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20:44:25

발터 베버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상급대장 OF-9
Generaloberst / General admiral
파일:Si_4a.png / 파일:130px-WMacht_Lw_OF9_GenOberst_1945.png / 파일:AA-2A.png
육군
상급대장
한스 폰 젝트 | 쿠르트 폰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 | 게오르크 린데만 | 베르너 폰 프리치 | 루트비히 베크 |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 프리드리히 프롬 | 하인츠 구데리안 |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 쿠르트 하제 | 에리히 회프너 | 프란츠 할더 | 헤르만 호트 |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 알프레트 요들 | 로타르 렌둘릭 | 에르하르트 라우스 |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 | 요하네스 프리스너 |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 에두아르트 디틀 | 카를 힐페르트 |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공군
상급대장
쿠르트 슈투덴트 | 에른스트 우데트
해군
상급대장
알프레트 잘베히터 | 오스카 쿠메츠 |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 빌헬름 마르샬 | 발터 빌헬름 율리우스 바르체하
병과대장 OF-8
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
파일:Si_4b.png / 파일:200px-WMacht_Lw_OF8_GenWaGtg_h_1945.svg.png / 파일:AA-3A.png
육군
병과대장
보병대장
프란츠 마텐클로트 | 안톤 도슈틀러 | 프리드리히-빌헬름 뮐러 | 쿠르트 폰 티펠슈키르히 | 테오도어 부세 | -한스 크렙스 |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 디트리히 폰 콜티츠 | 카를 에두아르트 |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명예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기갑대장
핫소 폰 만토이펠 | 발터 벵크 | 빌헬름 리터 폰 토마 | 발터 네링
포병대장
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 헬무트 바이틀링 | 에두아르트 바그너 | 에리히 마르크스 |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
통신대장
에리히 펠기벨 | 알베르트 프라운
산악대장
카를 에글제어 | 프란츠 뵈메
공병대장
발터 쿤체
공군
병과대장
브루노 브로이어공수 | 오이겐 마인들공수 | 울리히 케슬러조종
해군
대장
빌헬름 카나리스 | 오토 칠리악스 | 귄터 뤼첸스
중장 OF-7
Generalleutnant / Vizeadmiral
파일:Si_5a.png / 파일:1256px-WMacht_Lw_OF7_GenLt_h_1945.svg.png / 파일:AA-4A.png
육군
중장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 헬무트 폰 판비츠 | 한스 슈파이델 |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 아돌프 호이징거
아구스틴 무뇨스 그란데스 | 에밀리오 에스테반 인판테스
안드레이 블라소프 | 보리스 시테이폰
공군
중장
발터 베버 | 아돌프 갈란트 | 테오도어 오스터캄프
해군
중장
-
소장 OF-6
Generalmajor / Konteradmiral
파일:Si_6a.png / 파일:200px-WMacht_Lw_OF6_GenMaj01_h_1945.svg.png / 파일:AA-5A.png
육군
소장
발터 도른베르거 | 카를 게프하르트 | 카를 브란트 | 헤닝 폰 트레슈코프 | 하인리히 크라이페 | 한스 오스터 | 오토 에른스트 레머
미하일 스코로두모프 | 이반 코노노프 | 세르게이 부냐첸코
공군
소장
디트리히 펠츠
해군
소장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독일 국방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독일 국방군 해군, 즉 크릭스마리네에만 있는 준장 계급은 미군의 대령에 상응
※ 윗 첨자 : 전사
{{{#!wiki style="margin: -6px -5px; font-size: 0.8em; color:#FFF" ※ 둘러보기 }}}
}}}}}}}}}

<colbgcolor=#666><colcolor=#fff>
발터 베버
Walther Wever
파일:AAF-Luftwaffe-p62.jpg
출생 1887년 11월 11일
프로이센 왕국 브롬베르크
(現 폴란드 쿠야비포모제 주 비드고슈치)
사망 1936년 6월 3일 (48세)
복무 독일 제국 육군
독일 국가방위군 육군
나치 독일 공군
최종 계급 중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알브레히트 기사 훈장 1등급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프리드리히 기사 훈장 1등급
철십자 훈장 1·2등급

1. 개요2. 생애
2.1. 젊고 유능한 프로이센 장교2.2. 군에 계속 남게 되다2.3. 전략폭격 지지자2.4. 의문의 사고사
3. 기타
3.1. 가족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독일 공군의 초대 참모총장을 역임한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중장이었다.

2. 생애

2.1. 젊고 유능한 프로이센 장교

발터 베버가 태어났을 때, 그의 고향은 포젠이다. 현재 폴란드 영토의 서부에 속해있지만 당시만 해도 독일 제국 영토였던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프로이센 왕국의 최고 감찰관이라는 고위 관리직을 지낸 카를 게오르크 베버였으며, 아버지는 베를린 은행장을 지낸 아르놀트 베버였다. 아비투어에 합격한 후 대학으로 가는 대신 군사학교에 들어가 군인이 되는 길에 발을 내디뎠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발터 베버는 일선이 아닌 후방에 있는 사령부에서 참모장교로 근무하며 방어 대형을 고안하거나 연합군에 대한 반격 작전을 입안하는 작업을 보좌하면서, 전략적인 안목을 키우게 된다. 1917년부터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가 이끄는 육군 최고사령부의 작전과에 전속되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를 결정했을 때 그에게 네덜란드로 망명할 것을 권고한 것은 베버 혼자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서 새롭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자를 황제를 섬기듯이 잘 따를 것이라며 공화제를 찬성한 장교 중 하나이기도 했다. 1919년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명령에 의해 참모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회고록를 필기했다. 그런데 그가 제 I 군관구 참모부에 전속을 간 싯점에서 카프 반란이 일어났다. 바이에른 출신이 아닌 장교로서는 처음으로 사단 참모 직위가 주어질만큼 유능했던 그는 뮌헨 봉기도 겪게 된다.

2.2. 군에 계속 남게 되다

항복 이후, 대부분의 장교들은 제대 조치되었지만 베버는 그 꼼꼼한 실무 능력 덕택에 병무청에 복직되었고, 1931년부터는 육군 훈련부장을 맡게 된다. 이렇게 육군에 복무하고 있던 베버는 1933년 9월 1일에, 새롭게 창설될 독일 공군을 준비하는 기관인 제국항공성으로 전출 명령을 받고 항공통수국장에 취임했다. 1935년 3월부로 제3제국징병제가 부활되면서 이제 모든 가면을 벗어던진 루프트바페는 초대 공군 참모총장으로 발터 베버를 선택하였다.[1]

2.3. 전략폭격 지지자

이탈리아의 항공 이론가 지울리오 두헤 장군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베버는 참모총장이 되자마자 항공전의 전략 전술을 철저히 분석하는 기관을 만들고 이론을 발전시켜 현대적인 공군력 건설에 필요한 기술적 선행 과제들을 결정했다. 공군의 작전 운영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은 급강하 폭격기와 전투폭격기, 경폭격기지만, 종래 전쟁의 승리를 가져올 무기는 전략폭격기라는 이론을 강하게 주장하며 주변 장교들도 설득시켰으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반신반의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터 베버는 상관 헤르만 괴링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는 자신의 제한적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풀어나가려고 했다. 이리하여 베버 장군은 우랄 폭격기 계획이라고 명명한 전략폭격기의 개발 사업에 나서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치 독일도 Ju 89Do 19 같은 시제 중폭격기를 갖게 되었으나, 히틀러 정권은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고, 당시 독일의 한정된 국력으로는 전술 폭격기로 가까운 장래에 전쟁을 벌이는 쪽으로 전략을 세우고 있었던 탓에 안그래도 많은 자원이 필요하고 기술적으로 어려운 중폭격기 개발에는 속도가 붙지 않았다. 결국, 그가 죽기 몇 주전에 이미 우랄 프로젝트는 중지되고 있었으며, 그는 벽에 부딛히고 좌절하게 된다.

2.4. 의문의 사고사

1936년 6월 3일, 직접 조종간을 잡고 몰던 연락기 하인켈 He 70드레스덴 근교의 비행장에서 이륙한 직후 추락했고, 베버는 동승한 기술장교와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고 후 원인 분석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이륙 전에 모두 제거하게 되어 있는 조종타면의 고정핀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것이었다. 승강타에 고정된 채로 발견된 핀은 이륙 직전 점검을 소홀히 했거나, 누군가 고의적으로 끼워놓았다는 의심이 들만한 정황이었으나, 결국 사건은 사고사로 정리되었다.

3. 기타

3.1. 가족

베버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둘 모두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해 2차 대전 동안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었다.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 붙여진 둘째 아들 발터 베버(1923. 1. 16~1945. 4. 10) 중위는 250회나 출격하며 적기 44대를 격추한 에이스로서 1945년 4월에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JG 51에서 제3비행중대장으로 활동하던 때에는 Il-2를 5분간 3대나 격추시킬 정도로 숙련된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들 베버는 1945년 2월에 JG 7로 옮겨져 제트전투기 Me 262로 갈아타고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계속 싸웠으나, 패전을 맞기 직전인 4월 10일에 베를린 근교의 노이루핀(Neuruppin) 상공에서 연합군P-51 전투기에게 격추당해 전사하고 말았다.


[1] 공군참모총장의 후보로써 마지막까지 경쟁하였던 상대방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