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633>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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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633><colcolor=#fff>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브루실로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е́евич Бруси́лов Aleksey Alekseyevich Brusilov | |||
출생 | 1853년 9월 1일 | ||
러시아 제국 티플리스현 티플리스 (現 조지아 트빌리시) | |||
사망 | 1926년 3월 17일(향년 72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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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남동생 보리스,[3] 레프[4] | ||
배우자 | 안나 니콜라예브나 폰 가게메이스테르 (사별) 나데즈다 블라디미로브나 브루실로바젤리홉스카야 | ||
자녀 | 아들 알렉세이 | ||
복무 | 러시아 제국 육군 | ||
1872년 ~ 1918년 | |||
노농적군 | |||
1919년 ~ 1924년 | |||
최종 계급 | 기병대장 (러시아 제국 육군) | ||
병과 | 기병 | ||
주요 참전 | 러시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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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널리 활약한 러시아 제국의 장군.1916년에 동부전선에서 실시된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용명을 떨쳤고, 1차대전에 참전한 러시아군 지휘관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명장으로 평가되는 지휘관이었다.[5]
후에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러시아 장군들은 제국 편에 섰지만, 브루실로프는 처음에 중립을 지키다가 후에 붉은 군대에 가담했다. 러시아군에서 최종계급은 대장. 이오시프 스탈린이 독재권을 쥐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대숙청을 피하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은 거의 유일한 러시아 제국 장교 출신 소련군 장성이다.
2. 생애
2.1. 유년기
1853년 8월 31일 지금은 조지아의 트빌리시인 티플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러시아인이었고, 어머니인 마리야루이자 브루실로바는 폴란드인이었다.할아버지부터 그 자신인 브루실로프까지 브루실로프의 3대는 러시아 제국군의 장교로 복무했으며, 특히 그의 할아버지는 1812년 당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항하는 방어군으로 싸웠던 장교였다.
브루실로프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1856년에 세상을 뜨기 전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브루실로프는 쿠타이스[6]에 있는 친척들의 손에서 길러졌다. 그는 14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는 1867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중앙 유년학교[7]에 입교하였다. 1872년에 교육과정을 수료한 그는 제 15(트베리) 용기병 연대의 소위로 복무를 시작했다.
2.2.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브루실로프는 1872년 8월에 트베리 용기병 연대에서 복무를 시작했고, 그는 기병중대의 지휘권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았다. 그의 적성이 지휘관이 아닌 부관에 더 맞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1874년에 중위로 진급한 브루실로프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그의 부대를 캅카스에 있는 서부전선에서 운용하였으며, 아르다간[8]에 있는 요새에 대한 공격에 참여함으로써 공을 세운다. 그는 이 공적으로 성 스타니슬라프 3급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뒤에 큰 공을 세운 그는 성 안네 3급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상위(Stabskapitän)[9]으로 진급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 그는 카르스 주변에 자리잡은 오스만 제국군에 대한 공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는데, 이로써 그의 스타니슬라프 3급 훈장은 2급 훈장으로 승급되었다.
2.3. 1차대전 전까지
1881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기병 장교 학교의 학생이 된 브루실로프는 2년 후 그곳에서 승마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계속 승진하여 1900년엔 소장이 됐고, 1902년에는 중장에 이르러 기병 장교 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 동안 기병전술에 관한 여러 저작을 펴냈고, 프랑스와 독일 제국, 오헝 제국을 돌며 기병전술을 연구했다. 이 외국유학 시기가 딱 러일전쟁 시기와 겹쳤기 때문에 러일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외국 유학 중 1차 러시아 혁명이 터지며 그 과정에서 아내를 잃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1906년에는 제2 근위기병사단[10]의 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그는 정치에 휘말릴 수 있는 근위대를 피하려고 했다.
다행히 1908년 바르샤바 군관구의 14 군단장으로 부임했으나, 당시 폴란드 총독이었던 게오르기 스칼론과 충돌을 빚었다. 1913년 키예프 군관구의 12군단장으로 전임되었는데, 브루실로프는 엄격한 훈련으로 명성이 높았다.
2.4. 제1차 세계 대전
1차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제8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여 갈리치아(현재 우크라이나-폴란드 접경) 방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격파하였다. 러시아 제국군이 당시 (주로 독일 제국군에게) 연전연패했기 때문에 이는 매우 돋보였고, 이 공적으로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훈받았다.1915년에는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밀어붙이고 카르파티아산맥 근처까지 진격하여 기병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다른 전선에서 연전연패했기 때문에 돌출부가 형성되어 위치상으로 위험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후퇴하였다. 브루실로프도 계속된 공세를 시도해보았지만, 독일군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펠릭스 그라프 폰 보트머는 러시아군의 공세를 계속 막아버렸다. 그러나...
1916년 3월 29일, 남서전선군 총사령관에 부임하여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대한 공세를 실시한다. 이 공세는 그동안 불가능했던 진격을 무려 400km나 하고 40만명의 포로를 획득하는 등의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나, 북부의 중앙전선군이 제대로 조공을 못하여 더 이상의 진격은 불가능해졌고, 동부전선의 승패를 되돌리는데는 실패한다. 브루실로프 본인도 큰 피해에 비해 유의미한 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어쨌든 이 공세는 1차대전에서 연전연패하던 러시아군에게 거의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승리였다. 이 공적으로 브루실로프는 다이아몬드 게오르기 검을 하사받고, 러시아 제국군의 거의 유일한 명장으로 각인된다.
2.5. 임시정부 시절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브루실로프는 정국혼란과 패전 수습을 위해 차르의 퇴위를 요구하게 되었다. 어쨌든 브루실로프는 라브르 코르닐로프 같은 반동파는 아니었고, 더 이상 제정으로는 국가가 유지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성립한 공화국 임시정부에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전쟁장관을 맡게 되었다. 케렌스키는 브루실로프를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했고, 브루실로프는 혼란 가운데서도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힘썼다. 임시정부가 사형을 폐지하자 브루실로프는 "사형 폐지는 군율 유지를 힘들게 한다."며 반대하기도 했다.1917년 7월 케렌스키는 독일군에 공세를 명했는데(케렌스키 공세), 러시아군은 이미 떡실신 상태였기 때문에 이 공세는 대패로 끝났고, 임시정부의 리더십은 붕괴되었으며 전선에 구멍만 뚫렸다. 케렌스키는 이에 대한 책임을 브루실로프에 떠넘겨 그를 해임하고 모스크바로 소환하였다. 하지만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코르닐로프가 케렌스키의 명령을 사칭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볼셰비키가 주도해서 막아내면서, 케렌스키의 권력은 크게 축소된 반면, 볼셰비키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결국 10월 혁명이 일어나 케렌스키 정부는 붕괴하고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2.6. 공산정부 시절
공산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여 러시아에서는 공산당이 이끄는 적군과 반혁명세력인 백군이 내전을 벌이게 된다. 적군과 백군은 모두 브루실로프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브루실로프는 얼마간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볼셰비키가 아닌 이들 중 누가 러시아 인민과 함께 대지를 지키고 러시아를 지킨단 말인가? 당신들은 어디 있었으며, 누구를 군대로 보냈는가? 우리는 삼색기를 잊고 적기 아래에 단결해야 한다."
1919년 폴란드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되자[11] 브루실로프는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모든 러시아인은 조국 수호를 위해 붉은 군대에 입대하자!"는 논설을 발표했다. 내전이 발발하고 외국 군대가 혁명에 개입하자, 오히려 붉은 군대가 러시아의 수호자로 비쳐 많은 전직 러시아 제국군 장교들이 붉은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브루실로프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아들[12]이 붉은 군대에 참여했다가 전사한 것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이후에 고령 때문에 전선에 나가진 않았지만, 붉은 군대의 기병훈련과정을 담당하고, 1924년까지 공산정부의 군사혁명위원회에서 복무하면서 의장인 레프 트로츠키를 보좌했다.
2.7. 사망
이후 은퇴하여 1926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장례식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서[13] 정중히 거행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공산정부측 정부인사들과 옛 제정 정부인사들이 모두 참여하여 신시대와 구시대를 모두 대표했다.3. 기타
브루실로프라는 성씨가 소련군 초대 다섯 원수이자 스탈린의 절친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하고 비슷해서 종종 착각되기도 한다.[1] 1787.~1859.[2] 혼전성은 네스토옘스카야(Нестоемская).[3] 1855.~1918.[4] 1857.~1909.[5] 후에 제2차 세계 대전 때 영국군 원수였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자신의 저서 '전쟁의 역사'에서 브루실로프 장군을 극찬했다.[6] 지금의 쿠타이시로 소비에트 연방 유럽부(部) 남부, 조지아 공화국(Georgia)의 서부에 위치한 도시.[7] Imperial Corps of Pages. 러시아 제국에 존재했던 일종의 군사학교였는데, 귀족이나 고위 장교들의 준비된 자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8] 조지아 근처에 있는 터키의 주. 본래 터키 이름은 아르다한(Ardahan)이나, 러시아어에서는 ㅎ발음을 표기할 수 없기 때문에(х는 kh 발음이라 다르다) 비슷한 발음인 г라고 써서 아르다간이 되었다.[9] 영어로는 staff captain, 독어로는 Stabshauptmann인 이 계급은 오래 전부터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에서 쓰인 계급으로 위치는 중위보단 높고 대위보단 낮다. 북한식으로 상위라고 번역.[10] 러시아 제국의 '근위'는 정예부대를 뜻하는데, 때때로 차르를 위해 민중을 진압해야 하는 악역을 맡을 때도 있었다. 때문에 소련 시절 이런 명칭이 사라졌다가 독소전 초기의 참패 이후 부대 사기 진작 방안의 일환으로 다시 우수한 성과를 낸 부대에게 근위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11] 많은 이들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가 소련을 먼저 침공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보다 복잡하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제국이 항복하자마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11월 13일)했고, 그 직후 독일에게 뜯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생 독립국가들(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을 상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 중 폴란드 중심부와 지척이던 벨라루스는 1919년 1월 5일 수도 민스크가 함락당해 제일 먼저 망했다. 폴란드는 자신들도 공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예방전쟁을 준비했고 그 결과 폴란드가 벨라루스 서부의 붉은 군대를 공격함으로써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순한 국경분쟁에 불과했던 전쟁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공으로 멸망 직전이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1920년 초 폴란드와 동맹을 체결, 폴란드군이 우크라이나로 진격하면서 전면전으로 격화되었다.[12]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브루실로프(Алексе́й Алексе́евич Бруси́лов, 1887—1920). 적군 기병연대 지휘관이었다.[13] 크렘린 벽 묘지 다음으로 명예로운 곳이다.
분류
- 러시아 제국의 군인
- 소련의 군인
- 러시아-튀르크 전쟁/군인
- 러시아 내전/군인
- 제1차 세계 대전/군인
- 1853년 출생
- 1926년 사망
- 심장마비로 죽은 인물
- 트빌리시 출신 인물
-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자
-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
-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 성 블라디미르 훈장 2등급
- 성 블라디미르 훈장 3등급
- 성 블라디미르 훈장 4등급
- 성녀 안 훈장 1등급
- 성녀 안 훈장 2등급
- 성녀 안 훈장 3등급
-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1등급
-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2등급
-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3등급
- 레지옹 도뇌르 훈장/그랑도피시에
- 레지옹 도뇌르 훈장/코망되르
- 레지옹 도뇌르 훈장/오피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