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독일어: Dolchstoßlegende(비수전설)영어: Stab-in-the-back myth
한국어: 배후중상설(背後重傷說)[1]
Die deutsche Armee ist von hinten erdolcht worden.
독일의 군대는 배후의 적에게 당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떠돌던 독일은 사실 전투에서 지지 않았으나 유대인과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병역기피, 탈영, 파업선동, 간첩질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인지부조화적 음모론. 비수를 뒤에서 맞았다는 뜻의 비수 전설이라고도 한다. 독일의 군대는 배후의 적에게 당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잘 되면 내 덕! 망하면 네 탓!"[2]임은 어디서나 있는 말이라 색다를 것도 없지만 이 도시전설은 반유대주의, 나아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정권을 잡아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원동력이었다.
구체적인 어원은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사민당이 자신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할까 두려워해 해외로 망명하고 가졌던 미국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왔는데 그는 1차대전 당시 독일 육군 참모 차장이자 군수 총감으로 상관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함께 실질적인 독일군의 최고 지휘관이자,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막대한 권력을 휘두른 대전 말 독일의 실권자였다. 당시 기자가 취재를 마치고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며 "그렇다면 이것은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는 뜻입니까?"("Sie meinen, Sie seien in den Rücken gestochen worden?")라고 하자 루덴도르프가 "내 말이 바로 그거요!"라고 한 대답이 널리 퍼지면서 정착되었다.
2. 배경
이 음모론이 나온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거시적인 상황'과 민중의 '미시적인 개인의 인식'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후대가 아는 전체적인 지식과 당시 개인의 삶 속의 지식은 차이가 있고 이 때문에 배후중상설이라는 괴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당시 동부전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 박살나면서 붕괴 직전이었다가 타넨베르크 전투로 한숨을 돌렸고 1915년부터는 전과를 확대해서 오히려 러시아 제국 깊숙히 진격했다.
서부전선은 독일군의 초기 전과로 알자스-로렌을 제외하면 프랑스, 벨기에 영토 안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서부전선이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지옥같은 참호전으로 변해서 4년을 질질 끌면서 독일의 모든 물자가 바닥나고 1917년과 1918년 겨울에는 매일마다 아침 점심 저녁 순무를 갈아서 순무에 발라먹고 찍어먹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독일 제국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부전선의 전투를 끝내고 여기서 빼 온 예비부대와 자원으로 1918년 서부전선에서 5번에 걸쳐서 대공세를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오히려 미군 병력이 본격적으로 들어오자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한계에 달한 독일군은 1918년 9월 발칸 전선에서 동맹국 불가리아가 붕괴해도 속수무책이었고 동부전선의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전쟁을 포기했고 서부전선도 군데군데 숭숭 구멍이 나면서 탈영병이 속출해 최후의 방어선으로 여긴 '힌덴부르크 선'까지 무너지면서 군부는 민간 내각에 협상국에 휴전을 요청해 달라고 통보했다.
당시 군부독재 체제였던 독일은 정보가 통제받던 탓에 내각과 총리조차 막장테크 탄 9월에 가서야 이런 상황을 보고받았다. 이전까진 러시아의 항복 덕에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했다. 협상국은 휴전 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받아들이고 휴전 협상 선결 조건으로 전쟁 이전 독일 국경까지 군대를 자진해서 퇴각하고 군부와 빌헬름 2세 대신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민간 내각하고만 협상을 하겠다고 통보했다. 이 소식이 독일에 알려지자 민심이 폭발해 앞으로 있을 평화 협상에서 걸리적거리는 황제는 강제로 퇴위 당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으며 전쟁 전 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갑작스러운 권력의 공백과 전후처리를 수습해야 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민간과 군부는 정부와 괴리되어 있었고 독일 본토는 전쟁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라디오 방송과 국가의 발표는 독일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거나 힘든 싸움을 하고 이겼다는 거짓된 선전들로 가득했다. 허황된 거짓말이었지만 민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고위인사들까지 의심치 않은 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독일 국민들 중에서 상황을 안 좋게 보는 이들조차 독일 내에서 전투가 없으니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고 현실을 오판하고 있었다. 패배를 알만한 이들도 패배를 체감할 시간은 전혀 겪지 않았다.
이처럼 독일 국민들은 전황이 좀 나빠졌지만 내부상황은 아직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고 휴전을 요청하다가 갑자기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부가 바뀌어 "우리가 졌다. 항복 선언하겠다."고 전국적으로 발표를 하니 독일 국민들은 격하게 반발했다. 독일 국민들은 패배를 부정했고 내부의 배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만들었다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국민들이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민간정부 내각의 이후 국정이 어떻게 될지 심각하게 우려했고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정파의 이익보다는 독일을 위해서 고민 끝에 결국 이 역할을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는 협상국의 실수도 한 몫 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을 발효하고 나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군대는 휴전 협상 뒤 평화협정을 하기 전 독일이 딴 마음을 못 품도록 북해 항구를 봉쇄하고 지상군은 라인 강까지 진격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1918~1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사이 독일 국민들은 휴전 이전처럼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결국 독일 곳곳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르주아 체제라며 거부하고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주장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등 공산주의자들의 폭동과 이를 진압하려는 집권당인 사회민주당, 이후 독일 공산당의 베를린과 작센과 바이에른 하노버 등지의 정부 전복 폭동과 정부 요인 암살등 극좌 테러, 그리고 이 모두와 대적하던 자유군단과 철모단 같은 우익 민병대[3]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나라 꼴은 이도저도 못하는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극좌 폭동을 진압한 직후 1919년 1월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중도좌파~좌파)-중앙당(중도우파~우파)-독일민주당(중도~중도좌파)의 흑적황 좌우 대연정은 76.2%의 지지를 얻으면서 독일에서도 민주 공화 체제가 정착한 것 같았지만[4]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을 통보하면서 전국적으로 국민들의 심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독일 국민들은 휴전이라고 해서 프랑스에 알자스-로렌 정도만 떼어주는 정도의 평화조약을 체결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는데 프랑스뿐만 아니라 벨기에, 폴란드[5], 체코슬로바키아[6], 덴마크[7] 등에도 영토를 바치는 데다가 모든 전쟁의 책임을 독일에다 몰아붙이고 독일을 완전히 거덜내 버리고 몇 세대에 걸쳐서 갚아도 턱없이 모자랄 천문학적인 수준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지경에 처하자 그만 정신줄을 놔버렸다. 그들은 휴전과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인 정치인들을 '11월의 범죄자(Novemberverbrecher)'라고 부르며 비난했다.[8]
사실 전쟁기간 내내 해상을 영국에 봉쇄당한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순무만 먹고 살고 있었으며 어린이들은 의약품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던 데다 전선의 병사들은 영양실조로 스페인 독감에 걸려서 픽픽 쓰러져 죽어가는 판국에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이라면 독일이 이기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현역으로 군복무를 하는 장군들조차도 진지하게 이 전설을 믿지 않았지만 휴전 직후 패전 책임을 묻기 위한 법정을 열려는 시도를 의회에서 제기하자 힌덴부르크가 직접 "우리는 전선에서 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한 까닭은 오직 후방의 반란뿐이었다." 라고 주장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하여 법정의 성립을 무산시켰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전범 800명 인도 조항에 황제와 군부 인사들이 들었는데[9] 군부 인사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배후중상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정치계에선 우익세력이 독일 정치계의 큰 축이었던 사회민주당을 공격하려는 수단으로 썼다는 평가가 유력하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가 1918년 군수공장 파업에 연루된 의혹을 반전세력인 공산당은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전쟁 이전 구체제에서 주류였던 우익 세력은 킬군항의 수병 반란으로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서자 찬전/반전 논쟁 시기 이전에 사회민주당 내 반전 세력이 떨어져 나간 독일 공산당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실제로 힌덴부르크는 백일 공세 직후 독일군에게 재기의 여력이 없었음을 잘 알았지만 자신이 군인으로서 항복과 패전의 책임을 지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각에 사실상 항복인 휴전 요청도 부관이었던 빌헬름 그뢰너 장군에게
독일은 1차 대전 이전에도 사회주의가 성행했고 바이마르 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항복하는 계기인 킬 군항의 반란은 노동자, 농민들과 결합하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이 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일 공산당의 전신 스파르타쿠스단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여성 사회주의자로서는 가장 유명한 축인 로자 룩셈부르크 등[10]이 폭력적인 공산 혁명을 시도했고 이 사건이 극우파들의 주장이 잘 먹히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끔찍한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의 극에 다다른 제국주의 세력의 충돌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이 전쟁에서 부르주아들의 국가, 즉 자국의 정부가 패배하기를 바라야 한다'는 혁명적 조국패배주의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들에게 전쟁의 원인이자 패전의 주역으로 몰릴 위기였던 보수 우익들이 오히려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건 역공이 바로 '등 뒤의 칼에 찔렸다!' 라는 이론이고 이 시기 거대 자본은 초기에는 전통적 보수파인 힌덴부르크를, 이후에는 나치를 지원하면서 좌파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러 노력한다. 또한 좌파 세력도 급진파(독립사회민주당, 공산당)와 온건파(사회민주당)로 나뉘는 바람에 온건파가 세력을 쥔 뒤 반전파들을 무력으로 탄압을 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저지하던 시점이라 효과는 만점이었다.
그 결과 1920년에 열린 총선에서 흑적금 좌우대연정의 지지율은 반토막 이상이 나 버렸다. 76.2%에서 35%까지 줄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회민주당은 첫 총선에서 40%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으나 이후 20%대의 정체한 득표율에서 왔다갔다 하게 된다.
3. 현실
미국이 참전하면서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설령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 한들 독일은 전황을 뒤집을 수 없었다.1917년 말 러시아가 혁명으로 전쟁에서 이탈하였을 때 독일인들은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1918년 춘계공세를 실시 하였지만 원래 계획대로 협상국들의 경계선을 노려서 분단시킨 후 파리를 점령하기는 커녕 그에 앞서 필요한 아미앵의 철도역을 점령하는 것도 실패 했다. 특히 독일군의 경우에는 제1파로 돌격하는 돌격대의 손실이 심각했지만 프랑스군은 돌격대와 같은 특수부대에 정예부대를 몰아 넣는 것은 정예병을 더 빨리 소모할 뿐이라는 페르디낭 포슈의 의견에 따라 참호청소조 역시 일반 중대에서 차출하였기에 전투력 손실은 프랑스가 훨씬 경미했다. 춘계공세 막바지에 들어서 미군이 본격적으로 투입 되면서 독일군은 숫적으로도 열세에 시달렸고 춘계공세 종료 이후로는 정예병을 대량 손실한 독일군은 겨우 긁어 모은 오합지졸들, 그마저도 숫적으로도 적은 상태였다. 반대로 협상군은 포슈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일원화된 지휘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이어진 백일 공세에서는 공자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좋은 교환비로 독일을 격파 했다. 백일 공세 막바지인 1918년 11월에 이르러서는 힌덴부르크 선마저 돌파 당했다. 11월 11일에는 연합군은 독일의 주요 철도역이 있던 스당-메지에르에 도달 하였고 여기가 뚫린다면 독일 본토로 통하는 길이 훤히 열리는 셈이었다. 백일 공세 후 독일이 제대로 공세에 투입 가능한 사단은 10여개에 불과 하였고 나머지는 이미 패잔병에 불과 했고 독일군 사령부가 통제하지 못 했다.
동맹국의 상황은 더더욱 절망적이었다. 1918년 9월 29일, 불가리아가 항복하고(테살로니키 휴전) 10월 30일에는 오스만이 항복(무드로스 휴전)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0월 24일에 시작된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이탈리아에 완패 했고 11월 3일에 항복(빌라주스티 휴전) 했다. 오-헝, 불가리아, 오스트리아는 각각 협상국의 군대를 백만 단위로 붙잡아 두고 있었다. 독일군이 발칸반도나 중동에도 파견 되어 분산 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프랑스와 영국 역시 같은 지역에 백만에 가까운 병력을 파견 하였기에 오히려 협상군이 더 분산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1918년 가을에 동맹국들이 모두 이탈 하면서 독일은 완전한 고립무원에 빠졌고 이는 발칸, 중동에 배치된 수백만의 병력이 대독일 전선에 투입됨을 의미했다.
하지만 독일은 이미 1916년부터 소위 순무의 겨울로 불리는 기근을 겪고 있었다. 자신들의 상황이 안 좋은 만큼 협상국 역시 힘들 것이라 자위하며 순무를 까먹으며 버텼지만 그마저도 1918년 겨울에는 한계에 봉착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전통적인 농업대국 프랑스였고 영국 역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뚫고 세계 각지의 식민지에서 식량을 들여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더욱이 압도적인 생산량을 가진 미국의 식량이 보급 되면서 협상국 측은 최소한 굶을 일은 없었다.
이것만으로 이미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호전 시킬 가능성조차 없었다.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한 이래 매달 25만명의 미군이 서유럽에 상륙 했다. 프랑스의 군수경제는 절정에 달했고 1919년까지 르노 FT 전차를 3천대를 생산할 예정이었다. 양측의 전력비는 시간이 지날 수록 협상군 측에 일방적으로 기울고 있었다. 독일은 이 격차가 더 커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협상을 해야만 하는 압력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려진 1918년 10월 24일 해군 명령은 해군 장병들을 협상을 위한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수병들은 이러한 자살 특공에 반대해 킬 군항의 반란을 일으켰다. 정상적인 상황이었으면 금방 진압되었겠지만 여기에는 오랫동안 굶주렸던 노동자들이 합세 하였다. 그리고 한 지역의 반란은 겨우 이레 만에 전국을 휩쓸고 체제를 무너뜨렸다. 11월 4일에 시작된 항명은 11월 7일에 전국적인 공화국 선언으로 이어졌고 11월 9일에는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 전역이 뒤집히기까지 걸린 시간은 1주일에 불과했다. 이것이야말로 당시 독일인들이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 훗날 스스로를 세뇌한 거짓말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처음에는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4년에 걸친 뼈를 깎는 싸움 끝에 완패한 군인들이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기 위한 변명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에 분노한 독일인들은 불과 1년 전까지 자신들이 굶어 죽거나 협상군의 총칼에 죽는 수밖에 없던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을 잊어버리고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찾아 헤맸다.
배후중상설에서 내부 배신자로 지목된 것은 좌파 사회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사회주의자(사민주의자 포함)는 대체로 1차대전에 협력했다. 무엇보다도 좌파사회주의 세력의 중심인 사회민주당은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런 행위를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짓고 로자 룩셈부르크 등 강경파들이 뛰쳐나왔으나 대중적인 영향력은 적었으며, 1차대전 당시 일부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들의 전쟁이라면서 전시 협력을 거부하고 탈영 데모 파업을 했지만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규모가 미미했다.
|
배후중상설에 반박하여 대응한 유대인 단체의 포스터. |
유대인들도 배신자로 거론되었다. 이 음모론을 해명하기 위해 독일내 유대인 단체에선 독일 국민 평균보다 유대인의 참전율과 전사율이 더 높다고 홍보했다. 당시 독일의 인구 1% 미만인 60만 인구 중 10만명이 참전해 1만 2천명이 전사했고 78%가 전방에 갔다. 더구나 독일 제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유대인은 장교 입대도 불허했고 병사 입대만 허용했다. 그래서 당시 독일 제국군에 있던 유대인 출신 장교는 바이에른 왕국과 같은 다른 제후국 소속이었다. 한 예로 히틀러의 철십자 훈장을 추천한 유대인 장교로 이름이 알려진 후고 구트만은 바이에른 왕국군 출신이었다.[11] 당시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유대교를 믿는, 혹은 조상이나 부모 중에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 있었던 독일인이라고 생각했지 단 한 번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 독일을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음모론자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나치를 포함한 우익들은 밸푸어 선언까지 붙여 "유대인들은 영국이 약속한 유대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 독일의 패전을 사주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도 만들어냈고,[12] 히틀러는 히브리인 1만 2천에서 1만 5천을 일찍 목 매달았다면 100만 명의 독일인은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란 선동으로 화답했다.
한편 이러한 선동으로 일명 유대 볼셰비키 세력이라는 독일 민족을 위협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독일인들은 믿었다.[13] 나치당은 여기에 아리아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첨가해 열등한 아시아계 유대 볼셰비즘의 위협을 선전했다. 유대 볼셰비즘에 대한 증오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저버리고 프로이센의 동방영토 국경지대에서 수없는 공작을 펼치며[14] 위협하는 유대 볼셰비즘의 본산 소련을 공격하는 독소전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4. 결과
흔히 배후중상설의 실체를 '전쟁을 일으키고 독일을 패전시킨 군부의 똥을 그대로 뒤집어썼을 뿐인데 만악의 근원처럼 호도당한 불쌍한 사민당과 자유주의 세력'으로 일축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했다.일단 현대 역사학계는 '독일 수뇌부가 전쟁을 일으켰다' or '독일의 전쟁 책임이 가장 크다'라는 식의 옛 학설들을 반박하고 뒤집고 있다. 자세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문서 참조.
패전에 대해서도 독일 군부가 할 말이 있는 게, '에리히 루덴도르프로 대표되는 독일 군부 세력이 카이저를 일방적으로 뒷구멍으로 몰아내고 횡포를 부려서 망했다'는 인식도 현재는 적극적으로 반박되고 있다. 1917년 이후부터 루덴도르프가 독일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재자는 아니었다.[15] 카이저는 여전히 인사권을 쥐고 있었고, 베트맨홀베크 수상과 사회민주당 역시 여전히 독일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쟁 내내 그 어떤 방면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따라서 대전 기간 동안 독일 민중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군부측 인사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만이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얻은 전공을 바탕으로 범국민적인 존경을 누리고 있었고, 이를 이용한게 그의 야심만만한 부관 에리히 루덴도르프이었다. 그는 반대 세력이 그들의 정책을 반대하면 힌덴부르크가 사퇴하겠다고 땡깡을 부리고, 우유부단하고 인기를 잃는게 싫었던 카이저/수상/사민당 등이 결국 깨갱해서 굴복하는 식으로 국정이 굴러갔다. 흔히 일컬어지는 '독일 군부 독재' 체제는 실상 루덴도르프가 독일 제국의 실무를 담당하는 대신 힌덴부르크가 자신의 인기로 루덴도르프를 비호해 권력을 누리는 시스템이었다. 실제로 전쟁 막바지에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상실했던 루덴도르프는 빌헬름 2세한테 바로 모가지 당했다.[16]
이를 반대로 생각하자면, 만약 사회민주당이나 빌헬름 2세가 독일 민중들에게 제대로 된 리더십이나 뚝심을 보여주었다면 군부가 모든 걸 좌우하는 사태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례로 1917년 초반에 제국의회에서 연합군과 '합병이나 배상금 없는 평화'조약을 맺는다는 안건을 통과시키자, 힌덴부르크는 자신의 주특기인 사퇴를 무기로 협박해 왔다. 빌헬름 2세와 사민당 다수의 의회는 이러한 공갈에 대항하기는커녕 굴복을 택했고,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물론 베트만홀베크 수상의 사임 요구까지 들어주었다.[17] 이런 식으로 사민당은 이론적으로 무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내내 군부의 횡포를 막는 노력을 보이기는 커녕 방관하고 협조했다. 이 비판은 역시 우유부단했고 전쟁 전부터 독일의 외교 상황을 악화시킨 빌헬름 2세에게도 적용된다.
그럼에도 전쟁 중반부터 끝까지 독일의 실권을 잡고 전세를 주도한 세력이 독일 군부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볼수 있다. 카이저와 베트만홀베크가 반대했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다시 밀어붙여서 미국을 참전을 유도하고, 전쟁 중후반 동안 제기 되었던 합리적인 평화 협상들을 전부 걷어 찼던 장본인들 또한 루덴도르프를 주축으로 한 군부 세력이었다. 이들은 앞서 서술한 의회의 평화 안건 말고도 빌헬름 2세의 비교적 온건한 대러시아 강화 조건들과 1918년 초반에 벌어진 노동자들의 반전 시위들을 강압적으로 탄압했고, 그 결과는 독일 제국의 완전한 패망이었다. 따라서 배후중상설을 떠들어 댄 독일 군부야말로 독일의 패배를 불러온 가장 큰 책임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를 포함한 상당수의 군부 수뇌부들[18]은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기 싫어서 배후중상설을 고집했다. 그리고 군부의 주장을 수용한 극우 선동가들의 의해 배후중상설은 독일 사회 곳곳에 퍼지게 된다. 이는 패전 수습이라도 시도했던 사민당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에 치명타를 가했고, 공화국은 배후중상설의 여파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나치에게 끝장나게 된다.
배후중상설을 믿은 독일 국민들은 이후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독일 국민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던 터전이 대대적인 폭격이 떨어지고, 1945년 1월~5월에는 자국의 영토로 진입한 연합군에 의해 고향과 국토가 불타는 동시에 가족과 이웃들이 이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있는데도 정부와 군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눈 앞에서 직접 보고 나서야 비로소 배후중상설이 헛된 것임을 자각하였다. 참고로 이 때문에, 실제로 일부가 항복을 제안하려 했을 때, 연합군은 그냥 씹고 진격했다.[19]
이미 때는 늦었고, 따라서 이제서야 독일인들이 현실을 자각하거나 후회해보았자 소용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참고로 양차대전으로 질린 미국은 전후 독일의 산업능력을 아예 거세해버리고 농업국가로 만들 계획도 세웠다.[20] 냉전이 일어난 것이 독일에게는 행운일 따름이다.[21] 항복 여론을 확실히 하고 나아가 전후에 패전국 국민들 사이에서 배후중상설같은 헛소리가 횡행하다 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참사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패전국 국민들에게 "질만 해서 졌다"는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해야한다는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뤄졌다. 어쩌면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얘기. 그리고 독일 민간인 뿐만 아니라 나치당과 제3제국 정부 및 군 수뇌부 역시 전쟁 말기부터 연합국의 군정 기간 종료 시점까지 자살/전사하거나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전범 재판에 넘겨진 이후 사형이나 장기 징역을 당하는 등 배후중상설을 믿고 전쟁에 나간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운 좋게 단죄를 피하거나 조기에 사면을 받고 실질적인 복권까지 이루어진 나치 독일의 인사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철저하게 전쟁범죄를 거부해 트집 잡을 거리가 없어 처벌을 면했거나,[22] 서방 연합군과 소련군이 자신들의 입맞에 맞는 새로운 독일로 재건하기 위해 불러들인 장기말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 했다. 게다가 연합국은 전 독일 영토에서 탈나치화를 추진함에 따라 나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것들은 사실상 부정되었고, 따라서 배후중상설도 과거의 유물로 남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걸로 끝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연합군이 자신들의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의 의식 사이에서 배후중상설은 오랜기간 동안 근절되지 않았다. 1952년에 이루어진 설문조사의 따르면 독일인들의 68%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믿었고, 1950년대 중반까지도 독일인들의 절반 이상이 히틀러가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믿었다. 심지어 1959년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독일인들의 90%가 유대인들을 자신들과 이질적인 인종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독일인의 인식에서 배후중상설을 완전히 일소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도 20-30년이라는 긴 세월과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연합국의 끈질긴 교육 활동, 그리고 대규모의 사회운동이 필요했다. 그나마 이때부터 독일 사회 내부에서 과거사에 대한 본격적인 자정 분위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걸 주도한 아랫 세대가 나중에 사회의 주도층이 된 1980년대~1990년대 이후에 전쟁을 경험한 구세대가 사회 지도층에서 은퇴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대거 사라짐에 따라 배후중상설은 독일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소멸하게 되었다.
5. 타국의 유사 사례
5.1. 미국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패전 이후 미군 내 강경파를 중심으로 베트남 전쟁 패전 이유를 '구정 공세 이후 미국 언론에 의해 형성된 반전 여론'에서 찾는 주장이 나왔다. 이들은 반전 여론만 아니었다면 미국은 북베트남을 밀어버리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23]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미국식 배후중상설이라 비판하였다.실제로는 당초에 베트남 전쟁은 명분없는 전쟁이었던 것이 패인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6.25 전쟁의 차이점은 북진의 여부인데 6.25 전쟁 때는 북한 거의 전역까지 올라간 덕분에 북한은 거의 망할 뻔 하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겨우겨우 기사회생했으며 중공군이 개입하고도 이전처럼 낙동강까지 몰아치지 못하고 평택-삼척 선에서 멈춰야 했고 이마저도 자력으로 해내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다시 현 휴전선 일대까지 쫓겨나 버렸다.
반면 베트남 전쟁에서는 미국은 북진이 불가능했다. 6.25 전쟁은 침공당한 한국이 유엔이 인정한 합법정부였으며 침공당한 입장이고 한국 자체적으로도 국가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던지라 미국이 개입하기도 도와주기도 쉬웠지만 남베트남은 제대로 합법정부라고 하기도 뭣했고 북베트남도 '직접적으로' 남베트남을 전면적으로 침공하는 건 자제했으며 남베트남은 초기 한국은 안정적으로 보일 정도로 중앙이든 지방이든 혼란스러웠다 보니 명분상으로 북진이 지지받기 힘들었다.
그나마도 북진도 이겼을 때나 통하는 말로 북진만 하면 미국인 낙승할 수 있냐라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자체적 군사력이 거의 소멸한 북한군과 달리[24] 북베트남군은 전쟁이 한창일 때 자체적으로 병력이 100만 명 이상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미군이라도 단시간에 손쉽게 제압이 불가능하며 설령 북베트남군의 주력을 소멸시키더라도 6.25 전쟁 때처럼 중국이 전면개입할 게 뻔하다. 물론 미국에게도 동맹 남베트남군이 있기야 하지만 내부 단속조차 제대로 못하던 남베트남군이 북진 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
결국 애초에 베트남 전쟁은 북진을 해도 이길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데 그 카드를 애초에 쓸 수 없었고 그래서 당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정말 이기고 싶었다면 '미국령 베트남'처럼 식민지를 박아 미국령으로 만들어버리거나, 남베트남 스스로가 한국처럼 자체적인 역량을 키워 북베트남에 맞설만한 나라가 되는건데 이 나라는 망한 후 쌍둥이격의 국가인 한국에서조차도 나라 꼴이 엉망진창이라 망할 줄 알았다, 망해 마땅한 나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망한 나라라 될턱 이 없었고 당시 세계는 탈식민주의가 이미 대세였다.[25]
5.2. 프랑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에 6주만에 완패한 프랑스도 '배후 중상'을 믿었다. 즉, 독일군의 승리가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반란[26] 때문이라 생각했다.비시 정부를 이끌었던 필리프 페탱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리고 페탱은 독일에 점령된 것을 기회로 반 왕당파, 진보 지식인, 사회주의자 등 자신이 생각하기에 눈에 거슬리는 자들을 전부 프랑스에서 몰아낼 생각으로 1942년 패전 책임을 묻는 재판정을 열었는데 이 때의 피고들은 모두 정치인이나 지식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독일이 육군과 공군 간의 합동성 증대, 무전기를 장착한 전차의 도입으로 보병과 기갑부대간의 유기적인 움직임, 선형 전술을 타파한 기갑부대의 과감한 기동전술을 들고 나올때 구시대적 선형전술과 문서에 의한 명령하달을[27] 고집하고 진즉에 독일을 깨부술 수 있는 기회에 찍턴을 하고 돌아와 마지노선에 틀어박힌 프랑스 군부의 책임이었다.[28]
사실 프랑스에서는 이미 한 세기 이전에 이와 비슷한 인지부조화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까지 터졌다. 자세한 건 드레퓌스 사건 문서 참조.
5.3. 일본
제2차 세계 대전 뒤의 일본의 상황이 제1차 세계 대전 뒤의 독일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몰락 작전을 펴기 전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결론적으로 일본 본토에는 연합군이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 내에서도 1차 대전 이후의 독일과 2차 대전 이후의 일본이 '패전의 실감이 없는 패전'으로 유사하다는 분석이 있다.오히려 이러한 문제는 패전을 통해 나라가 박살났지만,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10년만에 세계적인 강국으로 빠르게 성장했던 일본의 현대사로 인해 생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패전을 통해서 오랫동안 전국이 피폐해졌으면 전쟁에 대한 극도의 혐오정서가 생겼을텐데 10년만에 다시 한 번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하다보니 이런 정서가 완전히 정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은 전간기 독일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1차 대전 당시에는 전선이 독일 영토 밖에서 형성되었고, 독일의 열세로 인해 전선이 뚫리기 전에 이미 전쟁이 끝났다. 독일 국경 내로 연합군이 진입하긴 했지만 이는 독일의 사실상 항복 이후의 일이었다. 이 때문에 비록 독일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적, 경제적 피해는 입었지만, 정작 독일 본토 자체는 전쟁의 참화를 비켜가는 데에 성공했다. 게다가 당시의 공군은 아직 초창기였기 때문에 후방지역이었던 독일 본토의 폭격 피해도 주목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 당시 독일에 대한 폭격은 거의 전부 철도나 군수공장 등 군사 목표물에 대해서만 행해졌고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는 도시에 폭탄이 떨어진건 런던 정도였다. 그래서 "국민 여러분. 진정하시고 평상시처럼 하던 일을 하십시오."를 영국 정부가 국민에게 선전한 것이 대표적이다. 독일 제국은 비록 전쟁에서 열세였지만 어쨌든 독일인 자신들의 혁명으로 멸망했고, 곧이어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들어서서 실권을 쥐어 가혹한 패전조약을 맺었으나 일본의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같은 실권을 쥔 외국군의 점령기관이 없었다.
이와 달리 일본은 지상군 상륙만 없었을 뿐이지, 도쿄 대공습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등의 엄청난 공습을 통해 본토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오늘은 어디어디 도시를 폭격할 것입니다, 민간인들은 대피하세요." 라고 여유로운 폭격 사전예고까지 하면서 그걸 그대로 실행하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저항의 의지까지 잃어가며 처절하게 짓눌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 열도 전체를 마치 하나의 실험장으로 삼은 것 마냥 마음대로 폭격하고 있었는데 도쿄 대공습이 대표적이다.
특히 네이팜탄이나 원자폭탄의 무자비한 위력을 직접 겪어본 일본인들의 연합군에 대한 공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연합군에 대한 완패는 일본 내부에서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완전히 인정되어 있었고, 궁성사건과 같이 항복을 거부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별다른 저항없이 실권을 내주었다. 말하자면 워낙 깔끔한 자국 상황에 전쟁의 피해를 실감하지 못해서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진짜 실력으로 진 건 아닌거 같은데?" 라는 잠꼬대가 가능했던 독일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내부의 적에게 책임을 돌리기에는 일본의 패배가 눈앞에 닥쳐왔던 상황이었다.
다만 폭격의 참화를 피해간 지역에서는 배후중상설에 기반한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다. 별다른 전략적 가치가 없어 폭격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시마네현에서는 마츠에 소요 사건 등 항복을 인정하지 못한 극우세력의 소요사태가 있었으며, 조금 다르긴 하지만 브라질의 이민자 일본인들도 제한된 정보 속에서 항복을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자기들끼리 맞다 아니다로 싸워 20명이 넘게 죽은 병맛나는 짓을 하기도 했다. 관련 글[29] 결국 독일이나 일본을 불문하고 실제 전장의 참혹함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나 전선과 괴리된 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잘못된 판단을 하기 마련이며, 그런 심리는 배후중상설의 배경이 되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
상술된 요소 때문에 21세기 일본의 우경화는 지리적 요소와 역사성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독일은 강대국들인 소련, 영국, 프랑스 및 체코, 폴란드, 네덜란드 등 여타 유럽의 피해국들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대륙국가이기에 생존을 위해 주변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할 필요가 있었지만, 일본은 국경선을 맞댄 나라가 없는 섬나라인 데다 든든한 후원자인 미국까지 있었고, 전후의 유럽과 달리 아시아 사회는 대체로 발전을 못 하고 혼란의 시기를 겪었던 탓에 독일과는 다르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으며 식민지와 관련된 잔혹행위와 약탈 등의 문제는 독일과 미국을 포함한 당대의 서방 세계 열강들 전부가 가지는 문제라서 유대인 문제로 독일을 압박한 것처럼 압박하는 것도 곤란했다는 것이 해당 의견의 주장이다. 또 독일은 자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자기 손으로 나치당을 집권시킨 것이라 어떠한 심리적 도피의 여지도 없었으나, 일본은 5.15 사건 등 군부의 폭주로 문민정부가 붕괴하며 우경화한 것이라 일반인 입장에서는 자기변호를 할 여지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꼽힌다.
[1] ‘가운데 중’이 아니라 ‘무거울 중’이다. 쉽게 말해 ‘등 뒤(背後)’에서 ‘중상’을 입혔다는 것.[2] 사회과학에서는 지각(perception, 知覺) 과정에서의 '귀인의 오류'로 자존적 편견(self-serving bias)이라고 한다.[3] 태반이 제대군인이었고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내내 벌어진 우익 준동의 주역일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주요 지지세력이 되었다.[4] 1919년 1월 선거는 남녀 보통선거였다. 제2제국에서 선거권의 제한으로 노동계층의 정치참여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다. 영국은 당시 남녀 차별 선거권(남성 21세, 여성은 30세 이상), 프랑스는 1945년에야 여성투표권을 인정할 만큼 당시 독일의 선거는 선진적이었다.[5] 포젠, 서프로이센, 상부 슐레지엔, 단치히.[6] 상부 슐레지엔의 일부 지역이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어갔다.[7]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북부가 덴마크로 돌아갔다.[8] 프랑스는 독일이 못 갚을 만큼 지나친 배상금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독일 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일각에서도 좀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의견이 나왔었다.[9]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비판적이고 전쟁의 발발에 대한 책임을 한쪽에만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어쨌든 당시 협상국의 주장이 그러했다.[10] 당시 독일 공산당은 찬전/반전 갈등으로 사회민주당(SPD)에서 갈라져 나왔고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와 무관한 독자노선이었다.[11] 참고로 구트만은 후일 나치 집권 후 게슈타포에 체포되는데 다행히도 히틀러가 옛 인연 때문인지 곧장 풀어줬고 나중에 구트만은 미국으로 이주해 2차대전이 끝나고도 17년 정도 더 살았다.[12] 정작 맥마흔 선언을 통해 똑같이 아랍 국가 건설을 약속받은 아랍인을 상대로는 처음에는 유대인과 다를 바 없이 여기다가 영국을 상대한다는 미명하여 립서비스를 해주곤 해서 일관성이 없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랍인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안 좋았다고 하는데 정작 현대 아랍인들의 상당수는 반유대주의 기치에 열광해서 히틀러를 좋게 본다.[13]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스베르들로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물론, 소콜니코프, 야고다, 카가노비치, 보로딘 같은 중역들도 유대인이었으며 볼셰비키의 반대편에 있는 멘셰비키 같은 경우에도 마르토프, 로좁스키, 악셀로드, 단, 아브라모비치 같은 핵심 인사들이 전부 유대인이었다. 심지어는 레닌의 외가도 기독교로 개종한(Выкресты) 유대인이었기에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띤 독일의 우파들과 나치들은 유대 볼셰비즘, 또는 유대 공산주의 같은 수사에 설득력을 더할 수 있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공산주의를 퍼뜨리고 혁명을 일으켜 독일 민족을 노예화하고 유대인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려 한다고 믿었다.[14] 소련 측에서는 발칸반도 방향으로 영향권을 확장하려 했고 히틀러는 이를 독일을 향한 위협 행동으로 천명하며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소련은 독일과의 무역협정을 비롯해 대부분의 협정을 준수하고 있었기에 전쟁 선포의 정당한 구실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전쟁 위협 행위로 따지면 독일은 더 심했는데 전쟁 발발 직전까지 온갖 물자는 다 받아먹으면서 열심히 정찰기로 영공을 침범했다.[15] Tipton, Frank B. A History of Modern German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16] Mommsen, Hans Eugene. The Rise and Fall of Weimar Democracy. Translated by Elborg Eugene. Forster and Larry Eugene. Jones.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8[17] de Gaulle, Charles (2002). The enemy's house divided.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18]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고 전쟁 기간 동안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에 부정적이었거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군부 인사들은 패전 책임에 대해서 쉬쉬했다.[19]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방 연합국에 원하는 것을 들어줄테니 함께 소련을 공격하자라고 제안했다. 물론 처칠은 언싱커블 작전을 입안하고 조지 패튼은 난 이 독일놈들이 소련놈들 보다 좋다라며 난동을 부리기도 했지만 영국군 수뇌부와 미군 수뇌부는 그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언싱커블 작전을 입안한 처칠 역시 나치당에 의한 독일을 항복시킨다는 전제조건을 확실히 했다. 참고로 히틀러가 지옥을 침공하면 악마를 위한 연설을 할수도 있다고 한 양반이 처칠이다.[20] 일본에 대한 민간인 폭격도 어느 정도는 이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일본쪽은 아예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을 정도까지 깡그리 밀어버리려 들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불지옥으로 만든 후 몰락 작전에서도 저항이 심한 곳마다 핵폭격을 떨궈서 말살해버릴 계획이었으니...[21] 사실 독일 수뇌부는 이미 냉전이 올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고 여기에 희망을 걸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냉전을 너무 기대한 나머지 알아서 서방연합군이 자신들의 편에 서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서방연합군이 바보도 아니고 김칫국만 들이마시는 독일을 냅둘리는 없었고 결국 히틀러가 자살한 후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야 부랴부랴 협상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22] 예시로 테오도어 모렐은 무려 나치당원+히틀러의 주치의라는 나치 독일의 고관이라 할 수 있었으나 했는 악행이 뇌물을 받고 자리를 알선해주거나 자기가 개발한 약물을 군 당국이 납품받도록 하게 하는 정도의 아주 사소한 일들 뿐이라 기소되었지만 반인륜 범죄나 전범 행위로 간주할 만한 게 못 되어서 그냥 석방되었다. 반면 그의 동료였던 카를 브란트 등은 인체실험 같은 반인륜 범죄와 깊게 연관되어 있어 처형되었다.[23] 이 때문인지 훗날 걸프 전쟁 때 미군은 자국 언론인 출입과 언론에 전달할 정보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24] 때문에 중공군 개입 이후부터 공산군의 주력은 중공군이 되었다.[25] 애초에 베트남 전쟁도 기원을 거슬러 가보면 2차 대전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재침공이 전쟁의 시발점이었다.[26] 실제로 프랑스 공산당은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고 정부의 국방비 증액을 방해하거나 전시에도 파업, 사보타주 등의 이적 행위를 저지르기는 했다. 이들은 독소전쟁이 터지고 나선 반독으로 전환해 적극적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이끌었지만 이미 앳저녁에 프랑스는 항복한 뒤인지라.. 재밌는건 독소불가침 조약 이전 프랑스에서 공산주의를 탄압하는 나치 독일을 가장 앞장서서 비난했던 세력이 바로 프랑스 공산당이었는데 소련이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당혹해했다고 한다.[27] 다만 이건 독일군이 최신 기술과 전술을 도입하며 열심히 전쟁을 준비한 것이었다. 프랑스군 역시 1차 대전 당시 엘랑 비탈로 대표되는 기동 전술을 만들었고 무능하다고 오늘날 찍힌 가믈랭은 나름 기갑사단을 확충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공황의 여파와 1차 대전의 악몽은 프랑스군에 이러한 변화를 도입하는 걸 방해했다.[28] 다만 프랑스 군부 입장에선 나름 찍턴에 대해 할말이 있는게 자르 공세에 대응한 독일군 제 1군은 2선급 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기동로에 지뢰를 매설하고 다양한 기만 전술을 펼치면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 영불 최고 사령부는 투입한 사단들로부터 들어오는 교전보고에 독일군이 폴란드로부터 사단을 차출했다고 착각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마지노선과 같은 지크프리트선에 꼬라박는건 독일만 좋은 일을 해주는 꼴이었다. 그러던 중 브루라 전투에서 폴란드 주력군이 증발하면서 독일은 완전히 승기를 잡았고 소련 역시 참전하며 폴란드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영불 연합군은 깔끔히 포기하고 돌아온 것이다.[29] 여담으로 이것 때문에 한동안 브라질계 일본인들 사이에서 박하에 굉장히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했고 지금도 이런 인식이 남아있다고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