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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Hans-Karl Freiherr von Esebeck 한스-카를 폰 에제베크 남작 |
출생 | 1892년 6월 10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
사망 | 1955년 1월 5일(향년 63세)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이절론 |
복무 | 독일 제국군 독일 국방군 |
주요 보직 | 제15 기갑사단장 제57 기갑군단장 빈 군관구 사령관 |
최종계급 | |
주요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 -북아프리카 전선 -바르바로사 작전 |
서훈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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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 시절 한스-카를 폰 에제베크 남작 |
2. 생애
에제베크는 1892년 6월 10일 군인 가문에서 왕실 말 사육 책임자였던 독일제국군 소장 발터 폰 에제베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제베크는 1911년 9월 25일에 예비후보생으로 제3 근위대 울란연대에 입대했고,1912년 6월 19일에 사관생도가 되었다. 1912년 5월 4일부터 1913년 1월 18일까지는 안클람 전쟁학교를 다녔다. 1913년 2월 18일에는 소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전선으로 보내졌고, 전쟁이 발발한 1914년에 전공을 세워 1,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1916년 6월 6일에 그는 중위로 진급했고, 1917년 8월 중순에 참모로 6군단 제3근위기병여단의 부관이 되었다. 1차 대전 종전 뒤에도 그는 계속 군에 남아 국가방위군에서 복무를 이어갔다.제2차 세계 대전 중, 폰 에제베크는 1939년 폴란드에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을 처음 만났고, 둘다 반나치주의자였기에 가까운 사이가 된다. 이후 프랑스 침공에서 제6 소총여단장으로서 1940년 7월 4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15기갑사단을 지휘했고, 동부 전선에서 제57 기갑군단을 지휘했다. 1944년 7월에는 제17군구(비엔나)의 사령관이 되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발키리 작전이 베를린의 육군 본부로부터 내려왔을 당시 그의 부관이자 반나치주의자였던 하인리히 코드레 대령이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그는 상관이던 에제베크에게 이를 알리기도 전에 즉각적으로 작전 수행을 지시했다. 코드레 대령은 작전 수행 서명이 권한이 없는 비츨레벤 원수의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것이 쿠데타임을 알아챘고, 사후보고를 받은 에제베크 또한 이미 쿠데타 계획을 알고 있었기에 작전 진행을 승인하고 지속을 명한다. 코드레 대령의 빠른 대응과 오스트리아 지역 친위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빈 군관구에서는 발키리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후 쿠데타가 실패하고 그는 다음날 7월 21일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어째서인지 사형은 면할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사후재가를 한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남은 전쟁 기간 동안은 계속 복역하다가 종전을 맞아 석방되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며, 1955년 1월 5일 63세를 일기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