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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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이름 | <colbgcolor=#fff,#1f2023>안네의 일기 | ||
Diaries of Anne Frank | |||
국가·소장 | 네덜란드 네덜란드 전쟁기록연구소 | ||
등재유형 | 기록유산 | ||
등재연도 | 2009년 | ||
제작시기 | 1942년 6월~1944년 8월 | }}}}}} |
안네의 일기 Het Achterhuis The Diary of a Young Girl | |
형식 | 일기 |
저자 | 안네 프랑크 |
국가 | [[네덜란드| ]][[틀:국기| ]][[틀:국기| ]] |
언어 | 네덜란드어 |
주제 | 제2차 세계 대전 홀로코스트 나치 점령 하의 네덜란드 |
출판년도 | 1947년 6월 25일 |
링크 | 안네 프랑크의 집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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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나치 독일의 잔인한 홀로코스트가 횡행하던 시절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네덜란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가상의 친구인 일기장 키티와 대화하는 형식[1]으로 남긴 일기. 전쟁의 비참함을 후대에 일깨워 준 문화유산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온갖 폐해들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가 이어져 인기 있는 책이 아니었으나, 후에 온당한 평가가 이뤄지면서 전 세계인의 애독서가 되었다.
2. 출판 현황
안네가 쓴 일기의 원본은 2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A본(version A)은 안네가 크리스마스 때 받은 일기장과 두 공책에 쓴 일기이다. 또 다른 판본인 B본(version B)은 자신의 일기가 전쟁 기록물로 제출될 수 있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들은 안네가 외부 공개를 위해 다시 작성한 것이다. B본은 A본에서 내용이 추가되거나 생략된 형태이다.2.1. 네덜란드어
안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으나 나치 집권 초기부터 프랑크 일가는 네덜란드로 이주한 상태였고, 그러다 보니 안네 본인은 네덜란드가 자신의 조국이며 네덜란드어가 자신의 모어라는 사고를 가지고 살았다. 실제 일기의 원본도 네덜란드어로 되어 있으며, 일기를 보면 '어른들의 네덜란드어가 이상하다'라고 놀리는 부분도 간혹 보인다.1947년 6월 25일에 암스테르담의 출판사에 의해 'Het Achterhuis. Dagbrieven van 14 juni 1942 tot 1 augustus 1944(비밀의 별간. 1942년 6월 14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의 일기 편지)'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버전 A와 버전 B를 짜맞춘 형태이고, 에필로그에 작가의 운명이 소개되어 있다. 출판사 직원의 조언에 따라 안네의 성에 대한 솔직한 생각이 생략되어 있으며 초반 부분도 많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이 판본은 저작권이 소멸되었다.
1986년에는 버전 A, 버전 B, 기존 출판본(1947년 편집본)까지 모두 수록한 (연구자용) 비판주석본이 출간되었고, 이후 2006년에 개정판이 새롭게 발간되었다.
1991년에는 안네 프랑크 재단의 의뢰에 따라 작가 미르얌 프레슬러가 새로 편집한 (일반 독자용) 완전판이 나왔으며 이후 1998년 공개된 다섯 장의 원고[2]가 포함된, 새로운 (일반 독자용) 완결판이 2001년에 출판되었다.
2.2. 한국어
1954년 일조각에서 '별은 창 너머: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국내 초역본을 내놓았다. 번역은 유효숙이었으며 영어 번역본에서 옮겨진 책이다. 참고 1, 참고 2. 6.25 전쟁 직후 발간되었던지라 당시 사람들에게 공감을 샀다고 한다.1978년 범우사에서 안네의 일기(1947년판)와 기타 글들을 묶어 <안네의 청춘 노우트>란 제목으로 출간했는데, 번역은 김남석이 맡았다. 1987년 번역자를 서석연[3]으로 갈아 단권 합본으로 내놓았다. 1999년에 개정본이 새로 나왔다.
1995년 문학사상사에서 완전판(1991년판)을 독점출간하였다. 독일어 번역본을 중심으로 옮겼다.
2021년 책세상에서 새로운 번역판(2001년판)을 발행하였다. 역시 독어판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으며 배수아가 맡았다.
2005년 도서출판 바움에서 멜리사 뮐러가 쓴 '소녀 안네 프랑크 평전'(1998년)을 박정미가 번역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절판되었다. 그나마 2021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전자책 형식으로 공개 중이다.
3. 특징
Who was Anne Frank? |
네덜란드어 원제는 '집 뒤채(Het Achterhuis, 헷 아흐테르하위스)'이다. 안네가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일기를 공모전에 출품하려 했을 때 쓰려 했던 제목이다. 원제가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런지 영어로 번역될 때는 '어린 소녀의 일기(The Diary of a Young Girl)'라는 제목으로 변경되어 출간되었다.[4]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은 1959년에 미국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제목인 'The Diary of Anne Frank'에서 유래된 것이다. 한국판은 문학사상사에서 1995년, 책세상에서 2021년 완전판을 출판했다. 500여 장 중 150장이 삭제된 편집판만 읽어봤다면 읽어볼 가치가 매우 높다.
전쟁의 참혹함과 나치 독일 치하 유대인들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그 시절 소녀의 풋풋한 감성을 엿볼 수 있는 책. 친구나 가족과 다툰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등등 그녀가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담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들이 살았던 집을 생생히 구경할 수 있다.[5] 특히나 아이들이 커 가는 것을 표시해 둔 벽이 책장 쪽 숨겨진 방을 들어간 뒤 프랑크 가족의 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프랑크 일가가 체포될 당시 그 자리에 있던 SS 장교가 오토 프랑크에게 "이런 곳에서 숨어 살면서 당신들은 행복했었나?"라는 질문을 했는데, 그 말에 프랑크 씨는 이 표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한다. 분명 몹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베르겐-벨젠 수용소 터에 세워진 안네와 마르고 자매 추모비 |
안네 본인은 자유를 다시 되찾기도 전인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서 1945년 2월~3월로 추정되는 시기에[6] 발진티푸스나 장티푸스로 추측되는 모종의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훗날 책으로 출간된 것은 프랑크 가족의 은신을 도왔던 동료 중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남았던 미프 히스(2010년 작고)가 그녀의 일기장을 소중히 보관하다[7] 유일하게 살아남아 돌아온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게 전한 뒤, 아버지가 이 일기를 출판사로 보낸 덕에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그녀 스스로가 전후 자신의 경험담이 담긴 일기를 책으로 내겠다고 소망하기도 했다.[8] 안네가 직접 출판을 목적으로 사적인 부분은 편집하고 지인의 실명을 가명으로 바꾼 편집 작업을 했다.[9] 오토가 그녀의 일기를 출판하기로 마음 먹은 것도 죽은 딸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단, 오토는 프랑크 가족의 이름만은 실명으로 놔뒀다.
여담으로, 오토가 수용소에서 돌아온 후 일기를 받자마자 출간을 결심했던 것은 아니다. 오토는 수용소에서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가족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다만 아내의 죽음은 수용소에서 우연히 만난 네덜란드인에게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고 한다. 몇 달 동안 가족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도중,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프랑크 자매와 함께 지냈던 생존자로부터 큰딸 마르고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딸 안네마저 세상을 떠났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10], 그 이후에는 일기의 출간 작업에 매달리게 되었다.
안타까운 점은 안네가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되는 2~3월로부터 불과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1945년 4월 15일, 베르겐-벨젠 수용소가 영국군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딱 몇 주만 더 버텼다면 연합군에 구조되어 살아남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수용소의 상황이 너무나 열악해, 만일 영연방군에 의해 구조가 되었어도 생존할 수 있었을 거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수용소가 해방되거나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영연방군, 미군, 소련군 등 연합군이나 마음씨 좋은 민간인들에 의해 구조되었어도 유대인과 집시 등 피수감자들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은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11]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자유를 빼앗기고 가족들도 죽었을 거란 절망 속에 쇠약사하는 것과 해방되어 내 가족과 친구들도 살아남았을지 모른다는 희망이라도 있는 것은 천지 차이일 것이다.
1945년 4월,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해방하는 영국군. 그 끔찍한 생활 환경을 볼 수 있다.[주의] |
1945년 4월, 영국군에 의해 촬영된 진상 조사 영상. 생존자, 친위대 간수, 영국군 장병들에 대한 인터뷰와 시신 더미, 시신을 묻는 거대한 구덩이 등이 찍혀 있다.[주의] |
여기에 더해 안네가 수감됐던 베르겐-벨젠 수용소는 더욱더 비참했다. 해방 당시 피수감자들의 상태는 너무나 심각해 휴 글린 준장의 지도 아래 영국군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음에도 6만여 명의 생존자들 중에서 13,994명이 해방 이후 2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즉, 의사와 간호사로 구성된 전문 의료진들의 노력에도 무려 약 4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어간 것이다. 수용소의 상태가 얼마나 열악했는지, 나치 독일의 만행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곳 뿐만 아니라 연합군이 해방한 다른 수용소에서도 수감 생활로 인한 후유증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후 영국군은 안네와 마르고를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학대하고 죽음으로 내몬 요제프 크라머 수용소장, 프리츠 클라인 수용소 담당의 등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주요 관리 인원들을 전원 체포하여 대부분을 교수대에 매달거나 감옥에 보냈다. 베르겐-벨젠 전범 재판에 대한 영어판 위키백과 문서.
수용소의 특성상 안네 프랑크를 비롯한 사망자들의 시신은 장례를 치루지 못했고 행방이 묘연하다. 영국군은 수용소를 해방한 직후 방치된 시신들을 수습해서 수백 구씩 모아 집단 매장했는데, 이 때 안네의 시신도 매장된 것으로 추정한다.
최초 출판자였던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출판할 때는 가족의 사생활이 침해되는 내용과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성에 대한 내용, 그리고 안네 스스로의 성 지향성에 대한 고뇌[14] 등이 포함된 부분은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펴냈다고 초판본에 밝힌 바 있다. 해당 성에 대한 내용 중 안네는 "어른들은 애들한테서 성에 관한 얘기를 쉬쉬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끼리 올바르지 않은 정보만 갖게 된다. 아들뿐만 아니라 딸에게도 성교육을 해야 한다."는 통찰력 있는 말을 했다.[15] 시대가 시대였겠지만, 이렇게 성에 관한 이야기를 통편집해버리는 것은 안네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토는 본인 욕, 판 단 욕, 뒤셀 욕은 죄다 편집했으면서 판 단 부인, 배우자 에디트 욕은 냅뒀다. 판 단 부인이야 일기에서도 공공연히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었을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에디트에 관한 내용을 삭제하지 않은 이유는 배우자에 대한 욕을 남겨둠으로써 본인과 비교되게 만들고, 자신은 엄격하지만 자상하고 완벽한 아버지 이미지로 만들려 했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감수성이 말달한 사춘기면 특히나 아버지의 강압적인 언행이나 어머니나 본인 형제들을 향한 통제며 기성세대의 잘못된 면 등에 제일 민감해 할 시기이며, 성 얘기를 편집하는 고리타분할 성향의 중년 남성 스스로에게 가정하는 소위 멋진 아버지 상이 청소년들이 진짜 바라는 좋은 아버지 상과는 일치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대체적으로 본인 이미지 세탁하려 했다는 의견이 많고 그가 비판 받는 점이다. 이러한 수정 시도 때문에 일기가 조작되었다는 논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6]
이후 세월이 흘러 1980년에 오토가 사망하고 책의 저작권이 안네 프랑크 재단으로 넘어갔을 때, 원본에서 거의 편집을 가하지 않은 완전판이 발매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초판과 완전판 2가지가 따로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완전판이 문학사상사에서 나오고 있다. 문학사상사판은 번역 자체는 큰 문제는 없으나 한국적 정서에 맞춘답시고 일기에게 하는 말을 존댓말로 번역하여 일기에 대한 친근감이나 안네의 감정 자체가 많이 지워져버렸다. 참고로 초판만 읽은 사람이라면 완전판을 읽을 가치는 매우 높다. 완전판에서는 나치의 잔혹함 외에도 안네가 스스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어서 문학으로도 가치가 높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 등장인물
오토 프랑크 | 에디트 프랑크 | 안네 프랑크 | 마르고 프랑크 | |
페터 판 펠스 (가명: 페터 판 단) | 아우구스테 판 펠스 (가명: 페트로넬라 판 단) | 프리츠 페퍼 (가명: 알베르트 뒤셀) | 헤르만 판 펠스 (가명: 헤르만 판 단) |
크게 프랑크 일가, 판 펠스(판 단) 일가, 프리츠 페퍼(알베르트 뒤셀), 그리고 조력자들로 나눌 수 있다.
4.1. 프랑크 일가
4.1.1. 안네 프랑크
안네 프랑크 (Annelies Marie Frank) (1929.06.12 - 1945.03.12)
자세한 내용은 안네 프랑크 문서 참고하십시오.
4.1.2. 오토 프랑크
안네의 아버지이자 안네의 일기를 편집하여 출간한 사람이다.
자세한 내용은 오토 프랑크 문서 참고하십시오.
4.1.3. 마르고 프랑크
마르고 프랑크 (Margot Betti Frank) (1926.02.16 - 1945.03.09)[17]
안네의 언니. 성격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묘사된다. 그래서 트러블이 많은 안네와는 달리 은신처 사람들하고는 대부분 별 탈 없이 잘 지내며, 안네하고도 서로 다툴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은 편이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우등생을 먼저 진급시켜주거나 장학금 제도가 있으면 늘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안네는 훌륭한 큰딸 마르고와 그렇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고민도 했고, 당연히 마르고를 싫어한다고 쓰거나 심술궂다, 아무 생각이 없다며 감정적으로 글을 쓸 때도 있었다. 엄마 에디트, 아빠 오토 모두 마르고를 편애하는 면이 있었고, 본인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적당히 착한 첫째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안네는 마르고가 주관 없고 꿈이 없다며 한심해했다. 다만 이 서술은 안네의 1인칭 시점임을 감안해야 한다.
사려 깊고 잘 인내하는 성격이다. 안네가 페터랑 둘이서만 어울려 놀 때, 청소년이 3명밖에 없어 마르고가 소외된 것에 죄책감 가진 안네를 보고 편지를 보냈다.[18] 엄마, 아빠뿐 아니라 은신처 식구인 판 단 부부와 뒤셀은 늘 안네와 마르고를 비교해대서 안네가 마르고를 원망도 많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네는 마르고에게 의존도 많이 했다. 마르고가 "엄마 아빠 간섭이 너무 심해져서 지겨워"라며 안네에게 마음을 터놓았을 때, 안네도 마르고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기뻐하면서도 은신처로 오기 이전에 사이 좋았던 가족이 거리를 두지 못해서 서로 사이가 나빠지고 있다며 답답해했다.[19]
은신처에서 마르고는 미프의 이름을 빌려 라틴어 교재를 신청해 제출했는데, 선생님이 채점하고 '이런 훌륭한 학생이 대체 누구냐'며 편지를 보낼 정도로 학구열과 성적이 뛰어났고, 은신처 내에서 뒤셀(본명 프란츠)에게 네덜란드어를 가르칠 정도로 똑똑하고 머리가 비상했다. 그러나 정작 뒤셀은 배울 의지가 없고 게을러서, 마르고조차 뒤셀을 보고 "공부가 조금도 늘지 않을 정도로 전혀 열의가 없는데 왜 가르쳐야 되는지 모르겠다"며 혹평했다.
발각 후 수용소로 끌려간 마르고는 앞서 언급한 대로 안네와 함께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지게 되었고, 1945년 3월 9일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에 안네는 크나큰 절망에 빠졌고, 이로 인해 본인 역시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사흘 만에 언니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만약 안네와 마르고가 죽지 않고 생존했다면 현재 기준으로는 할머니들이 되었을 거다.
마르고도 일기를 썼으나 이 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마르고의 일기가 남아있었더라면 자매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안네가 남긴 일기의 내용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수 있지만 마르고의 관점에서 보는 주변인과 생활상 등도 교차검증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안네의 일기나마 남겨질 수 있던 것도 미프 덕이며, 그것도 간발의 차이였다. 그 상황에 마르고의 일기까지 챙길 여유는 전혀 없었긴 하다.
안네 일가가 은신처에 들어오게 된 직접적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1942년 7월 5일 마르고 앞으로 노동 수용소 소환령이 떨어졌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은신처로 들어오게 되었다. 원래 은신처를 계획하고 짐을 천천히 들여놓고 있었으나 이 소환령으로 인해 예상보다 한 달 가까이 더 일찍 들어오게 되었다. 물론 마르고의 탓은 절대로 아니지만.
4.1.4. 에디트 프랑크
에디트 프랑크 (Edith Frank née Holländer) (1900.01.16 - 1945.01.06)
안네의 어머니. 오토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오토처럼 그 당시 기성세대답게 구시대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어서 안네와 자주 충돌했으며, 안네는 어머니를 그야말로 답답하고 속이 좁다고 묘사했다. 무삭제판에 따르면 성에 대해서도 보수적이고, 성미가 급하거나 꼼꼼하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허황된 생각만 한다는 등 부정적인 묘사가 대부분. 물론 일기는 어디까지나 사춘기 소녀 안네의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걸러서 들어야 한다.[20]
일기에서는 어느 날 밤에 독일군이 밖에서 고사포와 기관총을 계속 쏘아대서 발각되는 걸 막기 위해 식구들이 모든 불을 끄고 숨어 있던 중에, 안네가 "너무 무서우니 촛불이라도 켜 달라" 하자 발각될 것을 걱정한 오토가 안 된다고 했지만 에디트는 바로 촛불을 켜 주었다. 오토가 불을 끄라고 말리자 "안네는 전쟁에 익숙한 군인이 아니에요."[21]라고 했다. 오토는 그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에디트를 말리지 않았다.
안네가 부모에게 마음을 닫아 가던 시기에 쓴 일기에서는, 아빠가 늦을 예정이니 대신 같이 잠자리 기도를 해주겠다고 부드럽게 제안했으나 거절 당했다고 한다. 이때 상처 받은 듯한 반응으로 "엄마는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는 서술을 보면 안네의 닫힌 마음을 본인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으며, 자기 나름대로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을 해 보았으나 잘 안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베프의 회고에 따르면 베프가 우연히 일기를 쓰고 있는 안네를 보게 되었는데, 에디트는 베프에게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비록 구시대적인 사고관이 있어 안네와 사이가 크게 좋지는 않았어도 오랜 피난 생활 중에도 딸이 무언가를 하려 하는 것에 대해 나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게슈타포에게 발각된 이후 모든 은신처 사람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고, 결국 1945년 1월 27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2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안네, 마르고, 판 단 부인이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졌을 때 혼자 아우슈비츠에 남겨진 것에 충격을 받아 정신착란을 일으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어 사망했다는 설, 다른 하나는 독일 경비병이 마르고를 강간하려 하자 몸을 던져 딸을 지키려다 그 병사에게 구타 당하고 끌려간 후 죽었다는 설. 어느 쪽이든 매우 안타까운 죽음이다.
4.2. 판 단 일가(판 펠스 일가)
판 단(Van Daan) 가족의 본명은 판 펠스(Van Pels)로, 안네가 일기가 공식적으로 출판될 경우를 고려했기 때문에 일기에는 전부 안네가 지은 가명으로 쓰여 있다. 안네 본인 이름의 경우도 처음엔 '안네 아울리스', '안네 로빈'이라는 가명을 붙였다이들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정육업자였던 헤르만 판 펠스는 1938년 오토 프랑크와 공동으로 향신료 유통 회사 펙타콘을 설립한 관계였다. 사업상 인연을 맺은 것이 은신처 생활까지 이어진 사례.
4.2.1. 헤르만 판 펠스
헤르만 판 단 / 헤르만 판 펠스 (Hermann van Daan / Hermann van Pels)밥 먹으면서도 참 말이 많은데, 항상 자기 의견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입장이야. 절대 반박해서는 안 돼. 만약 누군가가 감히 그렇게 했다가는 판 단 씨의 보복을 피하지 못하니까. 성난 고양이처럼 상대방에게 덤벼들거든! 난 절대 그런 꼴은 당하고 싶지 않아. 누구라도 무심코 한 번 휘말리면, 그 다음에는 아주 조심할 수 밖에 없어. 판 단 씨의 의견은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진실이고, 그는 세상만사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니까. 어쨌든 그가 영민한 건 사실인 듯 해. 하지만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 게 문제지.
1943년 08월 09일 (월) 일기 중에서. 무삭제판 이전 판본에서 '검열'된 부분이다.
페터 판 단의 아버지이자 판 단 부인의 남편. 머리가 벗겨진 뚱뚱한 남자다. 오토가 멋대로 편집한 안네의 일기판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언급이 없었는데, 나중에 출판된 무삭제판에서는 매우 폭력적인 아버지이자 권위적인 남편이었음이 밝혀진다. 안네에게 여자가 어쩌고 하며 가르치려 들었고, 음식에 집착하는 바람에 은신처 사람들끼리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또한 아들인 페터에게 늘상 윽박지르고 폭행해 페터를 조용하고 의기소침한 아이로 자라게 한 원인이 되었다. 담배가 없으면 매우 성질을 부려대서, 먹을 것조차 부족한 은신처에서 연신 담배를 찾아댔다. 배우자의 의사를 무시하기 일쑤여서 판 단 부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피 코트를 팔아달라고 미프에게 부탁하며 담배 하나 사달라는 걸 보고는 안네가 치를 떨며 일기에 적었다. 모피 코트가 은신처 생활에서 필요 없는 물건이니 먹을 걸 사오라는 얘기였지만, 울며불며 막는 판 단 부인 앞에서 담배 얘기를 꺼냈다는 거 자체가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안네에게는 나쁘게 보였던 것이다. 1943년 08월 09일 (월) 일기 중에서. 무삭제판 이전 판본에서 '검열'된 부분이다.
수용소로 끌려가고 한 달 뒤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가스실로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했는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는 아우슈비츠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가스실 학살이었다. 그런데 또 집안에서의 막장 행보를 생각하면 이 사람은 어쩌면 그 업보를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치른 거라고 볼 수도 있다.
4.2.2. 아우구스테 판 펠스
페트로넬라 판 단 / 아우구스테 판 펠스 (Petronella van Daan / Auguste van Pels)헤르만 판 단의 아내이자 페터 판 단의 어머니.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매우 신경질적인 여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 은신처에 들어왔을 때 요강을 가지고 와서 주변 사람들을 웃게 했다. 참견이 심했고 잔소리를 많이 해서 안네와 자주 다퉜고, 툭하면 마르고와 비교했다. 심지어 "안네가 내 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네가 만약 내 딸이라면 이렇게 버릇 없이 키우지 않았을 것이다."란 말을 수시로 하여 안네가 질려했을 정도.
안네뿐만 아니라 프랑크 가족 모두에게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녀에 대하여 에디트는 비열하다고 평했고, 마르고는 하찮다고 평했으며, 오토는 추악하다고 평했다. 특히 안네와 에디트는 아우구스테가 못난 자기 남편과 비교되는 듬직한 오토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싫어했다.
어느 날 식사를 했는데 안네가 감자만 먹고 다른 야채를 남겼다는 이유로 계속 훈계를 늘어놓자, 참다 못한 오토가 안네를 옹호해주며 판 단 부인의 접시에 담겨있는 야채를 지적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담으로 그녀는 욕 솜씨가 아주 뛰어나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를 섞어 말하는 게 예술이었다고 한다.
한 번은 안네가 일기를 쓰는 것을 목격했는데, 놀란 안네가 얼른 일기를 덮자 마지막 페이지만 보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필 마지막 페이지가 안네가 아우구스테에 대한 욕만 잔뜩 써놓은 페이지였기 때문에 안네가 거절했다.
훗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고, 안네와 마르고와 함께 수용소에서 건강한 여성 3명으로 뽑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베르겐-벨젠에서 또 다른 수용소로 옮겨진 정황까지는 확인되는데, 이후에는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을 뿐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된 바가 없다. 심지어 죽은 시기와 장소도 확인할 수 없어 1945년 4월 9일에서 5월 8일 사이에 독일 혹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측만 되고 있을 뿐이다.
4.2.3. 페터 판 펠스
페터 판 단 / 페터 판 펠스 (Peter van Daan / Peter van Pels)헤르만 판 단과 페트로넬라 판 단의 아들. 폭력적인 아빠와 신경질적인 엄마 사이에서 자라 소극적인 성격을 가졌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다락방에 틀어박혀 고양이 무쉬하고만 지냈다고 한다. 초반에는 안네가 시끄럽고 수다스럽다는 이유로 싫어했으나[22] 안네와 몇 번 얘기를 주고 받은 후 따로 만나서 얘기하고 놀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다.
안네가 부모님과 친한 편이고, 자존감 높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것을 굉장히 부러워 했으며, 의존도 많이 했다. 안네와 키스도 몇 번 나누며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안네는 마르고도 페터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안네가 미안해서 한동안 마르고의 눈치를 보았는데, 마르고 본인이 나중에 자신은 페터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며, 청소년 3명 중에서 자기만 소외되는 게 섭섭할 뿐이라고 직접 말했다. 안네의 어머니는 안네와 페터 둘이 이렇게 친해지는 것을 꺼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뒤, 1945년 1월에 "유대인들을 전부 독일로 옮기라"는 명령으로 인해 건강하지 못해 남겨진 오토와 헤어지게 되었다.[23] 죽음의 행진을 거쳐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의 마우타우젠(Mauthausen) 강제수용소[24]의 부속 수용소인 멜크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의 광산에서 끔찍한 중노동에 시달린 끝에 결국 병을 얻어 수용소 병동으로 보내졌다가 사망했다. 자세한 사망일자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십자 기록에는 5월 10일로 기재되어 있는데, 비극적이게도 이는 수감자들이 수용소의 통제권을 장악한 지 6일,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 지 이틀, 그리고 마우타우젠이 조지 S. 패튼 장군의 미 3군 분견대에게 해방된 지 5일이나 지난 이후였다.
은신처 식구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네덜란드의 한 임시 수용소에 머물렀는데,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안네와 페터는 항상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지냈으며, 이별과 죽음을 직감했겠지만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은신처 내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와 싸우는 모습도 그려지고, 막말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페터는 유리문이 있는 주방에서 샤워를 하기 때문에 씻는 모습이 다 보인다는데 본인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모양.
4.2.4. 무시(Mousch)
페터가 데려온 고양이. 판단과 뒤셀이 지속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했지만 페터는 이 고양이를 끝까지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배가 불러 있어서 안네가 암컷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알고 보니 뼈다귀를 하도 주워 먹어서 배가 불렀던 거지 사실 수컷이었다.[25]나중에 집을 나가 종적을 감추어 버렸고, 이에 페터는 크게 상심했다. 그러나 그 후 다락방 모래구석에서 애인과 함께 발견되어 은신처 식구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안네도 원래 모르체(Moortje)라는 고양이를 길렀기에 무시를 상당히 좋아했다.[26]
4.3. 프리츠 페퍼
알베르트 뒤셀 / 프리츠 페퍼 (Albert Dussel / Fritz Pfeffer)은신처에서 새로 받아들인 유대인 치과의사. 베라 비티네(Vera Bythine)라는 여자와 이혼한 사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고, 샤를로트 칼레타(Charlotte Kaletta)라는 프랑스인 애인이 있었지만 홀로코스트 와중에 이별했다. 가끔 애인이 식량을 선물로 보내주곤 했는데, 은신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해줬음에도 혼자만 열심히 화장실에서 처먹어댔다. 이 때문에 오죽하면 안네가 '페퍼가 굶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며 화를 냈을 정도다. 평판이 매우 안 좋아서 은신처 식구들이 처음에 걱정했다.
오토 편집판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편집판에서는 그저 무심한 치과의사일 뿐이었는데, 무삭제판을 읽으면 이런 성격 진짜 이상한 남자와 2년을 같이 살아준 안네가 거진 부처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첫날 은신처 합류 날짜를 멋대로 바꿔서 안네가 '염치는 갖다 버린 신참'이라고 했다. 은신처로 들어오기 전, 겉으로는 신사인 척 다 했지만 막상 은신처 식구로 받아들여지고 나자 매우 제멋대로 굴었다.
일기에 따르면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성격이었단다. 애인에게 받은 식품을 혼자 다 먹어치운 건 이기적으로 보이긴 해도 자기 거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항상 매사에 대고 불평불만을 털어내고 기도비닉이 최우선인 은신처에서 줄곧 편지를 보내는데다 미프에게 금서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등[27] 개념을 밥에 말아먹은 듯한 행위를 자주 보였다. 재미난 건, 항상 불평불만을 해대면서도 성격은 소심하고 예민했던지라 에디트를 붙잡고 불평불만을 하다 "모두가 당신의 불평을 지긋지긋해 한다"는 에디트의 일갈을 듣고 불면증을 호소하기까지 했다는 거다. 당연히 안네네 가족은 물론이요 판 펠스네 가족과도 사사건건 시비가 붙는 건 일상이었다.
또한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신경질적인 태도를 자주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속을 살살 긁어대는 화법을 구사하여 은신처 내 인물들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 은신처 사정상 안네와 같이 방을 썼는데, 코를 골거나 이를 갈고 옷을 아무 데서나 갈아입는 등 이래 보여도 한창 사춘기를 겪는 소녀를 배려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 같이 방을 쓰다 보니 책상을 누가 언제 사용할 거냐는 문제를 두고 "넌 겨우 어린애가 일기 쓸 뿐이잖니? 네 공부는 하찮은 거잖아? 난 치과의사라서 할 게 많아!"[28]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안네가 항의하자 오토가 개입해 책상 사용 시간을 직접 정해줘야 했다. 비록 안네 측에 불리하게 배정되긴 했지만... 근데 그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이 때문에 대판 싸운 뒤 규칙을 무시하고 12시간 내내 책상에 앉아 버티는 어찌 보면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
화장실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상당히 편협한 모습을 보였다. 은신처가 위치한 건물에는 은신처 일행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이 있었기에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화장실을 쓸 수 없었다. 이에 화장실 시간은 매우 예민한 문제였는데, 안네와 방 공유 문제를 두고 싸우자 이유도 없이 화장실을 오래 점거하는 식으로 자신 나름대로 복수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르고가 은신처에서 그에게 네덜란드어를 가르쳐 주었는데, 마르고의 평에 따르면 조금도 공부할 생각이 없고 게으르기 짝이 없어 실력이 늘지도 않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29]
이러다 보니 호평이 나올 리가 당연히 없었다. 안네는 일기장에서 54살이나 먹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속이 좁고 찌질하며 쓰레기 같다고 뒤셀을 악평했다. 한편 미프는 그에 대해 "마음씨가 좋고 잘생겼으며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같이 안 살아본 사람의 증언임을 감안해야 한다.
프랑크 가족, 판 단 가족과 같이 게슈타포에게 연행되어 강제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44년 12월 20일에 독일 함부르크의 노이엔감메(Neuengamme)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읽어보면 어째 은신처 사는 사람들(특히 어른들)의 성격이 죄다 배배 꼬였고 개차반이다 싶을 것이다. 다만 당시는 아무리 착하고 상냥한 사람도 예민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상당히 극한 상황이었던 만큼, 자연히 어른들도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에 더해 일기를 쓰고 있는 안네 본인 역시[30] 자신도 알게 모르게 꼬인 시선으로 묘사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한다.
4.4. 조력자
오토 프랑크와 조력자들, 1945년 10월, 암스테르담 (왼쪽부터) 미프 히스, 요하네스 클레이만, 오토 프랑크, 빅토르 퀴흘레르, 그리고 베프 포스콰일 |
조력자들은 오토 프랑크의 소유 회사[31]에서 일하던 직원들이다. 은신처인 프란센라흐트 263번지는 원래 오펙타 사무실이었는데,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프랑크 가족 등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 그리고 이들 역시 미프와 베프를 제외한 모두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다.[32] 다행히 이들은 그나마 은신처 사람들과 달리 모두 무사히 종전을 맞이해 평온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4.4.1. 코프하이스 / 요하네스 클레이만
- Johannes Kleiman (1896년 8월 17일 ~ 1959년 1월 28일)
오토의 회사 직원. 상냥하고 착한 성격이다.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은신처 식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지만, 강제 노역을 하다가 중간에 위출혈이 도져서 적십자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암스테르담에서 계속 일했는데, 1959년에 갑자기 책상 위에 쓰러져 급사했다. 안네가 일기에서도 썼듯 평소에도 클레이만은 위궤양 등의 병으로 상당히 고생했었는데, 결국 지병의 악화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오토와 함께 안네의 일기를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영화화 작업 관련하여 오토와 함께 고증에 힘 썼으며, 생전에도 기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인터뷰를 응했다고 한다. 안네의 증언에 따르면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늘 명랑하고 놀라울 만큼 씩씩한' 사람이었고, 에디트는 그를 두고 "클라이만 씨가 들어오면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아"라고 말한 바 있다(1943년 09월 10일 일기 중).
은신처 시절 문고리가 고장났는지 확인해 보겠답시고 문고리를 계속 돌려서 은신처 식구들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했다. 빅토르가 제안한 은신처의 비밀문을 제작한 사람이다. 그런데 문 위틀이 너무 낮아서 은신처 식구들이 자주 머리를 찧고 다치는 일이 빈번해[33] 위틀에 톱밥 자루를 못질해서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은신처 시절 문고리가 고장났는지 확인해 보겠답시고 문고리를 계속 돌려서 은신처 식구들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했다. 빅토르가 제안한 은신처의 비밀문을 제작한 사람이다. 그런데 문 위틀이 너무 낮아서 은신처 식구들이 자주 머리를 찧고 다치는 일이 빈번해[33] 위틀에 톱밥 자루를 못질해서 붙여 놓았다고 한다.
4.4.2. 크라렐 / 빅토르 퀴흘레르
- Viktor(Victor) Kugler (1900년 6월 15일 ~ 1981년 12월 16일)
오토의 회사 직원. 역시 상냥하고 착한 성격이다.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은신처 식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자기들 때문에 무고한 직원들까지 끌려가게 되었다고 자책하는 오토에게 "우리들은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니 후회하지 않는다"고 위로하는 대인배다운 모습을 보였다. 이동 도중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을 때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은신처의 문을 책장으로 가리는 비밀문을 제안한 사람. 전쟁이 끝난 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그곳에서 살다가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4.4.3. 엘리 / 베프 포스카윌
- Bep Voskuijl (1919년 7월 5일 ~ 1983년 5월 6일)
오토의 회사 직원. 다른 직원들처럼 상냥하고 착한 성격으로, 미프와 함께 은신처 식구들에게 식품을 조달했다. 요하네스가 병이 나고 미프가 아플 때 혼자 은신처 식구들을 위해 심부름을 해야 했는데, 판 단 부부의 잦은 심부름에도 짜증을 내지 않고 도와준 천사였다. 몇 번 한계에 부딪쳐 거절한 적은 있으나 그마저도 다 봐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슈타포한테 은신처를 발각 당했을 때 미프를 포함해 끌려가지 않은 유이한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후 결혼하고 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한 명의 이름을 안네라고 지었다. 이렇듯 베프도 다른 조력자들처럼 안네의 일기를 소중히 여긴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언론 노출을 싫어했기 때문에 생전에 인터뷰는 거의 하지 않았다.[34] 스위스로 이주한 후엔 오토와 친하게 지냈고, 오토가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1983년 신장병으로 작고.
4.4.4. 미프 / 미프 히스
- Miep Gies[35] (1909년 2월 15일 ~ 2010년 1월 11일)
오토의 비서 출신.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후 식량난 때문에 네덜란드로 이주한 오스트리아계 네덜란드인이다. 나치당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부했고, 남편 행크와 함께 프랑크 가족과 판 단 가족이 은신처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게슈타포가 쳐들어 왔을 때 기지를 발휘해[36] 안네의 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준 은인이다. 안네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던 사람이었고, 안네의 어머니 에디트가 안네가 작가가 될 거라며 자랑했기에 안네가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프가 프랑크 일가를 숨겨주었음에도 체포되지 않은 것도 그녀의 기지 덕분이었는데, 은신처를 습격한 SD 현장 지휘관 카를 질버바우어 상사가 빈 억양을 쓰는 것을 듣고 자신도 빈에서 왔다며 대화를 시도했고, 이에 친화감을 느꼈는지 실버바우어 상사는 미프를 유대인을 숨겨준 협력자로 수용소로 보내지 않았다. 안네가 돌아오면 돌려줘야 한다며 일기를 보관하고 있었다가[37] 후에 돌아온 오토에게 일기를 넘겨주었다.[38] 이렇게 안네의 일기를 세상에 나오게 해준 공로로 미프는 네덜란드 왕실로부터 귀족 작위를 수여 받았다. 이후 100세가 넘게 장수하였고, 은신처 관련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21세기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은신처 조력자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공식 홈페이지도 있으며, 생전에는 편지 답장도 해줬다고 한다.
미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2번째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8부작 작은 불빛이 2023년 5월 2일 공개되었다.
4.4.5. 행크 / 얀 히스
- Jan Gies (1905년 10월 18일 ~ 1993년 1월 26일)
미프의 남편. 은신처로 떠나기 전날 미리 짐을 은신처에 가져다 주는 등[39], 프랑크 가족과 판 단 가족이 은신처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시 의회에 약간의 연줄이 있어서 옷이나 식품을 가져다 주기도 했으며, 새로운 뉴스를 가지고 들어오는 역할을 맡았다. 종종 점심 시간에 들르기도 했다. 미프와 함께 은신처에서 같이 밤을 지낸 적도 있다. 은신처 사람들 중에서는 2번째로 장수했다.
4.4.6. 빌럼 판 마런
- Wilem van Maaren (1895년 8월 10일 ~ 1971년 11월 28일)
미프의 친지. 1943년부터 요한 포스콰일의 뒤를 이어 회사의 창고를 관리했던 사람이다. 은신처 식구들을 밀고했다고 오해를 받은 유력한 용의자들 중 한 명이지만 본인은 끝까지 부정했다. 물론 뒷날인 2022년에 와서야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그는 밀고자가 아니었기에 평생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 사망. 일기에서도 가끔 언급되는데, 속을 알 수 없는 부정적 이미지로 등장해 은신처 사람들이 싫어했다. 용의자설도 합쳐져 안네의 일기 팬들에게 까이는 인물 중 하나.
4.4.7. 요한 포스카윌
- Johan Voskuijl (1891년 1월 15일 ~ 1945년 11월 27일)
베프 포스콰일의 아버지. 회사의 창고를 관리했던 사람. 관리자로 있던 도중 병으로 인해 판 마런에게 관리자 역할을 넘겼다. 바로 그 유명한 회전 책장을 만든 사람. 손재주가 아주 훌륭했다고 한다. 1937년에 위암에 걸렸고[40] 병세 때문에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1월에 사망했다.
5. 은신처
Prospectus en leidraad van het Achterhuis 은신처의 취지와 사용 안내문 |
Speciale instelling voor het tijdelijk verblijf van Joden en dergelijke. 유대인과 동류의 사람들이 임시로 거주하는 특별 시설. Gedurende het gehele jaar geopend. 연중무휴. Mooie, rustige, bosvrije omgeving in het hartje van Amsterdam. Geen privé-buren. 암스테르담 중심부의 아름답고 조용하며, 숲이라고는 전혀 없는 환경. 상주하는 이웃 없음. Te bereiken met de tramlijnen 13 en 17, verder ook met auto of ets. In bepaalde gevallen, waar de Duitsers het gebruik van deze vervoermiddelen niet toelaten, ook lopende. 13번 혹은 17번 전차, 또는 자동차와 자전거로 올 수 있음. 독일군이 이러한 교통 수단을 금지할 경우 걸어서 오는 것도 가능함. 가구 딸린 아파트와 가구가 딸리지 않은 아파트 모두 상시 사용 가능함. 희망시 식사 제공. Woonprijs: gratis. 방세: 무료. Dieetkeuken vetvrij. 저지방 식단. Stromend water in badkamer (helaas geen bad) en aan diverse binnen- en buitenmuren. 수도는 욕실 (욕조는 없음) 및 건물 여기저기 내외 벽에 설치됨. 쾌적한 난방. Ruime opslagplaatsen voor goederen, van welke aard ook. 널찍하고 여유 있는 물품 보관 공간, 2개의 대형 금고. Eigen radiocentrale, met directe verbinding van London, New York, Tel Aviv en vele andere stations. Dit toestel staat vanaf zes uur 's avonds alleen inwonenden ter beschikking, waarbij geen verboden zenders bestaan met dien verstande, dat alleen bij uitzondering naar Duitse stations mag worden geluisterd, b.v. naar klassieke muziek en dergelijke. 런던, 뉴욕, 텔아비브 등 외국 방송을 바로 수신할 수 있는 라디오 기지. 은신처 거주민들은 저녁 6시 이후부터 라디오를 들을 수 있으며 어떤 방송도 제약 없이 청취 가능함. 하지만 독일 방송은 어쩌다 예외적으로만 허용됨. 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 방송 등. Rusturen: 10 uur 's avonds tot half 8 's morgens. 's Zondags tot kwart over 10. In verband met omstandigheden worden ook rusturen overdag gehouden, volgens aanwijzingen van de directie. Rusturen moeten stipt gehouden worden, in verband met de algemene veiligheid!!! 취침 시간: 저녁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 30분까지. 일요일에 한해 아침 10시 15분까지. 특수 상황일 경우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낮에도 취침 시간에 준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함. 은신처 거주자 모두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취침 시간 규칙은 반드시 준수해야 함!!! Vacantie: Tot nader order vervallen voor zover het betreft het verblijf buitenshuis. 외출: 건물 밖 외출은 당분간 금지. Gebruik van taal: Vereist is te allen tijde zacht te spreken, toegestaan zijn alle cultuurtalen, dus geen Duits. 언어 사용: 항상 조용한 목소리로 말할 것을 강력히 요구함. 문명국의 언어라면 어떤 말을 사용해도 무방. 즉 독일어는 안 된다는 뜻. Gymnastiekoefeningen: dagelijks. 운동: 매일 함. Lessen: In stenographie elke week één schriftelijke les, in Engels, Frans, Wiskunde en Geschiedenis te allen tijde. 교육: 매 주 1회 속기 강좌. 영어, 프랑스어, 수학, 역사 강좌는 수시로 열림. Speciale afdeling voor kleine huisdieren met goede verzorging (uitgezonderd ongedierte, waarvoor speciale vergunning moet worden overgelegd.). 소형 반려동물은 정성스러운 보살핌을 받음. (해충은 제외, 해충을 키우려면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함.) Het gebruik van maaltijden: ontbijt, alle dagen met uitzondering van Zon- en Feestdagen, 's morgens om 9 uur. Zon- en Feestdagen ca. half 12. Diner: gedeeltelijk uitgebreid, 's middags kwart over 1 tot kwart voor 2. Avondeten: koud en/of warm, in verband met de berichtendienst geen vaste tijd. 식사 시간: 아침은 9시, 일요일과 휴일은 11시 30분경. 점심은: 1시 15분에서 1시 45분경, 경우에 따라 연장돌 수도 있음. 저녁은 차가운 음식 혹은 따뜻한 음식, 확정된 시간 없음, 뉴스 시간에 따라 변동됨. Verplichtingen tegenover de ravitailleringscolonne: Altijd bereid te zijn om met kantoorwerk te helpen. 거주자의 의무: 언제든지 사무실의 일을 거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 Baden: 's Zondags vanaf 9 uur staat de teil voor alle huisgenoten beschikbaar. Men kan baden in W.C., keuken, privé-kantoor, voorkantoor naar keuze. 목욕: 일요일 9시부터 목욕통을 사용할 수 있음. 목욕 장소는 화장실, 부엌, 사장실 혹은 사무실 등 원하는 대로 고르면 됨. Sterke dranken: alleen op doktersattest. 알코올: 의사의 처방이 있을 경우에만 허용됨. Einde. 끝. |
헤르만 판 펠스가 타자기로 작성한 은신처의 규칙서. 프리츠 페퍼가 은신처에 도착했을 때 건네주었다. 안네의 일기 1942년 11월 19일자에 수록되었다. |
은신처는 암스테르담 프린젠그라흐트 263번지에 위치해 있었으며, 오토가 일하던 회사인 오펙타(Opekta)의 사무실이 위치하던 곳이기도 했다. 여기에 은신처를 마련하자고 처음 제안했던 사람은 클라이만이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해당 사무실은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박물관이 되어 있다.
6. 밀고자는 과연 누구였는가?
은신처 사람들을 밀고하여 수용소로 끌려가게 한 밀고자의 정체는 수십 년간 미스터리였다. 체포 당시 경찰들이 은신처의 비밀스러운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었으므로 밀고자는 은신처 사람들과 매우 가깝게 지낸 여러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며, 아마도 그 정도면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이렇게 밀고자로 추측되는 인물들이 여러 명 거론되고 있지만, 여러 번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음에도 밀고자가 누구인지는 결국 끝끝내 밝혀낼 수 없었다. 게다가 사건의 직접적인 관련자들이 모두 사망한 현 시점에서는 정확한 진상이 밝혀질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희박하다. 안네의 일기는 전쟁 이후 출판되어 유명해졌기 때문에 사회의 관심도도 높았으므로 생전에 본인이 신고자라고 밝힌다는 것은 '내가 인간 말종으로 찍히고 싶어 환장했소!'라고 스스로 광고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사회적 매장 수준으로는 절대로 안 끝나고, 높은 확률로 형사 처벌을 받거나, 허구한 날 두들겨 맞거나,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아니면 사적제재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밀고자의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이유는 밀고자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자 보안대 간부였던 친위대 중위 율리우스 데트만(Julius Dettmann)이 자살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데트만 중위의 지시로 프랑크 가족의 은신처를 급습한 현장 지휘관은 친위대 상사 카를 질버바우어(Karl Silberbauer)였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직속 상관이었던 데트만 중위는 '믿을 만한 정보원'에게서 은신처의 존재를 확인했고, 그에게 게슈타포를 대동하고 전원 체포를 명령했다고 한다.[41] 문제는 전후 데트만 중위가 연합군에 포로로 잡히고 1944년 7월 16일에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15명을 오버벤 근처에서 처형한 혐의를 받았고, 이에 재판을 받기 전인 1945년 7월 25일에 감옥에서 자살했기 때문에 밀고자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현장 지휘관 질버바우어 상사는 이후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이름을 바꾸고 빈 경찰에서 경감으로 일하다가 1963년 시몬 비젠탈의 활약으로 정체가 들통났으며, 이에 자신이 현장 지휘관이었음을 인정하고 프랑크 가족에 관한 증언을 하였다. 그는 안네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며, 안네가 (자신이 산) 안네의 일기에 나온 사진과 거의 똑같이 생겼으나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아름다워졌으며, 오토에게 '당신은 사랑스러운 딸을 가지고 있군'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체포 당시 짐을 싸던 오토가 1차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에게 지급되던 가방에 짐을 싸는 것을 보고 방을 뒤져 독일 제국군 전역증을 확인한 이후 본인 나름대로는 온정을 베풀어 짐 쌀 시간을 원칙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주어지던 5분에서 1시간으로 늘려주기도 했으며, 앞서 언급한 대로 안네의 일기장을 챙겼던 미프가 자신도 빈에서 왔다는 말에 유대인을 숨겨준, 게슈타포 기준에서는 범죄자였음에도 수용소로 보내지 않는 호의를 배풀어주었다.[42] 그는 안네의 일기에 자신의 이름이 혹시 기재돼 있을까 두려워서 일기 초판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이름은 다행히 없었다고 했다. 정체가 들통나자 그는 체포될 위기에 처했지만, 오토가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했고,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증언하여 재판은 면했다. 어찌 보면 그가 1차 대전 시기 독일 제국군 장교로 복무한 오토에게 자신의 재량으로 배풀었던 짐 싸는 시간을 1시간으로 늘려준 온정을 보답 받은 셈. 하지만 그래도 자신과 가족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에 참여했던 사람이니만큼 오토는 그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후 빈에서 살다가 1972년에 사망했다.
6.1. 회사 창고 관리인 빌럼 판 마런?
2022년 전까지 가장 유력했던 인물. 평소에 돈이 쪼들리는 편이었고, 은신처 사람들이 발각 당한 후 독일 당국이 그에게 건물 열쇠를 준 뒤에는 자기가 사장인 양 회사 일에 간섭해댔기 때문이다. 일개 하급 직원에 불과했던 그가 열쇠를 맡게 된 경위도 미심쩍은 점이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판 펠스가 우연히 떨어뜨린 지갑을 발견한 뒤부터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고 한다.은신처 발각 전에도 거동이 수상해 보였는지, 일기에서도 안네는 "판 마런의 행적이 조금 수상하다"고 적었다.[43] 일기에 따르면 은신 생활 중 도난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은신처 사람들과 회사 직원들은 "판 마런이 관련되어 있는 거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증거가 없어 의심으로 그쳤다. 그리고 판 마런 본인은 1971년에 76세로 죽을 때까지 평생 이를 부인했다.
6.2. 창고 청소부 리나 하르토크?
또 다른 유력한 용의자. 병역기피자인 아들을 숨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 은신처 사람들이 발각 당해서 수용소에 끌려가면 자신의 아들도 끌려갈까봐 늘 불안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10여 명의 유대인을 밀고하면 매우 큰 공을 인정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들과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은신처 식구들을 밀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안네의 일기가 출간된 이후 네덜란드 경찰이 밀고 사건을 재수사하던 중, 당시 괴뢰 경찰에 전화를 건 밀고자의 목소리가 여성의 목소리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하르토크가 더욱 의심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사망하여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6.3. 오토의 동업자 안톤 할러?
2000년대 이후에 요주의 밀고자 후보로 지목되고 있다. 처음 할러를 밀고자로 지목한 사람은 오토의 전기를 저술한 캐럴 앤 리로, 할러가 돈을 받고 유대인들을 밀고한 전적이 여러 번 있었던 데다 은신처를 습격한 독일 경찰들 중 할러의 친구도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참고로 할러는 오토가 돌아온 후 자신이 나치와 거래했던 사실을 숨겨달라는 대가로 오토에게 주기적으로 많은 돈을 주었다.사실 은신처 식구들은 은신 도중 몇 번의 위기를 겪었다. 사무실에 강도가 침입한 사건도 있었고, 건물주가 조력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집을 팔아버려 새 건물주가 집을 찾아온 일도 있었다. 다행히 열쇠가 없다고 해서 넘어갔지만.
참고로 당시 유대인을 신고하면 유대인 한 사람당 1.40길더를 포상금으로 주었다고 한다. 길더는 유로 도입 이전에 네덜란드에서 쓰인 화폐인데, 1945년 네덜란드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직후 고정 환율 2.652길더/USD과 당시 $1의 가치가 $13,26인 것을 감안해서 현재 가치로 대략 $7로 환산된다(2016년 기준). 단, 해방 직후 환율은 나치 치하의 네덜란드 길더 가치와 매우 다를 수 있다.
6.4. 사실 밀고자는 아예 없었다?
2016년 12월 16일 AFP 통신에 보도된 바로는,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박물관 측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은신처가 나치 독일에 의해 발각된 이유가 밀고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1. 은신처를 덮쳐 프랑크 일가를 체포한 것은 게슈타포가 아니라 SD라고 줄여 부르는 SS 방첩대였다.[44] 원래 SD는 방첩 활동이 주 업무였고 거기에 치안 단속 업무가 추가된 것이었을 뿐, 유대인 색출은 SD의 소관이 아니었다.[45]
2. 은신처가 발견되기 얼마 전, SD가 은신처가 있는 건물에서 일하던 두 남성의 배급권 불법 거래를 잡아냈고, 이에 따라 두 남성의 활동 근거지에 대한 정밀 수색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46]
3. 당시 은신처가 위치한 지역의 전화선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전화로는 밀고가 불가능했다는 점.
위와 같은 3가지 이유가 거론됐다. 종합하면 누군가의 밀고로 은신처가 발각된 것이 아니라, SS 방첩대가 배급권 불법 거래자들을 특정한 뒤 그들의 활동 근거지들을 중심으로 수사에 나섰는데 그 중 한 곳이 은신처가 위치한 건물이었고, 방첩대는 해당 건물을 수색하다가 우연히 은신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2. 은신처가 발견되기 얼마 전, SD가 은신처가 있는 건물에서 일하던 두 남성의 배급권 불법 거래를 잡아냈고, 이에 따라 두 남성의 활동 근거지에 대한 정밀 수색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46]
3. 당시 은신처가 위치한 지역의 전화선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전화로는 밀고가 불가능했다는 점.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이며,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박물관의 로날드 레오폴드 관장도 "이런 연구 결과가 밀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다른 가설들도 고려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은 없을지라도, 만약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재수 없이 걸려서 은신처 생활이 파탄난 꼴이니 심히 안타까울 뿐이다.
6.5. 아르놀트 판 덴 베르흐?
그러다 2022년 1월 17일, BBC 등 외신은 전직 미국 연방수사국(FBI) 수사요원 빈스 판코크(Vince Pankoke)가 안네 가족을 밀고한 주요 용의자를 지목했다고 보도했다. 놀랍게도 범인은 위에 열거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아닌 제3의 인물이자 같은 유대인인 아르놀트 판 덴 베르흐(Arnold van den Bergh)이다.암스테르담에 살며, 유태인 지역에서 나치 정책을 시행하는 걸 돕던 기구인 암스테르담 유태인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조직이 1943년에 해산되고 대원들이 강제수용소에 파견되자 수용소에 가지 않고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쓸모 있는 정보를 나치에게 제공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안네의 은신처를 알렸다고 한다. 판 덴 베르흐는 1950년에 사망했다.
그로인해 77년 만에 드러난 진범, 밀고자로 언론보도가 되기도 했었다.
사실 이미 과거부터 아르놀트 판 덴 베르흐는 여러 역사가와 탐사 언론인들로부터 밀고자로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부족했었는데 이번에 확인을 한 것이다.
총 19명의 조사팀은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와 전쟁·홀로코스트·인종학살연구소, 암스테르담시(市), 안네 프랑크 재단 등 관련 기관이 소장한 관련 자료를 철저히 훑었다. 이 중 안네의 아버지 오토가 수신인인 메모를 새로 찾아냈고, 여기서 '판 덴 베르흐가 나치에 가족의 은신처 정보를 넘겼다'는 내용이 기록된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나치의 네덜란드 점령 시절 나치에 협력하던 암스테르담 유대인 평의회의 일원이었던 자로,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프랑크 일가를 배신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1943년 유대인 평의회가 해산된 이후 조직원들이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으나, 판덴베르흐는 수용소로 보내지지 않고 암스테르담에서 정상적으로 거주하다가 1950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1 #2
빈스 판코크는 미국 CBS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60미닛(60 Minutes)과의 인터뷰에서 "판 덴 베르흐가 수용소에 가게 된 상황에서 일련의 보호를 받지 못하자 그와 그의 아내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나치에게 소중한 것을 제공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 관련 전직 수사관의 파일에서 판 덴 베르흐가 배신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익명의 메모 사본도 발견되었다. 이 메모의 수신인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였다. 오토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건데, 왜 진실을 밝히지 않았는지는 불명으로 조사팀은 또 "밀고자가 판 덴 베르흐라는 사실을 안네의 아버지가 알았지만 이를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유대인이 유대인을 밀고해 수용소에 보낸 사실이 반유대주의를 자극할 것으로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
그러나 그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용의자일 뿐 확실히 밀고자인지는 알 수 없는 상태였기에, 이를 공개한 네덜란드 출판사가 결국 사과했다. 출판사에 따르면, 조사팀은 판 덴 베르흐가 밀고자였을 가능성이 적어도 85% 수준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며, 자신들의 연구가 종전의 연구들이 채우지 못한 틈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를 너무 섣불리 단정지어 공개했다는 것. # 그리고 역사학자와 2차대전 전문가들은 네덜란드에서 책의 내용을 반박하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
결국 밀고자가 누구였는지, 혹은 정말로 밀고자가 있었는지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7. 미디어 믹스
7.1. 연극
역대 퓰리처상 시상식 | ||||
희곡 부문 | ||||
1955년 | → | 1956년 | → | 1957년 |
테네시 윌리엄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 → | 앨버트 해킷, 프란세스 굿리치 《안네 프랑크의 일기》 | → |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
역대 토니상 시상식 | ||||
최우수 연극 | ||||
제9회 (1955년) | → | 제10회 (1956년) | → | 제11회 (1957년) |
필사의 도망자 | → | 안네 프랑크의 일기 | → | 밤으로의 긴 여로 |
1955년 앨버트 해킷(Albert Hackett)과 프란세스 굿리치(Frances Goodrich)가 '안네 프랑크의 일기(The Diary Of Anne Frank)'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각색했다. 10월 5일 브로드웨이의 코트 극장에서 첫 상연되었다. 토니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7.2. 영화
- 1959년에 20세기 폭스사에서 위의 연극을 바탕으로 '안네 프랑크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고, 명작으로 1959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47]과 미술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칸 영화제와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한국 기준으로 저작재산권이 만료되어서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1편, 2편. 한국에서도 지상파로 더빙 방영한 바 있다.
7.3. 애니메이션
- 1995년에 일본 매드하우스에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나가오카 아키노리가 감독. 콘티 및 연출 협력 린 타로, 히라타 토시오, 아사카 모리오. 캐릭터 디자인 쿠보 츠구유키. 작화감독 카네모리 요시노리. 일본식 모에 화풍이 아니라 실제 안네의 외모와 리얼한 서양인의 외모를 재현한 극화풍으로 만들어져서 일본 흥행에 실패했다. 다만 훗날의 평가는 좋은 편이다. 안네 프랑크 재단에서도 이 애니메이션을 밀어준다. 시카고 국제 어린이 축제에서 어린이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애니메이션 감독 히라카와 테츠오가 극찬했다. # 일본어판에서는 현역 성우가 아닌 배우들이 더빙을 했으며, 영어, 프랑스어로 더빙이 되었다.
- 바시르와 왈츠를의 감독을 맡았던 아리 폴먼이 안네의 일기와 현대를 교차하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안네 프랑크는 어디에? (Where is Anne Frank)'>을 제작해 2021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했다. 일본에서는 <안네 프랑크와 여행하는 일기 (アンネ・フランクと旅する日記)>라는 제목으로 2022년 3월 11일에 극장 공개되었다.
7.4. 드라마
7.4.1. 미국 드라마
- 2001년판 ABC의 미니시리즈 '안네 프랑크(Anne Frank: The Whole Story)'도 있다. 현재 유튜브에서 영어 원판 그대로 끝까지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안네 프랑크 재단과 일이 틀어져서 안네의 일기를 소재로 한 이야기임에도 일기나 은신처 생활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은신처로 옮기기 이전의 생활과 수용소 연출이 사실적이고 훌륭하게 잘 되어 있고, 안네 역을 맡은 배우인 해나 테일러고든의 외모가 실제 안네와 닮았는데 연기까지 훌륭하게 소화하여 안네가 실제로 겪은 일들과 고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안네가 수용소로 끌려간 뒤인 7개월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충실한 자료 조사를 통해 다시 만들어졌기에 인간 안네 프랑크를 볼 수 있다. 링크.
7.4.2. 영국 드라마
- 2009년 BBC에서 드라마판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평도 좋은 편이라 상도 여러 개 받았다.
7.5. 음악
- 인디 뮤지션인 제프 맨검이 영향을 받아 전설적인 포크 락 앨범 'In the Aeroplane Over the Sea'를 써냈다. 1998년에 발표됐지만 오늘날까지 최고의 명반으로 추앙 받으며, 특히 4chan 등지에서의 제프 맨검 찬양은 대단하다.
7.6. 만화
- 삼성출판사에서 만화판을 출판했는데, 오류가 제법 많다. 마르고가 마르고트로 표기되었고, 안경을 쓰지 않았다는 등.
- 문공사의 '세계 명작만화 컬렉션'에서 만화판이 출간되었다. 현재는 블루래빗으로 출판사 판권이 바뀌었다.
7.7. 스핀오프
- 2020년에는 '만약 안네 프랑크가 일기 대신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면?'이라는 컨셉으로 시리즈가 나왔다.
8. 여담
- 과거에 한국에서 출판된 안네의 일기 번역본은 대체로 멀쩡히 안네의 사진을 표지로 썼지만, 어찌된 일인지 전혀 다른 엉뚱한 금발 백인 여성의 사진을 표지에 가져다 쓴 이상한 판본 책도 있었다.
[49]
만약 안네 프랑크 재단이 이를 알았다면 모욕죄로 고소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정식으로 출간되어 서점에 진열되었던 책이 아니고, 1980~90년대에 길거리에서 리어카에 담아놓고 팔던 것이다.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내용을 그대로 베꼈는지 번역 등에 전혀 문제가 없었음에도 어떻게 된 건지 저렇게 내용과 전혀 상관 없는 표지의 책들이 제법 있었다. 내용도 보지 않고 그냥 가까이 있는 아무 사진을 표지로 쓴 듯.
- 선술했듯이 성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중 월경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안네 프랑크는 생리에 관해 쓴 세계 최초의 작가'라는 평도 있다. 일본의 생리대 브랜드 '안네(アンネ)'가 여기에서 왔으며, 그게 월경에 대한 완곡어법이 되었다. 기사
- 비슷한 책으로 '엘렌의 일기'가 있다. 이 책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 파리에서 엘렌 베르라는 여자 대학생이 쓴 일기로, 1942년부터 1944년 체포될 때까지 쓴 것이다. 대학생이 쓴 거라[50] 훨씬 문장이 정제되어 있고, 안네의 일기와 다른 각도에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등[51] 독자적인 개성이 있다는 평이 많다. 다만 이 책은 프랑스에서도 2008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기 때문에 안네의 일기보다는 덜 유명한 편이다. 안타깝게도 엘렌은 나치 독일 패망을 앞둔 1945년 4월 초,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로 일가족과 함께 숨졌다.
- 비슷한 인물로 헬가 딘이 있다. 부프트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 그곳에서 1943년 6월부터 7월까지 한 달 동안 일기를 썼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용소 생활을 자세하게 묘사했고, 수용소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녀가 일기에 남긴 마지막 문장, "오늘 아침 아이들이 전부 사라졌다. 다음은 우리 차례다."가 유명하다. 그리고 이 문장을 쓴 다음날, 그녀는 폴란드에 있는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로 이송되어 약 2주간 생활하다 7월 15일 피살 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2004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밝혀져서 안네보다는 덜 알려져 있다.
- 한때 네오나치들과 일부 반유대주의자들이 이 일기를 '유대인들이 창작해낸 가짜 일기다'라는 망언을 했지만, 완전판 나올 당시 원본이 공개되면서 잠잠... 해지긴커녕 아직까지도 우기고 있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2013년 3월 3일자 방송에서 원본이 공개되었다는 설명은 않고 '아직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라는 설명을 하기도 했다. 이 방영분에서 나온 논란이 되는 근거가 네오 나치들이 주장하는 것들을 그대로 따왔다.
- 2013년 저스틴 비버가 유럽 투어 중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의 집'을 방문한 뒤 방명록에 "안네가 살았더라면 빌리버(저스틴 비버의 팬클럽)가 됐을 것"이라고 썼다가 욕을 바가지로 퍼먹은 적이 있다. #
- 2014년 2월 25일에 일본의 각종 도서관에서 이 안네의 일기를 비롯하여 각종 홀로코스트 관련 서적이 인위적으로 손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52] 도쿄에서만 300권이 넘는 서적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에 경악한 이스라엘과 유대인 단체들이 진상조사를 촉구하였고, 이에 일본 정부와 일본 경찰이 수사에 들어간 끝에, 마침내 범인이 잡혀 수사에 들어갔다. 링크. 범인은 "안네의 일기는 대필"이라는 해묵은 개드립을 시전하였다. 그런데 장갑까지 껴서 지문을 남기지 않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는데도 불안정한 언동을 보여, 정신 상태가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인지 확인하기도 했다.
- 2018년 5월 16일에는 안네의 일기에서 두 페이지 분량의 봉합된 일기가 발견되었다고 AP 통신에서 전했다. 기사. 안네 본인이 누가 볼까 해서 스스로 직접 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망친 페이지를 이용해 '야한 농담들'을 적어보겠다"면서 매춘, 결혼 등을 소재로 한 몇몇 얘기들을 단편적으로 적어놓았다. 당시 사춘기 소녀의 관점으로 적힌 것이기에 외설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고, 학자들도 웃긴 농담 수준으로 보는 내용이다.
[1] 동양에는 그런 문화가 별로 없지만, 서양에서는 일기장을 한 명의 인격체로 여기며 친구에게 편지를 쓰거나 말을 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내용도 '일기장에게(Dear Diary)'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2] 멜리사 뮐러가 쓴 '소녀 안네 프랑크 평전'(1998년)을 참고할 것.[3] 전남 여천 출신으로, <프로이트 정신분석론>, <나의 투쟁> 등지 번역.[4] [5] 일종의 가상현실인데, 마우스로 움직이기가 좀 불편하긴 해도 천천히 둘러보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6] 영국군에 의해 해당 수용소가 해방되기 고작 몇 주 전이다.[7] 무삭제판 후기에 따르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미프가 기지를 발휘해 일기와 안네의 글이 담긴 종이들을 간신히 빼돌렸다고 한다.[8] 덤으로 전시회에 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1944년 네덜란드 망명 정부가 BBC 방송을 통해 "종전 후 전쟁 당시의 기록을 모아서 전시회를 할 것"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했는데, 이를 들은 안네가 "나의 일기를 여기에 제출하겠다"면서 매우 개인적인 내용들을 많이 삭제했다.[9] 예를 들자면 안네의 단짝 친구 'Hanneli Goslar'의 경우, 'Lies Goosense'라는 가명으로 바뀌었다. 이 단짝 친구인 한넬리 또한 안네와 같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은신처에 숨어 있는 동안 안네는 한넬리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한넬리가 자신을 원망하는 꿈을 꾸고 '왜 나는 이렇게 숨어서라도 살아 있는데 한넬리는 죽어야 하는가'라며 몹시 괴로워하는 내용의 일기를 적기도 했다. 하지만 한넬리는 다행히 살아있어서 나중에 안네가 수용소에 끌려갔을 때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재회하기도 했고, 천운으로 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살아남아 1947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예루살렘으로 이민을 간 후 간호사로 활동하고 은퇴 후 홀로코스트 교육을 하였으며 2022년 10월 28일 향년 93세로 사망하였다.[10]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안네의 언니 마르고가 수용소의 생활에 견디다 못해 사망했고, 수용소 사람들은 안네를 위해 그 사실을 공연히 비밀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안네는 그 사실을 이미 눈치 챘고, 수용소에서 하나뿐인 가족을 잃자 이내 안네가 삶의 희망을 잃은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11] 실제로 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은 오랜 학대와 굶주림으로 인해 영양실조와 극심한 피로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아 신체가 제대로 된 소화 기능도 잘 하지 못하는 상태인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병원에 가서 전문 의료인들의 체계적이고 사려 깊은 치료와 간호를 받아야 생존률이 어느 정도 확보되며, 또한 음식도 고열량 식품을 먹였다가는 목숨까지 위험한 경우가 비일비재했기에 미음, 죽이나 오트밀 같이 소화가 잘 되는 음식부터 먹이고 기운이 어느 정도 차려져야 일반 음식을 소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학 지식이 없던 연합군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일단 뭐라도 먹이자'라는 생각만으로 전투식량, 초콜릿 바, 빵과 수프 등 고열량 식품이나 일상식을 그냥 주어서 이를 먹고 위장에 가해진 쇼크로 인해 배탈이 나는 등, 식량이 오히려 독이 되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도 블라덱과 친구 쉬베크가 우유와 닭을 먹고 탈 나는 얘기가 나온다. 심지어 당시 이 둘은 체력이 괜찮은 편이었음에도 탈이 났다.[주의] 매우 충격적이니 심약자는 시청에 주의.[주의] [14] 여자친구와 함께 잠을 자다 입을 맞췄다든가, 비너스와 같은 아름다운 여자의 몸을 보면 황홀감을 느낀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적어놓았다. #[15] 이런 주장들은 68혁명의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서구권에서 받아들여졌다. 바꿔 말하면 안네가 일기를 쓰던 시점에서는 당시 시대상보다 20년은 더 빠른 주장을 일기장 내에 적어놓은 것이다.[16] 물론 알아둬야 할 점이 있는데, 안네의 일기뿐만 아니라 사망자의 일기 등 사생활이나 개인 정보가 기록된 물건이 공개될 경우에는 어느 정도 편집되거나 비공개하여 내놓기도 한다. 이는 고인에게 명예를 지켜주기 위한 행위이면서 존중해주는 차원으로 하는 것으로, 일기 자체가 조작이라는 조작론은 네오나치나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니 무시하도록 하자.[17] 원래 프랑스어 이름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읽듯이 마지막 자음을 생략한다. 그래서 '마르고트'가 아닌 '마르고'이다. '마고'는 더더욱 아니다.[18] 편지에 의하면 마르고는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더 똑똑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그게 페터는 아니다. 그저 그런 사람을 못 만나서 안타까울 뿐이다. 너와 페터는 그런 면에선 잘 어울린다."라고 적었다. 안네는 언니가 상냥하고 마음이 넓다며 감탄했다.[19] 2020년대 현재 코로나 19로 인해 자가격리를 하거나 격리소에 입소한 사람들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만큼, 훨씬 더 극한 상황이었던 당시는 여러 모로 더했을 것이다. 일기 속에서도 은신처 식구들(일기를 쓰고 있는 안네 자신도)이 점점 더 서로에게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20] 안네 본인도 이 부분은 나중에 후회했다. 일기 중에 어머니를 신랄하게 비난했던 대목을 두고 스스로 '끝까지 못 읽겠다'며 반성하는 대목이 있다.[21] 오토야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지만 안네는 전간기에 태어났으므로 전쟁에 관해서 익숙한 정도가 다를 수 밖에 없다.[22] 안네도 페터를 "게으르고 별로 재미 없을 것 같다"고 안 좋아했다. 첫 인상 묘사도 굉장히 심심해 보인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적혀 있다.[23] 수용소에서 헤어지기 전까지 페터가 오토를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사실 친아버지인 헤르만 판 펠스가 먼저 가스실로 끌려가 사망한 상황에서 페터에게 오토의 존재는 아버지와 같았을 것이다. 참고로 은신처에 있을 때도 페터와 오토는 사이가 좋았다. 페터가 아버지와 한 판 하고 삐졌을 때 오토가 페터를 달래기 위해 여러 번이나 다락방을 오르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24] '계도 불가능한 정치범'들로 분류된 사람들이 끌려온 3등급 노동수용소이다. 1938년 빈과 린츠에 화강암 석재를 공급하고자 한 비너-그라벤 사의 요구로 세워졌다. 이 회사는 SS(나치 친위대) 소유의 DEST(독일 토목 및 석재 유한공사) 소속이었으며, 대표인 오스발트 폴 또한 후에 친위대 대장까지 진급하는 열성 친위대원이었다. 이를 위해 다하우 수용소의 일부 인원이 재배치되어 건설하였다. 마우타우젠 수용소와 구젠 1, 2, 3 수용소를 중심으로 하여 오스트리아 전역의 101개의 보조수용소(Außenlager)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콤비나트를 형성하고 있었다. 절멸수용소들과 같은 가스실은 없었으나 노동을 통한 절멸(Vernichtung durch Arbeit)을 추구하던 곳인 만큼 수감자들은 이곳에 부속된 벽돌 공장, 군수공장에서 끔찍한 중노동과 학대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DEST 소속 회사들뿐만 아니라 바이엘, 마우저, 하인켈, 메서슈미트 등 독일 유수의 대기업들 및 수많은 오스트리아 향토 기업들은 이곳의 이러한 참상에도 아랑곳 않고 저렴한 노예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 과정에서 총 12~32만 명의 수감자들이 이곳에서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45년 소련군이 오스트리아로 몰려오자 나치는 수감자들을 동원해 방어선을 건설함과 동시에 남은 수감자들을 지하공장에 집어넣은 후 붕괴시켜 전부 죽여버리고자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학살 명령은 수행되지 않았고, 수감자들은 폴란드, 러시아, 프랑스, 스페인계 수감자들을 주축으로 봉기를 준비했다. 이후 SS가 물러가고 그 자리를 오합지졸인 빈 출신 국민돌격대원들이 채우면서 수용소의 실질적인 주도권은 수감자들에게로 옮겨갔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인근 독일군 패잔병들의 공격을 격퇴하다 1945년 5월에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이후 이곳은 1970년에 박물관으로 재개장했고, 현재까지도 끔찍한 나치 정권의 범죄를 증언하는 역사적 장으로서 남아있다.[25] 무삭제판에서는 페터가 안네에게 무시의 생식기를 보여주며 성교육을 해줬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른 남자애가 성기를 가리키며 설명했다면 다시는 얼굴도 안 봤겠지만 페터가 너무 진지해서 당황스럽긴 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26] 안네가 친구였던 토시에한테서 받은 것으로, 은신처로 올 때 살짝 토시에네 집에 몰래 돌려주고 왔다고 나와 있다. 은신처에 숨어서도 모르체를 그리워하는 일기를 적기도 했으며, '언니와 함께 어떻게 하면 모르체를 데려올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상상도 해봤지만, 어차피 상상일 뿐 실제로 해낼 수는 없겠지...'라며 씁쓸해하기도 했다.[27] 금서는 어찌저찌 구했는데, 미프가 책을 구하고 돌아오던 길에 SS 차량에 치일 뻔해 문제가 커질 뻔했다. 차량 운전수가 미프에게 욕을 내뱉었다고 하는데, 욕설로 끝나서 망정이지 이걸 구실로 게슈타포에 연행되었으면 금서 소지죄로 인한 처벌은 물론이요 심문 과정에서 은신처가 들통날 수도 있었다.[28] 환자 카드를 들고 와서 그걸 정리했다고 한다. 그걸 대관절 어디다 쓰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29] 다만 이는 나이 54세에 은신처에 갇혀 있는 상황임을 감안해야 한다. 전쟁이 끝나고 네덜란드에 평생 살 계획이 아니라면 54세에 네덜란드어를 배울 필요가 아예 없을 수도... 또한 뒤셀의 본업이 치과의사였다는 점도 기억하자.[30] 게다가 당시 안네의 나이는 별 일 없이 자란 아이도 쉽사리 예민해지는 사춘기였다.[31] 오펙타(OPEKTA)라는 이름의 회사였다.[32] 미프는 후술하겠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체포조 현장 지휘관에게 동향인임을 어필하여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았다.[33] 안네 본인도 머리를 제대로 박아서 이마에 큰 혹이 난 적이 있다고 한다.[34] 안네의 일기 출간 이후 오토와 네오나치 사이에 있었던 소송 증인으로 출석했을 때 과도한 관심에 시달렸으며, 유족들에 따르면 생전에 전쟁 시절 얘기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35] 독일식 본명은 헤르미네 잔트루시츠(Hermine Santruschitz).[36] 게슈타포가 은신처를 습격했을 때 안네가 쓴 일기를 서류철에 재빨리 쓸어담았고, 나중에 게슈타포가 추궁하자 자기 문서라고 우겼다. 다른 말로는 돈, 귀금속, 보석을 갈취하던 게슈타포가 가방들을 뒤지다 일기장이랑 서류들이 쏟아지자 자세히 볼 것도 없이 그냥 버려놓고 간 덕분에 미프가 챙겨 놓았다고도 한다.[37] 다만 일기 내용은 몰랐다고 한다. 훗날 인터뷰에서는 "일기 내용을 알았다면 나의 신변을 위해 없앴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38] 안네가 자신의 일기를 공모전에 내려고 했던 걸 생각하면 안네의 꿈을 이뤄준 은인이다.[39]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옷, 구두 등을 챙겨서 은신처로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다윗의 별을 단 유대인이 짐가방을 잔뜩 들고 길을 나서면 바로 신고 당하는 게 당시 상황이었기에 이렇게 짐을 나눠서 옮겨야 했다. 실제로 오토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 짐을 조금씩 미리 은신처에 쌓아두었는데, 마르고에게 소환장이 도착하는 바람에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은신처로 숨었다. 판 단 가족도 열흘 정도 일찍 들어온 케이스. 안네는 이 때문에 "은신처로 이사하던 날, 옷을 그야말로 껴입을 수 있을 만큼 껴입어서 걷는 것도 버거웠다"고 일기에서 불평을 했다.[40] 일기에서도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언급이 여러 번 나온다.[41] 이를 보아 밀고자는 이전에도 비슷한 짓을 저지른 경력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데트만 중위가 이러한 일을 위해 개인적으로 심은 스파이인지는 불명이다.[42] 어찌 보면 개인적으로는 선행을 하는 사람이라도 커다란 악에 동조할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의 일례라고 할 수 있다.[43] 1943년 09월 16일 일기에 따르면 '창고 일꾼인 판 마런 씨가 이 뒤쪽 건물 공간이 수상스럽다고 여기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그가 원래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인 데다가 워낙 꼬치꼬치 물어보기 때문에 적당한 핑계만으로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라고도 되어 있고, 조력자들은 아예 판 마런이 있는지 없는지를 집중적으로 체크할 정도였다.[44] SD는 'Sicherheitsdienst'의 약자로, 직역하면 보안대라는 뜻이다. 게슈타포와는 상급 기관이 국가보안본부로 같을 뿐 엄연히 별개의 기관이다. 또한 구분하기도 쉬웠는데, 게슈타포 요원들은 정체를 숨겨야 하기 때문에 사복을 입고 임무를 수행하지만 SD 요원들은 대놓고 SS 제복을 입고 다녔다. 아예 SD 요원임을 드러내려고 왼쪽 소매에 식별 표지를 따로 부착했을 정도. 이는 SD가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45] SD는 방첩뿐만 아니라 레지스탕스와 파르티잔 협력자 색출 및 불순분자 체포 임무가 주특기였다.[46] 말 그대로 용의자를 체포할 명분으로 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당국이 압수수색을 벌인 것이다.[47] 판 단(판 펠스) 부인 역의 셜리 윈터스. 신경질적인 인물을 실감나게 연기해낸 그녀는 이때 받은 아카데미상 트로피를 암스테르담에 있는 안네 프랑크 기념관에 기증하였고, 지금도 이곳을 방문하면 트로피가 전시되어 있다.[48]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2번째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49] 표지 상단에 있는 단어 SELECTION이 SEIECTION이라고 되어있는 오류가 있다.[50] 아직 중학생이었던 안네와 달리, 엘렌은 소르본 대학교를 다니던 영문학도였다. 첫 페이지부터가 폴 발레리를 방문하는 장면일 정도.[51] 엘렌의 일기에서는 홀로코스트로 끌려간 사람들의 친족들을 책임지는 일을 하는 장면이나 시오니즘에 대한 비판이 종종 드러난다. 안네의 일기보다는 확실히 세상에 대한 인식이 확고한 성인이 썼다는 게 잘 드러나는 편이다.[52] 일각에서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지는 틈을 노린 극우의 만행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