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콘라트 아데나워 | 마르틴 루터 | 카를 마르크스 | 한스, 죠피 숄 남매 | 빌리 브란트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아돌프 콜핑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헬무트 콜 | 로베르트 보쉬 | 다니엘 퀴블뵈크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콘라트 추제 | 요제프 켄테니히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카를하인츠 뵘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헬무트 슈미트 | 레진 힐데브란트 | 알리체 슈바르처 | 토마스 고트샤크 |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미하엘 슈마허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 귄터 야우흐 | 디터 볼렌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얀 울리히 | 슈테피 그라프 | 사무엘 하네만 | 디트리히 본회퍼 | 보리스 베커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프란츠 베켄바워 | 오스카 쉰들러 | 네나 | 한스 디트리히 겐셔 | 하인츠 뤼만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하랄트 슈미트 | 프리드리히 대왕 | 임마누엘 칸트 | 패트릭 린드너 | 하르트무트 엥겔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힐데가르트 폰 빙엔 | 하이노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마를레네 디트리히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로베르트 코흐 | 요슈카 피셔 | 카를 마이 | 로리오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루디 푈러 | 하인츠 에르하르트 | 로이 블랙 |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 볼프강 아펠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알렉산더 폰 훔볼트 | 피터 크라우스 | 베르너 폰 브라운 | 디르크 노비츠키 | 캄피노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 프리드리히 실러 | 리하르트 바그너 | 카타리나 비트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프리츠 발터 | 니콜 |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 오토 릴리엔탈 | 마리온 돈호프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토마스 만 | 헤르만 헤세 | 로미 슈나이더 | 스벤 하나발트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빌리 밀로위치 | 게르하르트 슈뢰더 | 요제프 보이스 | 프리드리히 니체 | 루디 두치크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카를 레만 | 베아테 우제 | 트뤼머프라우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헬무트 란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알브레히트 뒤러 | 막스 슈멜링 | 카를 벤츠 | 프리드리히 2세 | 라인하르트 메이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하인리히 하이네 | 게오르크 엘저 | 콘라드 두덴 | 제임스 라스트 | 우베 젤러 | |||||
출처 | |||||||||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666><colcolor=#fff>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Claus von Stauffenberg | |
본명 | 클라우스 필리프 마리아 유스티니안 솅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1] Claus Philipp Maria Justinian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
출생 | 1907년 11월 15일 |
독일 제국 예팅겐 | |
사망 | 1944년 7월 21일 (향년 36세) |
나치 독일 베를린 | |
작위 | 백작 |
직업 | 군인 |
계급 | 독일 국방군 육군 일반참모 대령 |
복무 | 1926년 ~ 1944년 |
가족 | 배우자 (1933년 결혼) 자녀 5명 |
종교 | 가톨릭 |
서훈 | 1급 철십자장 2급 철십자장 동부전선 종군장 전상장 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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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식들과 함께 있는 슈타우펜베르크 |
지금은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이다. 물론 무엇을 감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배신자로 역사에 기록되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배신자가 될 것이다.
― 거사를 앞두고.
독일의 군인.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인물이다.― 거사를 앞두고.
2. 생애
2.1. 초기
풀네임에 붙어 있는 '그라프(Graf)'에서도 알 수 있듯 남부 독일의 유서 깊은 가톨릭 집안인 슈타우펜베르크 백작가[2]의 네 아들 중 셋째이자, 실질적으로는 막내아들이었다. 그의 형 베르톨트와 알렉산더는 쌍둥이였고, 그는 태어난 후 얼마 가지 않아 죽은 막내동생 콘라트와 쌍둥이였다는 것이다. 연속으로 쌍둥이만 낳은 셈인데, 쌍둥이를 연속으로 낳을 확률은 굉장히 드물다.2.2. 복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최종 계급은 독일 국방군 육군 대령. 견습사관 시절 기병대에서 복무를 시작한 후 초급장교 시기를 줄곧 기병병과 장교로 보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발발 이후 기갑병과로 전과했다. 또한 그 혹독하기로 유명한 육군 일반참모 과정을 졸업한, 후술할 부상만 없었다면 장군이 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을, 장래가 보장되는 인재였다.폴란드 침공 당시 그의 부대(1경사단)는 폴란드군을 상대로 활약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폴란드 침공과 점령, 폴란드인들의 노예화와 식민지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 이유는 그가 전형적인 독일 귀족이었기 때문인데, 당대의 독일 귀족들은 폴란드를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 분할 등을 거치면서 과거 자신들이 정복하고 점령했던 지역으로 간주하면서 폴란드계 거주민들을 자신들의 농노로 생각했다. 독일 귀족들은 폴란드 침공을 자신들의 '광대한 동방 영토'를 되찾을 기회로 여겼고, 슈타우펜베르크도 이에 동참했으며,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을 야만적으로 다루는 독일의 행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아예 이렇게 말했다. "폴란드에 대한 체계적 식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다. 나는 이것이 실행되리라 확신한다."[3]
폴란드 침공에는 열렬한 지지를 보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서 반유대주의 및 러시아인에 대한 국방군 및 SS의 만행을 목도하고 반나치 이념에 기울기 시작했다. 사실 독소전쟁 이전부터 장검의 밤과 수정의 밤을 계기로 히틀러의 행위에 정의를 쫓는 목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고, 자신의 강한 가톨릭적 가치관에 따른 도덕성과 나치즘의 유대인 박해가 상충하는 상황을 점차 생각하면서 나치즘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43년 1월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제10기갑사단 참모장교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배치 불과 1달만인 그해 2월에 튀니지에서 사단 사령부가 영국 공군의 공습을 받았다. 이 공습으로 10기갑사단장이던 볼프강 피셔(Wolfgang Fischer; 1910~1943) 육군 중장(사후 기갑대장으로 추서)이 전사하는 등 10기갑사단 지휘부 장교들 대다수가 죽고 다쳤는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도 중상을 입고 본토로 후송됐다.
슈타우펜베르크 본인은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왼쪽 눈을 실명했고 오른손 전체와 왼손 손가락 2개를 잃어 중증 장애인이 되어 전상장 금장을 수여받았다. 이 정도면 전쟁 말기 60대 노인도 끌고간 국민돌격대 소집도 면제될 만큼의 심각한 장애였기에 본인이 원한다면 퇴역할 수도 있었으나, 계속 근무할 것을 희망하여 후방 참모직인 베를린의 육군 보충군(Ersatzheer)사령부[4]의 동원참모 보직을 받게 되었다.
2.3. 사망
1944년에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여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하고 1944년 7월 21일 새벽에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의 명령에 따라 육군사령부 앞뜰에서 총살되었다.2.3.1.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의 행적
최후의 히틀러 암살계획이었던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사실상의 주동자로서, 전반적인 쿠데타 계획의 수립과 더불어 전쟁영웅/상이군인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아돌프 히틀러에게 접근, 폭탄으로 암살하는 임무를 자청해서 맡았다. 상이군인에 대한 경의와 장애인에 대한 방심을 이용하여 시한폭탄을 사용한 폭탄 테러를 가한다는 기획을 처음 낸 것이 바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본인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평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철저히 수상쩍은 행동을 자제해 왔고, 히틀러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를 중증 장애로 퇴역해 여생을 보내도 됨에도 자진해서 군에 남은 충성심 강하고 성실한 모범적인 장교로 여겼다. 자연히 총통을 만날 일이 있어도 타 장교들보다 몸 검색도 훨씬 덜 받았다.이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예측은 보기 좋게 성공, 히틀러에 대한 암살음모 중 유일하게 실제로 히틀러에게 실질적인 위해를 끼쳤다. 그러나 히틀러를 즉사시키는 것은 실패하였고, 통신두절[5]로 인해 히틀러 암살 여부가 확실시되지 않아 쿠데타 결행이 지연되었다.
결국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베를린으로 돌아와 작전성공을 확언한 뒤에야 쿠데타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암살의 실패 가능성을 우려하는 동료들을 질타,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6]
쿠데타 실패 이후 사령부 현장에서 부상을 입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직후 사건과 연루될 가능성을 우려한 육군 보충군 사령관인 육군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7]의 독단적인 약식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육군총사령부 건물 앞뜰에서 총살형에 처해지는데, 형 집행 직전 슈타우펜베르크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Es lebe unser heiliges Deutschland!
(신성한 우리 독일 만세!)
유언을 끝내자마자 슈타우펜베르크는 바로 총살되었다. 총살된 순서는 제일 마지막이었다. 형 집행 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 즉결처분된 인원들은 프롬 장군의 명령에 의해 그 자리에 급히 매장되었지만 그의 시신이 훗날에 이용될 것을 우려한 SS가 시체를 다시 꺼내 화장해 버렸다. 따라서 그의 무덤은 없으며 그 매장 자리에 오늘날 추모비만 남아있을 뿐이다.(신성한 우리 독일 만세!)
원래는 당시 총살 대상자들 중 계급 및 임관일 순서로 세 번째 총살 대상이 되었으나, 마지막 총살 대상이었던 그의 전속부관 베르너 폰 헤프텐 보병중위(1908년 10월 9일생)가 발포 순간 총살대 앞에 뛰어드는 바람에 거의 동시에 죽었다.[8] 그리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단 이유로 형 베르톨트와 외삼촌 니콜라우스 윅스퀼, 사촌인 크릭스마리네 군법무관(소령급 군무원) 베르톨트 솅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Berthold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등 여러 인물들이 이후 처형당했다. 그나마 다행히 아내와 자녀들은 전쟁 말기의 혼란 때문에 무사히 도피, 처형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후일담
현재 독일에서는 독일 국내 반나치 저항조직의 상징이자 참된 독일 군인정신의 정수로서 신성시되고 있다.안네 프랑크도 이 사건을 은신처에서 듣고 일기로 썼는데(1944년 7월 24일자) 히틀러가 죽었다고 해도 암살범들이 비슷비슷한 군국주의자들이라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고 얼마 안 가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식으로 서술했다.
상술한 1944년 7월 24일자 안네의 일기에 언급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9]
"큰 뉴스! 히틀러 암살계획이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유대인 공산주의자도, 영국의 자본가도 아닌 훌륭한 독일의 장군[10]으로, 그것도 아주 젊은 백작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히틀러는 가벼운 상처와 화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히틀러와 함께 있던 수 명의 장군과 장교가 죽거나 다치고 주범은 사살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전쟁에 지쳐 히틀러를 없애려는 장군이나 장교가 많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히틀러를 제거하면 군인 출신 독재자를 옹립하고, 연합군과 강화를 맺은 다음 재군비를 해서 20년 쯤 지나면 다시 전쟁을 시작할 속셈이겠죠.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로 히틀러의 죽음이 늦춰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적의 독일군들끼리 서로를 죽여준다면 연합군측은 훨씬 유리하고 편하겠죠. 그렇게 하면 소련군과 영국군이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겪는 고생이 가벼워질 테고, 그만큼 빨리 파괴된 자기 나라의 도시 부흥에 착수할 수 있을텐데요."
이스라엘에선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에 대하여 꽤 긍정적으로 본다. 그가 히틀러만 싫어한 게 아니라 그의 일기 및 기록으로 유태인 및 다른 인종 학살을 성토하며 나치를 지지하던 걸 후회하는 게 보이고 행동으로 막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허나 이스라엘 군사학자 마르틴 판크레펠트는 자신의 저서 <전쟁 본능>에서, 귀족이자 군국주의자인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현 독일 연방군에서 자신이 민주주의자이자 본받아야 할 사람이라 묘사되는 것을 보면 태어난 걸 후회할 거라고 평했다.
장남 베르톨트 마리아 솅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Berthold Maria Schenk Graf von Stauffenberg)도 부친의 뒤를 이어 군문을 밟아 서독 육군 장군까지 진급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 종전 후 서독 연방군(Bundeswehr. 현재의 독일 연방군)이 재건된 직후 1956년 육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임관, 남부방면사령부 총사령관을 지낸 뒤 94년에 최종계급 소장(Genaralmajor)으로 38년간의 군생활을 마쳤다. 퇴역 당시 전 독일군에서 최고령자(34년생. 당시 60세)였다고 한다. 훗날 그가 회고하기를, "내가 임관했을 때 모두들 나와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신이 그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아들이냐?'라고 물으면 나는 '그렇다.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참고로 2004년에 그의 70세 생일이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6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았는데 그 장소가 무려 늑대 소굴(Wolfschanze), 그의 아버지가 폭탄을 터뜨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베르톨트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2024년 기준 90세로 아직 생존해 있다.
막내이자 유복녀인 콘스탄체는 작가가 되어 그의 아내이자 남매의 어머니 니나에 관한 서적을 썼고 그녀의 아들 중 하나는 배우가 되어 작전명 발키리에 출연하기도 했다. 역시 2024년 기준 79세로 아직 생존해 있다.
4. 관련 미디어
이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로 알려진 것은 두 편이다. 독일 배우인 제바스티안 코흐가 주연한 슈타우펜베르크[11], 그리고 톰 크루즈가 주연한 작전명 발키리이다.슈타우펜베르크는 극적인 전개보다는 암살 시도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천천히 그려 가는 모습이 돋보이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그의 조력자인 육군소장 헤닝 폰트레슈코프 장군[12], 에리히 펠기벨 장군 등이 반 나치로 기울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다. 7월 20일 당시 히틀러의 지휘소에서 일어난 사건 경과도 생략이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평을 들었다. 다만 그 때문인지 일반 관객들에게는 좀 지루할 수도 있다. 국내판 자막이 심히 엉망인데, 대령이 장군에게 말을 까며 장군은 대령에게 존댓말도 쓴다. 게다가 그 장군의 아라베스크 목깃 장식은 아예 거꾸로 뒤집어져 있다. 다만 독일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모두 줄곧 영어만 해서 몰입력이 떨어지는 작전명 발키리와 달리 배우들이 독일어를 사용하며 독일인 분위기를 내기 때문에 다소 리얼하다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작전명 발키리의 경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유족들은 톰 크루즈의 외양과 연기에 대해 대단히 불만을 품었다는 얘기가 있다. 톰 크루즈는 종교적인 문제로 독일 입국 자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도 한 소리 했다. 키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극중에서 톰 크루즈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연기한 모습이 너무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하게 그려지는 데에 가장 큰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결단력이 대단했고 성미가 불 같았다고 하는데, 톰 크루즈의 연기는 단호하긴 하되 조용하고 차분하면서 부드러운 분위기가 짙었기 때문이다.[13] 오히려 영화에서는 빌 나이가 연기한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이 작중 내내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나왔다. 또한 그의 장남 베르톨트는 톰 크루즈가 사이언톨로지 신자라는 걸 지적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게다가 주요 가담자인 사촌인 해군 법무군무원 베르톨트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 등 여러 인물이 생략되었다. 그리고 자막에서는 슈타펜버그로 나오는 문제가 있기도 했다.
5. 기타
- 슈타우펜베르크가 등장하는 2004년작 슈타우펜베르크뿐만이 아니라 작전명 발키리 역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막이 굉장히 엉망인데, 슈타우펜베르크를 스테펜버그 또는 슈타펜버그라 적어 놨고, 헤프텐 중위가 면접 전에 올브리히트 장군에게 "Heil Hitler, General!"이라고 말한 대사를 "히틀러 장군님 만세"라는 북한이 연상되는 대사로 번역해 버렸다. 당연히 해당 대사의 장군은 히틀러가 아닌 올브리히트를 가리키고, 애초 히틀러는 나치 독일 총통이지 장군이 아니다. 그리고 처음 자막 파일이 풀렸을 때 괴벨스는 고블스로 번역되는 일도 있었다.
[1] 외래어 표기법대로는 '폰슈타우펜베르크'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상 로망어와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고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정확하게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슈바벤 지방의 영주 가문이다. 초기에는 남작 가문이었으나 1791년에 백작가가 되었다.[3] It is essential that we begin a systemic colonization in Poland. But I have no fear that this will not occur". Housden, Martyn (1997). Resistance and Conformity in the Third Reich. New York: Routledge. ISBN 0-415-12134-5.[4] 당시 독일 육군의 보충군은 신규 입영자원을 포함한 육군 보충병력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독일 전국을 13개 군관구로 나누고, 각 군관구에서 신병 및 동원예비군의 소집/동원과 이의 훈련을 책임지는 것이 보충군 사령부의 임무였고, 이렇게 훈련된 병력을 각 군관구에 연고가 있는 사단에 보충하는 것이 당시 독일 육군의 병력동원체계였다.[5] 암살 성공 혹은 실패 여부를 총통 지휘소에 있던 육군통신대장 펠기벨 장군이 베를린의 협력자들에게 전화로 알리기로 했는데, 총통이 생환하자 이를 직언할 경우 도청에 의해 적발될 것을 겁냈고, 이를 애매하게 알리고는 통신을 끊었다. 통신을 끊어서 총통 지휘소를 외부와 고립시키는 것이 계획상 존재하긴 했으나, 히틀러의 생사 여부를 제대로 알리지 않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까지 작전 선임자인 올브리히트 장군이 결정을 미뤘고, 쿠데타의 실패를 야기했다.[6] 사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총통 암살미수범으로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므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입장에선 쿠데타 결행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7]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은 실제로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볼 수 없으나, 쿠데타를 묵인할 듯한 행동을 수 차례 보였기 때문에 쿠데타파 역시 그를 자신들의 동지로 생각했다. 프롬 장군은 쿠데타 실행자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으면 자신 역시 그 문제로 법정에 서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오토 스코르체니 SS중령이 쿠데타 주역들을 체포하면서 현실화된다. 프롬 장군은 1945년 3월 15일 불고지죄로 총살형에 처해졌다.[8] 2009년작 작전명 발키리에선 헤프텐 중위가 그의 앞을 막아서 먼저 죽은 걸로 나오나, 실제로는 대령을 몸으로 막으려다 거의 같이 죽었다. 실제라면 7.92㎜ 소총탄의 위력 때문에, 헤프텐 중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해도 총탄은 그의 몸을 관통하고도 대령을 죽일 정도의 운동 에너지가 남는다.[9] 청묵사판에서 발췌.[10] 안네의 착오이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장군이 아닌 영관급 장교였다. 다만 안네가 군 관련 지식이 많을 리 없으니 그냥 장군으로 착각할 만 하다. 장군참모(Generalstab)라는 직책도 그렇고.[11] 국내에는 발키리 대작전이라는 다소 유치한 제목으로 들어오기도 했다.[12]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가 수류탄으로 자살하는 모습이다.[13] 다만 늑대굴에서 폭탄이 터진 이후, 올브리히트 장군이 불안에 휩싸여 히틀러 생사 여부를 모른다며 발키리 작전을 할지말지 갈팡질팡 하는 모습에 분노해 상급자에게 크게 화를 내며 명령과 협박에 가까울 정도의 어조로 올브리히트 장군을 설득하려고 하고,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도 히틀러 암살 여부가 불명확하지 않느냐고 따지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체포해버리는 등 이후부턴 굉장히 배짱 있게 행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