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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 Heinrich Aloysius Maria Elisabeth Brüning 하인리히 알로이지우스 마리아 엘리자베트 브뤼닝 |
출생 | 1885년 11월 26일 |
사망 | 1970년 3월 30일 (향년 85세) |
재임기간 | 1930년 3월 30일 ~ 1932년 5월 30일 (만 2년 2개월) |
출신 정당 | 가톨릭 중앙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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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0년부터 1932년[1]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21대 총리를 지낸 인물.성향 자체는 온건보수인 인물이었지만,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남용하는 바람에 의회정치의 붕괴를 일으켰으며[2], 독일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해 나치당에게 보인 유화적[3]인 태도가 결국은 나치의 집권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호되게 비판받는 인물 중 하나이다.
2. 생애
2.1. 초창기
뮌스터에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와 본,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경제, 역사, 정치 등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수여받는다. 이후 1915년 자원입대[4]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소위로 활동하면서 철십자 훈장을 두 차례나 수여받는다. 종전 이후 학계 대신 정계로 자신의 진로를 정하면서 1923년 루르 지방에서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운동[5]에 참가하기도 한 브뤼닝은 이듬해인 1924년 가톨릭 중앙당에 입당하여 브레슬라우 지역구 소속으로 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된다. 이후 재정 문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6] 당 내에서 입지를 넓혀간 브뤼닝은 1929년 당 대표로 선출된 이후 영 플랜(Young Plan)을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재정 적자를 줄이고 증세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이러한 노력으로 당시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눈에 띄고 1930년 5월 29일 공화국의 총리로 지명된다.
2.2. 총리로서
브뤼닝은 자신의 국정 운영 목표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전쟁보상금 및 외채를 상환하여 독일 경제의 부담 완화'를 제시했다. 문제는 이를 위해서는 대중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긴축재정 및 임금 상승 억제와 같은 정책을 실시해야 했던 것. 엎친데 덮친 격으로 브뤼닝이 총리직에 올랐을 시기는 세계 대공황이 절정이던 1930년이였고 결국 라이히스탁은 이런 브뤼닝 내각의 제안을 부결한다. 이에 대노한 것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애초에 왕당파로 공화국이라는 체제에 회의적이었던 이 노인네는 이 사태를 의회정치의 실패로 규정하고 의회를 해산한 뒤 재선거를 명령한다. 문제는 이 선거에서 공산당과 나치가 대승을 거둬버렸다. 이제 브뤼닝과 그의 내각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헌법 48조에 적힌 대통령 비상대권을 이용하여 의회의 동의없이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상대권의 남용은 다시 그의 대한 민중의 지지를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불러왔고 여전히 경제는 악화일로를 치닫는만큼 브뤼닝 내각은 점점 궁지로 몰린다. 여기에 똥별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부추김을 받은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브뤼닝 내각의 장관들을 교체해버리면서 브뤼닝의 정국장악력을 더욱 약화시켜버렸다.결국 브뤼닝은 히틀러와 나치를 대연정에 참가시키고자 협상을 시도해본다. 그렇지만 내각 중에서도 요직(특히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활용할 수 있는 총리)을 나치당에 주지 않으려고 브뤼닝이 버텼기 때문에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사실 브뤼닝이 자신의 총리직이 위태위태한 시점에서 자신의 총리직 연장을 위해선 나치의 지지가 필수적인 상황임에도 나치에게 최소한의 권력만 주고자 발악했던 것은, 당시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이미 80대의 나이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아니었던 고령이었기 때문. 힌덴부르크가 죽고 후임으로 히틀러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그 결과를 브뤼닝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최후의 시도로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형태로 호엔촐레른 왕조를 복귀시키려는 구상도 했는데, 브뤼닝이 새로운 황제로 고려한 인물은 빌헬름 2세의 손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빌헬름 2세 폐하 복위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필요없다." 이라고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브뤼닝의 회고록에 따르면 힌덴부르크의 빌헬름 2세 사랑에 브뤼닝이 “각하, 상식적으로 빌헬름 2세가 돌아오면 사민당이나 다른 좌파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있습니까." 라고 했는데 이에 빡친 힌덴부르크가 브뤼닝을 그대로 자기 집무실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결국 브뤼닝은 최후의 수단으로 힌덴부르크의 재선 출마를 결정했다. 힌덴부르크 본인은 재선 출마하기를 꺼렸지만 어떻게 설득해 출마시켰다. 공화국을 수호하려는 보수우파와 좌파계열의 협력이 수립되어 힌덴부르크는 그리 어렵지 않게 히틀러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지만 힌덴부르크 본인은 "빨갱이들이 밀어줘서 대통령이 됐다니, 아 쪽팔려"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그렇지만 여전히 인기없는 경제 정책으로 그의 내각에 대한 지지도는 바닥이었고 이런 와중에 융커들의 토지세 문제를 놓고 브뤼닝과 힌덴부르크는 대충돌을 빚는다. 게다가 실업자들에게 동프로이센의 잉여농지를 분배하려는 브뤼닝의 계획을 '농업 볼셰비즘'으로 규정한 힌덴부르크에 의해 결국 브뤼닝 내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총 사퇴했고, 후임자로는 프란츠 폰 파펜이 임명된다.
다만 힌덴부르크와 브뤼닝의 개인적인 사이는 여전히 괜찮았는지, 브뤼닝도 힌덴부르크에 대한 존경심을 이후로도 계속 보여주었으며 힌덴부르크도 브뤼닝의 사임 후 그동안의 수고를 칭찬하면서 파티를 열어주었다고 한다.
2.3. 이후
가톨릭 중앙당의 수장으로 프란츠 폰 파펜 내각의 붕괴를 이끌기도 했는데 1933년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 바로 중앙당은 안 건드릴거라는 히틀러의 감언이설에 속아 수권법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중앙당 소속 의원들을 설득했던 것. 당연히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7월 5일 중앙당은 해산되고 브뤼닝은 체포 대상으로 지목된다. 체포를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난 브뤼닝은 이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떠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로 머무르면서 소련과 히틀러의 야욕을 경고하지만 말 그대로 씹힌다. 종전 이후 브뤼닝은 독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초대 서독의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와 갈등을 빚은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 1970년 버몬트주에서 사망한다. 이후 그의 유해는 고향 뮌스터로 돌아온다.[1] 바이마르 공화국 역대 최장수 총리다. 단임내각 기준이고 2차까지 합치면 빌헬름 마르크스가 최장수. 근데 바이마르 공화국이 얼마나 정치적 불안정성이 심했는지 그래봐야 4년이다.[2] 이걸 비꼬느라 브뤼닝 내각을 대통령 내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3] 어디까지나 공산당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유화적인거지, SA의 활동을 금지하는 등 나치를 찍어누르고자 노력도 해봤었다.[4] 오히려 군 측에서는 그의 나쁜 시력과 약한 체력 및 긴 가방줄로 인해 입대를 만류했다고 한다.[5] 초인플레이션으로 전장 배상금을 독일이 지불하지 못하자 프랑스가 루르 지방을 점령해 버린 것에 대한 반발운동. 이에 당시 총리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루르 지방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지시했다.[6] 노동계층의 소득세가 도합 12억 마르크를 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