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5:14:14

바실리 추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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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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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5대 지상군 총사령관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уйко́в
Vasily Ivanovich Chuikov
파일:바실리 추이코프 원수.jpg
출생 1900년 2월 12일
러시아 제국 툴라현 베뇨프구 세레브라디예 프루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주 세례브라디예 프루디구 세례브라디예 프루디)
사망 1982년 3월 18일 (향년 82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마마예프 쿠르간
재임기간 제5대 지상군 총사령관
1960년 ~ 1964년 6월
서명 파일:바실리 추이코프 서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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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이반 이바노비치 추이코프
어머니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추이코바[1]
배우자 발렌티나 페트로브나 추이코바
자녀 아들 알렉산드르[2]
딸 니넬, 이리나
복무 노농적군
1918년 ~ 1946년
소비에트 지상군
1946년 ~ 1972년
최종 계급 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주요 보직 지상군 총사령관
주요 참전 겨울전쟁
폴란드 침공
스탈린그라드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전투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9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3회)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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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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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맹활약한 소련 육군의 지휘관. 최종 계급은 원수.[3]

일반인에게는 독소전쟁명장 게오르기 주코프, 유능한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보다는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분전한 소련군 지휘관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 후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전투에도 참가해 큰 전공을 세운 유능한 장군.

사진에서도 드러나는 강한 인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매우 불같은 성격을 지닌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 타입의 장군이었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900년 모스크바 남부 세레브라녜 프루디(Serebryanye Prudy)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고, 1918년 4월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1918-1920년에는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지휘하는 제5군의 일원으로 적백내전에 참전했고, 여기서 맹활약한 공로로 적기훈장을 받는 등 군공을 쌓으면서 20세의 나이로 연대장까지 승진했다. 1921~25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고급 장교 교육을 받았고, 1936년에는 기계화학교에 들어가 기갑 전술을 배웠다.

2.2. 제2차 세계 대전

2.2.1. 폴란드 침공겨울전쟁

이후 기계화여단장으로 승진했고, 1939년 9월 17일에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의 벨라루스 전선군 휘하 제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폴란드 침공에 참가하였다. 동년 11월에 벌어진 겨울전쟁에도 제9군을 이끌었으나 패배하였다. 겨울전쟁 종전 후 1940년부터 1942년 3월까지는 중일전쟁이 벌어지던 중국에 파견되어 장제스 휘하 중국 국민당군의 군사 고문을 맡았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중국에 있었지만, 1942년 5월에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2.2.2. 독소전쟁

2.2.2.1. 스탈린그라드 전투
파일:external/media-cache-ak0.pinimg.com/251f2c0838d895a7c649dc679ae4c79b.jpg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의 모습
이후 소련으로 돌아오자마자 1942년 5월부터 제1예비군사령관이 되었다. 이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제64군으로 개칭되어 투입되었는데,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이었던 안드레이 예료멘코는 8월에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수비하게 된 제62군 사령관 안톤 로파틴이 예료멘코와의 대화에서 너무 패배주의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해임하고 그 자리에 추이코프를 앉혔다.

스탈린그라드루프트바페의 무차별 공습에 의해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수많은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으나, 역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독일 기갑 부대의 진격을 저지하고 소련군에게 엄폐물을 제공하는 호재로 돌아오기도 했다. 추이코프는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장기인 제병협동의 화력과 공중 지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포병의 지원 하에 독일군에 바싹 붙어 공격하는 근접 전술[4]을 펼쳤다. 독일군의 장기인 제병협동이 이 전술 앞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했는데, 아군 가까이 붙은 소련군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다가는 팀킬이 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이 전술은 좁은 구역에서 진행되는 시가전에서 적은 병력으로 독일 국방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으나, 소련군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에 11월 초에는 거의 볼가 강 유역까지 밀려났다. 하지만 추이코프의 부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독일군을 물고 늘어진 덕에,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
파일:Командный_пункт_62-й_армии_начальник_штаба_Н.И._Крылов,_В.И._Чуйков,_К.А._Гуров,_А.И._Родимцев._Декабрь_1942_г.jpg
작전을 구상 중인 모습[5][6][7]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ujkov.jpg
전투 당시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8]
이렇게 추이코프가 독일군의 주의를 끌며 사투를 벌이는 동안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 총군부사령, 니콜라이 바투틴 남서전선군 사령관은 스탈린그라드 양익에 은밀하게 병력을 집중시켰다가 총공격을 퍼붓고, 시내에 못박힌 독일 제6군을 포위해 전멸시키는 일명 '천왕성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적으로 추이코프는 상장[9]으로 진급했다,
2.2.2.2. 바그라티온 작전베를린 전투
이후 추이코프는 제8근위군으로 개편된 제62군을 종전 때까지 계속 지휘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성과에서 보듯이 추이코프는 시가전에도 능했지만, 원래 전공인 기동전에도 능해서 1944년의 바그라티온 작전 때는 벨로루시에서 폴란드까지 하루에 100km 이상을 전진한 적도 있었다.[10] 작전의 성공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파일:external/tarnmoor.files.wordpress.com/chuikovpoints.jpg
작전을 설명하는 모습[11]
베를린 전투 때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로루시전선군에 소속되어 베를린 공략의 주공을 맡았다. 경쟁자인 이반 코네프보다 먼저 베를린을 점령하려던 주코프의 우격다짐 때문에 젤로 고지 전투에서는 삽질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베를린으로 먼저 진입해 베를린 방어 총사령관 헬무트 바이틀링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2.3. 전후

종전 후에는 주코프와 바실리 소콜롭스키 원수 휘하에서 독일 주둔 소련점령군집단 부사령관으로 근무했고, 1948년에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듬해 4월에 소콜롭스키의 후임으로 독일 주둔 소련점령군집단사령관이 되어 1953년까지 재임했고,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소련으로 돌아와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맡았다. 1955년에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했고, 1956년 2월, 20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을, 1961년부터 1972년까지는 소련 시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은 뒤 은퇴했다. 1961년 10월, 소련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이후 죽을 때까지 중앙위원으로 재직했다. 은퇴 후에는 명예직인 국방부 총감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 들어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적백내전 당시 왼팔에 입은 상처가 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이코프는 이 부상 때문에 평생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용맹한 군인으로서 얻은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치료를 거부하고 내버려 두었다. 결국 이 상처는 1981년에 패혈증으로 악화되었고, 9개월 동안 투병하다가 모스크바에서 82세로 세상을 떠났다.[1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alingrad_graf_Tsjoeikov.jpg
볼고그라드에 위치한 추이코프의 묘비
이전의 다른 소련 원수들은 사망 후 대부분 크렘린 벽 묘지나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지만, 추이코프는 볼고그라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관인 마마예프 쿠르간에 묻혔다.

3. 평가

부대를 지휘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확실히 병사들을 전투에 임하게 하는 법을 아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단점도 과감하게 극복했다.
로디온 말리놉스키
말보다는 행동으로 그의 뜻을 증명하는 인물이었다.
니콜라이 크릴로프
추이코프 동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존경하게 됐다. 살짝 무례한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전투에 있어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추이코프 동지가 전투력 공급원 그 자체였다. 그의 불 같은 성격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열정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미하일 카투코프

4. 진급 이력

5. 기타

  • 게오르기 주코프와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매우 나빴고, 주코프의 회고록에서는 자신의 전선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에도 추이코프의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상술한 안톤 로파틴 중장이 찌질이 같이 행동했다는 것은 예료멘코와 추이코프의 주장인데, 반대로 주코프는 로파틴이 정비 태세를 잘 갖춰 놨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가 로파틴 덕분이라고 자기 회고록에 기록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
  • 조급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은 전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지상군 총사령관 시절이었던 1961년, 영국이 헝가리 혁명에서 확보한 T-54를 시험해보고 T-54의 100mm 포를 막을 수 있도록 더 두꺼운 장갑과 T-54를 관통하는데 충분한 105mm 강선포를 개발하여 센츄리온 전차에 장착했고 이보다 더 강력한 치프틴용 120mm 강선포도 개발했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여전히 지지부진했던 신형 전차[13] 개발 상태를 보고 빡친 나머지 양산이 예정되었던 저 신형 전차를 기존 T-55보다 고작 10% 강할 뿐인 쓰레기라고 비하하면서 양산을 취소해버리고 일종의 실험용 및 보험용 전차로 완성되어 있던 T-62와 T-62A를 대신 양산하라고 지시한 에피소드도 있다. 이 때 "포신안정장치 그딴 소리 집어치워! 돼지 위에 얹어놓고 그걸 전차라고 우겨도 상관없으니까 당장 115밀리 포 전차를 내놔!"라고 하며 그냥 T-62를 양산시켰다. 포에 돼지를 올려 놓기는 했다 당시 개발 감독관인 오쿠니에프는 결국 모스크바로 불려가서 높으신 분들에게 '친절하고 깊이 있는 설득'을 받고 신형 전차를 개발하게 된다. T-62 문서 참조.
  • 중일전쟁 중에 중화민국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적이 있는데 이 때문인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한다.

6. 매체에서

파일:external/vignette2.wikia.nocookie.net/Chuikov.jpg
실제와 다르게 너무 순해진 것 같다
General Krebs vs Marshall Chuikov General Map Pointer... 어?!
  • 배경이 베를린 전투인 영화 다운폴에도 잠깐 등장한다. 상당히 골때리는 실화가 영화에서도 재현됐는데, 휴전 교섭을 하려고 자신의 사령부에 찾아온 독일군 육군참모총장 한스 크렙스와 갑작스럽게 회견하게 되자, 유일한 민간인이라 교섭에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 마트베이 블란테르[14]를 옷장에 쑤셔박는 장면(위 영상 45초부터 등장)이 일품이다. 블란테르는 교섭 도중 결국 졸도하여 옷장 밖으로 쓰러졌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교섭을 계속했다고 한다. 또한 하필 고급 참모와 지휘관들이 죄다 나가 있고 그의 방에는 해군 소령과 육군 소위만 있었기 때문에, 크렙스를 들여보내기 전 장교들에게 훈장을 하나씩 더 달도록 해 최대한 높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해 얕잡아 보이지 않게 했다. 하지만 추이코프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죽었다는 소식에 놀라는 등 어리버리한 신출내기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포인트다. 또한 크렙스는 소련에서 10년 이상을 외교관으로 보냈기에 당연히 장교들의 계급장[15]을 알고 있었으므로[16] 처음부터 헛수고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필수요소에 등극했다. 기믹은 무엇이든지 집어넣는 만능 옷장의 소유자(...).
  • 1949년에 만들어진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부터 베를린 전투까지 가장 비중 있는 장성으로 등장한다. 마지막에 스탈린이 함락된 베를린에 올 때 이를 영접하는 이도 추이코프고, 스탈린은 "추이코프 동지 수고했소"라고 답례한다. 원래대로라면 주코프가 가장 부각되어야 할 장성이었지만, 주코프는 영화 제작 당시 지나친 자만심 때문에 스탈린의 미움을 받아 후방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된 상태였으므로 추이코프를 대신 띄워준 것으로 보인다.[17]
  • 스타트렉에 나오는 엔터프라이즈 호의 승무원 파벨 체코프는 추이코프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7. 주요 서훈



[1] 혼전성은 카랴키나(Карякина).[2] 조각가.[3] 전쟁 중에 진급한 것은 아니고, 1955년에 진급했다.[4] 추이코프는 이를 '적 껴안기(Hugging the enemy)'라고 불렀다.[5] 오른쪽부터 제13근위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로딤체프 소장, 정치장교 쿠즈마 구로프 중장, 추이코프 중장, 참모장 니콜라이 크릴로프 소장[6] 구로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 티푸스에 걸려 병사했다. 티푸스가 당시 그 일대에서 유행하면서 소련군과 추축군 포로를 가리지 않고 격전으로 심신이 지친 군인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독일군 포로 9만 명 중 종전 후 5천여 명만 귀환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전염병 탓이다. 어쨌든 구로프는 지휘권에 간섭하지 않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제62군의 사기를 계속 유지시켜 정치장교로서 이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7] 추이코프는 신경성 습진 때문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8] 별이 3개지만 계급은 중장이다. 장성용 카라 한정 기본 1성 카라장에 별 2개를 박기 때문.[9] 서방군 계급 기준으로는 중장에 해당한다.[10] 그러나 1943년 7월에 있었던 사상 최대의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도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2군이 너무 소모되어 그 때까지도 병력과 물자 보충 등 개편 작업이 덜 끝난 듯하다.[11] 상장 계급장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획득 시 주어지는 금성메달을 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바그라티온 작전 후의 사진으로 보인다.[12] 다만 추이코프의 활약을 기린 서적을 인용한 영문위키에 따르면 추이코프는 적백내전 때 4번의 부상을 입었으며, 특히 1920년 폴란드에서 왼팔에 박힌 파편이 패혈증을 유발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 파편은 수술로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면 대안으로 팔을 자를 수 있었을 것이고, 추이코프가 이를 거부했을 수는 있다.[13] Object 430. 부족한 성능과 늦은 개발로 양산이 취소되고 자동장전장치와 함께 주포의 화력과 방어력이 더 증가된 Object 432 및 Object 434 개발안으로 변경되어 T-64로 양산된다.[14] 그 유명한 카츄샤의 작곡가다.[15] 추이코프가 식탁에 앉은 후 썸네일 기준, 왼쪽은 육군 소위이고 오른쪽은 해군 소령이다.[16] 단, 이들의 계급장은 개전 직후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전을 기념해 1943년부터 개정된 복제의 일환이라, 크렙스가 소련 시절에 근무할 때 본 계급장들과는 다르다.[17] 다만 주코프도 영화 1부에서 바실렙스키와 함께 스탈린과 작전 회의를 하는 스타브카의 수뇌부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홀대받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