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28 00:28:01

작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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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Freistaat Sachse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Flag_of_Saxony.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Coat_of_arms_of_Saxony.svg.png
주기(州旗) 주장(州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Deutschland_Lage_von_Sachsen.svg.png
작센의 위치
행정
국가 독일 파일:독일 국기.png
시간대 (UTC+1/+2)
주도(州都) 드레스덴
인문환경
면적 18,415.66 km2
인구 4,081,783명(2016년)
인구밀도 221.6명/km2
정치
주총리 미하엘 크레치머 [[기독교민주연합|
기민련
]]
주의회 여당 45석 [[기독교민주연합|
기민련
]]
10석 [[독일 사회민주당|
사민당
]]
야당 14석 [[좌파당(독일)|
좌파당
]]
38석 [[독일을 위한 대안|
대안당
]]
12석 [[동맹 90/녹색당|
녹색당
]]
연방하원 12석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기민련
]]
11석 [[독일을 위한 대안|
대안당
]]
6석 [[좌파당(독일)|
좌파당
]]
4석 [[독일 사회민주당|
사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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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석 [[자유민주당(독일)|
자민당
]]
2석 [[동맹 90/녹색당|
녹색당
]]
1석 [[파란당|
파란당
]]
연방상원 4석

1. 개요2. 역사
2.1. 구(舊) 작센 (Altsachsen, Old Saxony: ~ 1180년)2.2. 현(現) 작센
3. 특색4. 기타5. 색슨족/작센족을 의미하는 독일어6. 관련 문서

1. 개요

지도에서 녹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작센 주로, 북쪽에는 브란덴부르크 주, 동쪽에는 폴란드, 남쪽은 체코, 서남쪽에 바이에른 주, 서쪽에는 튀링겐 주, 서북쪽에는 작센-안할트 주와 이웃해 있다.

주도(州都)는 드레스덴. 기타 주요 도시로는 라이프치히, 마이센, 켐니츠(舊 카를마르크스슈타트) 등이 있다.

구 동독 지역 중 인구 밀도가 가장 조밀하고 산업화가 많이 진행된 지역이다. 2009년 기준으로 면적은 1만 8,413 ㎢이며, 약 417만 명이 거주하고 있고,[2] 국내총생산은 929억 유로에 달한다. 교육수준이 굉장히 높고 우수 전문 인력과 학자들이 작센에서 배출되었다. 작센 산하의 행정 구역으로 22개의 구로 구성되어 있다.

2. 역사

2.1. 구(舊) 작센 (Altsachsen, Old Saxony: ~ 1180년)

원래 작센(Old Saxony, 3세기~1180년)은 라인·엘베 두 강 사이의 오늘날의 니더작센홀슈타인, 그리고 북부 베스트팔렌에 해당하는 지역을 의미하며, 현재의 작센주와는 관련이 없는 영토다. 엘베강 동쪽의 땅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이후에 슬라브화되었다가 나중에 중세 이후 동방식민운동으로 다시 독일화되었기 때문에 당시 작센은 북독일 그 자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었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작센(Sachsen)족은 200년경부터 이 영역에 정주했다. 독일의 5대 부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바다와 접해 있었기 때문에 해상으로의 진출과 무역도 활발했다. 5세기경 작센족(영어명 색슨족)의 일파[3]잉글랜드를 정복한 것도 바로 북해 연안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76년 서로마 제국 붕괴 후 여러 게르만 왕국들이 건설될 때, 작센족도 작센 왕국을 건설하였다. 작센은 다른 게르만족과 마찬가지로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수용했고,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는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웃에 있는 메로빙거 왕조프랑크 왕국과는 느슨한 관계를 이어갔으나 인접국 관계인 만큼 수시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7세기경 작센 왕국의 힘은 강성해졌고 이웃 프랑크 왕국과 자주 전쟁이 발생했다. 침공과 보복 침공 등으로 양국 간의 감정의 골이 크게 벌어졌다. 772년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 때 작센과 프랑크의 전쟁은 절정을 이루어 근 40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전쟁이 이어진다. 이단 척결이라는 명분으로 작센과 전쟁을 했던 카롤루스는 점령 지역의 작센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했고 거부하는 이들은 모두 처형했다. 잔혹한 전쟁 끝에 작센의 인구가 격감할 정도가 된 800년 결국 작센은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지만, 작센인들은 810년까지 반란을 이어갔다.

카롤루스 대제는 810년 작센을 평정한 후 이 곳을 프랑크 왕국의 하위 단위인 작센 공국으로 지정했다. 카를로스 대제 사후 베르됭 조약(843년)을 통해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왕국의 하위 단위를 구성하는 독일의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가 되었는데, 다른 4곳은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로트링겐이다. 899년 어린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즉위하자 주변의 슬라브족, 마자르족 등으로부터 외침이 이어졌는데, 국왕이 리더쉽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각 공국의 지도자들이 개별적인 지도력으로 외침을 막아내야 했다. 그결과 900년 이후 5대 부족 공국의 자치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911년 루트비히 유아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었고, 5대 부족 공작들과 3대 주교령 주교들이 모여 차기 국왕을 선출하게 되었다. 이것이 선제후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서프랑크 국왕 샤를 3세가 혈통을 이유로 왕위 계승을 주장했지만 5대 공작들은 이를 씹고 독일 부족 가운데서 차기왕을 선출하기로 하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새로 국왕으로 선출했다. 콘라트 1세에 이어 왕으로 선출된 이는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였다. 하인리히 1세는 독일왕을 자칭했고 이에 독일 왕국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동시에 작센 왕조(오토 왕조)가 시작되었다.

962년 작센 왕조(오토 왕조) 출신의 독일왕 오토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황제 가문을 배출한 작센 공위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 다음가는 지위인 선제후 직위에서 세속 제후 중 첫 번째 서열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성립 후에 작센은 크게 4개 지방으로 분류하여 서부는 베스트팔렌,[4], 동부는 오스트팔렌,[5] 북부는 노르트알빙기아,[6] 중부는 앙그리아라고 불렀다.[7]

작센 공작이자 독일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오토 대제는 황제가 되면서 작센 공위를 빌롱 가문의 헤르만에게 넘겨줬다(961년). 빌롱 가문 이후 작센 공위는 주플린부르크 가문을 거쳐 1142년 벨프 가문하인리히 사자공에게로 넘어갔다. 신성 로마 제국은 건국 초기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지금의 안할트 지방에 크베들린부르크나 마그데부르크 등의 도시를 세우고 국력과 투자가 집중하였는데, 작센 공작들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동부로 확장을 모색했다. 특히 하인리히 사자공은 벤드족 등 엘베강 동쪽에 살던 슬라브족들을 격파하며 동쪽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메클렌부르크포메른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고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여 독일화하였다. 그 결과 작센 공국은 엘베강을 넘어 마이센과 드레스덴까지 닿게 되었다. 황제보다 넓은 영토를 다스리게 된 하인리히 사자공은 선대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 일평생 동안 권력 투쟁을 이어갔으나 1180년 황제에게 패하면서 제국 추방령을 받고 모든 작위를 박탈당하고 영지가 몰수되었다. 이로서 사자공의 작센 공국도 몰수되어 바르바로사 황제 측근들에게 분배되며 분할되면서 작센 공국은 해체되고 말았다(1180년).

1180년 하인리히 사자공이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추방되면서 유서 깊은 중세 작센 공국은 공중분해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사자공의 추방 후 벨프 가문은 거의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고 아무런 작위도 없이 사자공 모친 소유의 약간의 사유지로 연명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서 깊은 벨프 가문은 여전히 여러 제후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거의 가진 것이 없던 사자공의 아들 오토 4세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 바르바로사 황제의 손자를 젖히고 황제로 선출되기까지 했다(1208년).
1235년 제국의회에서 바르바로사 황제가 하인리히 사자공벨프 가문에 가한 가혹한 조치를 다소 완화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몰수된 영지의 일부가 벨프 가문으로 환수되어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 탄생하였고 이는 하노버 공국/선제후국/왕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구(舊) 작센 공국의 영지 중 일부는 베스트팔렌 공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2.2. 현(現) 작센

구 작센 공국은 원래 엘베강 동쪽에 있었으나 여러 차례에 걸쳐 엘베 동쪽으로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했었는데, 특히 구 작센의 마지막 지배자이자 전성기를 일궈낸 하인리히 사자공은 엘베강 동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아울러 신성 로마 제국의 동쪽 변방에 있던 마이센 등 기존 변경백국들도 작센의 영향권하에 두었다.

1180년 바르바로사 황제가 하인리히 사자공의 영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하면서 로마 시대 이래 내려오던 유서 깊은 작센 공국은 공중분해되었다. 이후 구 작센 공국의 실질적인 후계자는 벨프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하노버 공국)이었으나, 1946년 니더작센주가 만들어질 때까지 더이상 작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구 작센의 영토를 최종적으로 재분배한 1235년 제국 회의에서 아슈카니어 가문이 구 작센 공국의 가장 동쪽에 있었던 땅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 구 작센 공국의 적통이었던 벨프 가문이 더 이상 작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라는 지역명을 사용하자, 아슈카니아 가문이 작센 공국이라는 이름을 가져가 사용하게 된다. 원래 비텐베르크 지역에서 출발한 아슈카니아 가문은 구 작센의 동쪽 영토를 얻으면서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1235년 작센 타이틀을 가져간 아슈카니아 가문의 영토는 3개의 지역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북부(홀슈타인의 남동부), 중부(작센-안할트 주 북부), 남부(비텐베르크 지역) 3개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이 중 중부 지역(작센 안할트 북부)이 원래 작센 땅이었고, 북부(홀슈타인의 남동부)는 하인리히 사자공이 새로 병합한 변경지역으며, 남부(비텐베르크 지역)은 아슈카니아 가문의 본령으로 작센과는 무관했다.

1252년 아슈카니아 가문의 3개의 영토 중 가장 넓은 중부(작센-안할트 주 북부) 땅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서 아슈카니아 가문은 소국으로 축소되었고, 구 작센 땅과도 사실상 무관하게 되었다.

아슈카니아 가문의 남은 두 땅은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1260년 가문이 분할되게 된다. 북부(홀슈타인의 남동부)는 작센-라우엔부르크로, 남부(비텐베르크)는 작센-비텐베르크로 나누어졌다. 이 두 지역이 치열하게 경쟁하다 결국 작센-비텐베르크쪽에서 작센 선제후로 인정받게 되었다.

1422년 작센-비텐베르크 가문이 대가 끊기면서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위와 선제후 지위는 마이센 변경백인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4세에게 주어졌고, 마이센 변경백의 영지를 구성하는 오스터란트(지금의 라이프치히 주변 지역)와 라우지츠·튀링겐 등과 작센-비텐베르크와 합쳐지면서 지금의 작센 주의 기원이 되었다.[8] 하지만 1428년 프리드리히 4세가 사망하면서 두아들인 에른스트와 알브레히트의 재산 문제로 인해 결국 동서로 갈라졌다. 알브레히트가 현재의 작센주인 작센 동부인 마이센 변경백령과 북부 튀링겐를 상속받고 이는 작센 주로, 에르스트가 작센 서부인 현재의 작센-안할트 주 지역의 비텐베르크와 남부 튀링겐을 상속 받아 이는 튀링엔 주로 이어진다.

이후 마르틴 루터의 등장으로 루터교회 계통의 비텐베르크(현 작센-안할트) 지역이 프로테스탄트의 중심지가 되지 않고... 현재의 작센 주는 작센 선제후의 강력한 적대자이자 라이벌인 작센-마이센 공작 게오르크의 영향으로 가톨릭 지역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마르틴 루터 시기엔 베틴 가문의 종가 에른스트 계열이 작센 선제후 직위로 비텐부르크에서 마르틴 루터를 보호했으나, 사촌인 게오르크 공작(알브레히트) 계열은 사촌과 영지 분쟁으로 갈등관계인데다가 영지인 라이프치히 대학의 학풍이 체코에서 얀 후스 시기 쫓겨난 독일인 교수들의 학맥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개신교까 성향이 강했기 때문... 따라서 현재 작센 주 지역은 종교개혁시기 강력한 개신교 적대세력이었다.. 게오르크 공작은 자신의 후사인 동생 하인리히가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에게 영지를 증여하려 했으나 급사했고 하인리히가 작위를 이어받자 하인리히의 아들인 모리츠는 아버지가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영지를 물려받기 위해 개신교로 개종한다.

그러다가 1547년 루터 사후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5세의 중앙집권화 와 종교일원화 정책에 개신교 제후들이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종교전쟁이 일어나자 알브레히트계 베틴 가문의 수장이었던 모리츠가 카를 5세의 동생이자 후계자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고 작센 선제후령 수도 비텐베르크 근처 뮐베르크 근처에서 베틴 가문 에른스트 계열 6촌 친척이자 작센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1세를 위시한 슈말칼덴 동맹군을 격퇴시켜 1555년 9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제국 의회에서 에르스트계 베틴 가문이 갖고 있던 선제후의 지위와 비텐베르크에서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일대의 작센지역 (현 작센-안할트)를 획득했다.

17세기엔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지지하였으나, 구스타브 아돌프가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대패하자, 편을 바꾸어 가톨릭 편인 합스부르크에 붙었다. 이에 스웨덴군의 보복으로 인해 많은 참화를 입긴 했으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보헤미아 왕국의 루사티아(라우지츠)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1697년에는 아우구스트 2세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아들 대인 아우구스트 3세 대까지 동유럽의 강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동군연합으로 두기도 했다.

1804년 나폴레옹에게 빌붙어 작센 공국에서 작센 왕국으로 격상했고, 작센왕국은 과거 폴란드 왕위를 차지한것처럼 나폴레옹에게 바르샤바 대공 자리를 제안받아서 형식상 동군연합이 된다. 이는 작센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견제용으로 크게 키워보려는 나폴레옹의 전략이었다. 1813년 해방전쟁 이후 나폴레옹을 계속 지지한 대가로 1815년에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영토의 북쪽(당시 작센 영토의 절반 이상)인 비텐베르크, 토르가우, 북부 튀링겐, 라우지츠 대부분을 프로이센에게 할양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한 독일 연방에 가입했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8년에 발생한 킬 군항의 반란의 영향으로 일어난 혁명으로 국왕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국왕이 퇴위하면서 현재의 명칭인 작센 자유주로 바뀌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끌날때까지 유지한다.

1945년 소련군 점령지가 되었고, 나이세강(江) 동쪽 지역은 폴란드 영토로 되는 대신[9]나이세강 서쪽의 슐레지엔 영토(대표적으로 괴를리츠)를 흡수하였다. 동독 치하에서 1952년, 드레스덴, 카를마르크스슈타트, 라이프치히 구(Bezirk)으로 나뉘어 소멸되었으나, 통일 직전인 1990년에 부활하였다.

3. 특색

종교개혁 이후로[10] 2차대전 전까지 대체로 개신교가 95%로 압도적으로 많았다.[11] 그러나 동독 공산 정권을 거치면서 국가 무신론의 영향으로 종교인구는 격감했고, 통독 이후로도 회복되지 않아 2011년 기준 무종교인이 72.6%에 달하는 곳이 되었다.

독일의 주 가운데 출산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2010년에 1.49명, 2014년에 1.57명을 기록했다. 특히 바우첸 구는 1.77명을 기록하였다.

지리적으로 산이 많고 남쪽으로는 체코와 국경선이라 할 수 있는 에르츠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토지가 비옥하다.

산업적으로 토지가 비옥하여 밀·보리·과일·아마 등이 생산되며 마이센의 도자기[12], 라이프치히의 인쇄와 모피제품, 자동차[13], 드레스덴의 담배와 자동차[14], 글라스휘테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계 회사들이[15] 자리하고 있다. 산악지대의 목재·가구·완구공업이 유명하고 대체적으로 은·석탄·구리·철·우라늄 등의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 되어 있다.

정치적으로는 기독교민주연합(CDU)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다. 통일 후 첫 자유선거가 치루어진 1990년부터 기독민주당이 주의회를 장악하고 주지사를 배출해왔다. 한때 바이에른만큼이나 보수색이 강한 지역... 이라고 인식되어왔으나, PEGIDA가 작센에서 시작한 후론 완전히 막나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생기고 있다. 이게 한두 번이 아닌 게 2004년엔 네오나치 정당인 NPD에게도 9.2% 득표율, 12개의 의석을 준 적이 있다.
주의회 (2014년 선거) ,지역구+정당명부 의석수,
여당 59 + 0 = 59석 (기민련) 0 + 18 = 18석 (사민당)
야당 1 + 26 = 27석 (좌파당) 0 + 14 = 14석 (대안당) 0+ 8 = 8석 (녹색당)

PEGIDA의 활약과 더불어 2014년 주의회 선거에서 반이민 반난민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 9.7% 득표로 14개의 의석을 가져가면서, 본격적으로 관광업에 타격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드레스덴과 작센의 산악지대는 안 그래도 많은 관광객들이 오던 지역인데 외국인에게 불친절하며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는 곳으로 인식되면서다.

급기야 2017년 연방 의회 선거에서는 정당투표 결과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CDU를 0.1%차로 누르고 작센 주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기에 이른다. 특히 폴란드와의 국경 근처인 콧부스와 괴를리츠 일대는 AfD의 표밭이다. 2014년 주의회 선거와 비교해 불과 3년 사이 민심이 CDU에서 AfD로 대거 옮겨간 것이라 독일 연방 전체적으로 AfD가 많은 득표를 한 것과 더불어 작센주에서의 큰 약진에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연방의회 (2017년 총선) , 정당득표율 / 지역구+정당명부 의석수,
26.9% / 12+0 = 12석 (기민련) 27% / 3+8 = 11석 (대안당) 16.1% / 1+5 = 6석 (좌파당)
10.5% / 0+4 = 4석 (사민당) 8.2% / 0+3 = 3석 (자민당) 4.6% / 0+2 = 2석 (녹색당)

4. 기타

1990년 이후 현재 통일 독일 영토의 최동단이 이 주에 위치해 있다. 작센 주 괴를리츠 구 소속의 나이세아우에(Neißeaue)가 바로 그곳.[16][17] 은 또한 작센 주의 동부와 브란덴부르크 주의 동남부에 걸쳐서 서슬라브계 소수민족인 소르브인이 거주하고 있다. 독일내 소수민족으로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덴마크계 민족과 더불어 유이하다.

5. 색슨족/작센족을 의미하는 독일어

게르만 계통 중 하나인 색슨족을 독일어로 작센이라고 부른다. 즉 작센 왕국은 작센족들의 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센 왕국의 권역은 위 항목의 독일 주의 시초가 된다. 영국 내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잉글랜드 민족을 부르는 앵글로색슨이란 말도 여기서 왔는데, 현대 스코틀랜드에서는 잉글랜드 출신 사람을 폄하하며 부르는 멸칭이 원래 이 작센인을 의미하는 Sassenach이다. 독일을 핀란드어로 'Saksa'라고 하고 에스토니아어로 'Saksamaa'라고 하는데 이것도 작센 족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6. 관련 문서



[1] 뒤쪽의 'e'는 강세가 없어서 'ㅔ'로 소리나지 않는다. 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선 그냥 'ㅔ'로 표기.[2] 인구가 가장 많던 1950년에는 5,682,802명을 기록했다.[3] 이들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앵글로색슨이 된다. 앵글족과 색슨(작센)족이라지만 앵글족은 거의 사멸했고, 색슨족이 대부분이었다.[4] 서쪽의 평지라는 뜻으로 현재 지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도 남아있듯이 빌레펠트와 파더보른, 뮌스터, 오스나브뤼크 등의 지역[5] 동쪽의 평지라는 뜻으로,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베르크 등을 일컬었다.[6] 현 홀슈타인 지역[7] 앵글족이 어원이다. 현재의 민덴, 하노버 일대[8] 현재의 작센주 문장도 베틴 가문의 깃발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9] 그래도 상실한 영토는 기존 영토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3분의 1이 날아간 브란덴부르크나, 4분의 1만 남은 포메른에 비하면야. 아예 전부 날아간 동프로이센이나 96%가 날아간 슐레지엔은 말할 필요도 없고.[10] 사실 마르틴 루터가 속한 작센 선제후 궁정은 현재의 작센지방이 아니라 작센-안할트 지방에 속하며 작센 선제후 직위는 마르틴 루터를 지지한 선제후 가문 베틴가문 에른스트 계열에서 가톨릭을 믿다가 뒤늦게 개종한 베틴가문 알브레히트 계열에 찬탈당한다. 마르틴 루터가 활약한 비텐베르크 지역은 에른스트 계열이 찬탈당하면서 알브레히트 계열로 넘어갔다가. 1815년 빈 회의 이후 프로이센으로 넘어간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센 왕가의 종교는 가톨릭이었는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에 선출되기 위해 18세기말에 작센선제후가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결국 2대에 걸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에 선출되었다.[12] 유럽에서 최초로 백자를 만든 지역으로, 1708년 아우구스트 2세가 고용한 연금술사 요한 뵈트거가 백자를 생산한 이후, 마이센의 기술자들이 유럽곳곳으로 탈출하면서 유럽에 백자제조 기술이 퍼지게 되었다.[13] 2000년대에 포르쉐에서 카이엔을 생산하기 위해 라이프치히에 공장을 신설했으며, 현재는 파나메라마칸도 라이프치히에서 생산한다. 카이엔의 매출이 포르쉐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보통이 아닌 만큼, 라이프치히와 작센 주의 세수에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BMW라이프치히에 공장이 있으며, 이쪽에서는 1시리즈, 2시리즈, X1을 생산 중이다.[14] 여기에는 폭스바겐에서 개발한 F세그먼트 세단 페이톤 전체와 벤틀리 컨티넨탈/플라잉 스퍼의 플랫폼을 생산하며, 수제 공장이다. 공장 전 외벽이 철과 유리로 되어 있고, 바닥에는 캐나다산 단풍나무로 만든 원목 마루가 깔려있으며, 직원들은 가운을 입고 클래식이 나오는 헤드셋을 끼며 작업을 하며, 새들이 외벽에 부딪치지 않게 새들만 들을 수 있는 고주파 출력 장치를 설치했다고 한다.하지만 정작 페이톤이 안습이라는 것[15] A. Lange & Söhne, Glashütte Original, NOMOS, Mühle, Union, Bruno Söhnle 등[16]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들에게 분할되기 전까지만 해도, 본래의 강역은 현 폴란드의 그단스크(독일명 단치히)를 지나 현 러시아의 칼리닌 그라드(독일명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이르렀었다. 때문에 지금도 작센, 튀링겐, 작센-안할트 지방 방송의 이름이 '중부독일방송(Mitteldeutscher Rundfunk)'이다.[17] 참고로 1945년 이전 독일의 최동단은 동프로이센 주 시르빈트(Schirwindt)(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 쿠투조보(Куту́зово))였다.[18] 2차대전 이전까지는 슐레지엔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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