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8:43:37

오토 벨스

독일 사회민주당 당수
오토 벨스
Otto Wels
파일:오토 벨스.jpg
출생 1873년 9월 15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939년 9월 16일 (향년 66세)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1]
국적 독일국무국적[2]
소속 정당

당수 임기 1919년 6월 14일 ~ 1939년 9월 16일

1. 개요2. 상세3. 매체에서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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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정치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사회민주당을 이끈 정치인으로, 1919년부터 1939년까지 무려 20년간 사민당의 당수직을 역임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중도좌파 진영을 대표하였다.

2. 상세

1919년 46세의 나이로 사민당의 당수직에 올랐다. 이 해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한 해이기도 하므로 한마디로 말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중도좌파 진영 그 자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계 대공황과 독일 공산당, 나치당의 부상 속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며, 원수지간인 공산당과도 일부 협력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나치당의 부상을 막지는 못하였다.

수권법 통과 당시 주류 정치권에서 이를 가장 강력히 반대한 인사로써, 독일 주류 정치권에서 마지막으로 나치에 저항했던 "양심적인 정치인"[3]이다. 수권법의 하원 표결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역사적 순간에 인간성과 정의, 자유,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밝힌다. 전권위임법(수권법)이 당신들에게 영원 불멸의 이념을 없앨 수 있는 힘을 주지는 못한다. … 또한 독일 사민당은 이 박해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박해받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국가 내의 동지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여러분의 의연함과 충직함은 존경받을 만하다. 여러분들의 확신에 찬 용기, 끊임없는 확신은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 원문(독일어)

그리고 최후의 한마디로 히틀러에게는 이 말을 남겼다.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빼앗을 수 있지만, 우리의 명예를 빼앗을 수는 없다." 원문(독일어)

그러나 이 발언을 들으며 메모를 하던 히틀러는 연설이 끝나자마자 즉각 연단에 올라 "우리 중에 당신들에게 탄압받고 감옥에 갇혀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며 이를 비웃었고 "독일은 자유로워지겠지만 당신들을 통해서는 아니다."라며 통박을 해버려서 오히려 나치당의 사기만 진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나치당원들은 히틀러가 연설하는 내내 좋아 날뛰었고 히틀러는 "우리는 이미 수권법을 의회 표결 없이 얻을 수 있지만 자비를 베푸는 것"이며 "사민당 의원들은 투표하지 말라"고 위협했다.

수권법이 통과된 이후 나치당 정권에 의해 국적 박탈을 받고 강제 추방되었다. 이는 시범 케이스로 쫓겨난 것으로, 독일 시민권 박탈 1호였다. 무국적자가 된 뿐만 아니라 추방까지 당한 그는 비교적 사회주의자들의 세가 강력했던 프랑스로 도피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지 보름만에 사망했다. 그나마 본인 사망 약 9~10개월 뒤에 있을 프랑스 침공은 겪지 않았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일지도. 만약 그때까지 살았고 히틀러나 나치 수뇌부가 그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점령 직후 그를 찾아내서 잡았을 수도 있다. 그 뒤는...

3. 매체에서

영화 '그가 돌아왔다'에서는 21세기로 타임리프한 히틀러가 당시 파울 뢰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그리고 오토 벨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그들은 비록 무도한 악당[4]이였지만 나름 위엄있는 정적이였다며 그의 연설 녹음이 잠시 스쳐지나간다. 그러면서 현재의 사민당은 그들의 발밑에도 못 미치는 우스꽝스러운 바보들이라 비판한다.

웹소설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도 등장. 민주주의자로써 독재를 원하는 아르민 로젠바움과 대립하나, 독재자가 되는데 성공한 아르민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다. 이후 히틀러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반 로젠바움 쿠데타에 참여하나, 실패하고 다하우 수용소에 갇힌다.

4. 같이 보기



[1] 66세 생일 다음날에 사망했다.[2] 수권법 통과 이후 나치당 정권에 의해 국적 박탈[3] 당시 독일 정계에서는 중도 진영과 나치를 포함한 우파가 수권법에 동의했고, 똑같이 수권법을 반대했던 극좌파 공산당은 수권법 제정 전에 히틀러가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구실로 금지해버렸다. 그 상황에서 공식적인 경로로 수권법 제정에 저항한 마지막 정당이 사민당이었다.[4] 자신과 나치즘이 '선'이라고 굳게 믿는 히틀러 입장에선 악당 중에 악당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