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5:29:24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colbgcolor=#8da9c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소령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라프
Georg Ludwig Ritter von Trapp
파일:Lt._Geo_Von_Trapp_LCCN2014699117_(cropped).jpg
▲ 1916년경의 모습
<colcolor=#191919> 이름 Georg Ludwig Ritter von Trapp
게오르크 루트비히 리터 폰 트라프[1]
출생 1880년 4월 4일,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 제국 자다르
사망 1947년 5월 30일(향년 67세),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버몬트 스토
복무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1900년 ~ 1918년)
최종 계급 해군 소령
(Korvettenkapitän)
주요 참전 의화단 반란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2. 계급과 작위3. 약력
3.1. 학력3.2. 경력3.3. 서훈 내역
4. 일생
4.1. 군 생활4.2. 전쟁 이후
5. 저서6. 기타
6.1.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게오르크 루트비히 리터 폰 트라프는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장교로 복무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미국에서 음악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랩 대령'의 모델로 잘 알려져 있다.

별명은 잠수함의 에이스였는데,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수 많은 협상국의 군함과 상선, 그리고 잠수함을 격침시켜서 얻은 별명이다.

2. 계급과 작위

영화에서는 '대령'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이는 독일어권의 해군 영관장교 계급 명칭이 영어권과 달라서 생긴 오역이다. 독일어권에서 해군 소령은 "초계함 함장(Korvettenkapitän), 중령은 "호위함 함장(Frigattenkapitän)", 대령은 "해군 함장(Kapitän zur See)"이고 일상 회화에서는 세 계급을 모두 퉁쳐서 "Kapitän"으로 부른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해군 소령과 중령을 "(Lt.) Commander"라고 칭하고, 대령만 "Captain"으로 표기한다. [2] 번안 과정에서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Kapitän"을 실제 영어권 계급체계에 대응하는 "Commander"가 아니라 그냥 "Captain"으로 직역하면서 계급이 두계단 뛰는 오해가 발생한 것.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남작이라고 나오는데, 성명에 있는 칭호 '리터(Ritter)'는 세습기사 칭호로 남작(Freiherr)보다 한 단계 위계가 낮다. 영국식으로 하면 준남작 비슷할 것이다. 세습기사 칭호는 게오르크의 부친 대에 얻은 것.

3. 약력

3.1. 학력

3.2. 경력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복무 (1898 ~ 1918)
    • 지휘관 경력
      • 잠수함 U-6 함장 (1910.7.1 ~ 1913)
      • 어뢰정 제52호 정장 (1914.7.28)
      • 잠수함 U-5 함장 (1915.4.17)
      • 잠수함 U-14 함장 (1915.10.14)
        (구 프랑스 해군 잠수함 "퀴리")
      • 카타로 잠수함 기지 사령관 (1918.5 ~ 1918.11)

3.3. 서훈 내역

  •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 1898년 금경축 기념포장 청동장[3] (1898)
    • 전쟁포장[4] (1900/1901)
    • 용맹포장 은장 2급[5] (1901)
    • 1908년 금강경축 군사십자장[6] (1908)
    • 무공십자장 3급[7] (1911)
    • 무공십자포장 청동장 및 무공십자장 소수[8] (1915/1916)
    • 무공십자장 3급 및 전쟁장[9] (1915/1916)
    • 레오폴트 훈장 기사십자장 및 전쟁장[10]
    • 철관 훈장 3급 기사장 및 전쟁장[11] (1916/1917)
    • 카를의 군대 십자장[12] (1917/1918)
    • 무공십자장 3급 및 전쟁장[13] (1917/1918)
    • 용맹포장 은장 1급[14] (1917/1918)
    • 마리아 테레지아 무공훈장 기사십자장[15] (1924)

4. 일생

4.1. 군 생활

1880년 4월 4일 현재 크로아티아의 영토이자 달마티아 왕국의 수도인 자다르[19]에서 태어났으며, 해군 중령이었던 부친을 따라 현재 크로아티아 영토[20]에 있는 피우메 해군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로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음악을 접한 것 또한 사관생도 시절부터였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해군 사관들은 타국 인사들과 교류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보다 높은 수준의 교양을 요구받았다. 이 때문에 피우메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군사 교육 말고도 외국어 교육과 각종 문화 교육을 제공해 주었다. 트랍은 여기서 바이올린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1900년에는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가했다. 당시 사관후보생으로서 해군 육전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후 잠수함에 관심을 갖고 그 분야로 진출하였으며, 1910년 영국인 여자인 애거사 화이트헤드(Agathe Whitehead)와 결혼하였다. 그는 세계 최초의 근대적 어뢰인 화이트헤드 어뢰를 개발한 로버트 화이트헤드(Robert Whitehead)의 손녀로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녀였다. 참고로 그녀의 사촌언니는 비스마르크의 장남 헤르베르트와 결혼했고 사촌오빠인 호요스 백작[21]은 헝가리의 외교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마디로 최상류층이라고 보면 된다. 로버트 화이트헤드는 영국인이었지만 그의 어뢰 디자인은 원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어뢰 디자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와도 커넥션이 있었다. 애거사 화이트헤드는 1922년 성홍열로 세상을 떠났다.

파일:SM_U-14_(Austria-Hungary).jpg
▲ 트랍 소령의 유보트 U-14함. 원래 프랑스 해군의 브뤼메르급 잠수함 '퀴리' 함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15년에는 대위 계급을 달고 제국 해군 소속 SM U-5 잠수함의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프랑스 해군 소속의 순양함레옹 강베타(Leon Gambetta)를 격침시키고 잠수함 퀴리[22]를 나포하였다. 퀴리는 제국 해군 소속으로 변경되었고 SM U-14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트라프 본인이 SM U-14의 지휘관이 된다. 이외에도 수많은 협상국 측의 상선과 잠수함을 격침하여 에이스 함장들 중 한 명이 되었고, 1918년 5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였으며, 제국 최고의 훈장인 마리아 테레지아 무공훈장까지 받았다.
...다음 날 8시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깃발은 21발의 예포와 함께 마지막으로 게양되고, 그리고 영원히 내려질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적백적 깃발에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 장례식에 모여들었다. 지난 140년간 그 깃발 아래에서 우리의 아버지들과 선조들은 리사와 헬골란트, 그리고 수많은 곳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우리의 깃발이 게양되는 곳마다 이 깃발은 오랜, 그리고 대대로 이어온 전통을 위해 용맹히 싸웠으며 수많은 적들을 쓰러뜨렸다.[23] 이제 그 깃발은 함선의 선미에 단 한 번만 마지막으로 게양될 것이었다.
나는[24] 직접 천천히, 그리고 엄숙히 깃발을 게양했고, 예포가 울리기를 기다린 다음, 다시 거두었다. 정말 마지막으로 말이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치 사랑하는 이의 장례식에 온 것처럼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folding [ 독일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Am nächsten Morgen um 8 Uhr früh ist die k.u.k Flagge mit einem Salut von 21 Schuß zum letzten Male zu hissen und hierauf für immer einzuholen.
Und zu diesem Begräbnis rücken sie alle aus, um ihrer rot-weiß-roten Flagge die letzte Ehre zu erweisen. Schon ihre Vater und Urväter hatten unter ihr ruhmvoll bei Lissa, Helgoland wie bei unzähligen Gelegenheiten durch mehr als 140 Jahre gekämpft und nie waren sie geschlagen worden.
Wo sie sich zeigte hat sie, getreu den alten, überlieferten Traditionen, gekämpft und Tod und Vernichtung um sich verbreitet. Nun soll es das letztermal sein, daß sie am Heck eines Kriegsschiffes hinausgeht.
Langsam und feierlich hißt der Stationskommandant eigenhändig die Flagge, wartet dann den Geschützlaut ab und holt sie wieder ein. Zum allerletztenmal!
Es gibt keinen, dem nicht das Wasser aus den Augen läuft. Ringsum ist ein Schluchzen zu hören, wie beim Begräbnisse des Liebsten.}}}

▲ 자서전 <최후의 예포가 울릴 때까지>에서 묘사한 해군 해체의 순간. 원전 206p~207p에서 발췌.

전쟁이 끝나자 소령[25]으로 예편하였으며, 더 이상 해군에 복무하지 못하게 되었다. 본인은 해군인데 자기 나라가 내륙국이 되어서 더 이상 해군을 운영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제국 해체 이후, 폰 트라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일부가 되어 버린 고향 크로아티아에 남지 않고 오스트리아로 가는 것을 택했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1924년에 잘츠부르크 근교의 아이겐(Aigen)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해당 지역에 위치한 논베르크(Nonnberg) 수도원에서 수녀로 일하다가 파견 온 가정교사이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의 모델이 되는 마리아 아우구스타 쿠체라(Maria Augusta Kutschera, 1905~1987)와 1927년에 재혼하였다. 이후 그녀와의 사이에서 로제마리(Rosemarie, 1928년 출생.)와 엘레오노레(Eleonore, 1931년 출생.)를 얻었다.

4.2. 전쟁 이후

1938년 오스트리아 연방국나치 독일강제 합병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트라프에게 독일 해군 복무를 권유했지만 그는 자신의 조국은 오스트리아뿐이라면서 거절하였다. 그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방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기를 걸어 놓았다.

이후 트라프 일가는 나치를 피해 미국 버몬트의 스토로 이주하였고 본인은 제2차 세계 대전추축국의 패망으로 끝난 지 2년 뒤인 1947년 5월 30일 미국에서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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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원본 표지 영문 번역본 표지
  • <최후의 예포가 울릴 때까지(Bis zum letzten Flaggenschuss)> (1935)
    본인의 1차 대전 참전 경험을 서술한 회고록이다. 1차 대전 당시의 잠수함전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잠수함대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중 하나로 꼽힌다. 출간 직후부터 유명했던 베스트 셀러로, 그에게 잠수함전 전문가로서의 불후의 명성을 안겨 준 서적이다. 망명 중이었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역시 읽었다고 전해진다. 국내에는 발매되지 않았다.

    영문판 제목은 <To the Last Salute>이다. 트랍 소령의 손녀인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M. Campbell)이 할아버지의 회고록을 직접 영어로 번역했다. 영문판은 미국 버몬트에 있는 트랍 가문의 별장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의 기반이 된 마리아 폰 트랍의 자서전 등의 다른 기념품들과 함께 판매하고 있다.

6. 기타

  •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캐나다의 명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분했다. 다만 플러머가 연기한 트랍은 실제 트랍과는 많이 다르다. 자녀들의 살아생전 인터뷰에 따르면 소령 본인은 오히려 동시대 군인치곤 집안에선 온화하고 좀처럼 소리지르는 모습을 보기 힘든 다정다감한 가장이었고 오히려 새엄마 마리아가 성격이 드센 군기반장으로 아이들이 무서워했다고 한다.

    자녀들의 회고에 따르면 트랍 소령은 전후에 직장인 해군에서 예편당하고 아내마저 잃어 힘든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욱 관심을 쏟았다. 아이들과 함께 풀라 시 남쪽의 베루다 섬으로 주기적으로 캠핑을 가기도 했고, 함장 시절 실력을 살려 직접 배를 몰아 아이들과 함께 요트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26] 자식들에게 음악을 처음 가르친 것 또한 실제로는 마리아가 아니라 트랍 소령이었다.

    이 때문에 딸 아가테는 얼음장 같은 플러머의 연기를 보고는 "저건 우리 아빠가 아니다"라고 생각했고 다른 자녀들 역시 영화 속의 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며 불만을 표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마리아가 원작이 되는 자서전의 판권을 헐값에 파는 바람에, 헐리우드에서 멋대로 각색하는 것을 트랍 일가가 제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뺏겼다고 생각했다. 그의 자서전을 영어로 번역한 손녀 엘리자베스 캠벨 역시, 영화가 왜곡한 할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번역했다고 역자 서문에서 밝혔다.
  • 사관생도 시절 대한제국제물포(현 인천광역시)에 잠시 방문한 적이 있다. 다만 개인적인 방문은 아니었다. 트랍 소령이 승선해 있던 SMS 마리아 테레지아함을 비롯한 오스트리아 원정함대가 의화단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하던 도중에 1901년 4월 30일부터 동년 5월 6일까지 약 일주일 간 제물포에 머물렀던 것이다.[27] 당시 트랍이 구한말의 한국에서 일주일 간 어떤 경험을 겪고 어떤 소감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의화단 전쟁 참전에 대해서도 말을 극도로 아끼는 사람이었다.
  • 현대 오스트리아 연방군의 사관학교인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도 1995년 이래로 트랍 소령을 기념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그를 기념하는 이유는, 그의 모교인 피우메 해군사관학교가 제국 멸망과 함께 폐교되었기 때문이다.

6.1. 매체에서

  • 사운드 오브 뮤직
    아내 마리아 폰 트랩의 자서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영화로, 트랍 소령과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전 세계인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 Hearts of Iron IV
    독일이 안슐루스 중점을 완료하고 스위스가 해안주를 얻으면 트랍이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하는 대가로 스위스 해군에 복무하기를 청한다. 이를 받아들이면 트랍을 제독 겸 해군참모총장으로 써먹을 수 있다. 바다의 늑대와 통상파괴(천재) 특성이 달린 쓸만한 잠수함 제독이다.
    • 카이저라이히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에서는 동맹국이 1차대전에서 승리하고 오스트리아 제국도 해체되지 않아 1936년 기준 그대로 해군 장성으로 남아있다. 인물 설명에 가족끼리 음악회를 연다는 설명이 있는 건 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리터 폰트라프'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다만 권위 문제도 있고 통솔력 문제도 있어서 공식 문서같이 딱딱한곳이 아니라면 일단 함장직을 받은 사관이라면 위관 임시 함장도, 준함장도 영어로도 그냥 캡틴이라고 불러줬다[3] Jubiläums-Erinnerungsmedaille 1898 / Crown Jubilee Medal for Armed Forces, Bronze.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50주년 골든 주빌리의 기념장이자 포장(메달)이다. 당시 복무하던 군인들과 공무원들은 거의 전부 다 받았다.[4] Kriegsmedaille / War Medal. 전쟁 발발 시 참전자들을 대상으로 수여된 포장. 1900년과 1901년에는 의화단 전쟁 참전자들이 수여 대상이었다.[5] Tapferkeitsmedaille / Silver Bravery Medal 2. Class. 전투에서 용맹히 싸워 공적을 인정받은 군인들에게 주었던 포장이다.[6] Militär-Jubiläumskreuz 1908 / Military Jubilee Cross.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기념장이다.[7] Militärverdienstkreuz / Military Merit Cross, 3. Class. 무공십자장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가장 대표적인 무공훈장으로, 장교들을 대상으로 했다. 독일의 철십자 훈장에 대충 대응한다. 1급 기준으로 전체 훈장 중 4위, 무공훈장 중 3위의 높은 서열이었다. 트랍 소령이 수여받은 3급 역시 전체 훈장 중 21위로, 꽤나 높은 순위다.[8] Militär-Verdienstmedaille / Military Merit Medal on ribbon of Military Merit Cross, Bronze. 무공십자장보다 한 단계 낮은 포장이다.[9] Militärverdienstkreuz / Military Merit Cross, 3. Class with War Decoration[10] Österreichisch-kaiserlicher Leopold-Orden / Order of Leopold, Knight's Cross with War Decoration. 프란츠 1세가 제정한 민사 및 군사 훈장으로, 기사단의 형식을 띈다. 대십자장 기준으로 전체 훈장 중 5위, 무공훈장 중 4위에 해당하는 최고 등급의 훈장들 중 하나다. 트랍 소령이 수여받은 기사십자장 역시 전체 훈장들 중 16위다.[11] Orden der Eisernen Krone / Order of the Iron Crown-Ritter, 3. Class with War Decoration. 롬바르디아 철관에서 따온 민사 및 군사 훈장으로, 역시 기사단의 형식을 띄었다. 원형 메달, 몰타 십자 또는 철십자의 형식인 다른 훈장들과 달리 쌍두수리의 형상을 띄고 있다. 제국 시절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훈장들 중 하나였다. 1급 기준으로 전체 훈장 중 6위, 트랍이 수여받은 3급은 19위다.[12] Karl-Truppenkreuz / Karl Troop Cross. 카를 1세가 제정한 훈장. 1차 대전 중반인 1916년부터 2년간 자그마치 65만 개를 수여했다. 악화되는 전황 속에 떨어져 가는 제국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남발되었다.[13] Militärverdienstkreuz / Military Merit Cross, 3. Class with War Decoration[14] Tapferkeitsmedaille / Silver Bravery Medal, 1. Class[15] Militär-Maria-Theresien-Orden / Order of Maria Theresa, Knight's Cross.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의 무공훈장이다. 18세기에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정했으며 역시 기사단의 형태를 띄었다. 가장 높은 대십자장은 전체 훈장들 중 2위, 무공훈장 중 1위의 서열이었다. 트랍 소령이 수여받은 기사십자장은 14위다. 1차대전 패전 이후 카를 1세가 수여 권한을 기사단 총회에 이관했기에, 트랍은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이 된 후임에도 수여받을 수 있었다. 1931년에 수여가 중단되었다.[16] Liyakat Madalyası / Liakat War Medal, Goldens. 오스만 제국군의 무공포장.[17] Order św. Stanisława / Орденъ Св. Станислава / Order of St. Stanislaus 3. Class. 본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훈장으로, 폴란드가 러시아에 합병된 후 러시아 상훈 체계에 편입되었다.[18] Eisernes Kreuz / Iron Cross[19] 당시 명칭은 '차라'[20] 그래서 가끔 크로아티아인으로 오해되기도 한다.[21]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야인 7월 위기 당시 베를린과 빈을 오가며 황제들의 친서를 들고 바삐 뛰어다녔던 그 호요스 백작 맞다.[22] 마리 퀴리피에르 퀴리 부부의 이름에서 유래[23] 직역 시 "수많은 죽음과 파괴를 퍼뜨렸다."[24] 원문은 "기지 사령관(Stationskommandant)". 카타로 잠수함 기지 사령관이었던 소령 본인을 3인칭화하여 지칭하고 있다.[25] 제국 해군 기준 Korvettenkapitän(Corvette captain[26] 사실 사운드 오브 뮤직 내에서도 자세히 보면 영화다보니 아이들한테 소리지르고 무섭게 구는 모습은 순화하거나 표현을 안해서 그렇지 마리아가 성격이 굉장히 드세고 자기 주장이 강한 반면 폰 트라프 소령은 완고한 외면 속에 의외로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이다.[27]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함의 함장은 훗날 1차 대전 당시 해군최고사령관이 되는 안톤 하우스 대령이었다. 한편 하우스의 전임 최고사령관으로써 1900년대 오스트리아 해군 발전에 큰 공적을 세우게 되는 루돌프 몬테쿠콜리 대장 역시 원정함대 사령관이자 소장 신분으로 승선 중이었다. 몬테쿠콜리는 이때 함대를 대표해 서울로 올라와 덕수궁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