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3 23:50:32

칼라치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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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치 전투
러시아어: Сражение у Калача-на-Дону
독일어: Kesselschlacht bei Kalatsch
영어: Battle of Kalach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청색 상황의 일부
파일:칼라치 전투.png
▲ 칼라치 서쪽에서 62군을 포위하고 돈강을 넘는 독일 제6군[1]
날짜
1942년 7월 25일 ~ 8월 11일
장소
돈강 서쪽 칼라치 일대
교전국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바실리 고르도프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키릴 모스칼렌코
(제1전차군 사령관)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바실리 추이코프
(제64군 사령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B 집단군 사령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제4항공함대 사령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헤르만 호트
(제4기갑군 사령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제6군 사령관)
결과
소련 1개 야전군 괴멸
영향
독일군의 돈강 동안 교두보 확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시작
병력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62군, 64군
병력 160,000명
포 2,200문
전차 400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6군
병력 270,000명
포 3,000문
전차 500대
피해 규모 포로 57,000명 전사 4,247명
실종 640명
부상 13,319명

1. 개요2. 1942년 8월의 남부 전선
2.1. 소련군2.2. 독일군
3. 전투 서열
3.1. 소련군3.2. 독일군
4. 전개
4.1. 전투 이전4.2. 피슈라이허 작전4.3. 4기갑군의 합류4.4. 칼라치 포위망
5. 결과6. 여담

[clearfix]

1. 개요

칼라치 전투는 보로네시 전투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이어지는 전역이다. 이전까지 4기갑군의 도움을 받지 못한 6군은 기동력이 빈약하여 소련군의 도주를 허용했지만 이 전투의 결과로 적의 전선을 무너뜨리고 돈강을 도하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할 수 있었다.

2. 1942년 8월의 남부 전선

2.1. 소련군

돈강 동안으로 밀려나버린 소련군은 스타브카에서 예비 야전군들을 급히 전선으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브란스크 전선군과 보로네시 전선군은 돈강 동안을 지켰고 보로네시 전선군 좌익은 북쪽부터 남서 전선군을 재편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2], 크림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을 흡수한 북캅카스 전선군[3], 이란에 있다가 올라온 트랜스캅카스 전선군[4]이 담당했다.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2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날려버리고 보로네시 전투에서 또다시 절반의 병력을 손실한 소련군은 급조한 소총사단들의 평균 인력이 4,000명이 안 될 정도로 전력이 빈약한 상황이었다.[5]

2.2. 독일군

청색 상황이 발령되고 1단계[6]보로네시 전투를 치른 독일군은 다음 2단계[7]와 3단계[8]를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진행되고 있던 2,3단계는 건너뛰고 원 계획에는 없었던 4단계 계획이 새로 생겼다. 할더는 상대가 전력을 유지하면서 후퇴하고 있으므로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에 반대했지만[9] 히틀러는 적이 이미 붕괴했다고 판단했기에 제2차 로스토프 전투를 통해 로스토프를 탈환한 A 집단군은 에델바이스 작전(Unternehmen Edelweiß)을 개시하여 코카서스로, B 집단군은 피슈라이허 작전(Unternehmen Fischreiher)을 개시하여 돈강을 따라 스탈린그라드로 진군하게 된다. 그리고 B 집단군 소속이었던 4기갑군은 6군만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4기갑군을 남쪽으로 돌려버린다.

그 결과, 독일군은 안 그래도 전력이 분산된 상태에서 보급마저도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이게 왜 보급에 영향을 줬는지 파악하려면 남부 전선의 철도 현황을 파악해야한다. 독일과 소련 모두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보급을 위한 유의미한 차량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에[10] 철도가 보급의 생명줄이었기 때문이다. 청색 상황 시작 당시 남부 전선에서 독일군은 서쪽에서 오는 철도가 하리코프, 쿠르스크, 스탈리노 3곳에 있었다. 북쪽의 철도는 쿠르스크를 거쳐 보로네시를 지나 스탈린그라드로 이어졌다.[11] 하리코프에는 동쪽으로 가는 철도가 없었고 남북으로 이어지는 철도만 있었는데 이 철도는 오룔에서 쿠르스크를 지나 로스토프로 이어졌다. 남쪽의 철도는 두갈래였는데 하나는 스탈리노를 지나 서쪽 보로실로프그라드와 밀레로보를 거쳐 스탈린그라드로 향했고 하나는 남쪽 로스토프로 향한 뒤 거기서 철도가 갈라져 캅카스로 향하는 철도와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철도로 나뉘었다. 문제는 로스토프-스탈린그라드 철도와 스탈리노-스탈린그라드 철도는 중간에 만나는 하나의 철도였다는 것이다.

결국, A, B집단군이 사용할 수 있는 철도는 하리코프/스탈리노-로스토프로 이어지는 철도 1개뿐이었으며 이 철도를 가지고 4기갑군, 6군, 1기갑군과 17군이 동시에 진격하면서 루마니아 3,4군과 이탈리아 8군도 수송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게 해결되려면 쿠르스크-보로네시 철도에서 중간에 갈라져 밀레로보로 이어지는 철도 혹은 하리코프-로스토프 사이에서 밀레로보로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되어야 했는데[12] 당연히 당장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심지어 이 철도가 개통되도 집단군 당 철도 하나라 보급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독일군도 이를 알았기에 작전 수립 시 3단계로 순서를 나눈 것이었지만 히틀러는 적이 이미 붕괴했기에 대규모 전투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동시에 진행하기로 밀어붙인 것이다. 게다가 4기갑군을 남쪽으로 이동시키면서 의미 없는 연료 소모가 추가로 발생해버렸다.[13]

3. 전투 서열

3.1. 소련군[14]

  •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 사령관 : 바실리 고르도프 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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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독일군[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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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개

4.1. 전투 이전

칼라치는 스탈린그라드 서쪽 약 75km 떨어진 곳으로 여기에는 돈강을 건널 다리가 있었다.[23] 칼라치 서쪽 교두보는 소련군에게 돈강 서안에 남은 유일한 거점이었다. 이 지역은 강을 빼면 광활한 초원 지대라서 여기를 뺏기면 독일군이 도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스탈린그라드까지 방어 거점이 전무했다.

스타브카는 전략 예비대에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으로 62군[24], 63군[25], 64군[26]을 투입했고 해체된 남부 전선군의 일부[27]와 남서 전선군의 잔존 병력인 21군과 8항공군을 투입했다. 이후 28군과 38군은 1전차군과 4전차군에 흡수됐다.

소련군은 A 집단군을 막을 전력이 없으므로 6군을 막는데 집중했다. 63군과 21군은 돈강 북쪽을 방어하고 있었고 칼라치 북서쪽을 담당하고 있던 것은 소련 62군이었다. 62군은 전선에 6개 소총사단을 배치하고 1개 소총사단, 1개 전차여단, 6개 독립전차대대를 예비로 보유중이었다. 62군 우익, 돈강 너머에는 63군이 있었고 좌익에는 64군이 2개 소총사단과 1개 전차여단을 보유중이었다. 6군 전면에 배치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62군, 64군과 근처 부대들은 160,000명의 병력과 2,200문의 포, 400대의 전차를 보유중이었으나 대전차포와 대공포가 매우 부족했다.

파울루스의 6군은 공세 시점에서 270,000명의 병력을 보유 중이었다. 6군은 좌익을 보호해줄 루마니아 3군이 도착하려면 멀었으므로 방어 병력을 두면서 진군해야했다. 7월 23일, 파울루스는 피슈라이허 작전을 시작하며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했다.[28] 토스토프를 탈환한 이후 스탈린그라드에 큰 관심을 보이던 히틀러는 24기갑군단을 4기갑군에서 6군으로 배속시켰다. 무엇보다 돈강 동쪽에는 딱히 전략적 목표라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년과 마찬가지로 전술적 포위를 통한 전략적 승리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탈린그라드는 매력적인 목표였다. 히틀러는 보로네시 전투와 제2차 로스토프 전투로 돈강 유역의 소련군이 붕괴됐다고 생각했으나 독일군은 칼라치 인근에서 예상치 못한 적의 강한 저항을 만나게 된다. 독일군은 북쪽부터 8군단, 14기갑군단, 51군단, 24기갑군단[29]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후방에 OKH 예비인 11군단도 보유하고 있었다.

4.2. 피슈라이허 작전

파일:1942년 7월 말 돈강 전선.gif
7월 23일 ~ 7월 31일의 전선[30][31]
7월 23일, 북쪽에서 8군단과 14기갑군단은 62군의 우익에 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의 저항은 강력했다. 16기갑사단은 200대가 넘는 소련 전차의 반격을 받았다. 독일군의 보고에 따르면 그 중 40대가 파괴됐다. 이어서 14기갑군단은 3개 소총사단[32]과 1개 전차여단[33]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24일, 16기갑군단과 113보병사단은 계속해서 62군의 우익으로 파고들었다. 그 날 저녁이 되자, 8군단은 돈강까지 진출했다. 25일, 스타브카는 전선이 붕괴될 위기에 쳐하자 바실렙스키를 파견했다. 바실렙스키와 고르도프는 1전차군과 4전차군으로 반격을 할 생각이었다. 남쪽에서는 64군이 밀리면서도 51군단과 11군단을 어렵게 막아내고 있었다. 독일군은 51군단이 24기갑사단의 지원과 함께 진군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문제는 보급이었다. 연료 부족으로 전과확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24기갑사단은 62군과 64군 사이로 파고들어 두 야전군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28일, 소련 21군은 북쪽 돈강 너머에서, 4전차군은 22전차군단을 앞세워 북동쪽에서 8군단을 향해 반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은 6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62군이 포위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남쪽에서는 13전차군단과 28전차군단을 보유한 1전차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이 반격의 목표는 14기갑군단의 선봉을 포위 섬멸하여 포위된 62군의 사단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두 전차군은 완편되지 못한 상태로 1전차군은 대략 160대, 4전차군은 80대의 전차를 보유중이었다.[34] 그러나 북쪽에서 8군단의 113보병사단은 소련군을 막아냈으며 100엽병사단은 16기갑사단과의 연결을 유지했다. 독일군의 384보병사단과 이탈리아 제3신속사단을 추가로 투입했다.

휘하 부대들의 개별적인 전투, 미숙한 지휘가 겹쳐 7월 말이 되자 두 전차군은 사실상 괴멸당했다.[35]

4.3. 4기갑군의 합류

6군만으로 돈강을 건너는 것이 힘들다는 B집단군의 보고에 따라 7월 30일, 잠시 A집단군에 배속되었던 4기갑군이 다시 B기갑군으로 이동했고 로스토프에 있던 4기갑군은 방향을 북동쪽으로 돌려 스탈린그라드로 향했다.[36] 64군 좌익은 북캅카스 전선군의 51군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간극이 매우 넓어 소련군도 우려하고 있었으며 4기갑군은 이 틈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문제는 연료가 없어서 8월 1일이 되자 48기갑군단의 14기갑사단만 간신히 진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2일에 노보로시스크(Novorossiysk)-스탈린그라드 철도가 있는 코텔니코보(Kotelnikovo)를 점령했고 4일에는 철도를 따라 진격해 압가네로보(Abganerovo)에 도달했다. 소련군은 북쪽에서 13전차군단과 254전차여단을 차출해 방어선을 구축했고 48기갑군단은 연료 보충을 위해 또다시 멈춰야했다. 이후 2주간 이 근방을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는 칼라치를 방어하고 있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좌익을 크게 위협했다.

4.4. 칼라치 포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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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42년 8월 7일과 8일의 칼라치 전선.png
파일:1942년 8월 9일과 10일의 칼라치 전선.png
8월 7일과 8일의 독일군 공세 8월 9일과 10일의 전선 }}}
8월 3일이 되자 밀레로보까지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됐고 독일군의 보급은 조금이나마 사정이 나아졌다. 8월 4일, 6군은 드디어 기동전력으로 포위망을 형성할 만한 연료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 시점에서 남쪽의 4기갑군은 좌익의 48기갑군단이 64군과 51군 사이를 갈라 놓고 있었다. 파울루스는 8일에 공세를 재개하려 했으나 히틀러가 재촉한 탓에 일정을 앞당겨야했다. 6일에 탄약 보유량도 어느정도 충분해지자 7일 새벽, 독일군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의 8항공군단의 지원과 함께 14기갑군단[37]은 북쪽에서, 24기갑군단[38]은 남쪽에서 적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8군단은 북동쪽으로 진군하며 군의 좌익을 보호했다. 8일, 두 군단이 칼라치 서쪽에서 만나면서 62군과 1전차군 휘하 7개 소총사단, 2개 차량화소총여단, 7개 전차여단 약 45,000~50,000명이 포위당했다.[39] 이어 51군단이 포위망에 도착했고 11일까지 소련군의 저항은 분쇄됐다. 독일 측 기록으로는 전투 기간동안 소련군은 750문의 포와 605기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북쪽에서는 11군단과 8군단이 22기갑사단의 지원을 받아 소련군의 반격을 모조리 물리쳤고 24기갑군단은 소련군을 강 너머로 몰아냈다. 당시 병력이 부족했던 소련군에게는 이 정도도 큰 손실이었으며 돈강 서쪽 교두보가 사라지면서 칼라치는 독일군에게 넘어갔고 이어서 독일군이 돈강을 도하했다. 스타브카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8월 1일부터 20일까지 15개 소총사단과 3개 전차군단을 추가로 증원했다. 항공전에서도 독일이 압승을 거뒀다. 스타브카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으로 근위 부대들을 포함한 10개 항공연대를 증원했으나 8항공군단은 8항공군을 상대하며 수적 열세에도 아군이 공세를 펼칠 때 제공권을 압도적으로 장악했으며 빈약한 전선으로 공격해 오는 적의 반격을 막을 때도 큰 공헌을 했다. 후방의 9대공포사단과 좌익의 4항공군단 역시 약한 전력으로 2항공군의 공세를 대부분 막아냈다.

5. 결과

독일군은 소련의 야전군 1개를 포위, 섬멸하고 8월 23일, 독일군은 돈강을 건넜고 스탈린그라드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소련군은 독일군의 연료 부족 덕분에 소중한 2주를 벌 수 있었다. 게다가 전투 끝나고도 연료가 없어 또다시 2주가 지나서야 독일군이 돈 강을 건넜으니 거의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독일군은 이제 스탈린그라드까지 밀고 나갈 돈강 서안 교두보를 확보했다. 6군은 스탈린그라드로, 4기갑군은 우익에서 볼가강 연안으로 나아갔으며 돈강 연안은 보로네시부터 스탈린그라드까지 헝가리 2군, 이탈리아 8군, 루마니아 3군이 담당하게 됐다.

소련군은 이제 볼가강까지 적을 막을 수 있는 방어라인이 없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적을 막아야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돈강 북쪽으로 밀려나서 돈 전선군으로 개편[40]되었고 로코솝스키가 사령관직을 맡았다. 북쪽에서는 바투틴의 남서 전선군이 스타브카의 예비군을 근간으로 보로네시 전선군과 돈 전선군 사이에 새로 편성되었다.[41] 돈 전선군 좌익의 남동 전선군[42]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으로 개칭[43][44]되면서 사령관 예료멘코는 도시에서 독일군을 반드시 막아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6. 여담

  • 소련군은 퇴각만 한 것이 아니었다. 8월 20일부터 28일까지 63군과 21군은 크레멘스카야에서 돈강을 도하해 이탈리아 8군을 몰아내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방면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다시 강 건너편으로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탈리아 8군 지역의 2개 교두보와 헝가리 2군 지역의 교두보 2개는 나중에 소련군의 대반격에서 소련군 공세의 시작점 중 하나가 되었다.


[1] 지도 왼쪽 전선은 '>'모양으로 돈강(Дон)에 걸쳐 있으며 지도 한가운데 칼라치(Калач)가 있다. 오른쪽 굵은 파란선이 볼가강(Волга)이고 볼가강이 꺽이는 지점, 소련군이 모여있는 곳이 스탈린그라드(Сталингра́д)이다.[2] 7월 12일 개칭[3] 5월 20일에 크림 전선군에서 북캅카스 전선군으로 개칭, 7월 28일에 남부 전선군 흡수[4] 페르시아 침공 당시 소련군 주력이었다.[5] 개전 직전 소총사단의 정원은 12,000명정도였으며 42년 7월에는 정원이 10,000정도였다. 즉 이름만 사단이고 증강된 1개 연대급이었으며 이 시기 남부집단군의 독일군 보병사단들은 정원이 17,000명 수준이었고 북부와 중부 집단군의 사단들의 편제를 줄여가면서 병력을 차출했기 때문에 대부분 완편된 상태였다.[6] Blau I, 브라운슈바이크 작전, 쿠르스크에서 출발한 바익스 군집단이 전방의 적을 포위 및 섬멸하고 보로네시를 점령하여 진격로의 좌익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7] Blau II, 클라우제비츠 작전, 6군이 하리코프에서 출발해 돈강을 따라 진격하여 스탈린그라드와 볼가강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8] Blau III, 댐프시해머 작전, 루오프 군집단과 1기갑군이 스탈리노에서 출발해 로스토프를 거쳐 캅카스 유전지대를 차지하는 것이 목표[9] 이 때문에 9월 24일, 너무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할더는 해임당했고 후임 육군참모총장은 2계급 특진한 쿠르트 차이츨러 보병대장이 맡게 된다.[10] 소련군은 렌드리스로 받은 차량이 많긴 하나 전선에도 투입해야 하며 소련군 특성상 정비부대를 비롯한 후방부대가 매우 부실하여 수거하여 수리하는 비율이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주요 보급은 철도를 이용해야했다.[11] 이 때문에 독일군이 보로네시를 점령하여 이 철도를 차단하려 했던 것이다. 참고로 보로네시는 교통의 중심지인 만큼 철도가 북쪽으로는 모스크바, 남쪽으로는 로스토프, 서쪽으로는 쿠르스크, 동쪽으로는 스탈린그라드로 이어진다.[12] 여기서 말하는 철도들은 다 기존에 존재하던 것들이다. 다만, 적이 부수고 간데다가 규격이 달라 개통을 다시해야 사용이 가능했다.[13] 결과적으로 전력을 분산시켜놓고 각각의 전력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러면 분산 시키지 않았어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거니깐 의미 없는 가정 아니냐 할 수도 있는데 분산을 안 했다면 일단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보급 사정이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또한 전력을 분산한 결과 돈강 전선을 채우지 못해 동맹국 군대가 담당해야했으며 스탈린그라드 남쪽 평원지대도 전선이 너무 넓어 빈 지역이 많았다.[14] 8월 1일 기준[15] 7월 23일에 38군으로부터 재편[16] 7월 22일에 28군에서 개칭[17] 9월 5일부터 안톤 로파틴 소장[18] 8월 5일 기준[19] 전투에는 6군만 참여[20] 북쪽에서 돈강을 따라 배치된 B 집단군의 좌익 지원[21] 남쪽에서 캅카스로 진군하는 A 집단군 지원[22] 중앙에서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6군 지원[23] 보로네시로스토프가 요충지인 이유도 돈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리가 있다는 것은 그곳이 도로와 철로가 지나는 교충의 요충지라는 이야기다.[24] 스타브카 예비인 제7예비군으로부터 편성[25] 스타브카 예비인 제2예비군으로부터 편성[26] 스타브카 예비인 제1예비군으로부터 편성[27] 나머지는 북캅카스 전선군이 되었다.[28] 원 계획대로 스탈란그라드를 우회하여 무력화시키는 것은 6군의 전력만으로는 무리였다.[29] 작전 개시 직전인 22일, 4기갑군에서 차출[30] A는 야전군, TA는 전차군, TK는 전차군단/기갑군단, nд는 보병사단, cд는 소총사단이다.[31] 좀 더 자세한 현황은 http://www.armchairgeneral.com/rkkaww2/maps/1942SW/Stalingrad/battle_volgadmin_ru/04.HTM참고. 굵은 파란 선이 돈강이고 1전차군 사령부가 있는 곳이 칼라치이다. 소련군의 경우, A는 야전군 TA는 전차군, mK는 전차군단, cƏ는 소총사단, mбр는 전차여단이고 독일군은 mK는 기갑군단, AK는 보병군단, nƏ는 보병사단, mƏ는 기갑사단, MƏ는 차량화보병사단이다.[32] 33근위,192,184[33] 40[34] 그 중 절반 정도가 T-34-76, KV-1 전차였다.[35] 이 때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10월에 4전차군은 65군으로 재편되는데 파벨 바토프의 당시 회고에 따르면 4전차군은 전차 4대인 야전군이라는 조롱을 들었다고 한다.[36] 결국 4기갑군을 남쪽으로 이동시킨건 의미가 없어져버렸다.[37] 가동전차 191대[38] 가동전차 151대[39] 독일 측 기록으로는 52,000명[40] 9월 30일 개칭, 나중에 스탈린그라드 도심 포위를 담당했고 6군의 항복 이후에는 중부 전선군이 되어 쿠르스크 북쪽으로 이동한다.[41] 10월 25일 편성[42] 8월 7일,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좌익으로 편성[43] 9월 30일 개칭[44] 칼리치 전투를 치렀고 이후 돈 전선군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과 남동 전선군에서 이름이 바뀌고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치르게 되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이름만 같을 뿐 휘하부대와 사령관이 전부 다른 사실상 다른 부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