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2:14:37

쿠르트 폰 슐라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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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쿠르트 폰 슐라이허.png
바이마르 공화국의 23대 총리
본명쿠르트 페르디난트 프리드리히 헤르만 폰 슐라이허
Kurt Ferdinand Friedrich Hermann von Schleicher
출생1882년 4월 4일, 독일 제국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
사망1934년 6월 30일, 나치 독일 포츠담 (향년 52세)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 개요2. 생애
2.1. 정치 입문 전2.2. 정치 입문 후
2.2.1. 바이마르 공화국 국방차관2.2.2. 바이마르 공화국 국방장관2.2.3.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2.2.4. 실각
2.3. 최후와 평가
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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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총리이자 군인.

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에서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슐라이허는 1900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해 근위 제 3 보병연대 제 5중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동료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부대에서는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친한 사이였다.

1913년에 참모본부에 배치된 슐라이허는 자신의 희망에 의해 빌헬름 그뢰너 중령의 철도부에 배속되었으며 그곳에서 파펜을 알게 되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대위로서 병참부대에 소속되었다가 1917년에 제 237보병사단참모가 되었다.

1918년에 소령으로 진급 후 독일 11월 혁명 당시 그가 속한 군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주도의 임시정부 협력에 찬성했다. 상관이던 그뢰너 참모차장과 SPD 당수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오토 벨스는 서로 협약을 맺어 두 사람을 반란군의 손에서 구출했다. 이 협약은 과도정부의 안정과 함께 군부에게 국가 안의 국가라는 독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1차대전 후 병무국장이던 한스 폰 젝트의 측근이 되어 아들 오스카를 통해 힌덴부르크 대통령과도 개인적 신뢰관계를 쌓은 슐라이허는 독일군 내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2.2. 정치 입문 후

2.2.1. 바이마르 공화국 국방차관

1929년에 국방차관으로 취임하였고, 1931년에는 종형제의 미망인이던 폰 헤닝 장군의 딸이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2.2.2. 바이마르 공화국 국방장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36-B0228%2C_Kurt_von_Schleicher.jpg
1932년의 슐라이허

1932년에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가 세계 대공황의 선후처리를 위해 경제정책을 손대자 사회주의적이라며 슐라이허는 반대했는데 나치의 돌격대가 대두되자 돌격대 금지령을 둘러싸고 상사였던 그뢰너 국방장관과 마찰을 빚자 그뢰너를 사직시켜 브뤼닝 내각은 큰 타격을 입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지지를 잃은 브뤼닝 내각은 퇴진하여 슐라이허는 후임 총리로 오랜 지기였던 파펜을 추천했다. 파펜을 추천한 이유는 오랜 지기일 뿐만 아니라 멍청했던 파펜을 자신이 조종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

파펜 내각에서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슐라이허는 8월에 나치의 총리이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부총리직을 제시하면서 여당으로 끌이들이려 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2.2.3.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사회민주당의 오토 브라운이 수반으로 일하던 프로이센 주 정부를 프로이센 쿠데타로 해산시키고 정부를 지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파펜의 정치능력과 인기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고 9월에 불신임결의가 통과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파펜을 지키려 의회 해산권으 먼저 행사하여 불신임에도 불구하고 절차적인 문제를 삼아 의회 해산후 재선거가 있었으나 또다시 나치당과 공산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나머지 중앙당 사회민주당도 파펜을 불신임한 정당들이 똑같이 의회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슐라이허는 파펜의 정치력이 한계에 달했다며 의회 불신임이 또 다시 통과거나 의회를 해산하면 파펜이 물러나지 않으면 공산당과 나치당의 폭동이 터져 내전이 발생할 것이며 10만에 불과한 육군과 프로이센 무장경찰로는 폭동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대통령 힌덴부르크에게 보고했다. 그 결과
임시로 1932년 12월 3일 슐라이허가 대통령 권한의 의해 총리에 임명되는데 슐라이허는 나치당에 연대를 제안했지만 결과는 슈트라서만 해외로 쫓겨나고 끝났다. 군부의 자금원조와 신문에 의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슐라이허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우파 진영에선 슐라이허가 노동자의 총리가 되겠다는 소리에 "붉은 장군"이라며 경멸했고, 좌익에서는 프로이센 쿠데타에 의해 “반동주의자”라 찍혀서 사실상 공공의 적이 되어버려 우왕좌왕했다. 당시 독일에는 강철의 대원수에 의해 소련에서 쫓겨난 레프 트로츠키가 있었는데 트로츠키조차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정도로 그는 우왕좌왕했다.[1] 슐리이허의 어설픈 공작에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실각하고 나치당이 슐라이허 총리 내각에 완전히 등을 돌리자 슐라이허는 의회 재개 되면 또 다시 불신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자신을 믿고 재선거 없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나치와 공산당을 체포하여 비상대권으로 통치하자는 제안을 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불과 몇달 전에 폭동 진압이 어렵다고 보고 하고나선 이제와선 폭동을 진압할수있다는 보고에 격분했고, 대통령 취임시에 헌법 준수를 맹세했다며 슐라이허의 제안을 거절했다.

2.2.4. 실각

한편 슐라이허에게 실각당한 파펜은 히틀러와 접촉해 이들은 1933년 1월에 은행가의 중개로 두 차례의 극비회담을 가졌다. 1월 22일 회담에서는 슐라이허의 옛 친구이던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은행가, 대통령 비서실장인 오토 마이스너도 히틀러 같은 인물을 왜 총리에 임명하지 않느냐고 힌덴부르크를 설득했고, 여기에 국가인민당도 참여하는 형태로 슐라이허의 포위망이 형성되어 사면초가가 된 슐라이허는 1월 28일에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회담에서 사직을 권고받은 후 히틀러를 차기 총리로 한다는 힌덴부르크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나는 이미 무덤에 한 발을 디디고 있다. 후에 천국에 가서도 이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슐라이허는 "그런데 각하, 이 배신 후에는 각하께서 천국에 가시게 될지 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그렇게 쫒겨난 슐라이허는 여전히 독일군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히틀러에게 있어서 위험 요소였기 때문에 그를 숙청하기로 마음 먹었다.

2.3. 최후와 평가

결국 1934년 6월 30일에 슐라이허는 히틀러가 일으킨 숙청, 일명 장검의 밤 사건으로 신혼 집에서 부인과 함께 총에 맞고 죽었다. 그는 예비역 육군 중장[2]였고, 마켄젠이 장군참모협회에서 히틀러에 대한 비난 연설을 했지만 히틀러가 프로이센 토지를 주자 입을 다물었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던 가정부는 다음 해에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되었는데 공식적으론 자살로 발표되었고 2년 후에는 슐라이허가 에른스트 룀과 손잡고 반역을 일으키려는 꿍꿍이가 있었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슐라이허가 히틀러에 의해 살해 되었다고 해서 독일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처음부터 히틀러에 반대한것이 아닌 포섭하려다 실패하고, 짧은 총리 기간에 의회 불신임을 면하려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한 후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비상대권으로 통치하려다가 대통령의 거부로 해임되었기 때문이다. [3]

3. 대중매체

  • 2003년 TV영화 히틀러: 악의 탄생에서는 영국 배우 크리스토퍼 애트리지가 분했다. 파펜이 히틀러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옆에서 낄낄거리다가 히틀러에게 모욕을 당하질 않나 역사대로 총리가 됐다가 순식간에 퇴출당하고 암살당하는 등 안습하게 나온다.
  • Hearts of Iron의 대체역사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독일 제국이 1차세계대전에 승리해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하지 않아 장검의 밤 또한 일어나지 않았기에 살아있다. 1.0 정식 업데이트 이후, 1936년 검은 월요일 금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제국 수상으로 취임하며, 이후 루르 폭동 제압 상태에 따라 수상직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이명 높은 성의 사나이. 권력 유지에 성공한다면 독일을 국방국가로 만든다. 슐라이허의 독일은 무슨 러시아나 중국에 못지않은 징병 능력을 보여준다.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2차대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도 은퇴한다.


[1] 공산당에 손을 내밀었다가 우파에다가 손을 내미는 둥 한마디로 개판 그 자체였다. 트로츠키의 표현에 의하면 '군복을 입은 물음표' 였다고.[2] 총리에 취임하면서 전역했고,(국방장관은 겸임) 독일 육군 최고사령관이 겨우 상급대장이었다.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군비 제한으로 군의 규모가 축소된 터라.[3] 히틀러의 집권 과정을 다룬 <히틀러의 30일>의 저자 예일대 교수 헨리 애슈비 터너 3세는 슐라이허가 계획대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일을 통치했다면 계엄령 선포와 헌법 정지로 인해 독일에서는 대규모의 폭동이 있었겠지만, 진압당하고 장기간의 권위주의 독재 통치가 이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