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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 Karl Joseph Wirth 카를 요제프 비르트[1] |
출생 | 1879년 9월 6일 |
사망 | 1956년 1월 3일 (향년 76세) |
재임기간 | 1921년 5월 10일 ~ 1922년 11월 14일 |
출신 정당 | 가톨릭 중앙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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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역대 최연소였던 41살의 나이로 제14대 총리직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2]2. 생애
1879년 바덴 지역의 프라이부르크에서 엔지니어의 아들로 태어난다. 당시 독일 정치인들이 대부분 법학, 정치학 등을 전공했던 것에 비해 비르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을 대학교에서 전공으로 하였고, 졸업 이후에는 김나지움에서 수학 선생을 잠깐 하기도 했다. 이후 정치에 투신하여 1914년 중앙당 소속으로 제국 의회에 당선됐고, 1차 대전 시기에는 적십자 소속으로 활동하였다.[3]공화주의자였던 비르트는 독일 제국의 붕괴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나간다. 헤르만 뮐러의 1차 내각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였으며, 헤르만 뮐러 내각이 붕괴된 이후 콘스탄틴 페렌바흐 내각이 성립된 이후에도 자리를 유지한다. 1921년 5월 페렌바흐가 배상금 지불 액수, 라인란트 비무장화를 놓고 협상국과 충돌을 빚어 사퇴하자 비르트에게 총리직이 넘어오게 된다. 비르트는 비교적 성실하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으로, 협상국과 배상금을 줄이려는 협상을 시도했지만[4]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프랑스가 강경하게 배상금 감축을 거절했던데다가 내부적으로는 극우세력들이 성실한 조약 이행에 거세게 반발했던 것.[5]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극우파가 집권한 바이에른은 공공연하게 중앙정부에게 반기를 들면서 주지사가 사병들을 조직하고 있는 판국이었고(...) 1919년 8월 16일부터 1921년 7월 21일까지 상부 슐레지엔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무장한 독일인과 폴란드인 사이의 충돌이 슐레지엔 곳곳에서 벌어졌고 국제연맹이 이곳에 개입한다. 상부 슐레지엔의 독일/폴란드 귀속 여부를 놓고 주민투표가 벌어졌고[6] 국제연맹은 상부 슐레지엔의 1/3가량을[7] 폴란드에게 넘겨주는 결정을 내렸고, 이에 비르트는 책임을 지고 사퇴 선언을 한다.[8][9][10]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그의 사퇴 선언을 반려하면서 비르트는 총리직을 유지하게 된다.
이후 1922년 4월 비르트는 라팔로 조약을 맺고 소련과 국교를 맺어서 1차 대전 이후 독일의 외교적 고립 상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며,[11] 공화국 수호법(Gesetz zum Schutz der Republik)을 발의하여 당시 독일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정치적 테러와 분리독립운동을 막고자 시도한다. 하지만 전쟁배상금 문제는 끝내 비르트의 발목을 잡아서, 배상금 감축 논의가 수포로 돌아간 같은 해 11월에 비르트 내각은 총사퇴한다.
총리직 사퇴 이후로도 비르트는 활발히 정치에 참가하여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의 내무부 장관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1933년에는 나치가 발의한 수권법에 반대 연설을 한다. 수권법이 통과된 이후로는 나치 독일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여 주로 파리와 루체른에서 지낸다. 2차 대전 종전 이후에 다시 독일로 복귀한 뒤에도 비르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는데, 이 시기 서독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의 할슈타인 원칙을 비롯한 반공 친서방 외교노선이 독일의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라며 거세게 반대하다가[12][13] 1956년 고향 프라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난다.
[1] 독일어 발음으로는 비어트에 가까운 발음이다.[2] 그리고 이 역대 최연소 총리직 취임 기록은 80년 이상이 지나 독일연방공화국이 세워진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3] 자원입대 신청을 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부적합자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4] 이러한 '성실한 조약 이행 → 신뢰 형성 → 배상금 감축 협상' 시나리오는 이후로도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에 이르기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채택했던 외교 전략이다.[5] 극우세력들은 비르트와 내각 구성원들을 매국노라고 비난하면서 공공연하게 암살을 시도했고, 실제로 비르트의 정치적 동지이자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이러한 극우파의 테러에 희생되기도 한다.[6] 대략 60% 정도가 독일로의 존속을 원했고, 40% 정도가 폴란드 편입을 원했다.[7] 정확히 말해 68%는 독일에, 32%는 폴란드에.[8] 특히나 이 지역이 슐레지엔에서 가장 공업화가 이루어진 지역이라서 독일의 반발이 거셌다. 협상국에게 협조적이던 비르트마저 대놓고 '공업화 지역은 다 뜯어가면서 배상금은 배상금대로 갚으라는 거냐?'라고 거세게 항의할 정도.[9] 여담으로 비르트는 개인적으로는 폴란드를 매우 증오했다고 전해진다. '폴란드를 언젠가는 파괴시켜야 한다.'라는 발언이 기록됐을 정도. 1차대전 이후 독일이 할양한 영토 중 폴란드에 할양된 영토가 가장 많았으므로, 독일인 중에 언젠가 폴란드를 한 번 손 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안품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10] 사실 폴란드는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독일과 소련의 어그로를 자동적으로 끌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폴란드 제2공화국 자체가 구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영토 위에서 성립되었기 때문. 독일은 폴란드와 전쟁을 치른 것 뿐만 아니라 단지 폴란드가 독일 영토를 가지고 나가떨어진 것 자체 때문에 폴란드를 증오했다. 폴란드는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무렵 오스트리아는 약소국이 되었기에 폴란드에 원한을 품을래야 품을 수가 없었다.[11] 다만 이에 협상국이 발끈해서 전쟁 배상금을 깎아주려다가 파토내버린다.[12] 이 사람이 자신의 총리 재임 시기에 라팔로 조약을 맺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공산주의와 협력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이다.[13] 심지어 동독의 집권당인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으로부터 연금과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기밀해제된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문서에서는 이 사람을 동독 첩자라고 의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