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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1e05><colcolor=#fff> 소비에트 연방 제4대 노농적군 해군본부 총참모장 레프 갈레르 Лев Галлер | Lev Galler | |||
본명 | 레프 미하일로비치 갈레르 Лев Михайлович Галлер[1] Lev Mikhailovich Galler | ||
출생 | 1883년 11월 29일 | ||
러시아 제국 핀란드 대공국 비보르크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레닌그라드주 비보르크) | |||
사망 | 1950년 7월 12일 (향년 66세) | ||
소련 러시아 SFSR 타타르 ASSR 카잔 (現 러시아 타타르스탄 공화국 카잔) | |||
묘소 | 카잔 아르스코예 묘지 | ||
재임기간 | 제16대 발트함대 사령관 | ||
1932년 3월 ~ 1937년 1월 | |||
제4대 노농적군 해군본부 총참모장 | |||
1938년 1월 ~ 1940년 10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81e05><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미하일 페르디난도비치 폰 갈레르 어머니 줄리아 파우커 | |
복무 | 러시아 제국 해군 | ||
1905년 ~ 1917년 | |||
노농적군 해군 | |||
1917년 ~ 1937년 | |||
소비에트 해군 | |||
1937년 ~ 1948년 | |||
최종 계급 | 상장 (소비에트 해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 | ||
주요 서훈 | 레닌훈장 (3회) 우샤코프 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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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비보르크 요새에서 복무하던 아버지 미하일 페르디난도비치 폰 갈레르와 목사의 딸 줄리아 파우커 사이에서 태어났다. 폰 갈레르 집안은 3대째 내려오던 독일계 귀족 가문이었다.1903년 해군 사관생도단에 입교하고 1905년 준위로 임관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
1915년 7월부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전함 '슬라바'에서 장교로 복무하며 독일 나사우급 전함 '나사우'와 '포젠'과 교전했다.1916년 9월부터 구축함 '아브트로일'에서 복무하다 1917년 1월에 다시 전함 '슬라바'로 돌아와 중령으로 복무했다.
1917년 10월엔 우크라이나급 구축함 '투르크메네츠스타브로폴스키'[2]에 함장으로 임명,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로 전향한 승조원들과 뜻을 함께했다.
2.1.1. 전후
1921년 발트함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혁명과 내전으로 무너진 발트함대 재건을 도맡았다. 그 과정에서 갈레르는 다양한 함종으로 구성된 균형 잡힌 함대를 이상적인 함대로 생각하며 1925년 여름 미하일 프룬제를 만났을 때 항공모함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했고 프룬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아쉽게도 프룬제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그의 꿈은 무산되고 만다.1926년엔 해군대학에서 고등지휘참모 6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다시 발트함대 참모장으로 복귀했다. 1929년-1930년 전함 '파리즈스카야 콤무나'와 순양함 '프로핀테른'을 크론슈타트에서 세바스토폴까지 이송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932년 3월부터 발트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2. 독소전쟁
전쟁 중 군비는 나의 대리인 레프 갈레르 제독이 담당했다. 나는 그가 그 모든 해안포에 포탄을 차질없이 공급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엄청난 양의 포탄이었다.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
1937년 해군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고 1년 뒤인 1938년에 해군 참모장까지 역임하며 1939년 어린 나이에 해군 인민위원으로 부임한 쿠즈네초프를 성심성의껏 보좌했다.[3]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
1940년 이반 이사코프에게 밀려 부인민위원과 참모총장의 직위에서 내려오고 해군 조선 및 군비 담당을 맡으며 전쟁을 맞이했다. 갈레르의 업무는 크게 함선 수리 및 건조, 소해함 개발, 랜드리스 수송선 관리 감독 등이었으며 이사코프가 모스크바를 떠나있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일까지 떠맡으며 전쟁 기간 동안 소련 해군을 이끌었다.
2.2.1. 전후
전쟁을 거치며 갈레르는 쿠즈네초프와 함께 균형 잡힌 수상 함대를 이상으로 추구하며 항공모함이 포함된 건조 계획을 준비하고 지지했다.1947년부터 쿠즈네초프 해군사관학교[4]의 교장을 역임하다 같은 해 12월 쿠즈네초프와 다른 제독들과[5] 함께 영국과 미국에 해군 기밀을 넘겼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상장 계급을 박탈당하고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 1950년 2월 소련 내무부 카잔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어 입원했다가 7월 12일 사망했다.[6] 사망한 갈레르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상장 계급으로 복권되고 1999년 10월 카잔 아르스코예 묘지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3. 여담
-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쿠즈네초프의 집에 놀러와 쿠즈네초프의 가족들과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쿠즈네초프도 이런 훌륭한 사람이 왜 결혼하지 않는 건지 궁금해 했지만 개인적인 얘기를 꺼낼때마다 능숙하게 대화 주제를 돌려 더 캐묻지 않았다고 한다. 쿠즈네초프의 아내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갈레르가 유모 대신 차남 니콜라이의 유모차를 끌며 니콜라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던 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