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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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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투하쳅스키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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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4대 노농적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쳅스키 Михаи́л Тухаче́вский | Mikhail Tukhachevsky | |||
본명 |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Тухаче́вский Mikhail Nikolayevich Tukhachevsky | ||
출생 | 1893년 2월 16일 | ||
러시아 제국 스몰렌스크현 도고로부시구 알렉산드롭스코예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스몰렌스크주 사포노보군 슬레드네보) | |||
사망 | 1937년 6월 12일 (향년 44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돈스코이 묘지 | ||
재임기간 | 제4대 노농적군 사령관 | ||
1925년 11월 ~ 1928년 5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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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르 누나 엘리자베타, 올가, 마리아 여동생 소피아, 나탈리아[1] | ||
배우자 |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이그나티예바 (사별) 니나 예브게니예브나 투하쳅스카야 (재혼) | ||
자녀 | 장녀 스베틀라나 투하쳅스카야 (1922년 ~) 차녀 이리나 투하쳅스카야 | ||
종교 | 슬라브 신이교 | ||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 ||
복무 | 러시아 제국 육군 | ||
1914년 ~ 1917년 | |||
노농적군 | |||
1922년 ~ 1937년 | |||
최종 계급 | 중위 (러시아 제국 육군) 원수 (노농적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
주요 서훈 | 적기훈장 1회 레닌훈장 1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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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이자 소련군 원수. 제1차 세계 대전에는 러시아 제국 장교로, 러시아 내전에는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이후 소련군의 현대화를 추진하다가 대숙청 때 처형당했다.2. 생애
1905년 투하쳅스키 가족의 사진. 오른쪽에 웃고있는 아이가 12살의 투하쳅스키다. |
탈출 후 1917년 9월 스위스에서 찍은 사진. |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혁명으로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공화국 임시정부가 들어섰으나 러시아군은 거의 해체상태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여 인심을 잃었다. 이를 틈타 1917년 10월(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 볼셰비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를 세웠다(10월 혁명). 그렇지만 각지에서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반혁명군이 일어났고, 공산정부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그동안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분리독립을 시도한 소수민족들과 이들을 진압하려는 공산정부 간의 전쟁도 벌어졌고, 협상국은 독일과 단독강화를 맺으려던 공산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무장개입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내전.
내전 당시 사진. 뾰족모자는 세묜 부됸니의 이름을 따서 부됸노프카라고 불리며 초창기 붉은 군대의 상징과 같은 모자다. 후에 보온 성능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해 우샨카로 대체되었다. |
다른 귀족 출신 장교들은 대체로 반혁명군을 지지했으나, 투하쳅스키는 의외로 공산정부를 지지하여 볼셰비키당에 가입했고, 곧 붉은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초창기에 붉은 군대는 정규군사교육을 받은 자가 드물었고,[2] 그래서 그는 24세의 나이로 군단장급의 사령관이 되었다.[3] 투하쳅스키는 모스크바 방위사령관, 제5군 사령관을 차례로 맡아 드넓은 러시아를 누비며 각지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 공적으로 붉은 군대의 최고위급에 올랐다. 이때 그의 활약이 눈부셔서 이후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사이가 나빴던 이오시프 스탈린조차도 그를 "작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렀을 정도.[4]
1920년 4월 말에는 폴란드 전선의 주력인 서부전선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군을 몰아냈다. 이후 투하쳅스키는 폴란드군을 수도 바르샤바까지 밀어붙였다. 그렇지만 쾌진격을 거듭하다 공세종말점을 넘어선 붉은 군대는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군에게 취약한 남측방을 강타당한 뒤 포위섬멸됐고, 이때 패배의 원인을 둘러싸고 정치장교인 스탈린과 사이가 엄청나게 나빠졌다. 이 점이 후에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사실 바르샤바 전투의 대패는 전선 한참 후방의 민스크에 눌러앉은 채 비현실적인 낙관론에 취해 바르샤바 공격을 밀어붙인 투하쳅스키의 지휘책임이라는 게 오늘날의 평가다. 투하쳅스키는 폴란드로 완벽하게 기운 전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번 더 공세를 계획했다가 네만 강 전투에서 서부전선군의 잔여병력마저 날려먹었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투하쳅스키는 붉은 군대의 총참모장이 되어 구태의연한 오합지졸의 의용군을 전문적인 직업장교 하의 현대적인 군대로 탈바꿈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전차를 비롯한 기갑부대와 공군을 육성하는데 큰 역점을 주었다. 더불어 그 주제와 관련된 여러 책을 써냈고, 이는 소련군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종심작전 이론도 이 당시 그와 붉은 군대의 여러 전략전술 전문가들이 창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급진적인 생각이 "붉은 군국주의"로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세묜 부됸니와 같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장교들의 반대를 받았기에 그는 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들이 그때까지도 기병을 고집하는 구태 장교라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는데, 그들도 기병이 시대에 뒤처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며 보로실로프는 최대한 군의 기계화를 지원했다. 투하쳅스키가 비판받은 점은 원수씩이나 되는 인물이 당시 소련의 국력으로는 불가능한 수만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그럼에도 군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똑같이 갖고 있었으며,[5] 당시 막 기지개를 펴던 소련의 중공업들은 우선적으로 현대식 무기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소련은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이 연합해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혁명 직후의 간섭전쟁(러시아 내전)처럼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경공업과 농업은 거의 팽개치고 중공업에만 집중 투자했다.
원수 시절 초창기의 초상화. |
스탈린주의 헌법에 찬성하기 위해 소련 공산당 제1차 전연방대회에 참석한 모습[6] |
1935년 반혁명적이라고 폐지되었던 계급이 붉은 군대에 도입되어 그는 원수가 되었고 이 해에 그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서유럽을 방문하는데, 이것이 훗날 망명 중인 반정부 러시아인들을 만났다는 혐의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새롭게 집권한 나치 독일의 정보기관들이 공작을 벌여 허위문서를 소련 정보기관에 흘러가게 해서 혐의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 음모론에 따르면, OKH는 독소전쟁을 준비하기에 앞서 소련의 군사 이론가들과 장성 대다수를 스탈린이 스스로 숙청시키게 만들어 군사적 능력을 크게 파괴하고자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미하일 투하쳅스키였다. 강경한 트로츠키 파벌임과 동시에 군사의 급진적 현대화와 거대화를 주장하며, 종심돌파이론같은 세련된 군사이론을 만들기까지 하는 투하쳅스키는 OKH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이면서 동시에 제거하기 쉬운 대상이었다. 독일은 투하쳅스키를 음해하는 각종 거짓 문서와 정보들을 소련 내로 흘려보냈고 스탈린도 이것들을 접했다. 원래부터 투하쳅스키를 고깝게 보던 스탈린은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음에도 이를 빌미로 투하쳅스키를 제거하고자 하였고, 결국 투하쳅스키는 '나치 독일의 스파이 및 군사적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명분으로 대숙청 때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독일 정보기관이 스탈린과 NKVD에 의해 이용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스탈린이 NKVD 요원인 니콜라이 스코블린에게 투하쳅스키와 비롯한 몇몇 장군들이 반소련 음모를 꾸민다는 정황을 독일측에 노출시키도록 명령했고 이에 얼씨구나하고 낚인 독일 정보기관이 만들어 뿌린 거짓 증거물들을 입수해 숙청의 빌미로 사용했다는 것.
1935년 11월 11일 촬영. |
그가 남긴 "종심전투교리" 이론은 반혁명적이라고 폐기되었으나, 독소전쟁 시기에 부활해 훗날 전쟁 후반 독일에 대한 반격작전의 교리가 되었다.
1957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후 그는 무죄로 복권되었다. 독일 측이 역공작으로 허위문서를 소련 정보기관에 흘러가게 해서 그에게 혐의가 씌워졌다는 설이 있으나,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문서를 보면 스탈린은 그 역공작 문서와는 관련없이 투하쳅스키를 숙청하려고 처음부터 작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평소에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숨기는 성격이 아니었던 탓에 몇 차례 스탈린과 충돌했는데 이 때문에 일찌감치 숙청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1936년에 그는 독일이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공격해올 것이고 그로 인해서 매우 오랫동안 큰 희생을 치르는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에 스탈린은 격노하여 "도대체 자네 지금 뭘 하자는 건가? 소련 정권을 위협하는 건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8]
1986년 사망하는 그날까지 스탈린에게 충성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투하쳅스키의 숙청에 대해 "문제가 있었다면 도대체 어느 쪽에서 시작된 것인가? 그는 위험한 사람이었고 나는 상황이 악화될 경우, 그가 과연 전적으로 우리 편이 될 것인가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는 우파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우익의 위험이 가장 중요한 위험 요소였다. 많은 우파들이 그 자신이 우파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파였다." 라고 평가했다.[9] 비록 귀족 출신이었지만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에 참전하였다는 점을 봤을 때 그가 정말 우파였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스탈린 시대의 "우파"는 당의 정치노선에 별 관심 없는 비정치적 군사 테크노크라트를 포함하는, 지금 보면 황당할 정도로 광범한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몰로토프의 "투하쳅스키 자신은 깨닫지 못했어도 그는 우파였다"는 회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스탈린은 계속해서 자신의 파벌이 아니면 온갖 누명을 씌워서 제거해왔고 나라가 무너져도 스탈린을 지지할 정도의 파벌이 아니면 같은 공산당원도 우파라 낙인찍는다고 증언한 것이다.
흐루쇼프 시절 완전히 복권되어 우표 도안의 모델이 된 투하쳅스키. |
한편 실질적으로 붉은 군대를 건설한 레프 트로츠키는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하였다.
3. 평가
최근에 투하쳅스키가 평범한 지휘관이며 그냥 가정법상에서나 능력이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지만,[10] 그의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것은 분명하다.붉은 군대 초기 반혁명군의 공격으로 전선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가 지휘관으로 우선적으로 투입되었으며, 전과를 놓고 봐도 폴란드와의 전쟁을 제외하면 대부분 승리했다. 게다가 내전 후반부에는 붉은 군대에도 전직 제정 러시아군 장성이나 영관급 인물들이 대거 입대하는데, 전쟁전 대위에 불과했던 그가 계속 사령관급으로 남아있었던 것은 유능하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전술가로서뿐만 아니라 군사이론가로도 뛰어났고, 세계 최초로 공수부대를 창안했다. 또한 그가 주장한 기갑부대와 공군 중시 정책, 로켓무기 개발 등은 선구적인 것으로서 실로 몇 년 앞을 내다본 혜안이었다. 그가 숙청된 후에도 그 뒤를 이은 세묜 티모셴코가 이를 계속 추진하여 후에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투하쳅스키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또한 금물인데, 투하쳅스키가 '선구적인 혜안'을 가지고 있는 이론가라더라도, 그의 혜안을 실제로 실현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당시 내전의 혼란에서 겨우 벗어난 상태의 가난한 2류국가였고 이 시점에서 소련의 공업력은 투하쳅스키의 선진적인 구상을 실현시키기엔 너무나도 부실했다. 예를 들어 투하쳅스키의 종심작전 교리의 핵심 중 하나는 탱크가 전선에 구멍을 내고 적군이 정신 못 차리는 와중에 재빨리 쏟아부을 수 있는 기계화되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보병인데 실제로 독소전쟁 중 소련군이 이 정도 수준에 달한 것은 1943년 이후 지프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규모 렌드리스와 소련 스스로의 군을 기계화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있은 후에야 가능했다.
그러나 독소전쟁 초반까지만 해도 소련이 막대한 기갑장비(성능은 차치하고서라도)를 보유하고 있다가 갈려나간 것을 본다면 투하쳅스키가 숙청되지 않았다면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이런 대규모 공업화를 통한 군의 기계화는 아이러니하게도 투하쳅스키를 숙청한 스탈린이 니콜라이 부하린같은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해 가며 밀어붙인 중공업우선 정책으로 가능해졌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투하쳅스키가 러시아 내전에서는 괜찮은 지휘관이었다 하더라도, 마지막 실전인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중요한 패배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된다. 전선 300마일 후방의 민스크에 앉아 있던 투하쳅스키는 신속한 바르샤바 점령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예비대도 없이 서부전선군 전 병력을 공세에 투입했다가 바르샤바 인근에서 취약한 남측방을 노출했고, 이를 놓치지 않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결정적인 역습을 가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때 주력부대 상당수가 포위섬멸당하면서 전투력이 거덜난 투하쳅스키 휘하의 서부전선군은 그 뒤로도 후방 전투근무지원부대까지 털리는 패퇴를 거듭하며 폴란드군에게 개전 초의 영광을 재현시켜주다가 결국 전쟁 자체가 소련의 패전으로 종결됐다. 혁신적인 이론가인 것과 우수한 지휘관인 것은 별개의 문제다.[11]
마치 삼국지의 곽가처럼 너무 빨리 죽어버렸기 때문에 평가도 엇갈리고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지적도 있는 인물.
4. 대중매체에서
- Hearts of Iron IV에서 소련군의 사령관으로 등장한다. 보병 장교와 공격적 교리, 무모함, 훌륭한 전략가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제법 훌륭한 지휘관이지만 스탈린 루트를 고르면 무조건 숙청당한다.[12] 무엇보다 호이 4에서 소련이 참전한 전장은 보통 전차와 항공기가 지배하는 전장이 되다 보니 게오르기 주코프에 비하면 애용이 덜한 편.
- 동맹국이 승리한 대체역사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 소비에트의 실패 이후 프랑스 코뮌의 망명자 장군으로 등장한다.
- 추축국이 승리한 대체역사 모드인 TNO에서는 서러시아 혁명전선에서 주코프와 함께 보로실로프 후계자 후보로 나온다. 적당한 군사 증강과 민생 경제의 증강, 협상을 통한 통일을 하려는 주코프와 달리 투하쳅스키는 극단적인 군국주의 정책을 통해 군사력을 최대한 끌어모아서 협상 없는 극도로 무자비한 통일을 행한다.
- 1920 바르샤바 전투라는 작품에서도 등장. 폴란드 영화다 보니 최종 보스 역할이다.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주인공 유진 킴과 기계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역사대로 숙청.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 주인공 조지원을 존경하는 젊은 장군으로 등장.
- 무솔리니가 캐리하는 2차대전?!에서 소련군 장군으로 대숙청에 휘말리나, 독소관계가 훨씬 진전되며 스탈린이 히틀러의 유능한 인사는 남겨놓으라는 조언을 듣고 스탈린이 기회를 주면서 풀려나며, 스탈린이 물러졌다며 선을 넘은 예조프의 발언을 비밀리에 기록한 녹음기를 틀어서 스탈린에게 바치는 등 정치질을 하는 모습도 보인다. 폴란드 침공 이후, 독소동맹에 따라 주코프를 휘하로 해 서부전선에 파병되나 프랑스 침공 초기의 혼란을 극복한 이탈리아군과 프랑스군의 반격에 밀리며 전선이 교착된다. 그러나 무턱대고 독소동맹이 무리해서 북유럽 3국을 집어삼키려 했다가 스웨덴까지 중립을 버리고 독일의 협박을 받은 노르웨이와 겨울전쟁이 일찍 개전한 핀란드를 따라 연합국에 합류하는 등 북유럽이 똘똘 뭉치면서 노르드군이 콜라반도를 휘저으며 소련이 대참패하자, 소련 내로 귀환해 군을 재편성하고 노르드군에 맞선다. 그러나 대숙청으로 소련군이 말이 아니게 되면서 레닌그라드가 함락되고(!) 모스크바 근처까지 밀리자 스탈린에 대한 반감이 솟아나고 소련 내 반스탈린파 및 이탈리아와 접촉한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찾아온 안토니오 그람시에게 혁명은 실패했고, 레닌이 아닌 마르크스가 옳으니 전후 소련은 민주주의를 택해야 한다는 연설을 듣고 스탈린 붕괴 후 민주주의를 도입하기로 마음먹는다. 이후 227호 명령 등 스탈린의 군사적 실정이 계속 이어지자, 유리 안드로포프와 반스탈린파 등과 손잡고 봉기, 그람시의 제안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자기 안위를 위해 트롤짓을 계속한 라브렌티 베리야를 주코프를 통해 죽인다. 그리고 곧장 스탈린의 집무실로 가 스탈린과 마지막으로 독대하고, 스탈린이 동귀어진하려 하자 권총으로 쏴죽인다. 전후 백계-자유주의계-정교회-중앙파-농민파 등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는 빅텐트 소비에트 의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되고, 서기장 권력집중체계에서 권력을 분산하고 소비에트 선거를 실시하며 소련에 민주주의를 도입해 개혁한다.
5. 기타
소련군 역사상 최연소 원수이다. (41세 진급)
신이교주의자였다. 실제로도 2월 혁명 이후 그의 친구가 집에 찾아가서 특이한 조각상이 있길래 뭐냐고 물어봤더니 페룬입니다, 위대한 사람이며 강인한 사람이며 전쟁과 죽음의 신입니다.라고 말하고 무릎꿇고 진지하게 기도했다고.... 친구가 그거보고 웃으니 '웃지 마십쇼!'라고 일갈한 뒤 난 슬라브인에게 종교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슬라브인에겐 마르크스주의란 새 종교가 생겼지만 그 종교는 너무 문명적이고 모더니즘적입니다. 나는 러시아에서 승리한 마르크스주의가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갈 것이라고 믿기에 페룬을 믿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매일 페룬을 숭배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보나파르트주의를 진지하게 존경하고 주장하며 자신의 신이교주의와 보나파르트주의적 견해를 숨기는 것이 소련의 대한 배신이라고 여기며 당당하게 보인 것은 덤.[출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가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때 그를 구명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쓰기도 했으나, 오히려 숙청이 임박한 쪽은 투하쳅스키였다.[15] 쇼스타코비치는 끝끝내 살아남아, 죽기 전에 남긴 회고록에서 투하쳅스키와의 인연에 대해 진심어린 회고를 남겼다.
-스키가 붙는 성씨 때문에 웹상에는 투하쳅스키가 폴란드계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하지만 투하쳅스키 가문이 사용하는 문장이 발음이 서로 비슷한 폴란드의 투하체프스키 가문(Tuchaczewscy)이 사용하는 문장과 조금 유사하다 뿐이지, 러시아의 투하쳅스키 가문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16] 오히려 투하쳅스키는 대대로 폴란드와 원수진 집안에 가깝다. 투하쳅스키 가문은 모스크바 대공국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전쟁을 벌여 1514년 정복한 스몰렌스크 일대에 영지를 가졌는데, 러시아가 혼란 시대를 겪는 중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스몰렌스크 일대를 탈환하면서 투하쳅스키 가문의 영지도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넘어가버렸다.[17] 근 2세기 후 악연은 재연되어 투하쳅스키의 증조부인 알렉산드르 투하쳅스키가 폴란드인이 일으킨 11월 봉기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1831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의 증손자인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거의 1세기 뒤에 바르샤바를 목전에 두고 패배했으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18]
[1] 유일하게 연좌제에서 살아남은 인물.[2] 다만 후에 국방장관 레프 트로츠키가 대거 러시아 제국군 장교들을 영입하여 붉은 군대 수뇌부는 러시아 제국군 출신들이 주류가 된다.[3] 나폴레옹도 프랑스 혁명 직후 군에서 장군 상당수가 목이 날아간 상태라 능력을 보이자 초고속 승진, 25세에 대장이 되었다.[4] 단, 이 부분은 러시아 혁명 직후의 소련에서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이 칭찬보다는 경계나 거부감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프랑스 혁명을 중요한 전범(典範)으로 삼았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영웅이나 위인이 아니라 혁명을 배신하고 군사독재, 더 나아가 제정시대를 연 '유능하지만 부정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 따라서 유능한, 특히 군사적인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인물을 '나폴레옹'이나 '보나파르트'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 인물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는 동시에 군사적으로 혁명정부를 배신하여 무너트리고 독재자로 등극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의 표현이기도 했다고 봐야 한다. 당시 소련 내에서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육해군 최고인민위원으로 러시아 내전을 지휘했던 레프 트로츠키같은 인물도 '군사적 보나파르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으며 이것이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 등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트로츠키가 아닌 스탈린을 지지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는 것이나 한참 시간이 흐른 일본의 좌파 학생운동권 내애서도 '보나파(보나파르티즘)하지 말라'는 표현이 '독단적으로 굴지 말라'(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잘난척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였음도 참고하자.[5] 겨울전쟁에서 사후평가 중 바실리 추이코프와의 대화를 보면 스탈린은 현대전에 대해 세심함은 상당히 떨어져도 전체적인 통찰력은 갖추고 있던 인물이다.[6] 제일 앞줄 왼쪽부터 니키타 흐루쇼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이오시프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미하일 칼리닌, 투하쳅스키[7] 이렇게 상식 밖으로 빠른 속도로 처형이 가해진 이유는 소련의 국민들이 인기 있는 장군들과 전쟁 영웅들을 재판하는 것에 분노할 것이 두려워서 스탈린이 직접 이들을 재판 직후에 처형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8] Overy, Richard, The Dictators: Hitler's Germany, Stalin's Russia.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2004.[9] Resis, Albert, ed. Molotov Remembers: Inside Kremlin Politics. Chicago: Ivan R. Dee, 1993.[10] 예를 들어 구 제정 시절 벌어진 토벌전 등에서 범용한 작전을 쓰고도 별 성과를 못 올린 사례 등을 든다. 그러니까 그가 살아있었다면 독소전쟁의 양상이 바뀔 수도 있었다는 가정은 의미없다는 논조의 얘기.[11] 해당 문제는 전형적인 기동전의 취약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동전의 명수였던 독일군 역시 이 점을 항상 고민했는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최초로 낫질 작전을 제안했을 때 독일군 참모부의 반응이 '그럼 님 기갑부대로 인해 확장된 측면은 어떻게 할 거임?'이었다.[12] 일부러 내전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와 함께 살리는 꼼수가 있기는하다.[13]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도 투하쳅스키를 잘생겼다고 표현했다.[출처] Minakov, Sergei Timofeevich (2017-09-05). Заговор "красных маршалов". Тухачевский против Сталина (The Conspiracy of the Red Marshals: Tukhachevsky vs. Stalin) (in Russian). Algoritm Publishing[15] 기껏 최후의 수단으로 매달렸던 사람인 투하쳅스키가 오히려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다는 것을 알고서, 쇼스타코비치는 '이제 진짜로 죽었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16] 투하쳅스키 가문은 14세기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인 인드리스(Indris)의 후손을 자칭했다. 그리고 투하쳅스키의 어원을 고려하면 그가 튀르크인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다.[17] 이후 투하쳅스키 가문은 오늘날 모스크바 일대의 영지를 새로 수여받았다.[18] 사실 러시아와 폴란드가 오랫동안 동유럽의 패권을 두고 다퉈왔던 만큼, 이렇게 수세기에 걸쳐 상대국과 싸워온 군사귀족 가문은 양국에 적잖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