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colcolor=#fff> 독일 육군최고사령부 총참모장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테오도어 베크 Ludwig August Theodor Beck | ||
출생 | 1880년 6월 29일 |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비스바덴 | ||
사망 | 1944년 7월 21일 (향년 64세) | |
나치 독일 프로이센 자유주 베를린 | ||
국적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
직업 | 군인 | |
최종 계급 | 상급대장 | |
경력 | 독일 육군최고사령부 총참모장 | |
1935년 7월 1일 ~ 1938년 8월 31일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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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군인이다.2. 생애
2.1. 초기 경력
프로이센 비스바덴에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집안의 전통에 따라 육군 장교로 복무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 아닌 사업가였다고 한다.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서부전선에서 활약했으며, 주로 참모 직책에 복무했는데, 이는 독일 육군의 성향상 그가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봐야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4천명으로 제한된 육군 장교단의 일원으로 육군에 남는 것을 허락받아서 계속 복무하였다. 1932년 군사국(Truppenamt) 총장에 부임하는데 이는 베르사유 조약에 금지된 참모본부 총장의 위장 명칭이었다. 그는 여러 군사저작을 발표하여 독일군 내에서 지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2.2. 나치 집권
그는 당시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던 나치를 혐오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군국주의, 왕정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귀족 출신이 다수인 독일 육군 장교단의 공통적 정서였다. 극우적인 면은 비슷했지만, 귀족적이며, 왕정복고적인 독일 육군 장교단이 귀족을 부인하는[1] '시민계급의 집단'을 배척하는 건 당연지사. 그리하여 나치 집권 전에는 군내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어기고 나치당에 가입한 장교들을 추방하는데 앞장섰다.나치당 집권 이후에는 육군 총참모장으로서 전쟁을 서두르는 히틀러의 모험주의가 다시한번 독일을 재앙에 빠뜨릴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국방군의 힘으로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고 하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히 무산되었다.
베크 장군 본인은 평화주의자는 아니었고, 그저 나치 일당의 서두른 전쟁이 독일을 다시 망하게 한다는 신념으로 계속적으로 히틀러의 모험주의에 제동을 걸려고 했으나, 뮌헨 협정으로 영프의 방관속에 주테덴란트를 할양받은 히틀러가 외교적으로 승리를 거두자, 군의 주류는 히틀러의 모험주의에 점점 협조적으로 변했고, 베크는 군에서 입지가 점점 좁아진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안슐루스 때도 독일군을 출동시키는데 매우 주저했다.
결과적으로 베크는 1938년 육군 총참모장 직을 사임하고, 후임은 프란츠 할더 장군이 이어받는다. 할더는 초반에는 베크와 비슷한 입장이었다가 히틀러의 침략전쟁에서 점점 협조적으로 변해서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대성공에 큰 활약을 한다.
2.3. 히틀러 암살 음모
베크는 예비역이 된 후 여러 음모자들과 규합해 히틀러 암살 음모를 꾸몄으나 전쟁 초반에는 히틀러의 대성공으로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 이후 전황이 악화되어 패색이 짙어지자, 베크를 중심으로 한 음모자들은 히틀러를 암살하여 정권을 잡고 연합국과 정전협상을 하기로 음모를 짰다. 거사가 성공하면 베크는 임시 국가원수에 취임하여 군을 수습할 작정이었다.하지만 1944년 7월 21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은 실패로 돌아갔고 베크와 음모 주동자들은 국내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에게 체포되었다. 어느정도 이들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프롬 장군은 음모 주동자들에게 가해질 심한 고문을 우려했고, 심문받을 경우 자신이 연루된 것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일반참모 대령 등 다른 연루자들을 총살시키기로 하면서 베크 장군에게만은 자살을 권유했고, 베크는 프롬이 준 발터 PP 권총으로 자살하였다.[2]
3. 평가 및 기타
미치광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지금도 영웅시 되고 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처럼 평화주의자라기보다는 복고적 보수주의자였다. 베크를 중심으로 한 음모가들은 정권을 잡으면 서방과는 강화를 하고 소련과는 전쟁을 계속한다는 망상을 품고 있었는데, 이들이 가진 현실인식의 한계였다. 자신들의 전쟁을 연합국과 추축국의 전쟁이 아닌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한 공산주의와의 성전쯤으로 여겼고, 서방 국가들과의 전쟁은 어쩌다보니 발생한 불우한 사고의 집합체에 가깝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프리드리히 파울루스나 프란츠 할더처럼 실전 부대 지휘 경험은 적고 오로지 참모로만 경력을 쌓은 장교들처럼, 베크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퇴역하면서 대규모 전역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일선의 장교들에 비해 결단력은 서투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데리안은 자기 자서전 《한 군인의 회상》에서 자신에게도 음모가들이 접근했으나, 베크가 주동자인 것을 알고 "그렇게 결단력 없는 인물이 성공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구데리안은 병무국 시절부터 베크를 낮게 평가했는데, 사실 베크 또한 육군의 기계화에 대해서 선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작전명 발키리에서는 배우 테렌스 스탬프가 베크 역을 맡았는데, 이미 퇴역했기 때문에 군복이 아닌 사복 차림으로 등장한다.[3] 여담이지만 이 배우는 슈퍼맨 2에서는 조드 장군 역을 했다. 의도는 다르지만 반역을 꾀한다는 면에서 조드와 베크는 통하는 면이 있다.
[1] 나치당은 극우정당답지 않게 시작은 극좌 사회주의 운동과 비슷하게 자본주의와 계급사회를 극심하게 부정해왔다. 이는 유럽 전체에 영향을 끼쳤던 러시아 혁명의 영향이다. 실제로 정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제외한 모든 귀족계급을 해산시켰다. 사실 히틀러는 군대의 장성들도 모두 평민들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였으나 프랑스와 영국을 타개해야 하는 상황에 그러지 않았던 것이고 끝까지 군대 내 귀족을 해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SA를 결국 해산시켰다.[2] 초탄이 빗나가는 바람에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 하다, 결국 두 번째 탄으로 자살에 성공했다.[3]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군복을 입지 않았다고 묻자 "이 저항은 군인의 뜻이 아닌 국민의 뜻이란 걸 보여줘야 하네."라는 말을 하며 군복을 끝까지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