨어졌고, 좌파 사민당과 연계되는 모습을 보여 대통령의 신임도 잃었다. 결국 브뤼닝은 1932년 경질당하고, 힌덴부르크는 국방부 내 '정치군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추천으로 중앙당의 프란츠 폰 파펜을 대통령 내각의 총리로 임명한다.

이때 히틀러를 견제하기 위해 많은 방법을 썼는데, 그 중 한 가지는 베르너 폰 프리치를 참모총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리치는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2.5.4. 파펜 총리

총리직에 임명된 프란츠 폰 파펜은 그때까지 듣보잡에 무식하고 하찮은 인물로, 총리가 되기 전에도 "뭐 이딴 모자라는 걸 총리로 추천하냐?" 는 물음에 슐라이허가 "그는 머리가 필요 없어! 모자니까!"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파펜을 저평가한 것이 슐라이허의 실수로 드러나는데, 파펜은 힌덴부르크의 비위를 맞추는 데 어느 누구보다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것이었다. 파펜은 자기가 속한 당이던 가톨릭 중앙당에 알리지도 않고 총리를 수락했기 때문에 국방부의 슐라이허와 죽이 맞아 전임 브뤼닝을 중상모략했다고 의심받았고, 결국 현직 총리일 때 자기가 속한 당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 때문에 파펜 내각은 출범하자마자 불신임 맞고 쫓겨날 판이었으니, 파펜은 힌덴부르크에 적극 기댔으며 원내 제 2당이었던 나치당에 손을 벌려볼 생각을 한다. 히틀러는 여기서 유감없이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는데 나치 돌격대 활동금지 해제, 의회해산 및 조기총선을 받아주면 협조하겠다고 응답한다.

파펜은 힌덴부르크의 동의를 받아서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 들인다. 우선 정치깡패 집단인 독일 공산당 '붉은전사동맹'과 나치당 '돌격대(SA)'의 유혈 충돌을 구실로 대통령 비상대권을 발동해 프로이센 정부는 치안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 구실로 주정부를 해산하고 중앙정부 직속으로 두는 실책을 터뜨렸다.(프로이센 쿠데타) 독일은 제2제국 또는 그 이전부터의 전통을 중시해서 지방자치(현재도 연방국가)이고 경찰권은 중앙정부 내무부가 아닌 지방정부에 속하는데,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프로이센 주는 18개 주 가운데 1주에 불과했지만 실상은 수도 베를린을 포함해 북독일 대부분과 독일 전체 인구, 면적의 60%를 차지했다. 프로이센 주정부는 사회민주당 주도의 연정이 정권을 잡았던, 한창 막장 테크 타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최후의 보루였는데, 그 보루가 무너진 것이다.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율(의회 608석중 230석 차지)로 원내 제1당에 등극하고 독일 공산당까지 약진하면서 공화국 중도파는 완전 몰락한다. 나치당과 공산당을 합치면 원내 과반수를 가뿐히 넘겼다.[20](공산당 89석, 유일한 공화국 수호세력인 사민당 133석)

나치당의 약진에 히틀러는 "민주주의 다수결 원칙 몰라?"라고 하면서 총리직을 요구했고, 파펜은 부총리를 제안하면서 달래보려 하지만 히틀러가 거절한다. 뒷방 노인이던 힌덴부르크는 오랜만에 등장하여 히틀러와 면담을 통해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했다.

힌덴부르크 역시 히틀러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에게 총리직을 줄 생각 역시 없었다. 거기다가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에게 도전한 것에 대한 반감까지 있었는데, 1925년 투표보다 여유 있게 이기긴 했지만 '보헤미아 상병'[21] 주제에 감히 주제넘게 맞먹으려 든 탓도 있고 무엇보다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당 선전에서 힌덴부르크를 유대인의 하수인이라며 인신공격을 심하게 한 게 큰 원인이었다. 힌덴부르크는 총리직을 요구하는 히틀러에게 "사흘 안에 의회 과반수를 구성해 봐라"라며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비꼬았다. 물론 나치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히틀러의 요구는 '전부 아니면 전무'였고 괴벨스의 표현대로 연정으로 바이마르 체제에 타협하는 더러운 협잡질은 거부했다. 나치당 내부에서 연정으로라도 권력을 잡자던 그레고어 슈트라서도 숙청되었다.

하지만 파펜 내각 역시 버틸 수가 없었다. 파펜이 인기라도 있으면 모를까 경제위기에 프로이센 주정부 폐쇄와 노동자 임금 삭감 등 친기업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 여기에 더해 히틀러의 복수(?)까지 합쳐지면서 개원하자마자 내각불신임안에 직면했다. 한편 힌덴부르크는 개원하자마자 대통령의 의회해산권을 발동해 재선거도 안하고 대통령 내각으로 파펜 내각을 유지하려 했다.[22] 그러나 제국의회 의장 괴링이 선수를 쳐 내각불신임안을 상정하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파펜 내각은 불신임 512명, 신임 42명로 압도적인 표차로 불신임을 당하게 된다. 불신임안 통과를 예상하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의회 해산 명령이 먼저 발의 되었다는 핑계로 일단은 버텼지만[23]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어쨌든 의회가 해산되었으니 재선거가 실시되고 득표율과 의석이 좀 줄긴했지만 또 나치당이 원내 1당을 차지했는데, 584석 중 나치당 196석, 공산당 100석으로 또 공화국 반대세력이 과반을 넘겼다.

그리고 이 때 국방장관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에게 과도내각 총리로 근근히 버티던 파펜을 포기하라고 공작하였다.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에게 의회에서 압도적으로 불신임한 총리를 의회 해산하고 재선거없이 비상대권으로 통치하면 곳곳에서 폭동이 벌어질 것이고 병력이 10만에 불과한 국가방위군은 이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보고하여 파펜을 포기하도록 했다.

결국 힌덴부르크는 파펜에 대한 신임을 거두었고, 파펜은 총리직을 사임했다. 사임하고 나가는 파펜을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리고[24] 자신의 사진이 담긴 액자에 평소엔 귀찮아서 쓰지도 않는 친필편지를 써서 배웅해줬다고 한다. 어쨌든 새로운 총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의회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총리를 임명하면 내각 불신임을 막을 수 없게 되자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와 다시 협상을 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바이마르 체제를 부르주아 강점기 체제로 선언하며 바이마르 시대 모든 내각에 대하여 불신임안을 발의 했기에 나치당이 실질적인 캐스팅 보트 권한이 있어서 히틀러의 동의 없이는 어떤 인사도 힌덴부르크 권한대로 임명이 불가능 했다.

히틀러는 자신을 총리로 임명해달라는 주장을 반복했고, 그것도 대통령 비상대권을 쓸 수 있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로 자신을 만들어주기를 요구했다. 힌덴부르크와 참모들의 반응은 이뭐병. 결국 다시 결렬된다. 이에 대통령은 히틀러에게 신문에 공개적으로 보낸 편지에서 의회 내각과 대통령 내각의 차이의 권한 차이를 분명히 한 뒤,
독일 국민에게 몇 번이나 자신의 배타성을 강조한 당의 지도자이며, 대통령 개인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치 경제적 조치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사람에게 대통령의 권한을 주겠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 당신이 이끄는 대통령 내각이 결국은 독일 국민들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증폭시킬 뿐인 일당독재가 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하지 않을수 없다.

대통령은 자신이 한 맹세나 양심에 비추어 이 생각을 도저히 바꿀 수 없다.

이런 글을 남긴다. 이 편지의 내용이 언론에 나오자 사회민주당은 두 팔 벌려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고 한다.

2.5.5. 슐라이허 총리

힌덴부르크는 일단 총리로 정치군인 슐라이허를 임명했다.

슐라이허는 나치에 대해선 이전 브뤼닝 총리와는 달리 돌격대 금지령에 반대했고, 나치를 재무장에 필요한 인적자원으로서 긍정적으로 보았다. 다른 우익 무장집단과 달리 돌격대의 연령대가 낮았기 때문에 군비제한이 걸린 바이마르 공화국에선 예비군으로 활용하고 나중에 군비제한이 풀릴 경우 급속히 군대를 확장할 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의회는 개원했지만, 슐라이허도 나치당 협조 없이는 내각 불신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슐라이어는 히틀러를 설득하다가 안되니 나치당 2인자였던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구워 삶아볼까 했는데, 발각되어서 슈트라서만 날아간다. 오히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히틀러 허락없이 정권참여 협상을 하다가 히틀러에게 굴복하고 당직 사퇴 후 자숙하는 의미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면서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하고 1934년 장검의 밤 때 슐라이허 부부와 함께 살해된다.

이 와중에 파펜은 자신이 짤린 배후에 슐라이허가 있다고 감으로 알아챘다. 이에 대해 이를 갈던 파펜은 히틀러와 접촉을 했는데, 슐라이허는 자기가 뒷공작을 해놓고도 순진하게 파펜이 자기 대신 히틀러가 새로운 내각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는 줄 알았다.

슐라이허의 그 짧은 임기에도 동부 융커들이 몰려와서 힌덴부르크한테 총리가 농업 보조금 깎아서 못살겠다고 고자질 크리에, 의회에선 대통령 측근들 농업보조금 스캔들이 터졌다. 의회는 개원 전인데도 관련 청문회가 열려서, 힌덴부르크는 정치 사찰과 뒷공작에 능한 슐라이허 총리가 이런 것도 못 막는 건지 아니면 대통령을 압박하려고 일부러 '안' 막는 건지 의심했다. 힌덴부르크의 마음은 점점 히틀러에 기울었다. 이미 히틀러에 넘어간 대통령 비서실장 마이스너와 아들 오스카까지[25] 히틀러를 옹호했다. 슐라이허는 그래도 군인이라고 힌덴부르크에 복종하였지만[26] 군부에서 슐라이허가 쿠데타를 기도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리자 이에 넘어간 힌덴부르크가 격노해, 이미 대세는 결정났다.

힌덴부르크는 1월 26일까지 슐라이허 라인의 육군사령관 폰 함머슈타인에크보르트 장군에게는 "여러분은 내가 보헤미아 상병을 총리로 임명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라고 낚시질을 했지만 이미 슐라이허를 짜르는 것은 1월 중순부터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다만 파펜을 총리로 하려고 하는데 파펜이 자꾸 사양하면서 히틀러를 총리로 추천하고, 아들과 마이스너가 계속해서 설득하던 중이었을 뿐이다. 결국엔 1933년 1월 28일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의 권고에 의해 사임한다. 사퇴 전날 이렇게 통보했다.
"자네도 군인이니 상관의 권고가 무슨 뜻인지 알겠지? 자네가 사퇴하길 권고하네!"

이때 슐라이허가 마지막으로 사임원을 제출하러 갔을때 힌덴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무덤에 한 발을 디디고 있다. 후에 천국에 가서도 이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러자 슐라이허는 "각하, 저는 각하께서 이런 배신을 저지르시고 나서 과연 천국에 가시게 될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사실 믿었던 군부도 슐라이허 편만은 아니었다. 히틀러가 집권하길 바라는 나치빠 군인들도 그 당시에는 상당했다고 한다. 슐라이허의 후임 국방부 장관[27]이었던 블롬베르크는 1월 초에 힌덴부르크와의 만남에서 슐라이허 내각이 나치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는 것 때문에 군부가 불만이라고 터놓을 정도였다. 히틀러도 국방부 속에 깊숙히 침투한 나치 동조자들을 통해서 슐라이허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손금 보듯이 알고 있었다.

2.5.6. 히틀러와 공화국 붕괴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도 이 인간이 너무 위험하다 생각했는지 비상대권을 주지 않는 의회내각 총리로 임명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히틀러와 파펜은 원내 과반수를 위해 연립정권을 수립하려 노력하는 척했다. 하지만 당시 중앙당은 연립정권 참여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가톨릭 중앙당이 참여한다는 것부터 훼이크였다.

힌덴부르크는 나중엔 원내 연립내각 구성에서 연정에 참여하기로 한 가톨릭 중앙당이 무리한 요구로 결국 참여하지 않았다고 보고해도 의회 해산에 질리고 귀찮아서였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나치당 혼자서 1/3은 확보한 이상 내각 해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든 일곱살의 노인 대통령의 마지막 1년 8개월은 그야말로 히틀러의 팬 생활이었다. 1월 30일 히틀러의 총리 취임 기념식에서 돌격대의 행진을 보면서 흐뭇해(?) 했다고 한다. 돌격대가 풍악을 울리는 소리에 지팡이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흥얼거렸고 평소 군복 코스프레 주정뱅이 난봉꾼 집단으로 평가했던 돌격대의 행진을 보면서 "우리가 러시아에서 포로를 저렇게 많이 잡았었나?" 하고 농을 했다고...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에 만족하고 있었고 파펜까지 버려졌다.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하고 한달 뒤 1933년 2월에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히틀러가 공산당 퇴치용이라며 비상대권을 요구하자 대통령 권한을 발동, 기본권 제한에 동의했다. 이어진 관권 선거를 용인했다. 그리고 1933년 3월에 히틀러와 나치당은 정부에 입법권을 주는 수권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는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기꺼이 법안에 서명하였다.

힌덴부르크는 나치당의 정국 운영을 반가워했다. 노쇠한 힌덴부르크는 바로 전 해인 1932년 벌어진 선거에 지쳐있었다. 3월 대통령 1차 투표, 한달 뒤 2차 투표, 5월 프로이센주 총선, 의회 해산 후 7월 전국 총선, 또 의회 해산 후 11월 총선으로 복잡한 정국 속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더 이상 선거를 치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뻐했던 것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기존 정치인들과 달리 화끈하게 말 많은 다른 좌파 사민당과 공산당, 시끄러운 우파 자유주의자까지 일망 타진하고 재무장을 추진한다는 점도 육군원수 대통령 마음에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국은 안정되었고, 무엇보다 자기 소유의 동프로이센 노이데크[28] 농장을 자주 갈 수 있던 것에 만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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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 12일, 히틀러와 악수하는 힌덴부르크이다. 오른쪽에는 자신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가 있다. 전쟁 기념일을 퍼레이드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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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와 상병[29]의 악수> 힌덴부르크는 198cm의 장신이었다. 참고로 히틀러의 키는 175cm.

괴벨스가 기획한 1933년 3월 21일 '포츠담의 날'[30] 사진이다. 독일 국민들에겐 구세대(독일 제국)[31]신세대(나치 독일)가 타협하고 화합해서 14년 동안의 혼란을 끝내고 새 시대로 나가는 희망을 상징하는 사진이었다. 사진과 우표로 인쇄되어 널리 퍼지고 나치 정권의 홍보용으로 많이 쓰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힌덴부르크가 언제나 히틀러 말을 잘 들었던 것은 아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와 나치가 유대인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까지 박해하는 것은 태클을 걸었고, 나치 돌격대가 노골적으로 독일 군부를 적대하자 군부의 입장을 히틀러에게 전달해 그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에 히틀러는 1934년 6월 30일 돌격대를 숙청한 장검의 밤으로 화답했고, 군부와 나치는 타협에 성공했다. 장검의 밤은 법률과 사법체계를 완전무시한 초법적인 사태로서 한때 힌덴부르크가 총리에 임명한 슐라이허 장군까지 살해되었는데도 힌덴부르크는 "단호한 행동과 용감한 개인적 개입으로 반역의 씨를 미연에 제거하고 독일 국민을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구한다"고 감사를 표하며 '대역죄'를 진압한 것을 축복했다.

2.6. 죽음

1934년 8월 2일에 동프로이센의 노이데크에 있는 자택에서 죽었다. 죽기 하루 전 전에 자기 집을 방문한 히틀러를 보고는 비몽사몽간에 빌헬름 2세가 온 줄 알고 황제 폐하라고 불렀다. 최후의 유언은 "황제 폐하, 나의 조국(Mein Kaiser, Mein Vaterland)."

파일:파울 폰 힌덴부르크 사망 직후.png
사망 직후의 힌덴부르크.

파일: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례식.png
힌덴부르크의 장례식

생전 힌덴부르크는 입헌군주제의 형태로 독일 군주제를 복귀시키고 싶어 했고 프로이센 왕족이 왕위에 오르기를 바랐으나, 대통령 취임 시 바이마르 헌법을 지키겠다고 선서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을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말년 치매설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하일 히틀러" 라는 낭설이 있는데 카더라와 달리 1934년 노환으로 죽을 때까지 제정신을 유지했다고 한다. 최소한 히틀러한테 정권을 넘길 때까진 정신 건강은 멀쩡했다.[32]

유언장은 죽기 4달 전인 4월부터 작성하여 독일 국민에게 한 통, 수상 히틀러에게 한 통을 썼는데 히틀러가 파기했다. 모든 증언을 신뢰하긴 어렵지만 유일한 증인인 파펜의 증언으론,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치는 것에 반대하며 입헌군주제를 채용하길 바랐다고 한다. 또 히틀러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치 정권에 대해서 업적의 일부분을 인정하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 이후 잘 알려진 대로 히틀러는 유언을 빙자해 대통령직을 겸직, 퓌러가 되었다. 이후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가 나중에야 유서를 공개했는데 힌덴부르크가 즐겨 쓰던 문체와 너무 다르고 힌덴부르크가 언제나 언급하던 신이나 황제에 대한 언급도 없어서 조작이라는 의심을 강력하게 받았다.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는 앞서 히틀러를 보헤미아 상병이라고 부르며 꺼림칙해하던 아버지를 설득해서 총리가 되게 하는 데 관여했다. 오스카는 원래 아버지만도 못한 능력을 가진 주제에 대통령 아들로 많은 걸 누린다는 자격지심이 있었고, 히틀러가 협조할 경우 여러 혜택을 준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이었다. 부친이 사망한 이후에도 히틀러의 총통 겸직 국민투표에 대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독일인들이 찬성 투표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물론 국민투표가 끝나고 나선 무시당했고, 나치 정권 하에서도 동프로이센 포로수용소 소장에 그치며 존재감은 없었다. 이후 은퇴하여 아버지가 사망했던 노이데크의 장원에서 은퇴생활이나 즐기다가 소련군이 침공하자 피난해야 했고[33],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힌덴부르크의 장례식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힌덴부르크는 자신의 농장인 노이데크에 묻히길 원했던 자신의 뜻과 달리 정치적 선전을 위해 타넨베르크 전적지 기념관에 묻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소련에 의해 파헤쳐질 걸 우려한 아들 오스카가 니더작센주로 피난갈 때 유골도 함께 가져갔다. 이후 미군의 보호로 오늘날 헤센주에 위치한 마르부르크의 성 엘리자베트 성당[34]에 묻혔다.# ##

3. 평가

현대 독일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강하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는 것에는 반대는 했으나 기어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고 편을 들어줬으니 큰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또한 배후중상설을 퍼뜨린 주범 중 한 명으로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흔들고 독일의 민주정이 무너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재 그의 무덤에는 변변한 조명 시설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본래 고향에 묻혔으나, 소련군이 침공할 때에 그나마 예우한다고 서독으로 이장했고 현재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지는 않는다. 일찍 죽진 않았지만, 자신의 눈으로 조국에 닥쳐온 참화를 보기 전에 죽은 게 개인적으로 다행일 것이다.

힌덴부르크의 이름을 딴 거리와 지명은 2차 대전 이후 대부분 개명되었고 2022년 2월에도 트리어힌덴부르크 거리가 개명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이전에 워낙 도배되다시피 했던지라 일부는 잔존해 있다. 예를 들면 독일 각지의 힌덴부르크 거리들은 물론 북해힌덴부르크 댐[35], 함부르크힌덴부르크 공원, 힐데스하임힌덴부르크 광장 등.

그는 군인으로서 에리히 폰 팔켄하인처럼 철저한 군국주의자였다. 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부모님에게 이런 편지를 썼는데 "나는 이 밝은 미래를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군인으로서 전쟁은 정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쓰러지면 그것은 가장 명예롭고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이는 그가 군국주의자였음을 알려준다. 다만 독일 제국 자체가 철저히 군국주의적인 사회였음을 감안한다면,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36].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25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

[[무소속(정치)|
무소속
]]
14,655,641표 (48.3%) 당선(1위) 초선
1932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 19,359,983표 (53.0%) 재선

5. 서훈

6. 기타

키가 198cm인데 독일 역대 군주, 대통령 총리들 중 키가 가장 크다. 2위는 193cm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헬무트 콜.

이따금 잠언집이나 미담집에 힌덴부르크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칭송이 있는데, 그의 실체를 아는 독자들은 실소 할 수 밖에. 훌륭한 장군이었고 자신의 정신건강은 좋았을 지 모르나, 정치인으로서는 무능하고 독단적인 인물이었다.

7. 대중매체

히틀러: 악의 탄생이란 2부작 TV 드라마에서는 명배우 피터 오툴이 힌덴부르크 역을 맡았다. 건강이 그리 좋지 못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37], 마치 서서히 무너져 가던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상시킨다. 자신을 총리에 임명시켜 달라는 히틀러의 요구에 "자네를 임명하면 내가 어떻게 신을 만나겠나?"라고 반발하자, 히틀러는 "저를 총리에 임명시켜 주시지 않겠다면, 어떻게 독일 국민들을 만나시겠습니까?"라고 응수하고 물러나오는 자리에서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 신은 무슨. 이제 곧 만나게 될텐데."라고 비웃는다. 종국에는 사망하고, 히틀러는 그의 장례식에서 나치 독일의 시작을 알린다[38].

2017년에 개봉한 영화 원더우먼에선 더 이상 답이 없는 전쟁 상황을 인지하고, 연합국과의 종전 협정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등장. 그러나 이에 반발한 루덴도르프에게 끔직하게 살해당한다. 작중 이름이 불러지지 않아, 힌덴부르크가 영화에 나온 걸 모르는 이가 많다.#

붉은 남작을 주인공으로 한, 동명의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처음에는 주인공 리히트호펜에게 여러가지 조언도 해주고, 빌헬름 2세에게 훈장도 받게 해주면서 호감을 표하지만, 전쟁에 냉소적인 그에게 실망하고는 건방지다며 내쫓는다.

2차 대전이 배경인 전략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나치 독일이 대독일국을 형성할 수 있는데, 대독일국을 선포하면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의 이름을 힌덴부르크로 바꿔버린다.

'The Great Martian War'라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에선 독일 제국이 화성인의 침공으로 멸망하자, 직접 잔존 제국군과 난민들을 규합해 벨기에를 넘어 연합군에 합류한다. 덕분에 병력 부족으로 쓸려나가기 직전이었던 프랑스와 벨기에의 구원자가 되었다.[39] 힌덴부르크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몇 안되는 작품.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주인공이 빙의한 히틀러에게 호감을 느껴서, 대통령이 된 이후 파펜슐라이허를 건너뛰고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고 원 역사보다 더욱 나치당에 힘을 실어준다. 주인공도 나름 힌덴부르크를 고평가해서, 마지막 유언을 제외하고는[40]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었다.


[1] 베네켄도르프 가와 힌덴부르크 가가 통합한 가문으로, '폰 베네켄도르프 운트 폰 힌덴부르크'가 통째로 하나의 이다.[2] Ogrodzieniec, 힌덴부르크 가문의 영지였다.[3] 풀네임은 로베르트 루트비히 폰 베네켄도르프 운트 폰 힌덴부르크 (Robert Ludwig von Beneckendorff und von Hindenburg).[4] 독일 제국 육군의 최고사령관은 황제가 맡았다.[5] 나치 독일 시기에 통용된 화폐 단위를 일컫는다.[6] 오버슐레지엔에 있는 자브제(Zabrze). 1915년 빌헬름 2세의 칙명으로 Hindenburg in Oberschlesien(약칭 Hindenburg O.S.)으로 바뀌었다. 1945년 이후에는 폴란드영토로 넘어가 다시 자브제로 불린다.[7] 팔켄하인은 서부전선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소모전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베르됭 전투이었다.[8] 하지만 루덴도르프는 1935년에 그에 대해 "사령관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대부분의 결정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아무도 그를 깨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9] 루덴도르프도 실권자로 만들려고 새로운 직책을 만들었다.[10] 이때 이미 빌헬름 2세는 실권을 상실하고 뒷방 늙은이가 되어버렸다.[11]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모든 원수가 원수지휘봉을 갖지는 못하였다.[12] 아이러니한게, 루마니아를 점령시킨 1등공신 중 한명이 참모총장에서 몰아내려했던 팔켄하인이라는 것이다.[13] 베트만홀베크는 꽤 비관적이기로 유명한데, 그의 비관적인 추측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도 놀라운 우연이다. 브란덴부르크가 러시아의 땅이 될줄을 예상했고, 미국의 참전까지 예상한 사람이다.[14] 이는 카이저만이 누릴 수 있었던 명예였다.[15] 그는 제정 시절 육군 장군이라 정치에 대해 그렇게 잘 몰랐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도 처음엔 거절했다가 선거로 뽑는 군주(대통령)의 자리를 황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황제의 충신 힌덴부르크가 유지해줘야 한다는 설득 때문이었다.[16] 사회민주당 출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 시절부터 비서실장이었다. 나치 등장 후 듣보잡이 되어 버렸지만 히틀러 총리 임명에 큰 역할을 한다.[17] 의회에서 내각 선출이 안될 경우 헌법상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임명한 내각.[18]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그전까지 헤르만 뮐러와 힌덴부르크의 사이는 개인적으로 꽤 괜찮았고, 힌덴부르크는 헤르만 뮐러가 자신의 총리 중 최고라며 치켜세운 적도 있었다.[19] 히틀러는 바이마르 체제를 혐오한데다가 당선 가능성이 없는 대통령 선거 출마가 무익하다 생각했으나, 괴벨스는 힌덴부르크의 반대항으로 출마하는 것 자체가 선전효과가 있다고 보았고, 괴벨스의 식견은 전적으로 옳았다.[20] 나치당과 공산당은 공화국 체제를 끝장낸다는데는 목표가 일단 같았기 때문에 정권을 잡기 전 어떤 내각이 들어서건 내각불신임을 할 태세였다. 나치당은 1당으로 합법적으로 정권 획득이 가능해졌으니 총리직 내놓으라는 속셈이었고, 공산당은 내각이 무너져 몇달 간 계속해서 정치적인 공백이 이어지면 가뜩이나 대공황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체제전복이 용이하다고 판단했다.[21] 현재 영어권에서 조차 보헤미안이라면 떠돌이에 근본없는자라는 멸칭이다. 당시 독일어권에서도 비슷한 뜻[22] 사실 헌법 위반이다. 헌법에 대한 맹세드립으로 황제를 못 모셔(?)오는 힌덴부르크가 얼마나 파펜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23] 실제로 불신임안보다 의회 해산명령이 먼저 도착했으나 국회의장 헤르만 괴링이 파펜을 망신 주려 무시하고 불신임안을 처리했다.[24] 후에 파펜이 회상록에서 '맹세코 힌덴부르크의 눈물을 봤다'고 주장했다.[25] 오스카는 슐라이허와 원래 친한 편이었는데 슐라이허가 총리가 되고 나서 고개가 뻣뻣해진데다가 "헌법에도 없는 대통령 아들 주제에 너무 나서는 거 아니냐." 라는 '충고'에 격분해서 슐라이허와 원수가 된다.[26] 부하가 은근히 쿠데타를 권유하자. "그는 원수고 나는 장군이야. 복종하라고 배웠네." 라고 답했다고 한다.[27] 슐라이허는 총리, 국방부 장관, 프로이센 경찰청장을 겸임했다.[28] 현재의 폴란드 오그로제녜츠 마을이다.[29] 히틀러는 바이에른 왕국군 예비역 상병이었다.[30] 독일 군국주의의 상징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은 상수시 궁전이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 있다. 상수시 궁전 내부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해가 있는 가르니송 교회에서 행사가 열렸다.[31] 힌덴부르크는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이긴 했지만 한평생 독일 제국에서 공적을 쌓았고, 스스로도 제국 체제를 더 선호했다.[32] 헨리 애슈비 터너 2세 예일대 역사학 교수 <히틀러의 30일> 저술.[33] 노이데크의 저택은 소련군이 불태워 버렸다. 또 1950년대에 폴란드 당국이 이어서 노이데크의 장원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34] 헤센 가문의 모계 시조격인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성녀 에르제베트(언드라시 2세의 딸)를 위해 봉헌된 성당.[35]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본토와 쥘트 섬을 잇는 제방. 철로도 있다.[36] 심지어 은행털이범이나 사기꾼이 군복을 입고 은행에 들어가서 아무런 담보도 없이 돈을 대출해 달라고 요구만 해도 거의 무조건 돈을 그대로 대출해 줄만큼, 독일 제국은 군인이 철저하게 우대를 받았던 사회였다.[37] 등장하는 장면마다 몸을 조금씩 떨고 있고, 말도 웅얼거린다.[38] 이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묘비 위에 세워진 나치 독일을 연상하게 한다.[39] 원역사를 생각하면 엄청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40] 빌헬름 2세를 복위시켜 달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