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8 22:23:56

리스토 뤼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1739, #002b6c 20%, #002b6c 80%, #001739);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퀴외스티 칼리오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리스토 뤼티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우르호 케코넨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마우노 코이비스토 마르티 아티사리 타르야 할로넨 사울리 니니스퇴
제13대
알렉산데르 스투브 }}}
}}}}}}
리스토 뤼티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color: #80c1f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라우리 잉그만 카를로 카스트렌 유호 벤놀라
제6대 제5대² 제7대 제8대 제7대²
라파엘 에리히 유호 벤놀라 아이모 카얀데르 퀴외스티 칼리오 아이모 카얀데르
제3대² 제9대 제8대² 제10대 제11대
라우리 잉그만 안티 툴렌헤이모 퀴외스티 칼리오 배이뇌 탄네르 유호 수닐라
제12대 제8대³ 초대² 제11대² 제13대
오스카리 만테레 퀴외스티 칼리오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유호 수닐라 토이보 미카엘 키비매키
제8대⁴ 제7대³ 제14대 제15대 제16대
퀴외스티 칼리오 아이모 카얀데르 리스토 뤼티 요한 빌헬름 랑겔 에드빈 링코미에스
제17대 제18대 제2대² 제19대 제20대
안티 하크첼 우르호 카스트렌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마우노 페칼라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1대² 제20대²
우르호 케코넨 사카리 투오미오야 랄프 퇴른그렌 우르호 케코넨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
제24대 제25대 제26대 제20대³ 제24대²
비에노 유시 숙셀라이넨 라이너 폰 피안트 레이노 쿠스코스키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 비에노 유시 숙셀라이넨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제31대
마르티 미에투넨 아티 카랼라이넨 레이노 라그나르 레토 요한네스 비롤라이넨 라파엘 파시오
제32대 제33대 제28대² 제33대² 제31대²
마우노 코이비스토 테우보 아우라 아티 카랼라이넨 테우보 아우라 라파엘 파시오
제34대 제35대 제27대² 제34대² 제32대²
칼레비 소르사 케이요 리나마 마르티 미에투넨 칼레비 소르사 마우노 코이비스토
제34대³ 제36대 제37대 제38대 제39대
칼레비 소르사 하리 홀케리 에스코 아호 파보 리포넨 안넬리 얘텐매키
제40대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마티 반하넨 마리 키비니에미 위르키 카타이넨 알렉산데르 스투브 유하 시필래
제45대 제46대 제47대
안티 리네 산나 마린 페테리 오르포
핀란드 대통령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2004년 핀란드의 공영방송 YLE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리스토 뤼티 우르호 케코넨 아돌프 에른로트 타르야 할로넨
6위7위8위9위10위
아르보 윌푀 미카엘 아그리콜라 장 시벨리우스 알렉시스 키비 엘리아스 뢴로트
11위 ~ 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마티 뉘캐넨 배이뇌 밀뤼린네 빌레 발로 랄리 배이뇌 린나
16위17위18위19위20위
리누스 토르발스 스페데 팔사넨 펜티 린콜라 토베 얀손 베이코 후르스티
21위22위23위24위25위
파보 누르미 민나 칸트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요한 빌헬름 스넬만 헤르타 쿠시넨
26위27위28위29위30위
아르토 사리 미나 실란페 베이뇌 탄네르 루키나 하그만 크리스트프리드 가난데르
31위32위33위34위35위
미카 발타리 미카 해키넨 알바 알토 에우겐 샤우만 타피오 라우타바라
36위37위38위39위40위
에이노 레이노 야코 푀위리 오토 빌레 쿠시넨 유이케 레스키넨 안데르스 쉬데니우스
41위42위43위44위45위
우노 퀴그나에우스 야리 리트마넨 카트리 헬레나 칼라오야 파니 루코넨 안넬리 예텐메키
46위47위48위49위50위
카를 파체르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마우노 코이비스토 헬레네 셰르프베크 레이노 헬리스마
51위52위53위54위55위
요르마 올릴라 라우리 퇴르니 게오르크 헨리크 폰 브라이트 아른트 페쿠리넨 타우노 팔로
56위57위58위59위60위
악셀리 갈렌칼렐라 요한 루드비그 루네베리 퀴외스티 칼리오 파보 루오찰라이넨 라르스 레비 라에스타디우스
61위62위63위64위65위
라세 비렌 헬비 시필래 위리외 칼리넨 아르투리 일마리 비르타넨 날스아슬락 발케아패
66위67위68위69위70위
아르미 쿠셀라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아키 카우리스매키 칼레 패탈로 파보 리포넨
71위72위73위74위75위
아우로라 카람친 사카리 토펠리우스 알리 바이티넨쿠이카 시모 해위해 야코 일카
76위77위78위79위80위
아르토 야바나이넨 레나 팔로티에 카리타 마틸라 베이코 하쿨리넨 헬레 카닐라
81위82위83위84위85위
올라비 비르타 하누 살라마 어윈 굿맨 라일라 키누넨 아르비 린드
86위87위88위89위90위
키르스티 파카넨 라린 파라스케 마틸다 브레데 에르노 파실리나 안티 투이스쿠
91위92위93위94위95위
아니키 태흐티 엘리사베트 레흔 에사 사리넨 마이유 게브하르드 칼레비 소르사
96위97위98위99위100위
악셀 아이로 라우리 윌뢰넨 라이모 헬미넨 아르미 라티아 베이코 시니살로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colbgcolor=#002b6c><colcolor=#fff>
핀란드 제5대 대통령
리스토 헤이키 뤼티
Risto Heikki Ryti
파일:Risto_Heikki_Ryti.jpg
출생 1889년 2월 3일
러시아 제국 핀란드 대공국 휘티넨[1]
사망 1956년 10월 25일 (향년 67세)
핀란드 우시마 헬싱키
재임기간 제14대 총리
1939년 12월 1일 ~ 1940년 12월 19일
제5대 대통령
1940년 12월 19일 ~ 1944년 8월 4일
서명
파일:리스토 뤼티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2b6c><colcolor=#fff> 배우자 게르다 뤼티[2]
자녀 3명
학력 알렉산드르 제국대학 (법학 / 석사)
종교 개신교 (핀란드 복음주의 루터교회)
최종 당적 국민진보당 }}}}}}}}}

1. 개요2. 생애
2.1. 초기생애2.2. 젊은 정치거물2.3. 전시총리2.4. 전시대통령2.5. 희생양
3. 평가4. 여담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핀란드의 제5대 대통령.

2. 생애

2.1. 초기생애

핀란드 남서부 사타쿤타의 소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뤼티의 유년기 즈음에는 살림이 펴서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었고 1906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 법학을 전공했다. 190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향해 변호사를 개업했다. 당시 핀란드 제일의 갑부인 알프레드 코르델린을 알게 되어 그의 친구이자 변호사가 되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1차대전이 발발하자 귀국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때부터 핀란드 독립 때까지 5년여간 뤼티와 코르델린은 더욱 밀접해졌다. 하지만 1917년 11월 7일, 코르델린의 49세 생일 잔치 도중 볼셰비키 성향의 러시아 선원들이 저택을 습격했다. 뤼티 부부는 죽을 뻔 했고 코르델린은 납치당한 뒤 살해당했다. 핀란드 내전 때 뤼티는 적군이 장악한 헬싱키 지하에서 숨어 지냈는데, 남동생이 백군에 가담했다가 전사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뤼티는 좌익을 혐오하게 되었다.

2.2. 젊은 정치거물

내전 이후인 1919년 국민진보당에 입당해 의회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자당의 지도자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스톨베리의 퇴임 이후 극우의 준동으로 국민진보당은 꾸준히 세가 줄어들었지만, 뤼티는 재무장관, 국립은행 총재를 거치며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 경제관료로 행세하면서 혼자 승승장구했다. 이것은 뤼티의 처세술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좌파 혐오가 진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뤼티는 1922년 스톨베리의 내전기 적군 참여자 대사면에도 반대했다.

1925년, 스톨베리가 연임을 포기하자 인기가 높아진 뤼티가 제2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5세. 2차 투표까지는 1위였지만 3차 결선투표에서 스웨덴인당농업동맹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를 지지하면서 낙선했다. 대선에서 낙선한 뤼티는 정계에서 일시 은퇴하여 막후 인물이 되었다.

뤼티의 성향은 말하자면 고전자유주의, 정통 시장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친영미파였고, 영국을 따라 핀란드 마르카를 금태환화폐로 만들고자 했다.[3] 뤼티는 실업자 구제와 빈민구호를 반대했고, 기업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동시에 국가의 부는 국민 모두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2.3. 전시총리

뤼티는 사회민주당 주석 배이뇌 탄네르, 그리고 농업동맹의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와 신뢰관계를 구축했다. 1939년 가을 총리직을 제안받고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11월 30일 겨울전쟁이 터지면서 받아들여 12월 1일 취임했다.

소련은 오토 빌레 쿠시넨을 수반으로 내세워 핀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우고 뤼티 내각과는 대화창구를 닫아 버렸다. 이듬해 1월까지 핀란드군은 결사적으로 분전하여 총체적인 전술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외교적 협상의 여지를 마련했다. 결국 소련은 쿠시넨 괴뢰정부를 버리고 스웨덴을 통해 핀란드와 협상을 모색했다. 소련의 날강도 같은 요구에 반대하는 각료가 없지 않았지만 뤼티와 탄네르는 이 전쟁은 빨리 끝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각료들을 설득해 3월 13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에 조인했다.

전쟁의 결과 핀란드는 영토의 11%를 뜯겼고, 인구의 12%인 42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이런 참담한 결과에 충격을 받은 칼리오 대통령은 8월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지고, 총리 뤼티와 군부의 만네르헤임, 그리고 외무장관 탄네르가 국무를 도맡았다. 칼리오는 대통령직 조기 사임 의향을 밝혔다. 카리알라 난민 수용문제 때문에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도 치르지 못하자 수정헌법을 통과시켜 다음 선거에서는 의회의원들이 선거인단이 되었다. 뤼티는 평화조약 주도자로서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여겨졌고, 간접선거 결과 300표 중 288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1940년 12월 19일 칼리오 대통령이 심장발작으로 사망하면서 뤼티는 예정보다 일찍 대통령직에 오르게 되었다.

2.4. 전시대통령

핀란드는 겨울전쟁 때는 스웨덴에, 겨울전쟁 이후로는 나치 독일에 의존적이 되었는데, 친영파였던 뤼티에게는 마뜩치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발트해가 독일과 소련의 호수가 된 상황에서 영국과의 교역로를 잃은 핀란드 입장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1940년 8월, 뤼티는 독일과의 비밀 군사협력에 동의했다. 이때만 해도 독일과 싸우던 서방 연합국마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경우 소련이 독일을 막아내지 못하리라 전망했었다. 뤼티 역시 그런 전망 하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경우 겨울전쟁 때 잃은 땅을 회복할 가능성을 기대했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핀란드는 며칠간 형식적 중립을 취하다가 소련이 공습을 하자 소련에 선전포고했다. 영국은 핀란드를 추축국으로 규정하고 핀란드에 선전포고했다.

핀란드군은 겨울전쟁 때 빼앗긴 영토를 재확보할 뿐 아니라 원래 소련 땅이었던 동카리알라까지 정복해 군정청을 설립했다. 배이뇌 탄네르와 사민당은 동카리알라 공격에 반대했지만 뤼티는 탄네르를 어찌어찌 달래서 사민당의 내각 사퇴를 막았다.[4]

원래 뤼티는 칼리오가 다 못 채운 임기, 즉 1943년까지만 대통령을 지내기로 되어 있었지만 전쟁통에 차기 선거를 준비할 수 없자 1937년 다시 수정헌법을 통과시켜 뤼티가 재선출되었다. 1942년 겨울을 꺾으면서 뤼티와 만네르헤임은 독일이 승리할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지만 이미 전쟁을 무르기에는 너무 늦었다.

1943년부터 핀란드는 독일의 망조를 눈치채고 손절매를 준비했다. 뤼티는 국민연합당 총재 에드빈 링코미에스와 협상하여 링코미에스 내각을 출범시켰고, 새 내각에서 파시즘 정당 애국인민운동은 강판되었다. 1944년 6월 9일, 소련의 대규모 반격(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가 개시되었고 6월 20일에는 핀란드 제4의 도시 비푸리가 소련군의 손에 떨어졌다.

식량과 무기 탄약이 모두 떨어지며 상황이 악화일로였던 핀란드는 스웨덴을 통해 소련과 협상하려 했지만 소련은 무조건 항복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뤼티와 탄네르는 무조건 항복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만네르헤임과 링코미에스는 반대했다. 같은 때 독일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예고도 없이 핀란드로 찾아왔다. 리벤트로프는 군사원조를 약속하며 소련과 싸움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이미 독일에 망조가 든 상황에서 뤼티는 결정권을 의회로 떠넘기고 싶어했다. 하지만 만네르헤임은 뤼티 개인 명의로 리벤트로프와 합의하기를 종용했고, 뤼티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군은 소련군을 탈리이한탈라 전투에서 막아내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2.5. 희생양

7월 중순 전선이 교착되면서 뤼티는 건강을 비롯해 여러 이유를 내세워 사임했다. 핀란드 의회는 만네르헤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만네르헤임이 차기 대통령이 되었다. 핀란드는 계속전쟁 때 확보한 영토를 모두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과 단독 강화했다. 독일군은 노르웨이 방면으로 후퇴하면서 핀란드군과 교전을 벌이고 민간인을 살상했다(라플란드 전쟁).

대통령직을 사임한 뤼티는 국립은행 총재직으로 돌아갔다. 1945년 봄, 소련은 핀란드에 전범재판을 요구했다.[5] 피고는 뤼티, 탄네르, 링코미에스 등 사실상 미꾸라지 만네르헤임을 제외한 전시 지도부 전부였다. 핀란드인들은 이 전쟁이 소련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난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것을 승자의 정의로 여기고 매우 못마땅해했다. 자연히 희생양으로 지목된 뤼티의 평판은 더욱 높아졌다.

당시 핀란드 헌법은 소급입법을 금지하고 있었으나, 소련의 압력으로 수정헌법을 통과시키면서 억지로 규정을 만들어 전범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나마 국내법으로 재판을 받은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뤼티는 형기가 가장 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옥중에서 위암에 걸렸다. 1949년 핀란드 "전범"들은 모두 가석방되었고, 뤼티는 석방되자마자 병원으로 실려갔다. 새 대통령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는 뤼티 등을 모두 사면했다. 사면된 뤼티는 공직에 복귀하지 않았고 1956년 사망했다. 향년 67세.[6]

3. 평가

핀란드가 2차대전이라는 지옥도에서 생존하기 위해 바쳐진 제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사랑한 친영미파였지만 시대는 그의 뜻과 반대로 폭주했고 전쟁범죄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래도 전쟁 중 총리와 대통령으로서 중심을 잡은 공로가 있기에 YLE의 위대한 핀란드인에서 만네르헤임 다음의 2위에 랭크되었다. 하지만 뤼티도 처음에는 책임을 의회에 떠넘기고 싶어했던 것을 보면 자의로 희생양이 된 건 아닌 것 같다. 핀란드군은 사실상 만네르헤임의 사병(私兵)이었고[7] 그런 만네르헤임이 뤼티에게 희생양이 되라고 등을 떠밀었으니.

1994년 의회 의사당 옆에 조각상이 제막되었다.

4. 여담

  • 프리메이슨이었다. 전범재판으로 감옥에 간 뒤 전과자는 회원이 될 수 없다는 프리메이슨 회칙에 따라 제명되었다.
  • 신흥종교인 신지학 협회를 믿었다. 아서 코난 도일 등이 그랬듯 근대의 많은 명망가들이 신비주의에 심취했는데[8] 뤼티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 역대 핀란드 대통령 중 유일하게 군통수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겨울전쟁 때 칼리오 대통령에게 통수권을 이양받은 만네르헤임이 겨울전쟁 종전 뒤에도 통수권을 반납하지 않았기 때문. 이후 만네르헤임이 뤼티의 후임 대통령이 되면서 통수권은 유야무야 대통령에게 돌아왔다.
  • Hearts of Iron IV에서는 AAT DLC 이후 핀란드 비동맹 루트에서 칼리오를 몰아내면 대통령이 된다.

5. 둘러보기

추축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cc
<colcolor=#fff> 국가 | 지도자
유럽 <colbgcolor=#838383,#191919>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에리히 레더 · 빌헬름 카이텔 · 하인리히 힘러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파일:전향 아이콘.svg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베니토 무솔리니 · 피에트로 바돌리오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살로 공화국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베니토 무솔리니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 호르티 미클로시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국민단결정부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살러시 페렌츠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파일:전향 아이콘.svg | 미하이 1세 · 이온 안토네스쿠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국파일:전향 아이콘.svg | 보리스 3세 · 시메온 2세
파일: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국기.svg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요제프 티소
파일: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국기.svg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에밀 하하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필리프 페탱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 크로아티아 독립국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안테 파벨리치 · 토미슬라브 2세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크비슬링 정권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비드쿤 크비슬링
파일:모나코 국기.svg 모나코 공국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파일:전향 아이콘.svg | 루이 2세
파일:세르비아 구국정부 국기.svg 세르비아 구국정부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밀란 네디치
파일:바르다르 마케도니아 국기.svg 바르다르 마케도니아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이반 미하일로프
파일:러시아 해군기.svg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파일:모호 아이콘.svg | 안드레이 블라소프
파일:로코트 자치국 국기.png 로코트 자치국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파일:벨라루스 국기(1918, 1991–1995).svg 벨라루스 중앙 라다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라다슬로 아스트로스키
핀란드파일:전향 아이콘.svg | 그리스국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알바니아 왕국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핀도스 공국 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류블랴나 주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 덴마크 보호령 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파일:모호 아이콘.svg
아시아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 쇼와 천황 · 고노에 후미마로 (전쟁 이전)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스즈키 간타로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아이신기오로 푸이 · 장징후이
파일:몽강연합자치정부 국기.svg 몽강연합자치정부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데므치그돈로브 · 운왕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기.svg 왕징웨이 정권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왕징웨이 · 천궁보
파일:자유 인도 임시정부 국기.svg 자유 인도 임시정부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찬드라 보스
파일:베트남 제국 국기.svg 베트남 제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바오다이 황제
파일:캄보디아 왕국(괴뢰국) 국기.png 캄보디아 왕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노로돔 시아누크
파일:버마국 국기.svg 버마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바 우
파일:필리핀 제2공화국 국기.svg 필리핀 제2공화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호세 라우렐
파일:라오스 왕국 국기.svg 라오스 왕국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 시사방봉
이라크 왕국파일:전향 아이콘.svg | 태국파일:전향 아이콘.svg
이념 파시즘 · 전체주의 · 권위주의 · 군국주의 · 반공주의
영토 확장 계획 레벤스라움 · 이탈리아 이레덴타 / 스파치오 비탈레 · 대동아공영권
파일:전향 아이콘.svg 전쟁 도중 연합국으로 전향 파일:모호 아이콘.svg 간접적 지원 및 여부 논란
파일:나치 독일의 괴뢰국 아이콘.svg 나치 독일의 괴뢰국 / 파일: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 파일:일본 제국의 괴뢰국 아이콘.svg 일본 제국의 괴뢰국
}}}}}}}}}}}}}}}


[1]핀란드 사타쿤타 휘티넨.[2] 혼전성은 세를라시우스(Serlachius).[3] 하지만 1929년 대공황으로 영국과 핀란드는 모두 금태환제를 포기한다.[4] 사민당은 계속전쟁 개전 전부터 이 전쟁 문제로 크게 분열이 일어난 상태였다. 전쟁 자체를 반대한 당내 좌파는 결국 전후 탈당하여 합법화된 공산당과 함께 인민민주동맹을 설립한다.[5] 계속전쟁독소전쟁과 같은 침략전쟁으로 규정한 것인데, 정작 계속전쟁 역시 소련의 선빵으로 일어난 전쟁이었다.[6] 마찬가지로 전시대통령이었던 칼리오도 67세로 죽었다. 그들보다 나이가 많던 스톨베리, 스빈후부드, 파시키비는 모두 80세 넘게 살았다.[7] 만네르헤임은 겨울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통령이 될 때까지 군통수권을 대통령에게 반납하지 않았다.[8] 심지어 신지학 협회 신자들 중엔 구한말의 개화운동가인 서광범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