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텝스크 공세 러시아어: Витеб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1] 독일어: Zweite Winterschlacht um Witebsk[2] 영어: Vitebsk Offensive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비텝스크 방향으로 공세를 펼치는 소련군[3] | ||
시기 | ||
1944년 2월 3일 ~ 3월 13일[4] | ||
장소 | ||
소련 벨로루시 SSR 비텝스크 일대의 독일 국방군 돌출부 | ||
원인 | ||
소련군의 제3기갑군 섬멸 시도 비텝스크 탈환 시도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제1 발트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바실리 소콜롭스키| ]] (서부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바실리 고르도프| ]] (제33군 사령관) | ]][[틀:깃발| ]][[이반 바그라먄| ]][[틀:깃발| (중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 (제6항공함대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 (제3기갑군 사령관) | ]][[틀:깃발| ]][[에른스트 부슈| ]]
결과 | ||
나치 독일의 승리 | ||
영향 | ||
바그라티온 작전까지 비텝스크 전선이 안정화됨 | ||
전력 | 병력 436,180명 전차 129대 | 전차 140대 |
피해 규모 | 전사/실종 27,639명 부상 107,373명 전차 363대 | 전사 3,530명 실종/포로 1,458명 부상 13,33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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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텝스크 공세[5] 혹은 제2차 비텝스크 동계 전투[6]은 네벨 공세로 시작된 43-44년 겨울의 비텝스크 전역의 마지막 전투이며 독일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의 시작으로 44년 6월에 비텝스크-오르샤 공세를 시작하기까지 4개월간 비텝스크 근방에서 대규모 공세를 중단하게 된다.비텝스크 전역만 따로 보면 이 구역은 3기갑군의 담당 구역으로 원래는 북부 집단군의 16군과 중부 집단군의 3기갑군의 연결점인 네벨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42년 11월의 벨리키예루키 전투 이후 잠잠하다가 네벨 공세-비텝스크 공세[7]로 이어지는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로 계속 밀려났다. 이후 고로독 공세[8]-비텝스크 공세[9]로 이어지는 소련군의 공세를 마침내 독일군이 막아내면서 4개월에 걸친 격전이 잠잠해지게 된다. 그러나 이 여파로 16군과 3기갑군 사이의 전선이 너무 길어지면서 비텝스크는 반원형 모양의 돌출부가 되었고 3기갑군이 담당할 전선이 길어지면서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쉽게 포위당하고 전멸당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2. 전투 서열
2.1. 독일군[10]
- 중부집단군 ( 사령관 : 에른스트 부슈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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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소련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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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43-44년 겨울의 동부 전선
43년 7월의 쿠르스크 전투를 끝으로 독일군의 전략적 공세는 끝났고 이후 소련군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쿠르스크 북쪽과 남쪽의 쿠투조프 작전과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을 시작으로 42년 겨울과 비슷하게 공세는 전 전선으로 확대됐다.북부 전선에서는 18군을 상대로 43년 7월부터 9월까지 레닌그라드와 볼호프 사이의 철도를 장악하기 위해서 므가 공세가 진행됐고 므가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마침내 시냐비노 고지를 탈환하면서 독일군은 사실상 레닌그라드 포위망 유지에 실패했다. 44년 1월부터는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가 진행되면서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끝났다. 조금 더 밑의 16군 구역에서는 43년 10월의 이드리차 공세, 44년 1월의 노보소콜니키 공세, 44년 3월의 스타라야루사 공세와 4월의 프스코프 공세가 이어지며 착실하게 철도를 장악해나갔고 북부 집단군은 판터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중부 전선에서는 43년 7월의 쿠투조프 작전 이후 8월부터 9월까지 수보로프 작전과 제2차 스몰렌스크 전투, 브랸스크 공세를 진행하며 중부 집단군을 밀어냈으나 10월부터 시작된 공세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서부 전선군은 11차례의 공세중 6번의 오르샤 공세를 포함해 4군을 8번이나 공격했으나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그나마 남부집단군이 밀려나고 2군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9군의 담당 구역이 지나치게 길어진 덕분에 벨로루시 전선군이 43년 10월부터 11월까지 고멜-레치차 공세, 44년 1월의 칼린코비치-모지리 공세, 2월의 로가체프-즐로빈 공세에서 약간 진격할 수 있었다.
남부 전선은 동시기 소련군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전역으로 43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드네프르 강 전투와 43년 12월부터 4월까지 이어진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로 남부 집단군은 폴란드와 루마니아까지 밀려났다.
4. 비텝스크를 포위하려는 소련군
고로독 공세 혹은 제1차 비텝스크 동계 전투기간 동안 제1 발트 전선군은 비텝스크 북쪽의 독일군 돌출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비텝스크 북서쪽으로 진출했다. 같은 시기, 서부 전선군은 비텝스크 방면으로 2개의 공세를 진행했으며 성과는 미미했지만 어쨌든 비텝스크 남쪽에 도달했다.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공세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스타브카에서는 두 전선군이 합동으로 비텝스크를 포위하는 것으로 목표를 축소했고 이에 따라 2월 3일부터 공세가 시작됐다.공세 초기, 소련 6개 제병협동군은 152,500명의 최전선 전투병력을 보유중이었으나 독일 3개 군단은 19,150명을 보유중이었다. 따라서 병력만 따져도 8대1의 격차가 있었으며 소련군이 돌파를 시도하기 위해 병력을 집중한 돌출부 북서쪽[12]과 남동쪽[13]은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3기갑군은 좌익부터 9군단, 53군단, 6군단을 배치하여 각각 4충격군과 10근위군, 43군, 33군과 39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전선군은 작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협조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서부 전선군의 경우에는 야전군끼리도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공세는 엉망진창이었다. 결국 2월 16일에 공세가 중단되었을 때, 서부 전선군은 겨우 4km진격한 상태였고 제1 발트 전선군은 그보다는 더 진격했으나 비텝스크 후방 차단은 커녕 폴로츠크-비텝스크 간 철도 차단에도 실패했다.
5. 서부 전선군의 추가 공세
제1 발트 전선군의 공세는 끝났지만 서부 전선군은 이후 3차례의 공세를 추가로 진행했다. 동시기에 북부 전선에서는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작전, 남부 전선에서는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 비하여 중부 전선에서는 성과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바그라먄은 그래도 고로독 공세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소콜롭스키는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어 스타브카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그리고 3월 5일부터 3월 9일까지 오르샤 방면으로 공세를 펼쳤으나 역시 전혀 성과가 없었다. 그나마 2월 29일부터 3월 5일까지 제1 발트 전선군과 함께 비텝스크 방면으로 다시 공세를 펼쳤을 때만 미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6. 결과
독일군은 8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뒀으며 이 여파로 극심한 손실을 견디지 못한 소련군이 공세를 멈추면서 1943-44년 겨울동안 중부 전선에서 이어진 네벨-비텝스크 전역과 오르샤 전역이 끝났다. 이후 비텝스크의 3기갑군과 1발트 전선군, 오르샤의 4군과 서부 전선군은 6월에 바그라티온 작전이 시작될 때까지 약 4개월 동안 큰 전투 없이 전선을 고수했으며 3기갑군과 4군은 둘 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괴멸당하게 된다.두 전선군의 전력은 병력 면에서는 8배 이상인데다가 제공권도 완벽히 장악한 상태였고 기갑 전력은 얼핏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독일군은 예비대를 모두 합친 전력이지만 소련군은 전선군, 야전군 직할 부대들은 모두 제외하고 최전선의 기갑전력만으로도 독일군 전체 기갑전력과 비슷한 수준이었다.[14] 그런데 성과는 전혀 없고 피해도 소련군이 8배나 많으니 스타브카에서 충격을 받을만한 결과였다. 결국 이러한 실패의 영향은 야전 사령관들에게도 미치게 되는데 서부 전선군 사령관 소콜롭스키는 4월에 해임됐으며 전선군 참모부와 야전군 사령관들도 상당수가 해임되거나 좌천됐다. 또한 서부 전선군은 규모가 너무 커서 지휘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2,3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분할됐다.
독일군에게는 반대로 엄청난 승리였는데 43년 10월에 네벨 공세에서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의 지경선이 돌파당하고 돌파구가 생겼을 때 엄청난 질책을 퍼붓던 히틀러가 직접 승리를 치하하고 3기갑군 사령관 라인하르트에게 곡엽검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할 정도였다. 이 시기는 동부 전선 전체에서 독일군이 밀리던 시기였는데 중부 집단군은 계속 남부 집단군으로 병력과 장비를 지원하고 있던 반면에 소련군은 남부 전선만큼이나 중부 전선에 엄청난 지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훨씬 값진 결과였다.
[1] 비텝스크 공세 작전[2] 제2차 비텝스크 동계전투[3] 가운데 Witebsk가 비텝스크이고 북쪽부터 독일 제3기갑군 소속 9,53,6군단이 배치되어 있다. 독일측 숫자는 사단이고 소련측 숫자는 야전군이며 북서쪽의 공세는 제1 발트 전선군, 남동쪽의 공세는 서부 전선군이다. 양 쪽의 빗금 친 부분이 공세 기간동안 소련군이 탈환한 영토이다.[4] 실질적인 공세는 2월 16일에 끝났고 독일측에서는 17일까지만 전투 기간으로 본다.[5] 소련 측 명칭, 사실 비텝스크 공세라는 명칭이 붙은 공세가 너무 많아서 이것만으로는 구분하기 힘들다. 당장 43-44년 겨울에 펼친 비텝스크 공세만 3번이다.[6] 독일 측 명칭[7] 1943년 10월의 공세들로 정식 명칭은 비텝스크 공세는 아니지만 편의를 위해 비텝스크 공세로 표기했다. 참고로 위에서 설명한 3번의 비텝스크 공세와는 별개의 공세이다.[8] 제1차 비텝스크 동계 전투[9] 1944년 2월의 공세, 제2차 비텝스크 동계 전투[10] 2월 3일 기준[11] 2월 1일 기준[12] 4충격군과 10근위군[13] 33군과 39군[14] 소련군은 대체로 제1파만 공세 투입 전력으로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