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1:35:46

이탈리아 전선(제2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 내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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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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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193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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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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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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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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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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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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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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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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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작전 · 필리핀 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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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Italian campaign
Guerra di liberazione italiana/Campagna d'Italia
날짜
1943년 7월 10일 ~ 1945년 5월 5일
장소
이탈리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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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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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
결과
연합국의 승리
병력
피해규모 사상자 358,295~376,637 사상자 1,549,590~1,793,570

1. 개요2. 발단3. 전개
3.1. 이탈리아 남부 점령3.2. 이탈리아 중부 점령
3.2.1. 구스타프 선 초입3.2.2. 로마 점령
3.3. 이탈리아 북부 점령
3.3.1. 고딕선3.3.2. 살로 공화국의 몰락
4. 관련 문서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기에 이탈리아 왕국을 통해 나치 독일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안치오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해변에 상륙한 연합군과 이 지역에 구스타프 선을 설치하고 필사적인 방어전을 벌인 독일군이 형성한 전선. 김영옥 대령이 활약한 전선이기도 하며, 독일의 공수부대가 전설을 만들어낸 전선, 그리고 터스키기 에어맨이 활약한 전선이기도 하다. 남미에서 유일하게 유럽으로 수만 단위의 병력을 보낸 브라질군 원정군 또한 이곳에 배치되었다.

2. 발단

이탈리아 전선의 시작은 북아프리카 전역의 종말에서 시작한다.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장악하여 횃불 작전을 끝낸 연합군은 다음 목표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미국이나 소련 등은 늦어도 1943년 이내에 프랑스독일 본토와 가까운 곳에 상륙해서 제2전선을 만들자고 주장한 반면, 영국의 경우에는 전후 지중해 패권 유지와 소련의 동유럽 진출 등을 저지하기 위해 일단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이탈리아를 공격해서 독일을 남쪽으로부터 공격하자는 안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연합군의 물량을 책임지는 미국과, 독일군의 주력과 피터지는 싸움을 계속 벌이는 소련의 의향을 거부할 수 없던 영국은 일단 원칙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제안대로 나가지만, 북아프리카의 확실한 확보를 위해 시칠리아 정도는 점령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미국과 소련은 시칠리아 정도는 점령해도 제2전선을 만드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영국의 안으로 최종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칠리아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연합군은 영국낚시에 걸리고 말았다.

시칠리아를 공격하면서 미국이 슬슬 정확한 계산을 때리기 시작하자, 1943년 안에는 제2전선을 형성하는 데 쓸 충분한 물자를 보유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오고, 태평양 전선의 요구수량도 급증한데다가, 막상 시칠리아에 발을 올려놓고 보니, 이탈리아 왕국군을 도와주러 온 독일 국방군의 저항이 심해서 쉽사리 이 방면의 군대를 빼서 영국에 보낸 후 제2전선을 형성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며, 이럴 경우 물자뿐 아니라 병력도 모자라서 더 이상 제2전선을 형성하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성공적으로 시칠리아에서 병력을 온전히 철수 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실상 1943년 내 제2전선 형성은 불가능해졌고, 곧이어 시칠리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바로 옆에 이탈리아 반도도 있으니 몇 개월 동안 병력을 놀리느니 차라리 이탈리아도 공격하자는 제안이 나오게 된다.

또한 시칠리아가 점령이 되자 국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경제는 혼란스럽고, 산업은 침체되고 독일은 사실상 이탈리아의 상전 노릇을 하고 있었다. 식량과 물자는 독일로 보내지고 있었고 이탈리아인들은 하루에 최대 900kcal로 식량이 제한되어 있었다.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쏟아져 나오자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베니토 무솔리니를 로마의 사보이아 별장으로 불러 그를 해임시켰다. 급속도로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자 빠른 침공은 이탈리아의 항복을 앞당기고 독일에 대한 더 빠른 군사적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시칠리아 전투의 승리로 인해 내친 김에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는 것이 이탈리아 전선의 시작이 되었다.

3. 전개

3.1. 이탈리아 남부 점령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기로 결정이 나자 어디로 상륙을 할 것이가로 논쟁이 발생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마크 클라크 장군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가장 큰 나폴리를 점령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살레르노만에 상륙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장군의 부관이었던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은 살레르노에 상륙하면 위험부담이 크니 시칠리아에서 이탈리아 본토로 가는 해협 중 가장 좁은 메시나 해협[1]을 건너면 바로 있는 항구도시 레조칼라브리아에 상륙하자고 주장했고, 또 다른 장군은 살레르노와 메시나 해협에 우리가 상륙할 걸 독일군이 알 테니 칼라브리아 반대편이자 이탈리아의 주요 군항인 타란토에 상륙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시간이 촉박하니 3곳에 동시에 상륙하자고 결정났다.

일단 시작은 좋았다. 9월 13일 마일스 뎀프시 중장이 지휘하는 캐나다 제1보병사단과 영국 제5보병사단은 메시나 해협을 건너 레조칼라브리아로 향했다. 이미 독일은 철수했고 이탈리아군은 사기가 저하되어서 그들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레조칼라브리아를 점령했다. 또한 이보다 앞선 9월 9일 영국 제1공수사단이 타란토에 강하를 하고 이를 돕기 위해 영국의 폭격기 부대와 아서 파워 중장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타란토에 맹폭을 퍼부었다. 제4낙하산 여단과 제10낙하산 대대가 타란토에 착지하자 이탈리아 수비대는 항복을 하고 독일군은 이미 떠났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상륙부대는 타란토를 상륙하자 마자 이탈리아 남부의 주요한 항구인 브린디시바리로 향했고, 중간 중간 독일군의 공격이 있었지만 9월 21일과 22일 각각 두 도시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한편 살레르노만에 상륙한 미5군은 독일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미영연합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공격에 크나큰 우위를 보였지만 느리게 전진했다. 9월 12일 독일군 미군을 살레르노 교두보에서 몰아낼 심산으로 6개의 차량화부대로 반격에 나셨지만 연합군 함대의 막강한 포격으로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미 제1기갑사단, 미 제3사단, 미 제34사단 병력이 증원을 오고 또한 레조칼라브리아에 상륙한 영국군과의 협공으로 포위를 당할까 봐 두려운 독일군은 교두보 일소를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했고,10월 1일 미5군이 나폴리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이에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정부는 내분을 일으켜 결국 붕괴되고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연합군의 계산이 먹혀들었다.

그러나, 좋았던 것은 여기서 끝이었다.[2] 당시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독일 국방군 지휘관 알베르트 케셀링 공군 원수는 즉시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을 움직여 근처의 이탈리아군 병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악셰 작전(Operation Achse)[3]을 발동했다. 무솔리니의 몰락을 확인한 7월 25일 독일은 즉시 병력을 움직였다. 명목은 동맹국을 돕겠다는 거였다. 7월 26일 제215보병사단이 리구리아를 통해 이탈리아 영내로 진입하였다. 또한 에이스 부대인 제1SS기갑사단 '아돌프 히틀러'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를 파견해 파르마와 레지오 에밀리아를 점령했다. 또한 제65보병사단이 라벤나와 리미니 지역으로 향했고, 제24기갑사단은 모데나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제71보병사단이 덴마크에서 프리울리로 진입했다. 이탈리아의 바돌리오 정부는 독일과 계속 싸우겠다고 주장하면서, 뒤로는 비밀협상을 지속했다. 9월 8일 이탈리아가 정식으로 항복을 선언하자 이탈리아에 있던 독일군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독일 공수부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은 제11공수사단을 로마로 강하시켰고 이에 우왕자왕한 이탈리아 정부 수뇌부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미국 군함을 타고,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브린디시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이는 지도부의 공백을 초래해서 이탈리아군이 효과적으로 독일군에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상당수의 병력과 장비를 독일군의 지휘하에 두는데 성공했고, 독일 친위대 SS오토 스코르체니는 그란사소 별장에 연금된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그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 정부 살로 공화국을 발족시켜 독일군을 돕게 했다. 결국 빠른 승리는 물건너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연합군에게 대참사가 벌어질 뻔한 일도 있었다. 당시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기 직전, 무솔리니가 실각한 이탈리아는 연합군 측에게 '공수부대로마에 직접 투입하고 이탈리아군이 이와 협력해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다'라고 제안했다. 성공만 한다면 단숨에 독일군을 로마 이북의 북이탈리아 지역으로 몰아낼 수 있는 기회여서 상층부는 이 제안에 매혹되었다. 그래서 실제로 82공수사단을 주력으로 한 공수부대를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의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소수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매튜 B. 리지웨이였다. 리지웨이는 로마에 주둔한 독일군을 이탈리아군과 공수부대 병력만으로 몰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상당한 의심을 했다. 이 때문에 리지웨이는 맥스웰 테일러에게 로마 인근을 정찰해서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의 상황을 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찰 결과는 리지웨이의 우려 그대로였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독일군과 교전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작전은 취소되었다.[4] 만약 저게 진짜로 실행되었다면 82 공수사단은 마켓 가든 작전에 참가하기도 전에 리타이어 되는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어쨌든 9월 19일에만 이탈리아 장군 82명, 기타 장교 13,000명, 군인 400,000만명이 포로가 되었고, 도합 1,000,370명을 포로로 잡고 소총 1,285,871정, 기관총 39,007문, MAB 38 기관단총 13,906문, 박격포 8,736문, 야포 2,754문, 기타 대포 5,568개 전차 16,631대, 장갑차 977대가 고소란히 독일의 손에 떨어졌다. 독일이 괴뢰정부를 세우자 브린디시에 있는 이탈리아 망명정부는 10월 13일 독일과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한편 나폴리를 점령한 미 제5군은 볼투르노 강변에 도착을 했고, 영국군 제8군은 캄포바소에서 비페르노강변에 있는 도시 라리노와 테르몰리까지 도착했다. 10월 초 미군과 영국군은 이탈리아 남부 전체를 손에 넣었고, 독일은 지연 작전을 하기 위해 볼투르노 강변에 볼투르노선을 건설해 연합군을 맞이 할 준비를 시작했다.

3.2. 이탈리아 중부 점령

3.2.1. 구스타프 선 초입
10월 초 히틀러를 설득하는데 성공한 알베르트 케셀링원수는 아탈리아에서의 전권을 받아 이탈리아 산악지형을 이용해서 지연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로마 남쪽에 볼투르노선, 바바라선을 만들어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만드는데 시간을 벌려고 했다. 결국 시간을 버는데 성공을 해서 아펜니노 산맥을 거쳐 아드리아해안의 상그로강 어귀를 가로지르는 구스타프선과 이를 보조하는 베른하르트선히틀러선을 건설하는데 성공한다.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은 이탈리아의 수도 점령하려면 이 방어선을 돌파해야한다면서 양동작전으로 2개의 특공대 대대가 테르몰리에 상륙하게 한뒤 제78보병사단을 돌격시켜 독일을 바바라선으로 철수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더 진격을 하려고 했지만 270km 떨어진 바리와 타란토에서 오는 보급품이 도로의 열악한 사정으로 전선으로 도착하지 못하자 진격은 돈좌되었다. 11월 9일 상그로강에 도착한 제5군단,인도 제8산악사단, 제78보병사단은 뉴질랜드 제2사단과 함께 공격을 시작했다. 11월 28일 중포병의 도움을 받은 영국군은 백병전 끝에 메자그로냐 마을을 점령하고 11월 말 제4기갑여단의 도움을 받은 제78보병사단은 포사체시아와 상그로강 건너편 능선을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몽고메리 장군은 지친 뉴질랜드 사단을 뺴고 캐나다군을 집어넣았다. 캐나다군은 12월 5일 야밤에 모로 강을 건너 빌라 로가티를 점령해 교두보를 만들었고 모로강변 곳곳에서 교두보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일대의 주요한 도시 오르토나를 점령하지 않으면 이 일대를 완전히 점령했다고 할 수 없었다. 12월 20일 캐나다 제1보병사단은 오르토나에서 독일 제1낙하산사단과 맞이했다. 오르토나 전투의 시작이었다. 독일군은 마을 곳곳에 다양한 기관총과 대전차 진지를 숨겨 기갑과 보병의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고, 수많은 캐나다군이 전사했다. 8일간에 격렬한 전투 끝에 독일군은 마을에서 철수했고 캐나다군은 오르토나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5]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 폭우가 쏟아지면서 연합군은 볼투르노 선과 베른하르트 선 사이를 가로질러 진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폭우가 그치길 기다리고, 폭우가 그친 12월 초 전 지역에서 공세를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12월 1일 영국 제10군단과 미 제2군단이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또 우익에서는 존 P.루카스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34사단과 미 제45보병사단은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아 공격을 했다. 일주일 간 격렬한 공격과 반격 끝에 연합군은 산 피에트로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이어서 이탈리아 제1차량화 전투단은 몬테 룽고를 공격했지만 병력도 장비도 훈련도 매우 빈약했던 이탈리아군은 독일 제29장갑척탄병 사단의 방어선에 박살났다. 하지만 다른 전선에서 맹공으로 전선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독일군은 북쪽으로 후퇴했다.[6]

12월 말, 재편성과 손실을 보충한 미 제5군은 구스타프선에 도달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해가 바뀐 1944년 1월 4일 산 비토레를 점령했고, 1월 7일에는 몬테 룽고를 향해 또 공격을 했다. 좌익에서는 영국 제 10군단이 세드로 언덕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했고, 결국 다 점령을 하는데 성공했다. 마지막 공격은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1월 12일 체르바로가 점령되고, 연합군 1월 13일 이 일대를 내려다 보는 언덕을 차지하자 독일 제14기갑군단은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서 라피도강을 건너 철수했다.
3.2.2. 로마 점령
연합군은 독일군과 살로 공화국군이 만든 방어선과 험준한 이탈리아의 산악지형에 전진이 지지부진해지자, 1월 22일 로마 근교인 안치오에 상륙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루시안 트러스콧 장군이 반대하고 마크 클라크 장군도 이에 동의했으나 윈스턴 처칠의 강력한 찬성으로 작전은 강행되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이 일대는 습지라서 독일군이 배수펌프 작동을 중지시켜 버리자, 바닷물에 침수되어 버리고 연합군은 고립되어 버렸다. 독일이 제1낙하산군단과 트라우고트 헤르 장군이 이끄는 제76기갑군단으로 반격에 나섰다. 공격은 성공적이서 교두보의 기반이 무너질 위기에 쳐했지만 새롭게 도착한 영국의 제168여단과 제3여단이 도착했고, 중포와 폭격기를 동원해 독일군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독일군은 척탄병 근위 제5대대와 노스 스태퍼드셔 연대 제2대대 사이로 침투해 연합군 전체를 포위할 뻔 했으나 결국 버텼다. 거기에 1월 30일 치스테나에서 시작된 미군의 공세도 실패로 돌아가자, 이에 2월 16일 독일은 티거 전차를 동원해 또 다시 공격에 나섰고 영국의 경순양함 페넬로페가 어뢰 2발을 맞고 침몰하자 지지부진한 전황에 화가난 처칠은 존 P. 루카스 소장을 해임하고 루시안 트러스콧 소장으로 교체했다.

한편 구스타프선에서도 공세가 시작되었다. 안치오에서 상륙한 연합군에 앞서 1월 17일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영국 제10군단은 가리글라아노 강을 간너 독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독일의 프리돌린 폰 에테를린 장군은 증원을 요청했으나 상부는 이를 묵살했다. 영국군이 가리글라아노 강을 건너는데 성공하자, 제프리 키스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36보병사단도 가리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의 제15기갑척탄병사단의 맹렬한 포격으로 공병들이 교량을 건설하는데 실패해서 결국 미군은 2,100여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철수했고, 독일은 미군 수백병을 포로로 잡았다. 한편 1월 24일 찰스 라이더 소장 휘하의 미 제34보병사단도 카시노 산을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우익에서 모로코-프랑스군이 독일 제5산악사단을 상대로 선전을 거둬 몬테 시팔코 경사면에 진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주변의 산과 언덕을 점령해서 동시에 몬테 시팔코를 공격했지만 2,500여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실패로 끝났다. 공격이 실패로 끝이나자 미군은 남쪽 끝에 있는 교차 능선을 향해 올라가 싸우자고 주장했다. 이는 구스타프 선의 뒤를 치자는 거였지만 카시노 산은 바위가 많아 땅에 참호를 파는 것은 불가능했고, 각 지형은 주변의 높은 지점에서 적의 대포에 노출되었다. 그곳에서 자라는 가시금작화는 엄폐물이 되기는커녕 수비군이 지뢰, 부비트랩, 숨겨진 철조망을 설치했기 때문에 진격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2월 11일 결국 미군은 결국 병력을 빼내었다.

안치오에서 위협받는 아군을 구하기 위해 빨리 전투에 나서라는 상부의 독촉으로 다시 전투가 개시되었다. 이 때 까지의 전투가 왜 실패로 끝났나 차근차근 복기한 연합군은 독일 포병 관측소로 이용된 걸로 추정되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사실 거기에는 독일군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많은 병사들이 저곳에 독일 포병 관측소가 있어서, 진격이 지지부진하다고 주장을 해서 결국, 2월 15일 공군을 동원해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폭격한다. 자세한 사항은 몬테카시노 전투 참조.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폭격으로 무너지고 다음날 밤, 인도 제7보병여단 소속 제1대대 왕립 서섹스 연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해 뉴질랜드 사단 28대대(마오리 대대)의 2개 중대가 카시노 마을의 기차역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공격은 실패로 끝이나고 결국 카시노 산 점령은 실패로 끝이난다. 그러자 겨울 때문에 땅이 딱딱해서 참호가 만들기가 힘드니, 봄이 오면 공격하자고 결정이 났고 3월 15일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은 구르카까지 동원해 맹공격을 퍼부었지만 독일군 저격수의 활약과 더불어서 독일군 제1낙하산 사단이 맹렬한 반격을 가해, 결국 또 다시 실패로 끝이 났다. 곧 있으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어 이탈리아에 주둔한 병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초조해진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은 병력이 더 빠지기 전에 공격을 안치오와 구스타프선 일대에 동시에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다이아뎀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5월 11일 영국군, 미군, 폴란드군, 뉴질랜드군, 이탈리아 남왕국군이 대규모 포격을 시작으로 구스타프선을 향해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맹렬한 반격으로 이 일대를 리틀 베르됭로 불릴 정도로 독일군의 포격을 받았다. 하지만 연합군은 연이어서 가리 강에 교두보를 형성하는데 성공하자 케셀링은 시간을 벌기위해 예비군을 투입시켰다. 그 때 모로코의 구미에르[7]부대가 히틀러선 후방으로 침투했고, 5월 15일 영국군이 리리 계곡에서 카시노산을 격리시키기 위한 선회 작전을 시작했다. 5월 17일, 안데르스 장군의 폴란드 제2군단은 강력하게 요새화된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지속적인 포격과 보호를 위한 자연적인 엄폐물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전투는 치열했고 때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연합군의 리리 계곡 진격으로 보급선이 위협받자 독일군은 카시노 고지에서 히틀러선의 새로운 방어 진지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5월 23일 연합군 대포 1,500문이 안치오에서 포격을 시작했다. 40분 후 근접 공중 지원을 받은 연합군은 보병과 기갑부대를 전진시켰다. 전진을 하면서 미 제1기갑사단은 전차 100대를 잃었고, 미 제3보병사단은 병력의 절반을 잃었지만, 치스테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케셀링은 연합군이 6번 도로를 확보할 거라고 판단 제1강하기갑사단 헤르만 괴링보고 6번 도로를 확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5월 26일 지지부진한 연합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벨레트리 틈새에 4개 사단을 투입했다. 하지만 카시노산과 리리 계곡 일대가 뚫리자, 결국 독일은 로마를 포기하고 후퇴를 하기로 결정했다. 안치오에 상륙한 연합군 부대는 8일간의 전투동안 전진하기는 커녕 오히려 해변에서 포위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제공권 장악과 물량의 우세가 명암을 갈랐다. 독일군의 치밀한 방어선에 직면한 연합군은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을 총동원해 이탈리아의 독일군을 서서히 북쪽으로 몰아냈고, 결국 이탈리아 신설 파시스트 정부 살로 공화국은 무너지게 된다.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달아내려 했으나 공산당 계열의 반독게릴라에게 붙잡혀 처형되고, 그의 시체는 거꾸로 매달려 분노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구타당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8]

하지만 살로 공화국의 붕괴는 나치 독일의 붕괴에서 불과 1-2달 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종전 때까지 연합군 병사들은 이탈리아 본토마저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이는 이탈리아 반도의 특성상 반도를 가로지르는 방어선을 형성하기 딱 좋았으며, 이 방어선을 넘고 북쪽으로 가면 험준한 알프스 산맥이 반갑게 맞이한다. 게다가 로마 점령 이후에는 목표물이 될만한 가치 있는 표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저 멀리 진격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또한 로마 점령도 이래저래 좋은 말을 듣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연합군이 로마를 점령한지 딱 2일 뒤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지면서 일반 시민들에겐 묻혀버렸다. 여기에다 로마 점령을 명령한 마크 클라크는 오히려 독일군에게 후퇴의 기회를 제공해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로마 점령 전 미군의 전략은 안치오 교두보에 고립된 병력을 구출하고 구스타프 라인을 우회해 독일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클라크가 포위 기동 대신 로마 점령을 선택해 버렸고, 그 틈에 독일군 주력이 북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것. 때문에 마크 클라크는 로마를 점령한다는 명예욕 때문에 전략 전체를 망쳤다는 큰 비판을 받아야 했다.

한편 1943년 12월 2일에는 심각한 화학무기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바리 항구에 정박한 연합군 함선들을 독일 공군이 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공격받은 수송선 중 한 척이 미군 당국이 만약의 상황이 닥칠 경우 사용하기 위해 가져온 대량의 겨자 가스를 싣고 있었다. 이 누출된 겨자 가스가 항구를 덮치는 바람에 연합군 장병만 7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항구에 있던 민간인 사상자를 합치면 1,000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전쟁 말기로 인해 갈수록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형성된 서부전선동부전선의 급박한 상황과, 서부전선이나 동부전선에서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점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은 병력을 차출당해서 공격자와 방어자 비율이 1:1이 되어버려 더 이상의 공세가 불가능해지는 등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전선의 변화가 별로 없는 매우 느긋한 전장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이탈리아 전선의 연합군 병사들이 사고를 치거나 탈영하는 사례가 상당수 있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공세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연합군이 뭔가 화끈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항공 폭격포병 사격 정도였다. 미냐노 협곡에서 어느 미군 포병대가 휴식시간 중 심심해서 다음과 같은 계산을 했다. 155mm 곡사포 값과 발당 50불인 포탄값과 운송 비용, 포병대 자신들의 식비와 봉급 등을 계산해서 이 포격만으로 저 독일군을 모두 죽인다면 얼마나 비용이 들지 계산한 것. 그러자 독일군 1명당 2만 5천 달러의 거금이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러자 포병대원들은 '차라리 그 돈을 독일군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게 낫겠다!'라고 말했다는 야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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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말에 나폴리 부근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는데,[9] 사고 현장을 조사하러 간 미 육군 헌병들이 아직 뜨거운 용암식빵을 구워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반면 독일군은 비록 2선급 병력이지만 총 20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이 이곳에 묶여있었는데, 당사자들은 예상도 못했지만 베를린 함락을 목전에 두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기 전에 서쪽으로 도망쳐야 했던 수많은 독일군과 달리 이들은 온전히 서방 연합군의 포로가 되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독일군의 20개 사단을 묶어두기 위해서는 연합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진격을 멈추면 안되기 때문에 이따금 의미없는 전투를 벌이며 의미없이 많은 목숨이 사라져 갔다.[10] 심지어 이 시기에는 영국 의회에서 여성 정치인 낸시 애스터가 "프랑스에서 진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편하고 조용한 이탈리아에 나와있는 D-day 기피자들"이라는 발언을 할 정도로 이탈리아 전선 자체의 가치가 의심받을 지경이었다.[11]

후일 낸시 애스터는 이 발언을 한 사실을 부정한다. 하지만 당대에는 거의 망언 정도로 전선에 퍼졌으며 이에 분노한 이탈리아 전선의 장병들은 풍자로 릴리 마를렌의 가사를 개사해 디데이 기피자의 발라드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레이디 애스터의 발언의 진위는 접어두고라도 레이디 애스터가 2차 대전 내내 비난을 받았던 건 전쟁전에 친독일/반공 노선의 정치가였다는 점이다. 어느정도냐면 뮌헨 협정 이후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온 체코슬로바키아 난민들보고 "당신들이 빨갱이라면 영국이 아니라 소련에 가야하는게 아닌가?" 라고 하고, 안슐루스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내비친 교황 비오 11세를 비난하는 등 도를 넘은 모습을 보여줘 당시 영국 노동당의 인물인 스탭포드 크립스가(다만 이 사람이 노동당 내 대표적 친소파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녀는 베를린멤버다." 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체임벌린과 처칠의 반독 노선에 비판적이라 미운 털이 박힌 것도 있다. 레이디 애스터는 인도-미얀마 전역의 영국군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물의를 일으켰고 소문에 의하면 미얀마 전선에서 온 장교와 딸의 문제 때문에 더 앙심을 품었다는 이야기까지도 돌았다. 거의 흑색선전급. 그 외에도 "흑인들은 노예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덕분에 기독교를 접했으니까요."라는 인종차별+인권침해적 망언이나 로디지아의 백인 정치인들 앞에서 "나는 흑인 노예 소유주의 딸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지껄이는 등 후안무치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죽어나는건 이탈리아의 민간인들이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남부 지역은 어느 영국군 아일랜드 근위대원의 말처럼 "1943년의 추운 겨울을 나기에는 빈말로도 행복하지 않은 곳"이었다. 풍요로운 미국에서 나폴리 항으로 쏟아져 들어온 각종 물품들이 희희낙락하게 한 건 암시장의 마피아들뿐이었던 반면 평범한 이탈리아인들은 거의 아사 직전이었다. 파시스트들이 이미 한 달 150g의 빵(독일에게 대놓고 노예 취급받던 폴란드인들과 비교해도 별로 나을 게 없었다)까지 줄였던 시민들의 배급 식량이 그나마도 죄다 독일군에게 장악되었던 것이다. 독일군들이 손을 대지 않아 이탈리아인들이 먹을 수 있었던 거라고는 예전에는 돼지 여물 취급받았던 속의 야생 밤뿐이었다.

밀가루를 빼앗긴 이탈리아인들은 밤을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 가장 부족한 것은 소금이었기에, 큰 맘을 먹고 돼지를 잡아도 고기를 보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독일군이 쓸고 간 뒤에 한 마리라도 남은 돼지가 있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독일 군정당국은 제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는 이탈리아 공무원들의 애원을 철저히 무시했다. 독일군이 이탈리아 병사들을 강제 노역장으로 끌고 가면서, 밭에서 일할 수 있는 남자의 씨가 말랐던 것이다. 영양실조가 만연하고, 비누와 더운 물을 거의 사용할 수 없어 이가 들끓으면서 발진티푸스로 인한 대재앙이 눈앞에 닥쳐왔다. 미군이 다급히 DDT를 공수해와 주민들에게 퍼부은 후에야 간신히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미군들이 버린 음식찌꺼기나 담배꽁초조차 주워모았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나폴리에서는 풋내기 창녀로 전락한 여성들이 단돈 25센트나 레이션 하나에 몸을 팔았고 남이탈리아 끝 바리에서는 담배 다섯 개비면 여자를 살 수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연합군 10명 중 1명이 성병에 걸리면서, 1944년 에 성병 치료를 위한 페니실린 사용이 허용되었다.[12]

이렇듯 이탈리아의 민간인들, 특히 이탈리아 북부의 민간인들은 워낙에 살로 공화국과 독일 군정청에게 크게 시달렸다 보니 반독 감정이 매우 심했고, 이는 1946년 이탈리아 왕국 존립투표에서 왕당파가 패하는 원인이 된다.[13] 독일과 살로 공화국 점령 하 이탈리아 북부에서만 30만 규모에 이르는 파르티지아노가 활약했다.

3.3. 이탈리아 북부 점령

3.3.1. 고딕선
6월 4일 로마가 함락되고 노르망디에 상륙작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미군과 프랑스 부대가 프랑스 남부 상륙을 위한 용기병 작전을 위해 계속해서 이탈리아에서는 병력이 빠져나갔다. 1944년 7월, 브라질 원정군이 도착했지만, 빠져나간 손실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었다. 병력이 없어도 공세는 계속 진행해야 됐다. 퇴각하는 독일군을 따라 연합군은 피렌체피사를 점령했다. 지지부진하긴 했지만 꾸준한 진격 끝에 전쟁 말기 이탈리아 전선은 드디어 독일군의 최종 방어라인인 고딕 선만 남았다. 고딕 라인 뒤에는 게다가 고딕 라인을 돌파한 뒤엔 포(Po) 강 유역인데 이 곳은 이탈리아에서 몇 안되는 평야 지대이니, 더 이상 후퇴는 불가능 할 것이다.

독일은 이미 구스타프 선이 함락 될 것을 가정하고 15,000여명의 노예 노동자들을 동원해 2,000여개 이상의 기관총 진지, 포대, 벙커, 관측소를 만들어 이에 대비했다. 하지만 아직 많은 병력이 고딕 선으로 후퇴하지 못 했다. 그래서 철군할 시간을 벌기 위해 아르노강 일대에 트라시메노 선[14]을 만들었다.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의 10군단과 트라우고트 헤르의 제76기갑사단과 발렌틴 푸르슈타인의 제51산악군단은 7월 중순까지 트라시메노 선을 사수하였다. 하지만 미 제4군단이 7월 1일 세시나강을 건너 리보르노를 점령하고 7월 3일 시에나에 입성하려고 하자 이 정도면 됐다고 판단한 케셀링에 의해 후퇴를 한다.

한편 로마에서 독일군이 철수하자 이탈리아 동부에서 주둔하고 있는 독일군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철군의 시간을 벌기 위해 독일군은 안코나 바로 앞의 치엔티 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한편 연합군도 새로운 항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안코나 공격을 결정했다. 6월 21일에 공격을 시작한 폴란드군은 6월 30일까지 치엔티 강을 돌파하지 못했으나, 폴란드 기갑부대가 안코나 북쪽에 있는 몬테키와와 크로체디 산 빈센초를 점령하자, 이 곳에 주둔한 독일군은 후퇴도 하지 못했고 결국 7월 18일 항복을 해 폴란드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 사이 독일군은 철군을 다했고 고딕 선 보강도 끝마무리에 들어갔다. 연합군은 고딕 선을 돌파하기 위해 리미니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리미니는 이탈리아 북부 평야와 이탈리아 중부의 산악 지형이 만나는 포계곡 남쪽 끝에 있는 도시로 고딕 선을 공략하려면 먼저 이 도시를 점령해야만 한다. 8월 25일 올리브 작전이 시작 되었다. 9월 2일 캐나다 제1사단이 리미니 남동쪽에 있는 큰 마을 리치오네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리치오네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자, 9월 3일 산 로렌초를 공격했다. 이 곳은 리미니 비행장이 있는 길목이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10일 간 전투 끝에 산 로렌조를 성공하자 본격적으로 리미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9월 13일 밤 캐나다군은 스트라다의 산 로렌조 북쪽 마리노 강 남쪽 기슭에 집결한 뒤, 야간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는 성공적이어서 캐나다군은 마리노 강을 무사히 도하했다. 9월 15일 그리스군이 리미니 비행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3일 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리미니 비행장을 무사히 점령했고, 리미니를 점령하기 위한 공세가 9월 18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뉴질랜드군의 지원을 받은 캐나다군과 그리스군이 코비냐노 언덕이 있는 산 포르투나노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고, 10만번이 넘는 포격이 단 한 언덕에서만 이루어졌다. 결국 이를 버티지 못한 독일군은 마레키아 강으로 후퇴했다.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연합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주기 위해 도시에서 전투를 벌일 생각이었다. 이에 연합군은 리미니에 700회의 포격과 486회의 공습을 가했고, 리미니의 건물 90%가 파괴되었다. 결국 이를 버티지 못한 독일군은 후퇴를 했고, 그리스군은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을 통과하여 리미니 도심으로 진입했다.[15]

한편 캐나다군과 그리스군, 뉴질랜드군이 리미니를 점령하느라 애를 쓰고 있을 때 영국 제8군은 메타우로 강을 건너 고딕 선의 전초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8월 30일 캐나다군까지 합세해서 포글리아 강 반대편 능선을 따라 뻗어있는 독일군 방어선에 도착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연이은 패배로 병력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그래서 독일군의 방어선을 뚫고 리치오네 근처 해안까지 뻗어있는 또 다른 독일군 방어선에 도달했다. 하이드리히 장군이 지휘하는 제1낙하산사단의 격렬한 저항으로 리미니와 로마냐 평야를 돌파하는데 실패했다. 한편 영국 제5군단도 코리아노 능선에 있는 방어선을 무너트려 전차가 움직이기 쉬운 평야로 진출하려 했지만, 독일군의 저항으로 실패한다.

그러자 연합군은 저항이 심한 코리아노 능선은 포기하고, 젬마노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영국군 제46보병사단, 제56런던보병사단, 제7기갑여단, 제25전차여단, 제4인도보병여단을 동원한 이 작전은 손쉽게 끝날 줄 알았지만 아드리아해의 몬테카시노라 불릴 정도로 매우 유사한 상황의 전투가 벌어졌다. 젬마노에서의 진격이 느려지자, 연합군은 다시 코리아노 능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제5기갑사단과 영국 제1기갑사단의 공격을 시작했고, 때 마침 그리스군에 의해 리미니가 함락되자 독일군은 후퇴를 시작했다. 독일군이 후퇴를 하기 시작하자 연합군은 산마리노를 노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독일군이 산마리노의 중립을 어기고 이 곳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제46보병사단이 몬테스쿠도를 점령하고 바로 북쪽이자 산마리노 국경과도 가까운 물라차노 마을에 진입했다. 독일군은 연합군에 맞서 제278보병사단을 투입했다. 제4인도보병여단의 선두 부대인 제10 발루치연대가 마라노 강을 건너고, 제9구르카소총연대가 파에타노 근처의 언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탄약이 부족해 후퇴를 했고, 이 때 셰르 바하두르 타파라는 구르카 병사는 2시간 동안 홀로 독일군과 맞서 싸워 아군이 무사히 철수하게 도왔다.[16] 9월 18일 저녁 무렵 제4,11시크 연대가 산마리노 북쪽에 있는 고지를 점령했고, 제11인도보병여단 소속 제79하이랜더보병 연대가 시 외곽으로 밀고 들어왔다. 결국 산마리노 경찰들의 도움으로 포위된 독일군은 소탕되었고 연합군은 산마리노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리미니와 산마리노 점령에 성공하자 연합군은 이탈리아 중부의 중심도시 볼로냐를 노리기 시작했다. 마크 클라크는 미 제2군단에 지시를 내려 라티코사 고갯길을 통과해 볼로냐에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 제2군단은 볼로냐에서 약 32km떨어진 몽히도로에서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보급품도 부족하고 비와 낮은 구름때문에 길이 진흙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비가 그친 10월 5일 미 제2군단은 볼로냐로 가는 65번 국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브나노 뒤쪽에 있는 460m의 깎아지는 절벽을 넘지 못하고 진격은 멈추었다. 10월 후반까지 진격이 더디자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국 제5군단에 체세나를 지나 사비오강을 건너 볼로냐로 진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진격은 볼로냐와 리미니 사이에 있는 포플리에서 멈추게 되었다. 한편 10월 16일 미 제5군이 볼로냐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브라질군의 도움을 받아 맹렬히 공격을 했지만 몬테그란데에서 진격을 멈추게 되었다.

11월과 12월 동안 미군은 볼로냐와 포계곡을 뚫으려고 했지만 연이어 실패했다. 한편 영국군이 11월 5일 라벤나점령에 성공한 뒤 9번 국도를 통해 진격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세니오 강의 강둑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형성하고 있어서 더 이상 진군을 하지 못했다. 연합군이 공격을 하지않자 독일군과 살로공화국군이 미 제5군의 좌익을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이났다.
3.3.2. 살로 공화국의 몰락
1945년 1월부터 3월까지 전선은 매우 조용했다. 하지만 후방은 달랐다. 연합군은 파르티잔과 폭격을 통해 이탈리아 북부의 도로와 철도망을 하나 둘 파괴했다. 이에 독일군은 베네치아를 통해 군수품을 운송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역사적인 도시이니 이 곳을 폭격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군은 핀포인트 폭격으로 베네치아의 항만과 독일군 기지, 그리고 독일해군의 배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보울러 작전을 실행했다. 핀포인트 폭격은 성공했고 베네치아에 있는 독일배와 군수품 창고, 군기지들은 성공적으로 파괴되었다.

베를린을 동부전선의 소련군에게 담당하도록 한 결정으로 인해 남아도는 무기와 장비, 군대가 집결해서 마지막으로 포격지원과 항공지원을 총 동원해 호쾌한 진격을 시작했다. 게다가 고딕 라인을 돌파한 뒤엔 포 강 유역인데 이 곳은 이탈리아에서 몇 안되는 평야 지대였고, 이는 연합군의 쾌진격에 더욱 도움이 되었다. 이 시점의 독일군은 본국과의 연락과 보급이 끊어진데다가 누가 봐도 독일이 패전한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일단 고딕 라인이 무너지자 더 이상의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이 시기가 바로 살로 공화국이 붕괴되고, 무솔리니가 도주중 잡혀서 처형당한 때다.

3월 23일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이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장군의 후임으로 서부군 총사령관에 임명이되고 그 자리를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가 맡게 되었다. 사령관이 바뀌고 독일의 패색이 짙던 4월 6일 연합군은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공세인 포도탄 작전을 시작하였다. 세니오 강 방어선에 대한 집중 포격을 시작으로 825대의 중폭격기가 세니오 강 뒤쪽에 폭격을 개시했다. 뉴질랜드군의 진격을 돕기 위해 28대의 처칠 크로커다일 화염 전차와 127대의 와스프 화염방사기 차량을 동원해했다. 연합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비팅호프는 독일 제29보병사단에게 아르젠타갭으로 보냈다. 하지만 찰스 키틀리 장군이 이끄는 영국 제5군은 화염방사기의 도움으로 이들의 증원을 막았고, 포사 마리나를 공격했지만 운하를 도하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4월 17일 포사 마리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점령하는데 성공한 영국군은 제36보병여단보고 아르젠타갭 북부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제36보병여단의 진격으로 제56사단과 마주한 독일군의 측면에 압박이 생기자 결국 독일군은 레노강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다.

한편 미 제5군은 2,000여발의 중폭격기와 2,000여발의 폭탄과 함께 진격하기 시작했고, 미 제4군도 좌측에서 공서를 펼치기 시작했다. 미 제2군단은 볼로냐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제91보병사단과 제34보병사단이 따라갔다. 독일군은 이전처럼 격렬한 방어전을 펼쳤지만, 병력 부족으로 인해 결국 고딕 선은 뚫릴 수 밖에 없었다. 고딕 선이 뚫리자 미 제6기갑사단은 미 제5군과 협력해 볼로냐를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볼로냐가 포위되자 이탈리아 파르티잔들이 총궐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북부 곳곳에서 파르티잔과 독일군, 살로 공화국군이 전투를 하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감지한 비팅호프 장군은 밀라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4월 21일 연합군이 그렇게 노리던 볼로냐가 함락했고, 4월 24일 이탈리아 파르티잔들의 활약으로 파르마가 해방되었다. 미 제4군은 북쪽으로 계속 진격해서 포 강 유역에 도착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포 강을 건넌 미 제4군은 베로나를 점령했다.

미 제4군단 휘하 제1기갑사단, 브라질군, 제34보병사단은 9번 고속도로를 따라 피아첸자를 점령했다. 4월 27일 제1기갑사단은 파르티잔에 의해 해방이 된 밀라노에 입성했으며, 토리노도 파르티잔에 의해 해방이 되었고, 제노바에 주둔한 귄터 마인홀트 장군은 휘하 14,000여명의 병력을 파르티잔에게 항복시켰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곳곳에서 독일군이 항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영국의 제13군단은 포 강을 건넌 다음 아디게 강에 있는 독일군 방어선인 베네치아 선에 도달했다. 독일군은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맥없이 방어선이 뚫렸고, 영국군이 파도바에 입성했을 때 파르티잔들이 5,000여명의 독일군 수비대를 가둔 것을 목격하였다. 연합군의 선두는 이탈리아 국경선까지 진격해서 스위스로 통하는 통로를 봉쇄하여 독일군이 중립국인 스위스로 튀지 못하도록 했으며, 이로써 간신히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탈리아 전역을 점령하게 된다.

이탈리아 전역이 연합군에 의해 점령이 되고,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독일군은 항복을 결정했다. 5월 1일 살로 공화국군 참모총장인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가 항복을 발표했고, 독일군은 5월 2일 카세르타 왕궁에서 항복문서에 사인을 하였다. 마침내 이탈리아 전역이 끝이 난 것이다.

4. 관련 문서



[1] 3.2km 정도이다.[2] 꼭 그런건 아니다.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독일 국방군이 이 시점부터 공격 대신 수비 위주로 전략을 변경하면서 점점 후퇴하기 시작했다.[3] 원래 작전명은 알라리크 작전으로, 작전의 이름으로 쓰인 알라리크는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한 게르만족 군주로 서로마 제국 붕괴에 일익을 담당했다.[4] 출처- 앤서니 비버, '제2차 세계 대전'[5] 오르토나 전투로 1,375명의 캐나다군이 사망했고, 이 전투를 이탈리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불렀다.[6] 11월 중순에서 12월 말까지 6주간의 격렬한 전투로 16,000여명의 사망자가 났고, 미냐노 갭에서 리리 계곡일대 까지 이어지는 지역을 연합군은 죽음의 계곡이라 불렀다.[7]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로코 지역 토착민 병사로 모로코의 북부는 아틀라스 산맥이 있는 산악지대로 이들은 산악전의 전문가들이다.[8] 이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 두려워 베를린 전투 막바지에 자살하면서 그의 운전수에게 자기 시체를 태워줄 것을 당부한다.[9] 화산재가 엔진에 들어가면서 주위에 주둔한 B-25 수십 기를 모조리 못 쓰게 되긴 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10] 어느 정도였냐면 연합군 측에서만 30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당연히 서부전선보다는 적은 사상자 수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수준.[11] 정말 그녀의 바램대로 이탈리아에 전선을 개전하지 않고 노르망디에만 집중했다면 노르망디 상륙 성공 자체를 보장할 지도 의문이며, 설령 성공했어도 이탈리아는 전후 파르티지아노가 소련에 포섭되어 대한민국과는 반대로 옛 살로 공화국 지역에 자유민주주의 정권, 남쪽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강력한 우익 반공성향을 생각하면 이런 몰상식도 없다.[12] 앤터니 비버 "제 2차 세계대전"中[13] 연합군에게 일찍 해방돼서 그나마 독일군에게 덜 시달린 이탈리안 남부 및 시찰리아는 왕정 존속을 주장했고, 살로 공화국을 비롯해 독일군에게 더 오래 시달렸던 북부는 왕정 완전 페지를 주장했다. 결과는 전술했듯이 반왕당파가 승리했고, 국왕 일가는 해외로 추방되었다. 다만 왕정 존속투표 자체는 굉장히 치열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더 일찍 퇴위했다면 왕당파가 승리했을 것이라는 추측마저 있을 정도였다.[14]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가 벌어진 장소이다.[15] 전쟁 후 그리스 제3산악 여단은 리미니 여단(Ταξιαρχια Ριμινι)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16] 본인은 이때 사망했고, 사후에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