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tablealign=right><tablewidth=400><bgcolor=#030><tablebordercolor=#030> 오드자크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일부 | |||
날짜 | 1945년 4월 19일 ~ 5월 25일 | ||
장소 |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 ||
원인 |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려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우스타샤 및 체트니크와 이를 막으려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틀:깃발| | ]][[틀:깃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크로아티아 독립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체트니크| ]] | ||
지휘관 | |||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 Petar Rajković|||
참전 부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 제27사단 [[틀:깃발| ]][[틀:깃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 제53사단 | ]][[틀:깃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 제25사단? | ||
병력 | |||
[[틀:깃발| | ]][[틀:깃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 35,000명[[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체트니크| ]] 1,500명 | ]][[틀:깃발| ]][[크로아티아 독립국| ]] 11,000명||
피해규모 | |||
277명 전사 815명 부상 59명 실종 | 5,128명 전사 1,705명 부상 5,654명 포로 | ||
결과 | |||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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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5년 4월 19일부터 5월 25일까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오드자크에서 발생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전선 전투 중 제일 늦게 종료된 전투이다. 그러나 파르티잔 최후의 승리였음에도 후술한 전후 처리 과정이 문제가 되어 30년 후에나 진상이 공개되는 등 유고슬라비아의 흑역사이기도 하다.2. 발단
티토 휘하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베오그라드를 수복한 이후 이전까지 파르티잔에게 맞서던 우스타샤와 체트니크는 지도부가 도주한 가운데 유고슬라비아를 탈출하여 어떻게든 서방 연합군의 포로가 되기 위해 대거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나마 체트니크는 말단 대원들의 경우에는 봐주는 경우도 극히 드물게나마 있었지만, 우스타샤는 저지른 일이 너무 컸던지라 군인들에 일부 크로아티아 민간인들까지 합세하여 자그레브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향하여 대거 피난길에 올랐다.당연하지만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이를 눈뜨고 지켜볼 이유는 만무하였고, 때문에 파르티잔 지도부는 예하 부대에 우스타샤의 탈출을 막을 것을 명령하였다. 파르티잔의 맹추격이 이어지자 우스타샤 부대원들은 난민들의 대피를 위해 오드자크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였고, 당시 오드자크의 지역 사령관이었던 페타르 라지코바지치의 지휘 하에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오드자크는 사바강과 보스나강으로 둘러쌓인 지형으로 때문에 한 면만 제대로 방어를 한다면 적군의 공세를 오랫동안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 또한 지휘관이었던 페타르 라지코바치치는 군대 경험이 있었고 무엇보다 지역 토착민이었기에 휘하 장교 및 부하들과 끈끈한 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강기슭과 지형을 따라 방어선을 이중 삼중으로 배치하였고, 각 마을 간에 신호망을 구축하여 유기적인 대응이 가능하도록 구성하였다.
4월 19일 밀로시 제키치 중령이 이끄는 제 25 세르비아 사단이 도착하자 공식적인 유럽전선 최후의 전투인 오드자크 전투가 시작되었다.
3. 전개
처음에는 단순한 패잔병 처리로 생각하고 가볍게 임한 파르티잔들이었다. 애초에 전력차부터 10:1로 압도적이었고 기관총과 박격포 등 소화기가 전부였던 우스타샤와 달리 중포, 전차, 비행기까지 소유하고 있던 파르티잔이었다. 그러나 우스타샤의 전에 없던 맹렬한 저항에 부딛히자 그런 예상은 단숨에 깨져버렸다.초기 작전은 순조로웠다. 파르티잔은 압도적인 화력 우세 속에서 마을들을 점령하고 고지대인 카다르 산을 점령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우스타샤는 포격을 감내하고 파르티잔을 끌어들이는 전략으로 막대한 출혈을 강요하였고 도리어 4월 22일에는 우스타샤의 대반격으로 25사단 예하 18여단이 막대한 보급품을 망실하고 패주하였다.
당황한 파르티잔 측은 16여단을 새로 투입하였지만 도리어 여단장인 스파소 미치치가 전사하는 등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베오그라드에서는 4월 28일에 25사단을 제외하고 새롭게 27사단을 투입한 뒤, 5월 1일에는 53사단과 14여단을 추가로 투입하여 오드자크를 완전히 포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