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9 00:47:43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colbgcolor=#000>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
Panzergrenadier-Division Großdeutschland
파일: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기.svg 파일: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엠블럼.svg
깃발 엠블럼
창설일 1939년 6월 14일
해체일 1945년 4월 25일
소속 독일 육군
상급부대 제162보병사단
사단 모토 신, 명예, 조국(Gott, Ehre, Vaterland)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사단 역사
2.1. 창설과 개칭2.2. 대독일연대 시절2.3. 대독일사단으로의 개편과 소멸
3.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 대대4. 특징5. 전쟁 범죄6. 미디어

1. 개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독일 국방군 육군의 최정예 사단이다.

2. 사단 역사

2.1. 창설과 개칭

파일:Bundesarchiv_Bild_102-10884,_Berlin,_Reichswehr-Feier,_Friedrich_Ebert.jpg
1923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을 사열하는 베를린 근위연대

일명 대독일 사단으로 알려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그 역사가 1921년 창설된 육군 베를린 근위연대 'Wachregiment Berlin'로 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베를린 근위연대는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의 7개 사단에서 각각 1개씩 보병 중대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7개의 중대가 모여서 이루어졌는데, 수도 베를린의 주요 군사 퍼레이드 행사나 정부 기관 경비 임무 그리고 유사시 바이마르 공화국을 대상으로 한 쿠데타 발발시 진압 역할을 맡았다.
1934년 힌덴부르크 사망 직후 히틀러에게 전군을 대표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베를린 근위연대
1933년 히틀러나치당이 집권하면서 평범한 의장대였던 베를린 근위연대의 역사는 크게 바뀌기 시작한다. 1934년 8월 2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사망 직후 국방군의 히틀러에 대한 충성 맹세식을 전군을 대표하여 최초로 진행하였다. 이후 1939년 6월 14일 베를린 근위 연대에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차량화 연대로 이름을 개칭, 개편되었다.

2.2. 대독일연대 시절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는 1939년 9월 진행된 폴란드 침공 당시 침공군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 당시 주공에 속하는 A집단군 제14군단에 배속되어 아르덴 산맥을 통과하였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A집단군 공격로를 열기위한 목적으로 룩셈부르크벨기에 침공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는데 공수부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3인용 경비행기를 활용해 벨기에에 공수작전을 펼치는 미친 짓을 벌여 성공하였으며, 5월 13일 스당 전투에서 A집단군의 선두였던 제1기갑사단의 뫼즈강 도강 작전에서 선두로 도하하여 스당의 주요 요새를 무력화시켜 A집단군의 성공적인 스당 돌파를 이끌어내는 큰 공을 세웠다.

성공적인 뫼즈강 도하와 스당 함락 이후 프랑스군 종심으로 뚫고 들어가는 구데리안의 19 기갑군단의 측면과 스당 교두보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아 10기갑사단과 함께 5월 15일 스당 남쪽에 위치한 스톤 고지(stonne)를 점령하고 17일까지 프랑스 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스톤 고지 전투에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의 공은 지대했는데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와 10기갑사단의 스톤 고지 점령으로 프랑스 군은 스당을 돌파한 독일군의 주공이 스당 남쪽에 위치한 파리와 마지노선 일대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주었고 그 덕에 19기갑군단은 성공적으로 프랑스 종심 깊숙히 돌파하여 낫질작전의 성공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가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당시 독일군의 주력 대전차포인 Pak 36은 프랑스의 주력 전차인 샤를 B1 Bis를 격파하기엔 역부족이었는데 스톤 고지에 배치된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의 대전차포 중대가 보유한 대전차포는 고작 12문이었고 그 중 스톤고지에 배치된 대전차포는 고작 9문이었다. 16일 야간 급파된 16보병사단과 24보병사단이 도착하여 임무를 교체하기 전까지 오기까지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는 총 9번에 달하는 혈투를 벌여 총 33대의 프랑스군 전차를 격파했다. 그 대가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총 570명의 사상자를 내었는데 프랑스 기갑부대의 정면 공격을 받았던 대전차중대의 경우 중대가 보유한 12문의 대전차포 중 6문을 잃었고 12명 전사, 65명 부상으로 중대 전력의 50%가 넘는 피해를 입었다.

거의 궤멸에 달한 피해를 입었던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잠깐의 휴식을 취한 이후 센강변으로 공격을 주도하였고 됭케르크 포위 작전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프랑스 중부를 향한 독일군의 적색 상황 작전에서 동쪽 축선을 배정받아 리옹을 함락시켰다. 다만 이 과정에서 자신들과 맞서 싸운 프랑스 흑인 부대를 대상으로 후술할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6월 21일 콩피에뉴 숲에서 열린 프랑스의 항복 문서 조인식에 의장대로 참여하였다. 이후 바다사자 작전 참가부대로 셀자스에 주둔했지만 바다사자 작전 취소 이후 지브롤터 공략 작전이었던 펠릭스 작전 참가 부대로 선정되어 프랑스 남부 지방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펠릭스 작전은 스페인프랑코가 독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무효화되었다.

1941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후속 부대로 유고슬라비아 패잔병을 소탕하는 역할을 맡았던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차량화 보병연대로 승격되어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에 중앙집단군 제2기갑집단 제46기갑군단 배속으로 민스크, 키예프 전투 등에 참가하며 공을 세웠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툴라까지 진출하며 모스크바 포위망 남쪽을 구성했지만 12월 7일 소련군의 강력한 반격에 큰 손실을 보고 후퇴하였고, 12월 22일 오카강 방어선을 구성하였지만 소련군의 강력한 공격에 그로스도이칠란트 한 개 중대의 전투력이 소대급으로 떨어질 정도로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이후 1942년 1월 20일 오카강 교두보에서 볼로그다주로 이동하여 지역 공격작전에 참여하였다가 1942년 2월 21일 부대 재편성을 위해 예비대로 돌려졌다. 이때까지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가 입은 피해는 1000여명 전사 및 실종, 3000명 부상으로 사실상 궤멸 수준이었다.

2.3. 대독일사단으로의 개편과 소멸

파일:Gdmap1942.gif
1942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주요 이동 및 전투[1]

1942년 2월 28일 완전히 궤멸되어 엉망진창인 연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기존의 대대들을 해체하고 브란덴부르크 노이루핀에서 징집된 2개의 대대를 추가 편성한 다음 오렐로 이동하였다. 이후 1개 전차대대를 배속받아 4월 1일 차량화보병사단으로 승격되면서 우리가 잘아는 '대독일사단' 즉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렇게 재편성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B집단군 예하 48기갑군단 소속으로 청색 작전에 참여하여 돈강을 도하, 보로네시를 점령한 이후 빠르게 남하하여 로스토프 방면 전투에 참여한 후 8월 중순 예비대로 전환, 우크라이나 서부로 이동해 보충을 받았다.

1942년 9월에는 르제프 전투 방어군으로 편성되어 화성 작전에서 소련군의 후퇴로를 공략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가장 격렬했던 전투에서 소방수로 투입되었기에 손실이 적지 않았으므로 12월 말 잠시 후방으로 물러나 손실을 보충받았다.

손실을 보충받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겨울폭풍 작전 실패 이후 강화되는 소련군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남부전선하르코프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소련군을 맞아 용감히 싸워 하르코프 재점령에 공을 세웠지만 손실이 극심했던 사단은 후방으로 철수하여 손실을 보충받았다.

1943년 5월 19일에는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사단으로 이름과 편제가 바뀌었고, 제48기갑군단에 배속되어 쿠르스크 전투에서 남쪽 방면의 주공을 맡았다. 이때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티거 15대, 제10기갑여단으로 부터 지원받은 194대의 판터 등 어마어마한 기갑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두 부대 장교단간 갈등이 터지는 것을 시작으로 공세는 소련 제67근위소총사단과 제3기계화군단의 저지선에 막혀버렸고, 이윽고 10기갑여단의 판터들과 티거들이 소련 공군의 공습과[2] 고질적인 신뢰성 문제로 퍼지면서 별달리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쿠르스크에서의 충격적인 패배 이후 대독일사단은 잠시 중부집단군에 편성되었다가 다시 48기갑군단으로 배속되어 드네프르강에서 소련군의 반격에 무너지는 독일군의 전선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전선 전체에 걸쳐 붕괴되는 독일군을 사단 하나의 힘으로 막아내는 것은 역부족이었기에 소방수라는 별명을 얻게 된 그동안의 활약이 무색하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후퇴 과정에서 소련군에게 후미를 공격당해 적지 않은 피해를 받았다.

1944년에는 자포로지예 지역으로 이동하여 전투를 벌였고,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당시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을 구출하기 위해 사단의 일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1944년 5월 17일 주간 뉴스 715호에 보도된 루마니아 전선에서의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보도에 등장하는 많은 양의 5호 전차 판터와 6호 전차 티거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 나치 독일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지 느낄 수 있다 [3]

우크라이나 남부 방어선이 무너진 이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핫소 폰 만토이펠 남작의 지휘 하에 플로이에슈티 유전지대를 품고 있는 루마니아를 향해 쏟아지는 소련의 공세를 방어하여 독일군의 남부전선을 보호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44년 6월 22일 개시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중부집단군이 완전히 와해되어 동프로이센 지역이 위협받게 되자 독일군 최고사령부 명령에 따라 1944년 8월 리투아니아 전선으로 이동하여 동프로이센의 동쪽 끝인 메멜을 방어하기 위한 교두보에 배치되었고, 수차례 소련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큰 공을 세웠지만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물량과 전술적 발전으로 인해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다. 1944년 말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팔레즈 포위전으로 서부 전선 독일군의 증발,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 연합군의 독일 폭격으로 독일은 야전부대들에 충분한 지원을 할 역량을 빠른 속도로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 대해서만큼은 끝까지 지원을 놓치않았다. 1944년 9월 28일 국방군 육군 최고사령부는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와해된 제 18기갑사단 생존자들과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 공세에서 박살난 제4군단 잔존 병력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으로 흡수시킨후,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재편된 브란덴부르크 사단과 합쳐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군단(Panzerkorps Großdeutschland)을 구성하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군단을 전성기 독일 기갑군단의 위용을 되찾을 정도로 완편시키기엔 독일은 시간과 물자 모두 부족하였고, 무엇보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힘만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소련군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1945년 1월 28일 소련군의 비스와-오데르 공세에 동프로이센 방어선이 붕괴되며 메멜이 함락되었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지연전을 벌이며 선박을 긁어모아 덴마크로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하나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한 소련 육군의 공세와 발트해에서 협공을 가하는 소련 해군의 공격으로 인해 사단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와해되고 만다. 1945년 3월 15일 기준 간신히 패잔병을 긁어모은 그로스도이칠란드 사단의 병력은 4000명으로 줄어들었으며 기갑척탄병 사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3호 돌격포 1대, 4호 전차 1대, 5호 전차 판터 5대, 6호 전차 티거 1 6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남아있던 마지막 그로스도이칠란드사단 병력들은 4월 25일 필라우(Pillau)[4]에서 동프로이센 지역의 독일군 패잔병들과 함께 최후의 저항을 했지만 완패하여 완전히 소멸된다. 이후 병사들은 각자 흩어져 소련군의 포로가 되거나 엘베강을 넘어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튜스의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드'에 따르면 발트해를 넘어 독일 본토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병력은 1000여명 수준이었다고 한다.[5][6]

3.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 대대

부대의 본래 임무 자체가 수도경비 및 유사시 쿠데타 진압이었던 만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휘하에 수도 경비 대대를 운영하였다. 1939년 6월 14일 베를린 근위 연대가 그로스도이칠란트 차량화 보병 연대로 개편되면서 연대 참모부와 연대 소속 4개 중대는 베를린 경비 대대 (Wach-Bataillon Berlin)으로 재편되었고 폴란드 침공 직전인 8월 24일에는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 소속 7중대와 8중대가 차출되어 총통경호대대(Führer-Begleit-Bataillon)가 창설되었다.[7] 총통 경호대대는 히틀러 야전 시찰시 근접 경호 및 볼프스샨체 경비 역할을 맡았고 베를린 경비 대대는 기존 베를린 근위 연대의 역할을 이어 받아 수도 의전 행사와 시설 방호 임무를 맡았다. 이후 1942년 10월 1일 베를린 경비 대대는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 대대 (Wach-Bataillon Großdeutschland)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그냥 단순한 수도 경비 대대 같지만 이들은 1944년 7월 20일 벌어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944년 7월 20일 당시 수도 베를린에는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 대대 총 4개 중대가 배치되어있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 대대장이었던 오토 에른스트 레머는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1기계화 보병 연대 4대대장으로 복무하며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백엽기사철십장을 수여받은 독일군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7월 20일,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폭탄 공격으로 히틀러가 죽었다고 확신한 검은 오케스트라단은 오후 4시 발키리 작전을 발동하였고 베를린 도시 방어 사령관 파울 폰 하제 중장은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 대대에 수도 주요 기관을 점거하고 히틀러를 암살한 죄로 친위대와 괴벨스를 체포하도록 이들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베를린 전체 정부 구역을 봉쇄하기엔 4개 중대로는 턱없이 부족하였고 가장 중요한 통신 및 정보 시설을 점령하지도 못했다. 한편 발키리 작전을 발동한 오후 4시엔 이미 별 다른 부상을 입지 않은 카이텔은 발키리 작전의 핵심이었던 보충군 사령관 프롬과 통화하여 히틀러가 살아있음을 전달한 상태였고 발키리 작전이 한참 진행 중이던 오후 5시 42분에는 주요 장성들에게 히틀러가 무사하다는 전보가 전달되었다. 오후 6시를 넘은 시각, 히틀러는 온전히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까지 회복되었고 마침 괴벨스를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친 에른스트 레머가 히틀러와 직접 통화하며 암살 시도가 실패하였음을 파악하게 된다. 이후 에른스트 레머 소령의 지휘하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 대대는 검은 오케스트라단에 대한 진압작전을 실시하였고 오후 11시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검은 오케스트라단 수뇌부가 체포되며 암살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4개 중대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 대대에 대한 포섭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쿠데타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검은 오케스트라단은 영위관급 장교들과 부사관들에게 까지 하게 될 경우 작전이 사전에 누설될 것을 우려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대대장이었던 에른스트 레머 소령이 히틀러가 생존하였음을 직접 확인한 직후 쿠데타 진압 작전을 실시한 것을 고려하면 경비 대대를 포섭하려는 시도가 정보 유출을 불러일으켰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검은 오케스트라단이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 대대를 투입한 것은 폭탄이 터지고 난 3시간 반으로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투입이 실시된지 2시간도 안되서 포섭되지 않았던 고위 장성들은 히틀러의 생존을 전파받았고 검은 오케스트라단 측의 협조 요청을 거부했고 히틀러의 생존 소식은 이들이 점령하지 못한 통신 기관을 통해 빠르게 전군에 전달되었다. 다만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 대대가 히틀러의 생존을 확인한 이후 빠르게 쿠데타 진압에 나선 만큼 설사 암살 시도 직후 검은 오케스트라단이 움직여 수도 주요 기관을 점거하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베를린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보충군 병력 만으로도 충분히 히틀러는 진압이 가능했으며 어떻게든 히틀러가 생존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면 시기가 늦었을 뿐 본 역사처럼 빠르게 검은 오케스트라단 진압에 나섰을 것이다.

어쨋든 쿠데타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에른스트 레머 소령은 2계급 특진, 대령이 되어 확대 개편된 총통 경호 여단(Führer-Begleit-Brigade)의 여단장으로 부임해 아르덴 대공세에 참여한 이후 1945년 1월 승격된 총통 경호 사단(Führer-Begleit-Division)의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수도 경비 대대의 경우 본대를 따라가지 않고 1945년 2월 1일 브란덴부르크 되베리츠(Döberitz)에서 제 309 보병사단 베를린(Infanterie Division Berlin)으로 편입되었다. 제 309보병사단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해 여러 전투를 벌였고 베를린 공방전 당시 젤로 고지 수비를 맡아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지만 역부족이었고 베를린 남쪽 할베 포위전에서 전멸했다.#

4. 특징

대독일사단은 연대 시절부터 수도 베를린을 방어하는 정예사단으로 많은 대우를 받았다. 대부분의 독일 육군 부대들의 경우 모병을 자신의 연고지역에서만 즉 담당 군구 내부에서 할 수 있었지만 대독일사단은 독일 전체에서 모병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독일 제국군 시절 베를린과 황제를 보위하던 '근위군단(Gardekorps)'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잊혀진 병사'로 유명한 기 사예르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를 둔 알자스 로렌 지방 출신 기 사예르는 프랑스인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대독일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몇몇 밀덕들은 대독일사단의 모병 특권을 들어 부대원을 모집할때 독일 전국에서 나치당에 충심이 높은 사람만 뽑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타 사상을 가진 자인지에 대해 사상검증은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사회주의를 제외한 사상을 가진 자들을 탄압하기 바빴던 나치 독일 특성상 전군에 동일한 사항이었고 별도의 시험을 받아야 했던 해군, 공군과 달리 대독일사단의 입대 절차는 독일 전 관구에서 병력을 모집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타 육군 사단과 동일했다. 전술된 기 사예르가 대독일사단으로 재배치되는 과정을 보면 그냥 보병 전과 이후 재배치 된 것일 뿐이다. 즉 대독일사단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수도기계화보병사단 포지션으로 보면 된다.

또한 최정예부대로서 육군 부대들 중 보급 최우선 순위를 차지했는데, 힘러의 입김 때문에 대부분의 중기갑전력이 SS 기갑부대로 돌아가 4호 전차판터, 돌격포로 버티던 일반적인 육군 사단들과는 달리 티거를 비롯한 중전차를 운영하는 501중전차대대 3중대, 504중전차대대 3중대가 대독일사단 전차연대로 편성되는 등 기갑척탄사단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이 때문에 대독일사단은 가장 치열한 격전지마다 소방수로 투입되었고, 매번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후방에서 재편성 받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파일:Cuffti2.gif

무엇보다 대독일사단은 독일 육군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부대 완장을 부여받았다. 독일군 부대 중 부대 수장을 수여받은 부대는 손에 꼽혔고 무장 친위대 사단들에게 총통의 최정예라는 자긍심을 주기 위해 지급 받았는데 대독일사단은 그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견장에 사단명의 약어인 GD 두 글자를 조합한 부대 배지[8]를 달 수 있는 특권을 받았고, 그 덕에 국방군 기록사진에서 대독일사단의 장병들은 수장과 견장으로 그 소속을 알 수 있다.
파일:Bundesarchiv_Bild_101I-712-0497-24,_Rumänien,_Offiziere_der_Div._»Großdeutschland«_Recolored.jpg
1944년 4월 루마니아 전선에서 지도를 보며 통화하는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대위. 완장과 배지가 선명히 보인다. 또한, SS와 달리 완장을 오른팔에 부착했다.

같은 이름을 부여받은 그로스도이칠란트 보충 연대(Die Ersatz-Brigade Großdeutschland) 역시 존재했는데 1942년 6월 브란덴부르크 코트부스에서 창설된 그로스도이칠란트 보충 연대는 독일군 훈련소로 기갑군 보충 훈련대(Panzer-Truppen-Ersatz-und-Ausbildungs-Abteilung)를 운영했다. 1944년 8월 1일엔 장교 후보생 학교(Offizierbewerber-Schule )가 설치되었고 1944년 7월 10일 창설된 총통 척탄병 여단(Führer-Grenadier-Brigade)이 그로스도이칠란트 보충 연대 소속 훈련병을 지원받아 편성되었다. 이후 그로스도이칠란트 보충 연대 병력은 1945년 3월 브란덴부르크 기갑척탄병사단으로 편성되었다.

5. 전쟁 범죄

국방군 최정예 병사들로 이름을 휘날린 그로스도이칠란드 사단 역시 전쟁 범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현재까지 그로스도이칠란드 사단이 저지른 것으로 파악된 전쟁 범죄는 총 3건으로 프랑스 침공 2건, 유고슬라비아 침공 1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940년 6월 9일부터 10일까지 에르퀸빌레 지역에서 그로스도이칠란드 연대는 모이즈 베벨 대위가 이끄는 세네갈 24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포로 74명을 총살하였다. 이후 리옹으로 진격한 그로스도이칠란드연대 병력들은 SS 토텐코프 연대와 함께 6월 19일부터 20일 양일에 걸쳐 50여명의 흑인 포로들을 총살하였다. 두 포로 학살 사건 모두 흑인 병사들이 피해자였는데 프랑스 침공 당시 인종주의에 물든 독일군 병사들이 얼마나 흑인을 인간 취급 하지 않았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9]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에는 민간인 총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1941년 4월 20일 밤 SS 다스라이히 연대가 파르티잔의 공격을 받아 1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는 일이 있었다. 이에 그로스도이칠란드 연대와 다스라이히는 해당 지역 주민 100여명을 체포하여 군사재판을 열고 총 36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당연히 해당 재판은 정식 재판도 아니었고 피고인들에 대해 변론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사형이 선고된 직후 18명은 총살, 18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이 중 총살된 14명은 그로스도이칠란드 연대 병력에 의해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10]

6. 미디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프레드리크 촐러 일병이 대독일사단 소속 병사로 등장한다. 무려 240여명의 미군을 3일 동안 사살한 영웅이라고.[11]
Steel Division 2에서 A등급 독일군 기갑사단으로 등장한다. 도펠코프 작전을 다룬 캠페인에서는 판터와 티거 수십대에 최정예 보병진으로 포위된 북부집단군을 구하기 위해 공격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소련군이 너무 많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돌파에 실패하고 북쪽의 슈트라흐비츠 전투단만이 돌파에 성공한다. 성능적으로는 히틀러 유겐트하위호환이란 느낌이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작전명 발키리의 후반부에서 쿠데타 세력의 명령에 따라 베를린 주요기관을 접수하고 나치정권의 주요간부들을 체포하는 부대가 그로스도이칠란트사단 수도경비대대이다.[12][13]


[1] 3월 오카강변 오렐 점령 이후 6월 28일 청색 작전 개시와 동시에 돈강을 도하하고 그 이후 남부집단군 지원을 위해 드네프르강과 돈강 하류지역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르제프 전역이 급해지자 중부전선으로 재배치 되어 9월부터 12월까지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2] 독소 전쟁기간동안 소련공군은 독일공군의 밥 노릇을 면치못했지만 1943년 시점부턴 누적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소련 공군의 질적향상이 이루어졌었다. 여기에 소련의 엄청난 공업력이 시너지를 이루며 어마어마한 양의 항공기를 생산해낸 소련공군은 수적으로 열세였던 독일 공군의 작전 공백을 틈타 독일 육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3] 1분 15초 핫소 폰 만토이펠 당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장을 볼 수 있다. 왼쪽 팔목에 그로스도이칠란트 소매 밴드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4] 現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발티스크[5] Tewes, Die Panzergrenadierdivision Grossdeutschland, S. 513–725, farbige Operations-Karten vom ZMSBw S. 1279–1288.[6] 기 사예르의 회고에 따르면 운 좋게 해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덴마크에 도착하였고 이후 영국군에게 항복하여 귀향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독일군에 입대한 병사들은 반역죄로 총살해버렸지만 기 사예르는 어머니가 독일인이었기에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는 조건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7] 초대 총통경호대대 사령관은 에르빈 롬멜소장이었다. 폴란드 침공 당시 에르빈 롬멜은 히틀러 근접 경호 지휘를 맡으며 친분을 다져나갔고 이 친분을 십분 활용해 제 7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8] 장교는 금색, 부사관은 은색 철제, 병들은 견장에 직접 수놓거나 별도로 자수된 토시형 견장 형태를 썼다. 병의 포제 배지들의 글자색은 자기 병과색 실로 자수놨다.[9] 히틀러의 아프리카인 피해자들: 1940년 침공에서의 독일군의 흑인 병사들 학살[10] 함부르크 사회연구소: 국방군의 범죄, 1941~1944년 전멸전쟁의 양[11] 사소한 오류로 위 문서를 읽다 보면 알겠지만 대독일사단은 동부전선에서 활동한 부대로 촐러 일병이 대독일사단으로 소속을 옮기지 않은 이상 대독일사단의 일원으로는 240명의 미군을 죽일 수는 없었다.[12] 결국 쿠데타 세력이 아돌프 히틀러 암살에 실패하면서 히틀러의 명령으로 쿠데타 세력을 체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13] 참고로 수도경비대대는 대대장이 사단장으로 쾌속 진급하지만 대대 자체는 전술한 것처럼 긴급 사단으로 편성되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