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2:11:46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0101, #cc0000 20%, #cc0000 80%, #b70101); color: #fff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c224> 초대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0101, #cc0000 20%, #cc0000 80%, #b70101); color: #fff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fff> 초대 제2대 제3대
아돌프 히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루츠 폰 크로지크
}}}}}}}}}

{{{#!wiki style="margin-top: -10px; margin-bottom: -10px;"<tablebordercolor=#dd0000><tablealign=center><tablebgcolor=#dd0000>
파일:나치 독일 국장.svg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131230,#d0cfed
국가대통령
카를 되니츠
수상 외무장관 재무장관 내무장관
루츠 슈베린 폰 그로지크 빌헬름 슈투카르트
법무장관 산업생산장관 농무장관 노동장관
오토 게오르크 티라크 알베르트 슈페어 헤르베르트 바케 프란츠 젤테
전쟁장관 교통장관 우정장관 군수장관
카를 되니츠 율리우스 도르프뮐러 카를-오토 자우르 }}}}}}}}}}}}

[[독일의 전쟁범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000> 전범과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루돌프 헤스 | 마르틴 보어만궐석재판 | 발두어 폰 시라흐 | 발터 풍크 | 빌헬름 카이텔 | 빌헬름 프리크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알베르트 슈페어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알프레트 요들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에리히 레더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카를 되니츠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프리츠 자우켈 | 한스 프랑크 | 헤르만 괴링자살

카를 브란트 | 카를 게프하르트 | 볼프람 지퍼스 | 루돌프 브란트 | 발데마르 호펜 | 카를 겐츠켄

에르하르트 밀히

오스발트 폴 | 아우구스트 프랑크 | 게오르크 뢰르너 | 한스 뢰르너 | 프란츠 아이렌슈말츠

빌헬름 리스트 | 로타르 렌둘릭 | 발터 쿤체

울리히 그라이펠트 | 베르너 로렌츠 | 리하르트 힐데브란트

오토 올렌도르프 | 에리히 나우만 | 파울 블로벨 | 베르너 브라우네 | 에두아르트 슈트라우흐 | 마르틴 잔트베르거 | 오이겐 슈타임레 | 발데마르 클링겔회퍼 | 하인츠 요스트 | 구스타프 아돌프 노스케 | 프란츠 직스

헤르만 호트 | 빌헬름 리터 폰 레프 | 게오르크 폰 퀴힐러 |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 | 빌헬름 케플러 | 에른스트 빌헬름 볼레 | 리하르트 발터 다레 | 한스 라머스 | 빌헬름 슈투카르트 | 오토 디트리히 | 고틀로프 베르거 | 발터 셸렌베르크 |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별개의 재판
미국 마우트하우젠 재판

아우구스트 아이그루버 | 에두아르트 크렙스바흐 | 아돌프 추터
미국 부헨발트 재판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 | 일제 코흐
미국 말메디 재판

요제프 디트리히 | 헤르만 프리스 | 요아힘 파이퍼
영국 하멜른 재판

카를 에버하르트 쇤가르트 | 요제프 크라머 | 이르마 그레제
영국 아우리히 재판

쿠르트 마이어
영국 헤롤트 재판

빌리 파울 헤롤트
네덜란드 리페르트 재판

미하엘 리페르트
소련 리가 재판

프리드리히 예켈른
프랑스 님스 재판

빌헬름 비트리히
프랑스 보르도 재판

하인츠 라머딩결석재판

아르투어 그라이저 | 아몬 괴트 | 요제프 마이징거 | 루돌프 회스 | 요제프 뷜러 | 알베르트 포르스터
폴란드 슈트로프 재판

위르겐 슈트로프
폴란드 코흐 재판

에리히 코흐
체코슬로바키아 리디체 재판

쿠르트 달루게 | 카를 헤르만 프랑크
서독 만슈타인 재판

에리히 폰 만슈타인
서독 부흐 재판

발터 부흐
서독 모아빗 재판

에리히 바우어
이스라엘 아이히만 재판

아돌프 아이히만
동독 블뢰체 재판

요제프 블뢰체
서독 뒤셀도르프 재판

프란츠 슈탕글
서독 트레블링카 재판

쿠르트 프란츠 | 빌리 멘츠
서독 소비보르 재판

쿠르트 볼렌더자살
서독 볼프 재판

카를 볼프
이탈리아 프리프케 재판

에리히 프리프케
프랑스 바르비 재판

클라우스 바르비
21세기 이후 나치 전범 재판

요제프 쉬츠
학살 사건 홀로코스트 |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 바빈야르 학살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 말메디 학살 | 그래뉴 학살 | 르 파라디 학살 | 바르샤바 봉기 진압
종전 전 사망한
전쟁범죄
혐의자
아돌프 히틀러 | 요제프 괴벨스 | 마르틴 보어만 | 하인리히 힘러 | 리하르트 글뤽스 | 오딜로 글로보츠닉 |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 | 이름프리트 에베를 | 쿠르트 폰 고트베르크 | 에두아르트 바그너 | 프리드리히 크뤼거 | 필리프 보울러 | 한스-아돌프 프뤼츠만 | 헤르베르트 바케 | 베른하르트 루스트 | 헤닝 폰 트레슈코프 | 발터 모델 | 한스 크렙스 이상 자살
헤르만 페겔라인처형 | 아르투어 네베처형 | 카를 오토 코흐처형 | 에리히 회프너처형 | 빌헬름 카나리스처형 |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처형 | 볼프 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처형 | 지크문트 라셔처형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암살 |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암살 | 테오도어 아이케전사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암살 | 페르디난트 폰 자메른 프랑케네크암살 | 오스카 디를레방어의문사 | 롤란트 프라이슬러폭사 | 프리츠 비트전사 | 카를 항케 | 에른스트 하인리히 슈마우저 | 프란츠 치라이스
실종된
전쟁범죄
혐의자
하인리히 뮐러
기소되지 않은
전쟁범죄
혐의자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 쿠르트 발트하임 | 디트리히 폰 콜티츠
생체 실험 T4 작전
생체실험 관련인물
요제프 멩겔레 |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 | 카를 브란트 | 카를 게프하르트 | 호르스트 슈만 | 아리베르트 하임 | 카를 클라우베르크 | 지크문트 라셔
강제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수용소
기타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 | 정치장교 명령 | 국방군 무오설 | 나치독일 피해자 만들기
나치 전쟁범죄 부역자 안테 파벨리치 | 요제프 티소 | 살러시 페렌츠 | 비드쿤 크비슬링 | 이온 안토네스쿠 | 호리아 시마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 스테판 반데라 | 안톤 뮈서르트 | 그러시 요제프 | 루돌프스 방게르스키스 |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페렌츠 | 헹크 펠드메이어르 | 루스커이 예뇌 | 아민 알후세이니 | 프란시스코 프랑코중립국
※ 문서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서술. 기소 여부 및 판결에 대해서는 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서를 참고
※ 둘러보기: 틀:파시즘, 틀:나치즘, 틀:뉘른베르크 군사법정 전범재판 }}}}}}}}}
파일:Johann_Ludwig_Graf_Schwerin_von_Krosigk.jpg
풀네임 Johann Ludwig Graf Schwerin von Krosigk
요한 루트비히 슈베린 폰 크로지크 백작
출생 1887년 8월 22일
사망 1977년 3월 4일 (향년 89세)[1]
재임기간 1945년 5월 1일 ~ 1945년 5월 23일 (22일)
출신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2]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나치 독일 시기2.3. 여생
3.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의 관료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나치 독일에 이르기까지 재무장관을 역임했으며 1945년 5월 8일 나치의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선언 이후 약 3주간의 짧은 기간 동안 제26대 총리로서 대통령인 카를 되니츠와 함께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상징적 수장이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폰(von)이 들어간 이름에서 짐작이 가듯이 1887년 안할트 지역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모계는 스웨덴의 전 왕실[3] 출신. 법학정치학을 전공한 이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육군으로 참전하여 철십자 훈장을 받기도 했다. 최종 계급은 중위. 종전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정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폰 크로지크는 1929년에는 예산국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1931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전쟁 배상금의 감축 문제를 놓고 독일이 협상국 측과 벌인 협상의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2.2. 나치 독일 시기

파일:나치 시기 크로지크.jpg
나치 시기의 폰 크로지크
아직 나치가 집권하기 전이었던 1932년 총리 프란츠 폰 파펜에 의해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폰 크로지크는 1933년 나치가 집권한 이후에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계속해서 재무부 장관직을 수행한다. 입각할 당시에도 무소속이었던 그는 나치 집권기에도 여전히 무소속으로 나치당과는 거리를 유지한다. 이것은 그가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재무부 장관이기에 가능하기도 했던 일. 그러나 1937년에 나치당 입당을 수락하여 명예당원이 되었다.[4] 거기에 아돌프 히틀러 본인이 워낙 행정절차에는 무관심해서, 1938년까지 히틀러와 경제문제를 놓고 회의를 가져본 적 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말로 치닫던 1945년 5월 1일,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자살하자 히틀러의 유언장에 따라 대통령 자리에 오른 카를 되니츠 제독은 그에게 플렌스부르크 정부[5]의 총리직을 권유하고 고심끝에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후 며칠 동안 폰 크로지크는 되니츠와 함께 서방측과의 평화협상을 진행하면서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소련군에게서 벗어나게 할 시간을 최대한 벌고자 노력했지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필두로 한 연합군 수뇌부가 양쪽 전선에서 동시에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는 이상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파일:크로지크 머그샷.jpg
재판에 회부된 폰 크로지크

이후 5월 23일 연합군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고 그 수뇌부를 전범으로 체포한다.[6] 크로지크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어 뉘른베르크 빌헬름 가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덜 돋보이는 재무부 장관이었던 점 때문인지 10년 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은 1951년 석방되었다.

2.3. 여생

파일:말년의 크로지크.jpg
말년의 폰 크로지크
이후 두 권의 회고록을 포함하여 각종 경제학 관련 저서를 내놓으며 집필활동을 하다가 1977년 89세를 일기로 에센에서 사망한다.

3. 여담

  • 노동장관 프란츠 젤테와 더불어 나치당의 집권 기간(1933~1945)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장관직을 유지한 인물. 다만 장관직(Reichsminister)이 아니라 각료직으로 따진다면 빌헬름 프리크도 포함된다. 프리크는 1943년에 하인리히 힘러에게 내무장관직을 빼앗기고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국가호국관(Reichsprotektor)이 되었는데 여전히 장관급 관원으로 각료 신분이었다.
  • 헤르만 괴링처럼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 대한 겸직을 해본 장관이기도 했다.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구성될 당시 카를 되니츠는 기존의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유임하지 않아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잠시 외무장관에 보임되었지만, 그도 며칠 안에 사임하여 최종적으로 크로지크가 외무장관도 겸임했기 때문.
  •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쓴 사람 중 하나이다. 정확히는 괴벨스가 선동기사에서 최초로 이 표현을 썼고, 이 기사를 읽은 뒤 폰 크로지크가 플렌스부르크 정부 총리의 자격으로 1945년 5월 2일 행한 대국민 연설에서 쓴 것이 두 번째. 그리고 윈스턴 처칠이 다시 이 표현을 연설에서 사용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다.
  • 그의 외손녀 베아트릭스 폰 슈토르히(Beatrix von Storch)[7]는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부당수(혹은 부대표)로 독일연방공화국 하원의원이다.


[1] 89년 6개월 10일[2] 1937년 이후부터는 소속[3] 다만 조금 심하게 옛날이다. 14세기 왕실이니.[4] 이 시기 폰 크로지크의 사진을 보면 나치당 뱃지를 달고 있다.[5] 연합군이 사실상 독일 전역을 장악한 것을 생각하면 식물 정부나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행정력이 미치는 몇몇 곳이 있기는 했다.[6] 연합국에서 서방 측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인정하려는 듯한 제스처를 잠시 취했고, 때문에 항복 이후 몇 주 동안은 SS 대원과 미군 병사가 같이 경비를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당연히 소련 측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자 결국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시켰다.[7] 폰 슈토르히는 결혼 이후의 성씨로, 본래 옛 올덴부르크 대공국을 통치한 올덴부르크 대공가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