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tablealign=center><bgcolor=#000> 제1차 세계 대전의 평화 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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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튀르키예 독립 전쟁을 통해 재협상 ii : 협상국의 일원이었으나 단독 평화 협정을 맺음 같이 보기: 파리 강화 회의, 베르사유 조약, 빅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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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reaty of Bucharest[영] / Tratatul de la București[루] / Букурещки договор[불] / Friede von Bukarest[독] / Bukaresti béke[헝]제1차 세계 대전 중 1918년 5월 7일 동맹국 진영[6]과 루마니아 왕국이 루마니아 왕국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체결한 강화조약. 이 강화조약으로 1916년 8월 27일 루마니아의 오스트리아-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 침공으로 발생한 동맹국 진영과 루마니아 왕국 간의 전쟁 상태가 종식되었다. 이 조약은 가혹하기가 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트리아농 조약과 베르사유 조약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7] 영토 할양, 내정간섭,[8] 관세 자주권 박탈, 군사력 제한 등을 명시한 이 조약으로 루마니아는 사실상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강화조약의 영어 역본은 여기서 볼 수 있다.#[9]
2. 부쿠레슈티에서 맺어진 다른 조약들
부쿠레슈티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조약들이 다수 체결된 곳이다. 1812년에 체결된 부쿠레슈티 조약은 제9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강화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게 프루트강 동쪽의 몰다비아 공국 영토 베사라비아 지역을 할양하면서 현대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분단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1886년에 체결된 부쿠레슈티 조약은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의 강화조약이다. 1913년에 체결된 부쿠레슈티 조약은 제2차 발칸전쟁의 강화조약으로,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발칸전쟁과 관련하여 한번씩은 언급되는 가장 유명한 부쿠레슈티 조약이다. 1916년에 체결된 부쿠레슈티 조약은 루마니아와 협상국(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루마니아의 1차대전 참전을 명시했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조약은 1918년에 루마니아와 동맹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3. 체결 이전
1918년, 루마니아 왕국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1916년의 전역에서 참패한 루마니아는 국토의 2/3에 해당하는 왈라키아와 도브루자 전역을 동맹국에 점령당하고 몰다비아로 후퇴했다. 루마니아는 러시아 제국의 100만 대군과 프랑스 군사고문단의 지원, 서방 협상국의 물자 지원을 받아가며 버텼지만, 1917년 3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러시아가 혼란에 빠지고 러시아 제국군이 붕괴되었다.[10]루마니아는 협상국의 지원을 받아 자국군을 개혁했고, 1917년 여름 머러셰슈티(Mărășești), 머러슈티(Mărăști), 오이투즈(Oituz) 전투의 승전으로 개선된 군사역량을 과시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여 혼란에 빠지면서 러시아가 제공하던 군사지원로가 위험에 빠졌고, 뒤이어 러시아 제국군이 붕괴하여 러시아의 군사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혼란을 관찰한 동맹국이 러시아 영내로 신속히 진격하자 루마니아는 곧 동맹국의 점령지에 둘러싸였고 군사지원도 완전히 막혔다.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해진 루마니아는 일단 1917년 11월 9일 동맹국과 포크샤니(Focșani) 정전협정을 체결하여 상호간의 적대행위를 멈추었다. 이후 강화협상을 개시하여 1918년 3월 5일 예비 강화조약인 부프테아(Buftea) 조약을 체결하고, 5월 7일 최종적인 평화조약으로 체결한 것이 부쿠레슈티 조약인 것이다.
4. 내용
- 동맹국 진영에 속한 국가와 루마니아 왕국간의 전쟁 상태를 종식하며, 외교관계를 재개함.
- 군사력을 제한함. 15개 보병사단 중 11, 12, 13, 14, 15보병사단을 해체하고 나머지 10개 사단 중 8개는 평시 편제로 전환함. 평시 편제상 1개 보병사단은 각각 보병대대 4개로 이루어진 보병연대 3개, 각각 기병중대 2개로 이루어진 기병연대 2개, 각각 7개 포대로 이루어진 야전포병연대 2개, 1개 공병 및 수송대대로 이루어지며, 루마니아군은 총 8개 보병사단을 둠. 8개 보병사단의 총 병력은 2만명을 넘을 수 없으며, 그 중 기병과 포병은 각각 3,200명, 9천명을 넘을 수 없음. 기병사단은 모두 해체함. 또한 루마니아군은 소화기 1정당 탄약 250발, 기관총 1정당 탄약 2,500발, 대포 1문당 포탄 150발 이상을 보유할 수 없으며, 그밖의 전쟁물자는 모조리 동맹국이 몰수함. 베사라비아에 주둔하는 다른 2개 보병사단은 전시 편제로 유지하도록 허용하되 동원 해제되면 역시 평시 편제에 맞게 전환함.
- 루마니아는 카르파티아 산맥과 도브루자를 동맹국에 할양함. 카르파티아 산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할양되고, 도브루자는 불가리아에 할양되는 지역(남도브루자+북도브루자 일부)과 동맹국이 공동관리하는 지역으로 나뉨. 단, 도나우강 삼각주는 도나우강 하구위원회(Europäische Donaukommission)가 관리함. 대신 동맹국은 루마니아와 베사라비아의 통일을 인정하며, 체르나보더(Cernavodă)와 콘스탄차를 잇는 교역로를 루마니아에 보장함.
- 양측은 서로 전쟁 배상금을 포기함.
- 동맹국은 루마니아 영내에서 철군하지만, 철군일은 후에 결정함.[11] 평화 조약 비준 이후 루마니아 영내에서 동맹국의 물자 징발은 중단되지만, 1918년도 생산분은 징발할 수 있음. 또한 루마니아는 점령군의 주둔비를 지불함.
- 루마니아는 민정을 이양받되 루마니아 정부의 각 부서에 동맹국 인사를 배치하며, 동맹국군의 치외법권을 인정함.
- 양측은 도나우강을 공동으로 관리함. 또한 루마니아는 도나우강을 항행하는 동맹국 선박과 그 선박에 실린 화물에 과세하지 않음.
별도로 독일은 90년간 유전을 임대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모든 '잉여' 곡물들을 구매할 권리를 얻어내기도 했다.
5. 영향
루마니아가 동맹국에 할양한 지역. 군청색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파란색은 불가리아에 할양한 지역이다. 그리고 연두색은 동맹국이 공동관리하는 지역이다. |
루마니아는 동맹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12] 루마니아의 군사력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하나같이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한 곳들만 할양했다. 카르파티아의 산맥과 도브루자를 빼앗김으로 인해 외침에 대한 자연방벽을 모두 상실했으며, 루마니아의 중심부와 국경선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아져 심대한 국방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루마니아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자원들의 수탈이 명시될 뿐만 아니라 점령군의 주둔비마저 지불해야 했고, 루마니아의 유일한 항구인 콘스탄차마저 동맹국의 관리에 넘어가 독립국으로서 정상적인 교역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13] 심지어 독일에서 비토권과 루마니아측 인사의 해고권을 가진 독일측 인사들을 루마니아 각 부서들에 배치하여 내정간섭을 하는 등, 독립국으로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다.
루마니아가 유일하게 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베사라비아와 통일을 인정받고[14] 배상금 포기가 명시되었다는 것 정도. 조약에서 영토가 오히려 불어난 이유는 독일 제국처럼 루마니아 왕국이 거의 단일민족국가에 가까운 인구 구성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1912년 조사에서 루마니아인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3.10%으로 거의 단일민족국가에 가까웠으며, 때문에 동맹국이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그리고 협상국이 불가리아 왕국을 제외한 나머지 동맹국 국가들에게 쳤던 민족자결주의 드립이 먹힐 턱이 없었다. 물론 영토를 덜 뜯겼다 뿐이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죄다 뜯겼다.
이 조약이 실현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루마니아 국왕 페르디난드 1세는 조약 내용에 격분한 나머지 루마니아 하원과 상원에서 모두 비준한 부쿠레슈티 조약을 승인하기를 거부했다.[15] 또한 독일의 막장 경제상황과 서부전선의 패배 소식을 이미 낱낱이 알고 있었으므로, 페르디난드 1세는 조금만 버티면 협상국의 승리가 확실하므로 이런 굴욕적인 내용의 조약은 승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도브루자의 국경 변화. 부쿠레슈티 조약(1918.05)에서 불가리아는 하늘색, 빨간색, 주황색, 핑크색 영역을 할양받았고, 베이지색 영역은 동맹국의 공동관리 지역이 되었다. 베를린 의정서(1918.09) 체결로 베이지색 영역도 불가리아령이 되었지만, 닷새 후 불가리아는 항복하여 동맹국의 뒤통수를 갈긴다(...). |
그리고 조약 내용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마찬가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만 이득보는 내용이 많아서 동맹국의 결속에는 오히려 악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불가리아 왕국은 루마니아 전선에서 남부 전역을 책임지고(북부 전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단시일에 루마니아군을 말 그대로 갈아마시는 대활약을 펼쳤지만, 정작 불가리아가 획득한 지역은 제2차 발칸전쟁 이전에도 불가리아령이었던 남도브루자와 북도브루자 남부의 12,296㎢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불가리아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서[16] 오히려 반독 및 반오스트리아-헝가리 감정이 들끓게 되었다. 불가리아를 어떻게든 동맹국 진영에 붙들어매려던 다른 동맹국은 9월 24일 도브루자의 공동관리 지역도 불가리아에게 할양한다는 내용의 의정서를 체결했지만, 이미 전쟁에 지쳤던 불가리아는 9월 29일에 항복을 선언한다.
종전 직전인 11월 9일, 페르디난드 1세는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루마니아 영내의 동맹국군에게 즉각 철군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날에는 다시 동맹국에 선전포고했고, 부쿠레슈티 조약도 무효화되었다. 전후 루마니아는 트리아농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 뇌이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와 인구를 2배로 불리는 데 성공했다.
[영] 영어[루] 루마니아어[불] 불가리아어[독] 독일어[헝] 헝가리어[6]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오스만 제국.[7] 사실 베르사유 조약뿐만 아니라 1차대전 전후로 맺은 소위 '강화조약'의 모양새는 다 이랬다. 독일은 식민지 포기+1320억 마르크 배상금 갚기,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만은 식민지 포기+본토 대부분 할양, 소비에트-러시아는 유럽부 영토 대부분 할양+60억 마르크 배상금 갚기. 더해서 패전국 모두 군사력 제한. 아타튀르크의 영도 하에 아득바득 싸워 강화조약을 덜 가혹하게 수정한 오스만과 애초에 가진 게 없어서 그나마 덜 털렸던 불가리아가 특이한 것이다.[8] 1차대전 후 강화조약을 체결한 다른 동맹국 국가들마저 군사력 제한을 제외한 내정간섭은 당하지 않았다.[9] 지금은 닫혀있다.[10] 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마자 붕괴된 것은 아니다. 러시아군은 의외로 1917년 후반에도 루마니아군과 어깨를 맞대어 몰다비아의 전선을 지탱했다. 진정으로 러시아군이 붕괴된 계기는 1917년 말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으로, 이때부터 러시아군 장병들이 사보타주하거나 탈주하여 전선이 붕괴되었다.[11] 이 대목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루마니아가 설설 기지 않을 경우 철군일을 차일피일 미루며 루마니아가 지불할 주둔비를 늘리는 식으로 엿먹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12] 미국의 근대 유럽사학자 맥그리거 녹스(MacGregor Knox)는 저서 To the Threshold of Power, 1922/33: Origins and Dynamics of the Fascist and National Socialist Dictatorships 1권 155쪽에서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한 루마니아를 semi-colonial dependency, 즉 반(半)식민지적 속국이라고 칭했다.[13] 사실 베사라비아도 해안에 면하긴 했지만, 그 해안이 죄다 늪지라서 개발이 어려운 지역이다. 반면에 콘스탄차 일대는 전전에 이미 상당히 개발된 지역이었다.[14] 루마니아의 영토 자체는 부쿠레슈티 조약 체결로 오히려 늘었다. 불가리에게 할양된 남도브루자 및 북도브루자 일부의 넓이가 12,296㎢,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할양된 카르파티아 산맥의 넓이가 5,650㎢, 동맹국 공동관리로 넘긴 북도브루자의 넓이가 11,024㎢이니 총합 29,070㎢가 동맹국에게 할양되었다. 반면에 루마니아의 영유권을 인정받은(정확히는 동맹국에게 묵인받은) 베사라비아의 넓이는 44,442㎢이니, 어쨌건 간에 국토 자체는 분명 전전에 비해 늘었다.[15] 당시 루마니아 법률상 국왕의 최종 승인을 받지 않은 조약은 효력이 없었다.[16] 불가리아는 도브루자 전역의 할양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