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3:39:01

카를 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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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대장 OF-9
Generaloberst / General 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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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슈투덴트 | 에른스트 우데트
해군
상급대장
알프레트 잘베히터 | 오스카 쿠메츠 |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 빌헬름 마르샬 | 발터 빌헬름 율리우스 바르체하
병과대장 OF-8
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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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병과대장
보병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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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 헬무트 바이틀링 | 에두아르트 바그너 | 에리히 마르크스 |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 | 프리츠 린데만
통신대장
에리히 펠기벨 | 알베르트 프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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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에글제어 | 프란츠 뵈메
공병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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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병과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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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대장
빌헬름 카나리스 | 오토 칠리악스 | 귄터 뤼첸스
중장 OF-7
Generalleutnant / Vize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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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중장
한스 폰 보이네부르크-렝스펠트 |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 헬무트 폰 판비츠 | 한스 슈파이델 |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 아돌프 호이징거 | 아구스틴 무뇨스 그란데스 | 에밀리오 에스테반 인판테스
공군
중장
발터 베버 | 아돌프 갈란트 | 테오도어 오스터캄프
해군
중장
-
소장 OF-6
Generalmajor / Konter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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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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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소장
디트리히 펠츠
해군
소장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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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첨자 :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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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arl Brandt.jpg
이름 Karl Brandt
카를 브란트
출생 1904년 1월 8일
독일 제국 엘자스-로트링겐 뮐하우젠
(現 프랑스 뮐루즈)
사망 1948년 6월 2일 (향년 44세)
연합군 점령하 독일 바이에른주 란츠베르크 형무소
복무 슈츠슈타펠 (1934년 ~ 1945년)
독일 국방군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중장 (집단지도자)
독일 국방군 육군 의사소장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출생과 성장3. 본격적인 만행 내역4. 몰락5. 전범 재판6. 사형 집행7.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카를 브란트 장군.jpg
친위대 여단지도자 카를 브란트
나치 독일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중장이다.

T-4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감독한 반인륜 범죄자이며, 자국민을 살해한 죄로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인물이기도 한데,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 자체가 단순히 전쟁 행위에 대한 처벌만을 하는 게 아니라 반인륜 행위를 저지른 범죄집단을 국제적으로 단죄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2. 출생과 성장

독일 제국 직할주였던 엘자스-로트링겐에 속한 알사스 지방의 뮐하우젠(현재는 프랑스령)에서 태어난 카를 브란트는 드레스덴 대학, 예나 대학, 프라이부르크 대학, 뮌헨 대학, 베를린 대학 등 여러 대학들을 전전하면서 의학을 공부해 베를린 대학에 재학중이던 1928년에 의사시험에 합격해 면허취득 후 1929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2년 3월 1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브란트는 처음엔 돌격대에 입대했다. 1933년 8월 15일에 아돌프 히틀러의 부관이던 빌헬름 브뤼크너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 브란트가 그를 수술하여 그를 회복시켰다. 이 사실이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 히틀러는 그를 개인 주치의로 임명하려고 했다.

파일:external/spartacus-educational.com/GERbrandtK3.jpg
결혼식 당시의 카를 브란트. 좌측부터 아돌프 히틀러, 아내, 본인, 빌헬름 브뤼크너, 헤르만 괴링.

1934년 3월 1일에 친위대로 이적한 브란트는 총통부 의사로 임명되어 히틀러의 측근이 되었다. 1934년 7월 29일에 정식으로 친위대 요원이 된 브란트는 1940년까지 친위대 본부에서 근무했다. 최종 계급은 슈츠슈타펠 중장무장친위대 중장.
파일:카를 브란트 집단지도자.jpg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중장 브란트

1934년 3월 17일에는 독일의 수영 선수 안니 레본(Anni Rehborn)과 결혼했고 1935년 10월 4일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따서 카를 아돌프 브란트(karl adolf brandt)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 이후에 히틀러의 의사가 된 브란트는 히틀러의 주치의로써 활동하면서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이나 히틀러의 주변 인물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며, 히틀러와는 굉장히 신뢰하는 관계여서 히틀러는 그를 가족 같이 여겼다고 한다. 그렇게 히틀러의 측근이 된 그는 하인리히 힘러, 마르틴 보어만, 헤르만 괴링, 알베르트 슈페어와 같은 히틀러의 핵심 측근들과도 매우 많이 아는 사이가 되었고, 히틀러가 자주 가는 오버잘츠베르크 별장에서 오버잘츠베르크 서클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갈 정도로 나치당에서 가장 위치가 높은 의사였다.
파일:external/spartacus-educational.com/GERbrandtK5.jpg 파일:external/spartacus-educational.com/GERbrandtK6.jpg
카를 브란트와 에바 브라운 카를 브란트와 아돌프 히틀러
여기까지만 요약하면 평범한 의사의 출세 이야기겠지만... 그 이후 악마가 된다.

3. 본격적인 만행 내역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
브란트는 1939년 10월 T-4 프로그램의 감독관으로 임명된다. 임명된 이후 한 일은 유대인 및 정신질환자, 장애인을 대상으로 안락사 실험이었다. 그는 불운한 생명체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부여한다는 목적으로 실시했고, 자신이 이들에게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편안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정의였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스를 이용한 죽음이 가장 인도적인 방법이라면서 적극적으로 가스 학살을 지지했고, 실험자들을 강제로 살균시키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장애인들이나 노인들을 가스실에 밀어넣은 후 살해했으나 나중에는 악질적이게도 생체 실험을 하고 실험 성과를 얻은 다음에 죽였다.

심지어 몰래 1차 대전 참전자와 2차 대전 참전자 중 중증 부상으로 영구적 장애를 얻은 이들 몇몇을 대상에 포함시켜 생체실험에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명령으로 T-4 프로그램은 중지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T-4 프로그램에 관여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고, 안락사 프로그램이 중지된 이후 라벤스브뤽(Ravensbrück)과 아우슈비츠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와 나츠바일러(Natzweiler) 수용소를 비롯한 수많은 강제수용소에서 직간접적으로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을 지원하고 참여하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 관여한 생체실험을 요약하면 이렇다.
  • 냉동 실험
나치의 과학자들은 군함 승조원들이나 항공기 승무원들이 탈출 후 착수할 경우 얼마나 차가운 바다에서 버틸 수 있고,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빠른지를 연구하기 위해 냉동 실험을 실시했는데 카를 브란트는 이 실험을 지원했다. 실험을 한다는 목적으로 얼음물이 든 탱크에다가 피해자들의 옷을 강제로 다 벗긴 다음에 탱크에 집어 넣은 후 얼마만에 사람이 얼어죽는지를 알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얼음물에 넣어두어 피해자들은 온몸이 얼어 사망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거의 얼어죽기 직전까지 실험을 했다가 그들을 탱크에서 꺼낸 다음 몸을 녹이는 실험을 했는데 이 때 온갖 미친 방법들을 동원했다.

대표적인 것이 여자들이 몸을 녹이는 방법 중에는 강간을 이용한 해동 방법도 실험하여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을 당했다. 다만 이 실험에 참여한 남성 피실험자들 역시 전쟁 포로들로서 피해자의 입장이지 여성들을 강간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얼음물 속에서 의식을 잃었기 때문에 여성을 강간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도 않았다.

또한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명목상으로는 자원자였다. 이들이 자원한 이유는 그들이 원래 있던 수용소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기 때문에 그 곳을 벗어나기 위해 실험에 자원한 것이었다. 즉 남성에 의한 강간이라기보다는 시스템에 의한 강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행위를 통한 해동방법은 실험에 참가한 대다수 의사들도 반대했던 방법인데, 하인리히 힘러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실시되었다고 한다. 물론 실험 결과 이 방법은 비실용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감압과 냉동실험의 담당자는 '지크문트 라셔'라는 의사였다. 이 인물은 부인이 48세의 나이로 자식 3명을 낳은 일로 힘러의 신임을 얻어 T-4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세 자식이 부인이 낳은 것이 아니라 고아원에서 빼돌린 것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결국 이들 부부는 슈츠슈타펠에 의해 수용소로 보내져 처형당했다.
  • 말라리아 실험
말라리아에 대한 위험성과 치료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요제프 멩겔레를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이 약 천명이 넘는 희생자들을 실험했고, 희생자들은 사망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살아남더라도 죽을 때까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나치는 전쟁 당시에 겨자 가스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와 나츠바일러(Natzweiler) 수용소에서 피해자들을 겨자 가스에 노출시킨 후에 상태를 보았다. 피해자들은 처음에는 멀쩡했으나 가스에 노출된 후 24시간 안에 심한 가려움증과 피부 자극 증세가 나타나고, 노란색 액체로 가득찬 거대한 수포가 노출된 부위에 생겼다. 겨자 가스 기체는 면이나 모 같은 일반적인 천을 간단하게 통과하기 때문에 노출 당시에 옷으로 가리고 있던 부위라도 수포가 생겼으며, 안구에 노출되었을 시에는 처음에는 따갑다가 결막염을 일으키고, 눈꺼풀이 부어올라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한다.

고농도의 가스를 흡입한 경우 호흡기의 출혈과 수포를 일으켜 점막에 손상을 주고 폐수종을 일으켰으며, 겨자 가스에 노출되어 입는 환부 부상은 화학물질로 인한 화상으로, 노출된 가스 농도에 따라 1도에서 2도 화상, 심한 경우에는 3도 화상까지 이르게 되었다. 심한 화상(신체 면적의 50%를 넘는 화상)은 치명적이며 환자가 며칠이나 몇 달 후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겨자 가스에 노출되었다가 생존한 자는 겨자 가스의 돌연변이 유발과 발암성 때문에 에 걸릴 확률이 높아졌다고 한다.
이 실험은 다양한 독극물에 대한 효능을 알기 위해 실험했다. 실험자들은 엄청난 양의 독을 투입받아 많은 이들이 사망했으며 음식에 독을 타서 실험자들에게 몰래 먹이기도 했다. 또한 독을 이용해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실험했는데,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독을 바른 총알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질산염을 첨가한 총알을 개발했는데, 이 총알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사격 실험을 자행하여 수많은 포로들을 죽게 만들었다. 실험체가 된 포로들은 독으로 인해 온몸이 마비되거나 고통을 겪다가 사망했다.
  • 전염병 황달 실험
여러 가지 질병들에 대한 치료와 관찰을 위해 시작되었다. 카를 브란트는 라벤스뷔크에서 피해자에게 질병과 황달액을 강제로 투입시킨 후 실험자들이 죽을 때까지 방치하거나 백신을 개발한다는 이유로 온갖 약물을 투여했다. 또한 발데마어 호펜이 주도적으로 실시한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황열병, 천연두, 파라티푸스, 콜레라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바이러스의 위험성과 치료법, 백신 개발법을 개발하기 위해 온갖 약물을 투여하는 실험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 실험 보고서에 따르면 실험자의 90% 이상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안다고 죽을 때까지 환자를 방치하거나 바이러스를 위한 백신 개발을 목적으로 온갖 괴상한 물질을 투입하여 피해자들이 처참히 사망하게끔 하였다.
  • 바닷물 주사 실험
이 실험은 공군의 조종사와 해군 선원들이 바닷물을 마실 수 있는가를 실험하기 위해서 실행된 것으로 피해자들을 음식과 물을 먹지 못하도록 강제로 막은 후 오로지 화학약품으로 처리된 바닷물만 마시게 했다. 결국 장기가 엄청나게 손상되었고 피해자들은 고통 끝에 사망했다.
  • 근육 및 신경 재생과 뼈 이식 실험
이 실험의 목적은 외과 시술의 발전이라는 목적으로 행해졌는데 육군의 부상병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행되었다. 이 실험은 피해자들에게 근육과 뼈, 그리고 피부나 팔 다리와 같은 부분들을,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마취도 하지 않고 잘라낸 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잘라낸 부위를 이식하는 미치광이 실험이었다. 희생자들은 서로 다른 혈액형 때문에, 혹은 실험 중 과다출혈로 인해 사망했다. 개중 아주 운이 좋으면 몸의 일부가 절단되는 정도였지만 심한 사람들은 사지가 갈가리 찢기기까지 했으며 평생동안 몸의 일부가 잘린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 술폰아미드 실험
술폰아미드라는 특별한 화학 물질이 인체에 어떠한 효과를 미치는지 실험하기 위해서 실시되었다. 술폰아미드는 영어식으로 '설폰아마이드'라고도 읽는데 항균작용이 있는 물질이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이 허구헌날 상처에 뿌리는 하얀 가루인 '설파제'가 바로 이것이다. 테오도어 모렐이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즉 설파제 자체가 딱히 해로운 물질은 아니다. 문제는 게프하르트는 술폰아미드가 상처를 치료할 수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술폰산의 다른 화합물을 써서 실험을 진행했다는 것. 그 이유는 카를 게프하르트 항목 참조.

술폰아미드를 사용한 실험자들은 희생자들에게 우선 다양한 종류의 박테리아, 예를 들어서 연쇄상구균 가스 괴저균 또는 파상풍균 등과 같은 물질들을 투입하였다. 실험의 현실성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유리조각이나 철 조각, 나무 조각으로 실험 대상자들이 상처가 날 때까지 비비다가 상처가 나면 그 상처에 술폰아미드를 투입하여 그 효과를 본 것이었다. 물론 이 술폰아미드에는 다른 화합물이 섞여 있었기에 약품을 상처에 투입하자 그 부위가 썩어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이런 실험을 할 당시에 카를 브란트는 아이와 노인들도 대상으로 하여 가스나 약물을 주입시켰고 실험 대상들을 독일을 위하지 못하는 쓸모 없는 식충이들로 비유했다. 훗날 T-4 프로그램이 시민들의 항의로 중단되자, 장애인들이 자연사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일부러 병균을 주입하거나 일부러 며칠이 넘는 시간 동안 굶겨 죽게 만들었다. 심지어 실험 당시에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울부짖기도 했는데도 냉정하게 무시했으며, 어떤 포로가 "그냥 총살형으로 죽여 달라. 무엇 하려고 가스실에 집어넣고 구차하게 죽이려고 하느냐." 하고 외쳤는데#, 포로들을 실험 성과도 없이 그냥 죽이기 싫어서 반드시 성과를 얻은 후에 죽였다고 한다.

카를 브란트는 포로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없게 만들어서 그들에게 더욱 절망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가스실에는 각종 이상한 약물이 넘쳐났고, 얼굴이 흉측하게 된 사람, 몸이 썩어들어 가는 사람, 몸이 녹아가는 사람 등 각종 기괴한 모습이 된 사람들 또는 시신이 가스실에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실험의 내용은 아마도 극히 일부일 것이다. 이들이 전후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면 무슨 일이 있을지 뻔히 알았던 관계로 철저하게 자료들을 파기해 버렸고, 생존자들을 죽여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실들이 묻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죄들이 전부 묻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이러한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이 하나하나 해외에도 알려졌다. 이러한 악질적인 생체실험은 나치의 전쟁범죄로 분류되어 전후 생체실험 혐의로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 회부된 23명의 의사에 대한 재판의 명칭이 'Karl Brandt et al.(카를 브란트 등.)'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4. 몰락

1944년 10월 5일에 한스 카를 폰 하셀바흐(Hans Karl von Hasselbach)와 함께 테오도어 모렐 의학박사가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내는 바람에 신망을 잃어 마르틴 보어만으로부터 총통부 의사직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모렐은 히틀러를 마약 중독자로 만든 돌팔이로서 비록 히틀러의 주치의였긴 했지만 이 사람은 민족 학살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가담하지 않았고, 생체실험은 의사로서 할 짓이 아니라며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그럼에도 워낙 이 돌팔이의 처방이 효과만큼은 쩔어주게 잘 들어서(장기적으로는 독이었지만) 히틀러가 매우 신임했고, 결정적으로 이 의사양반은 전후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 카를 브란트가 사형 집행되기 일주일 전에 침대에 누워 편히 세상을 떠났다.

카를 브란트는 이제 총통부 의사직에서 해임된데다 전황이 아무리 봐도 불리해지는 상황에 이르자 자신과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 소련군에게 체포될 것을 우려한다. 그래서 우선 연합군이 있는 쪽으로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미군 쪽으로 보냈지만, 이것이 히틀러에게 들통나버리고 말았다. 히틀러는 자신과 매우 가깝게 지냈던 카를 브란트의 배신에 매우 분노한다. 결국 카를 브란트는 1945년 4월 16일에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음날 사형선고를 받았고 교도소로 들어간다.

이 때 그와 친분이 있었던 알베르트 슈페어하인리히 힘러가 그가 총살되지 않도록 도왔다. 카를 브란트의 아내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아내와 굉장히 친했고 알베르트 슈페어 본인도 카를 브란트와 꽤나 친했기 때문에 석방시켰다.

그리고 히틀러가 자살하고 며칠이 지난 1945년 5월 2일 카를 브란트는 이제 석방되었으나 1945년 5월 23일에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 회부된다.

5. 전범 재판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 회부된 카를 브란트는 냉동실험, 말라리아 실험, 독가스 실험, 술폰아미드 실험, 근육 및 신경 재생과 뼈 이식 실험, 바닷물 주사 실험, 전염병 황달 실험, 살균 실험 및 발진티푸스 실험의 실행 및 계획 혐의로 기소됐다. 나치 독일의 T-4 프로그램에서의 안락사 실험과 프로그램 계획 및 SS에서 침략전쟁에의 협력, 전쟁범죄 및 비인도적인 범죄혐의로 유죄를 판결받았고 사형이 언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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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8월 20일 전범 재판장에서의 카를 브란트

그는 재판에서도 자신은 잘못한 점이 조금도 없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실시했던 안락사 프로그램의 유용성과 효율성을 주장하며 재판관을 설득하려 했으며 안락사 프로그램이 얼마나 인도적인 방법인지를 주장하는 미치고 말 같지도 않은 발언을 일삼았다. 위의 포로가 했던 말을 보면 얼마나 설득력 없는 설득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더 안락하게 죽일 수 있는데도 더 끔찍하게 죽였다.[1]

심지어 나치의 의사들이 실시한 의사실험은 힘러의 지휘 아래 있었으며, 힘러가 시켰으면 그 의사들은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과 나머지 의사들이 저지른 생체실험은 모두 하인리히 힘러가 명령해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2]

6.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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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는 카를 브란트
재판 이후 카를 게프하르트와 카를 브란트 두명은 사형 집행 전날까지 얼굴을 제외하고 동료 수감자와 연합군 헌병(군사경찰)들에게 얻어터진 다음 (파울 하우서 문서의 종전 부분 참조.) 1948년 6월 2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처형 직전까지도 자신이 저지른 만행들을 부정하는 등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며, "나는 발판에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아... 이것은 정치 보복일 뿐이야... 나는 내 조국을 위해서 일했다."("Es ist keine Schande. auf dem Scaffold zu stehen. Das ist nichts anderes als politische Rache. Ich habe meinem Vaterland ebenso gedient wie anderen vor mir.")라는 말을 하며 정신승리를 했다.

여기서 더 말하려고 했으나 교수형을 집행하는 군인이 짜증이 났는지 그냥 교수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이미 얼굴 제외 만신창이 상태로 저항도 못하고 목매달렸기에 데드맨 워킹 중에 한 망언이 곧 유언이 되었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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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브란트의 아내 아니 레본(Anni Rehborn) (1904년 8월 25일 ~ 1986년 1월 15일)

아니 레본은 카를 브란트의 아내가 된 이후 1935년 10월 5일에 아들 카를 아돌프 브란트를 낳았고, 남편이 친했던 만큼 히틀러의 주변 인물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바 브라운알베르트 슈페어의 아내 마르가레테 슈페어와 친하게 지냈으며, 전쟁 범죄와는 연관이 전혀 없었기에 간단한 조사를 받은 뒤 석방되었다. 이 점은 히틀러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 뒤 평범하게 살다가 81살 나이로 숨을 거뒀다. 오히려 그녀는 "나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편이 했던 만행까지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녀의 오빠인 율리우스(Julius Rehborn, 1899. 12. 30~ 1987. 11. 27)와 여동생 하니 레본(Hanni Rehborn, 1907. 11.20 ~ 1987.11.30)도 수영 선수였다고 한다.


[1] 당초에 이런 인간 말종들이 실행한 실험들은 알고 보면 그 성과는 딱히 대단하지 않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동시기 일본이 운용한 731 부대 역시도 연구 목표가 세균전, 화학전이었기에 세균전, 화학전 분야라면 모를까 의학에서의 성과는 미비했다. 이들의 실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유용성과 효율성'은커녕 '사람을 죽이기 위한 효용성'에도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유용성과 효율성'이라는 분야라면 차라리 아우슈비츠 같은 곳이 더 낫다. 거기는 진짜로 많은 인명을 빠르게 살상하기 위해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 물론 당초에 분야 자체부터가 잔악하기 짝이 없기에 그걸 배워간 이는 없었다.[2] 이 논리도 중견급이 많이 써먹던 논리로, '난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오.' 하는 투의 말로 자기 죄를 면하고 딴 사람들한테 책임전가를 하려는 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