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란토 공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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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초한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1번함 콘테 디 카보우르 | |||||
| 명칭 | 영어: Battle of Taranto 이탈리아어: Notte di Taranto | ||||
| 날짜 | 1940년 11월 11일 | ||||
| 장소 | 이탈리아, 아풀리아 주 타란토 |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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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 | |||||
| 전력 | |||||
| 항공모함 1척[1]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 뇌격기 21기 | 전함 6척[2]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7척 구축함 13척 | ||||
| 결과 | |||||
| 영국 해군의 승리 하지만 이탈리아 왕립해군 무력화에는 실패 | |||||
| 피해규모 | |||||
| 전사 2명 포로 2명 뇌격기 2기 격추 | 전사 59명[3] 부상 600명 전함 3척 무력화[4] 중순양함 1척 손상 구축함 2척 손상 전투기 2기 파괴 | ||||
1. 개요
1940년 11월 11일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왕립해군의 모항이었던 타란토에 공습을 가한 전투이다.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퓨리어스가 1918년 7월 19일에 감행한 톤더른 공습(Tondern raid)의 확장판이며, 역사상 최초로 항공기와 전함이 맞붙은 사건이었다.타란토 공습은 항공어뢰를 사용한 공습이 전함을 상대로 대단히 유효함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손상을 입은 전함들을 빠르게 복구시켰고, 얼마 안 가 영국 역시 이탈리아의 Decima Flottiglia MAS가 실시한 인간어뢰 공격으로 알렉산드리아 습격에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2척이 대파되며 항구 바닥에 착저하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 정작 타란토 공습 자체는 전쟁에서 그리 큰 전략적 의의는 가지지 못했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지중해에서는 영국 해군 지중해함대, 프랑스 해군 지중해함대, 이탈리아 왕립해군이라는 3강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1940년 6월 프랑스 침공이 프랑스 제3공화국의 패배로 끝나면서 이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이 서유럽을 거의 석권하여 영국 본토가 침공 위험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영국 본토 해역 함대가 지중해 함대를 증원하기 곤란한 상황이 닥쳐왔다. 게다가 유사시 지중해에서 영국과 협력하며 이탈리아를 견제할 수도 있었던 프랑스 해군마저 독일에 항복하면서 영국의 지중해함대가 이탈리아 왕립해군에 대해 전력의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마침내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 왕국이 추축국에 가담하여 영국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당시 이탈리아 왕립해군은 전함 6척[5], 순양함 21척, 구축함 52척, 잠수함 106척 등을 보유하여, 앤드루 커닝엄 제독의 영국 지중해 함대(전함 4척, 항모 1척, 순양함 9척, 구축함 25척, 잠수함 10척)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영국군은 전적으로 바다를 이용한 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몰타섬을 둘러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오는 해로가 최단 거리의 보급로였다. 대안으로 희망봉을 경유하면서 아프리카 대륙을 한 바퀴 도는 항로도 있었지만 이 경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효과적인 보급이 어려웠다. 그 때문에 아주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지브롤터 ↔ 몰타 ↔ 알렉산드리아로 이어지는 항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중해 항로를 수호해야 할 영국 해군은 상대인 이탈리아 왕립해군에 비해 수적 열세에 몰렸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 및 몰타 섬을 중간에 두고 지브롤터와 알렉산드리아 양쪽의 세력이 분리되어 서로 작전 협조가 어려운 상태였다. 또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서 불과 8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몰타 기지의 영국군은 구축함 1척, 잠수함 6척, 대공포 42문, 전투기 12대가 전부라서 이탈리아 해군과 공군의 집중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이탈리아군이 함대를 투입하여 깽판이라도 부리는 날에는 몰타 기지는 물론 이집트 주둔 영국군에게까지 위기에 처할 상황이었다.
3. 과정
3.1. 양측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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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대를 사열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
순양함 전력도 충실해서 중순양함을 8척이나 동원이 가능했다. 트렌토급 중순양함 4척, 차라급 중순양함 3척은 전간기 시절에 만들어진 군함들로 지중해에서의 활동에 지장이 없었으며, 구식 장갑순양함이기는 하지만 체급상 중순양함인 산 조르지오급 장갑순양함 1척도 유사시 긴급동원이 가능했으며 전함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본토에 전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다수의 중순양함을 한꺼번에 투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지중해에서 정면으로 함대결전을 펼칠 경우 이탈리아 왕립해군은 영국 지중해 함대까지도 압도할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령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 왕립육군은 아직 물자와 장비 양면에서 적절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고, 특히 무솔리니의 이집트 침공 준비를 위해 추가적인 대규모 보급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해군은 당분간 리비아의 트리폴리와 벵가지 행 보급선단의 호위에만 전념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알렉산드리아 주둔 영국 지중해 함대도 몰타 기지의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기 위한 호송선단을 호위하여 서로 진로가 엇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1940년 7월 9일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반도 근해에서 푼타 스틸로 전투(Battle of Punta Stilo, 영국 측 기록)-칼라브리아 해전(Battle of Calabria, 이탈리아 측 기록)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전투 자체는 양측이 수송선단을 호위하고 각각의 목적지로 가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사건이었지만, 이탈리아 공군 폭격기 72대가 투입되고 순양함과 전함들이 서로 포격을 교환하는 등 대규모 해전으로 발전했다. 이탈리아는 전함 줄리오 체사레(Giulio Cesare) 소파, 중순양함 볼차노(Bolzano)가 대파되었으며, 영국은 경순양함 넵튠(HMS Neptune), 글로스터(HMS Gloucester), 구축함 헤리워드(HMS Hereward), 디코이(Decoy)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전함 줄리오 체사레와 영국 전함 워스파이트는 서로 역사상 최장거리의 포격전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26,000야드(24km) 거리에서 줄리오 체사레가 워스파이트를 상대로 지근탄 2발을 내고, 워스파이트의 15인치 포탄 1발이 줄리오 체사레의 후방 갑판에 명중했다.
이후에도 이탈리아 왕립해군은 리비아의 자국군에게, 영국 해군은 몰타 기지를 위한 재보급에 집중하면서 가끔씩 조우전이 발생할 뿐이었다. 그러나 본토에 안전한 항구겸 거점인 타란토를 보유한 이탈리아와 달리, 영국 측은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 자체가 이탈리아 왕립육군의 침공 위협에 직면했기 때문에, 영국 지중해함대에게 더욱 불리한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의 주력 함대(전함 6척,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8척)가 집중 배치되어 있는 타란토 항구를 직접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타란토 항구는 대공포 101문, 기관총 193정의 막강한 화력을 위시하여, 서치라이트 22대, 저공 비행하는 항공기의 기습을 저지하기 위한 방공기구(barrage balloon) 87대, 어뢰 공격을 막기 위한 대어뢰 저지용 그물망 4.2km등이 설치되어 있는 등, 이탈리아 왕립해군 나름대로 철저한 방호책을 강구해둔 상태였다.[7]
3.2. 작전 계획 수립 및 공습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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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 |
바로 항공모함의 함재기인 페어리 소드피시를 이용하여 야간에 뇌격을 가하고 함재기를 수용한 후에 전속력으로 후퇴하는 기습작전이었다. 항구에 있는 주력함을 공격할 예정이었기에 타격력의 주력은 뇌격기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해군이 운용하던 뇌격기는 페어리 소드피시로 복엽기인데다가 순항속도가 200km가 안될 정도로 느린 기체라서 낮에 투입했다가는 이탈리아 왕립공군의 CR. 42같은 복엽 전투기에게도 죄다 털릴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야간공습으로 작전을 결정하였으며, 혹시 있을 정찰을 고려하여 이탈리아 공군의 활동범위 밖에서 출격하는 계획을 입안하였다.
파운드 제독은 이 조언을 받아들이고 1939년에 후임으로 부임한 지중해 함대 사령관 앤드루 커닝엄 제독에게 전언하여, 저지먼트(Judgment) 작전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게 되었다.[8]
그리고 프랑스의 몰락과 더불어 프랑스 해군이 연합군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저지먼트(Judgment) 작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작전에 나설 항공모함으로는 다소 낡았지만 함재기가 모두 소드피시로 구성된 항공모함 이글(HMS Eagle)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확정적인 계획은 북아프리카 전역이 시작된 후 1940년 9월 16일 이탈리아 왕립육군이 시디 바라니(Sidi Barrani)에서 침공을 정지하여 영국 지중해함대에게 운신의 자유가 확보된 후에나 작성될 수 있었다.
당초 작전은 1940년 10월 21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소드피시의 화재 사고가 번져 항모 이글의 연료 시스템까지 파손되는 재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작전 시행일이 11월 11일로 연기되었을 뿐 아니라, 지난번 해전에서 지근탄으로 인해 함재기용 항공유 탱크와 연결배관에서 유증기가 새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항공모함 이글이 작전 참가를 포기하고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에게 소드피시 5대를 인계하여, 항모 일러스트리어스(HMS Illustrious) 전단(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호위)이 공습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3.3. 정찰
당연히 작전을 위해서는 타란토 항구에 대한 사전정찰을 통해 공습에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야 했다.[9] 당연히 영국 정찰기가 왔다가면 조만간 영국의 공습이 벌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되는데다 타란토 항구 근처에는 13개의 청음소가 있어 레이더가 없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보완했다. 때문에 영국은 빠르고 높이 나는 정찰기가 필요했는데 당시 지중해 함대에서 유일하게 말타에서 750km 떨어진 타란토까지 왕복할 수 있는 쇼트 선덜랜드 비행정은 적진 정찰에는 느리고 상승한계고도가 낮아서 요격기와 대공포를 피할 수 없으므로 부적합했다.때문에 커닝햄은 본국에 신형 고속 정찰기를 요청했고, 얼마 후 말타에 미국제 마틴 메릴랜드 쌍발 경폭격기 3대가 도착했다. 이들은 최고 속력 489km/h에 최대 상승고도 9km에 달했기에 이탈리아 주력 전투기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 도착한 마틴 메릴랜드들은 타란토 항구의 고공정찰을 여러 번 성공했지만 공습 당일 11월 11일 아침에는 낮은 구름이 끼어 촬영이 불가능했다. 이에 정찰기 조종사 아드리안 워버튼(Adrian Warburton, 1918.3.10~1944.4.12)이 초저공으로 돌입해 군함 계류 상황을 직접 시도하고 대공포를 쏘기도 전에 빠져나왔는데, 승무원들(조종사, 항법사, 기총수)의 정찰 기록에서 전함 숫자가 일치하지 않자 다시 항구로 돌입해서 전함 5척, 순양함 14척, 구축함 27척이라고 확인한 후 탈출했다.#1
사전정찰 결과 영국은 어뢰 방어망 외에도 방공기구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종사들에게 방공기구들의 구체적인 위치가 상세히 표시된 지도를 제공했다. 방공기구는 날아오는 항공기에게 심각한 장애물이 되는데다가 방공기구 하부에 연결된 강철 케이블은 항공기 입장에서는 알아차리기가 힘들 정도로 얇은데 일단 충돌했다하면 기체를 순식간에 절단하는 위험한 물건이므로 조종사들은 철저하게 방공기구의 위치를 파악 및 암기했다.#1
또한 조명도 문제였는데, 선두 소드피시들에게 어뢰 대신 마그네슘 조명탄을 탑재해서 목표물과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조명탄 투하를 담당시켰다. 여기다 이탈리아군의 탐조등을 무력화할 방법도 필요했는데, 처음에는 말타에 주둔하는 영국 공군의 빅커스 웰링턴 폭격기들이 고공으로 침투해 시선을 돌리면 1~2분 후 소드피시들이 저공으로 침투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소속도, 비행 성능도 달라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때문에 소드피시 중 일부를 폭탄으로 무장하고 고고도로 침투해서 탐조등을 유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10] 하지만 이 때문에 어뢰로 무장한 소드피시의 수량이 크게 줄었다.
여기다 폭격 날짜도 문제였다. 소드피시 조종사들이 성공적으로 공격을 진행하려면 다음과 같은 천문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1
| 1 | 조종사들이 지형지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달이 밝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상현달~하현달 사이가 되어야 한다. |
| 2 | 타란토 항구의 지형상 소드피시들은 서쪽에서 돌입해야 한다. 달빛을 등진 전함들의 실루엣이 조종사들에게 잘 보이려면 달이 동쪽 하늘에 낮게 뜬 상태에서 돌입해야 한다. |
| 3 | 소드피시의 짧은 항속거리를 보완하려면 일러스트리어스가 타란토 270km 거리까지 접근한 상태에서 소드피시들이 발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일러스트리어스는 충분히 어두운 상태에서 타란토 쪽으로 출발해야 하며 달이 늦은 한밤중에 동쪽 하늘에 떠야 한다. |
| 4 | 몇 시간 뒤 돌아올 소드피시들을 착함시키고 항공모함이 안전거리 밖으로 후퇴할 때까지 해가 뜨면 안 된다. |
3.4. 이탈리아군의 대응
당연히 이탈리아군도 영국 해군이 타란토 항구에 몇 주 동안이나 정찰기를 보내 정찰하는 모습에 뭔가 수상함을 느꼈지만, 커닝햄 제독은 이탈리아군을 교란하기 위해 11월 4일부터 지중해 전역 모든 기지에서 10여 개의 소함대를 일제히 이동시키는 MD8 작전을 펼쳤다. 일부는 실제 수송선단이 맞았지만 일부는 그저 이탈리아군을 교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13.5. 공습 준비
일러스트리어스는 36대의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었으나 호위 전투기를 제외하면 총 24대의 소드피시 뇌격기만 탑재할 수 있었고, 원래 계획이었던 30기의 소드피시보다 줄어든 항공기로 최대한 피해를 입히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핵심은 조명탄조-폭탄조-어뢰조 3개로 나뉘어 각자 다른 코스로 돌입하는 것이다.#1| 1 | 12대씩 2개 편대로 나누어 공격한다. | ||
| 2 | 두 편대는 1시간의 시간차를 두고 이함한다. 당시 영국 항공모함들은 폐쇄식 격납고를 사용했기에 내부로 폭탄이 관통하거나 폭발이 일어나면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유폭을 막기 위해 무장 장착은 비행갑판 위에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한밤중에 등화 관제로 작업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1시간의 여유를 두었다. | ||
| 3 | 각 편대는 다음과 같은 무장 조합으로 구성한다. | ||
| 조명탄조 | 2기 | 250파운드 항공폭탄 4발, 조명탄 16발 | |
| 폭탄조 | 4기 | 250파운드 항공폭탄 6발 | |
| 어뢰조 | 6기 | Mark XII 항공어뢰 1발 | |
| 4 | 조명탄을 장착한 소드피시 2대가 먼저 남쪽으로 돌입한다. 부둣가를 따라 조명탄을 투하한 뒤 항구 유류 저장소에 폭격을 가한다. 이런 작업으로 서쪽에서 돌입할 뇌격기들 대신 시선을 끌고 전함 뒤쪽에 조명탄을 밝혀 뇌격기들의 시야 파악을 용이하게 한다. | ||
| 5 | 폭탄을 장착한 4대의 소드피시는 북쪽 고공으로 침투한다. 항구 북쪽 순양함과 구축함들에게 급강하 폭격을 가한다. | ||
| 6 | 어뢰를 장착한 6대의 소드피시는 저공으로 침투한다. 각자 목표로 지정받은 전함들에게 어뢰를 발사한다. | ||
| 1 | 기습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첫 번째 편대에 12대를, 두 번째 편대에 9대를 배치한다. |
| 2 | 1차 편대에는 원래대로 6대, 2차 편대에는 5대가 어뢰를 장착한다. 폭탄 장착 소드피시들 중 편대당 2대씩은 폭탄과 조명탄을 섞어서 장착한다. |
3.5.1. 어뢰 준비
영국 해군이 항만의 군함들을 공격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얕은 수심에서 어떻게 항공어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항공어뢰는 투하 직후에는 깊숙히 가라앉았다가 어느 정도 항주한 다음에 기존에 설정한 수심으로 올라와 유지하게 되는데 수심이 얕은 항구에서는 바로 항구 바닥의 진흙에 처박힐 게 뻔했다. 게다가 항만은 안 그래도 부족한 전함을 전시에 군수품 하역으로 늘 바쁜 항구에 접안시켜 (비활성 훈련용 어뢰라고 해도) 뇌격기의 훈련 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먼저 항공어뢰를 뇌격기에서 투하할 때 깊숙하게 가라앉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일단 영국의 함재뇌격기인 페어리 소드피시가 매우 느리다는 것과 함께 당시의 긴급성을 감안해서 작은 드럼통에 와이어를 감아놓은 구조물을 소드피시에 장착한 후 와이어를 항공어뢰의 머리부분에 매달아놓은 방식을 도입했다. 작동원리는 소드피시가 초저공 저속으로 항공어뢰를 투하하면 소드피시와 연결된 드럼통에서 와이어가 풀리면서 마찰이 발생해서 항공어뢰의 머리가 약간 들리는 식으로 바다에 착수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항공어뢰가 깊게 잠수하지 못하게 했으며, 와이어가 드럼통에서 모두 풀려나가면 소드피시도 자유롭게 회피기동이 가능해지고 투하한 항공어뢰는 와이어를 머리에 달아놓은 채로 목표로 항진하게 된다. 소드피시가 매우 느린 비행이 가능하기에 사용가능한 임시대책으로 미국이나 일본의 뇌격기처럼 빠른 기종은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1
그리고 항공어뢰를 투하했다고 하더라도 주력함은 벌지같은 방뢰장치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인 군함 측면에 어뢰가 맞을 경우에는 1발로는 충분한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따라서 투하한 항공어뢰가 군함의 바닥 부위로 진입해서 중앙부에서 폭발해서 버블제트현상을 발생시켜서 군함의 용골을 부숴버려야 군함이 어뢰 1발 명중으로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고 침몰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뢰의 신관 분야에서의 대책이 필요하며 영국 해군도 나름대로 이를 극복할 무기를 준비했는데, 바로 어뢰의 이중 격발 장치인 자기신관(Magnetic pistol)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 7월, 영국 해군의 구축함 HMS Garry가 독일 U보트 UB-110을 격침시킨 뒤 10월 인양했는데, 유보트에서 자기기폭장치를 설치한 어뢰가 발견되었다.[11] 자기기폭장치는 충격신관과 달리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도 폭발해서 적함에 큰 피해를 줄 수 있었고, 심도를 잘 조절하면 용골을 노려 순양함 정도는 한 발로 두동강 내는 것도 가능했다. 이렇게 이론상으로는 이상적인 무기였지만... 어뢰 스캔들 문서에서 나오듯 당시 지구 자기장 때문에 위도에 따라 자기신관의 세팅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누구도 몰랐다. 하지만 최소한 영국은 자기기폭장치와 충격신관을 둘 다 갖춘 듀플렉스 신관(Duplex Piston)을 갖추고 있었고, 이 신관의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캐터펄트 작전에서 영국 소드피시 뇌격기 6대가 다카르 항구에 정박중이던 프랑스 전함 리슐리외를 공격할 때 3기는 방뢰망에 걸릴 가능성이 높지만 신뢰성이 높은 충격신관 신관을 잠항 깊이 7.2m로 세팅하고, 나머지 3기는 신뢰성은 낮아도 방뢰망을 피할 가능성이 높은 듀플렉스 신관을 잠항 깊이 11.5m로 세팅해서 흘수 깊이 9.9m의 리슐리외의 용골을 노렸다. 당시 다카르 항구의 수심은 12.7m였기에 재수없으면 그냥 바닥에 박고 끝날 수도 있었다.
공습 결과 리슐리외는 우현에 어뢰를 1방 얻어맞고 우현측 2개의 스크류축 사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침몰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항행 불능 상태에 빠진다.#1#2 프랑스 해군의 기록을 보면 리슐리외가 입은 피해는 우현 3번 스크류와 4번 스크류 사이의 공간에 7.5m x 7m 정도 크기의 구멍이 뚫리고 3번 스크류축이 휘었으며 함미에 금이 갔는데, 이건 현지에서 고치기 힘든 피해수준이므로 결국 리슐리외는 1년 이상의 수리가 필요한 손상을 입혔다.
아무튼 다카르 항구 공습으로 영국은 항구에서 어뢰의 속도를 느리게, 그리고 잠항 수심을 낮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며 듀플렉스 신관 어뢰의 잠항 수심을 너무 깊게 하면 자기장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기폭하지 않거나 전함에 제대로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어뢰를 세팅했다.
| 1 | 수심 15미터인 타란토 항구에서 어뢰가 방뢰망보다 깊이 항주하도록 모든 어뢰에 듀플렉스 신관을 장착한다. |
| 2 | 잠항 수심은 10미터로 얕게, 속도는 29노트로 느리게 세팅한다. 당시 이탈리아 전함들의 흘수 깊이는 9.3~9.6미터 정도였기에 어뢰가 전함 바닥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다가 바닥 중앙에서 폭발하도록 하는 목적이었다. |
3.6. 타란토 공습
작전 당일 일러스트리어스는 순양함 4척,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아 타란토 315km 지점에 저녁 8시에 도착했고, 풍속 2노트라는 소식에 소드피시의 이함을 위해 바람 방향으로 변침해서 28노트로 항진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소드피시가 캐터펄트 없이 이함하려면 30노트의 맞바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당시의 유압식 캐터펄트는 함재기 발함에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자력이함이 가능하면 그걸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1하지만 소드피시가 무거운 항공어뢰까지 장착했기 때문에 항공갑판의 후방에서부터 전방까지 질주하는 방식으로 기존 출격보다 항공갑판을 길게 사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항공갑판 최후방에 발진대기가 가능한 함재기 수량이 최대 12기에 불과해서 1회 출격시 최대 12기만 동시에 발진이 가능했고 이런 이유로 인해 전력을 분산해서 출격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서 폐쇄식 격납고를 사용하는 장갑항공모함에서는 격납고 내부 폭발시 위험성이 높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급유는 격납고에서 하더라도 폭탄이나 어뢰장착같은 무장장착은 비행갑판 위에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잡았기에 1차 비행대가 발함한 후에 2차 비행대 소속의 항공기를 비행갑판 위로 올려서 무장장착을 실시해야 했고, 시간도 야간인데다가 적에게 들킬 가능성을 고려해서 조명도 충분하지 않았으니 작업속도가 느려져서 제2차 공격대는 1시간 후에나 발함이 가능해졌다.
3.6.1. 1차 공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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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습을 수행중인 페어리 소드피시 기록화 |
이 난장판 와중에도 우선 조명탄 소드피시 2대가 해안가를 따라가서 2.4km 고도에서 조명탄을 투하했는데 당시 이탈리아군은 탐조등을 쓰지 않아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았다.
다음으로 윌리엄슨(Williamson) 소령과 어뢰 장착 소드피시 2기가 소리를 최대한 감추기 위해 1.5km 상공에서 엔진 출력을 최소로 낮추고 해면 10m 높이까지 강하해 이탈리아 전함 콘테 디 카보우로를 노렸지만, 구축함 풀미네(Fulmine)가 이를 눈치채고 1km 거리에서 대공포화를 퍼부었으나 어뢰 공격을 저지하진 못했다. 윌리엄슨의 소드피시는 어뢰 투하 직후 바다에 추락했지만 대공포 피격인지 해수면 접촉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윌리엄슨과 항법사 스칼렛(Scarlett) 대위는 생존해 부유식 도크로 올라간 뒤 포로로 잡혔다. 이들이 투하한 어뢰 3발 중 윌리엄슨의 것을 제외한 어뢰 두 발은 빗나갔다. 23시 15분 전함 안드레아 도리아가 인근에서 두 차례의 큰 폭발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1
다만 어뢰조는 생각보다 직접적 사격을 받진 않았는데, 이들은 이미 반원형 항만 안쪽에서 초저공 비행을 하고 있었기에 이탈리아 대공포 사수들이 이들을 조준했다가 맞은편 상선이나 군함 및 항만 시설들이 대공포 포탄에 얻어맞는 모습을 본 후 조준을 높이면서 대부분 머리 위로 빗나갔기 때문이다. 다만 예광탄 때문에 심리적 부담감은 어쩔 수 없었으며 화약 냄새 때문에 이 예광탄들을 '불타는 양파(Flaming onion)'라 불렀다.#1
23시 15분, 이안 스웨인 대위의 소드피시가 항만에 돌입해 360미터 거리에서 리토리오의 좌현에 어뢰를 명중시켰고, 갑자기 리토리오가 눈 앞에 나타난 탓에 투하 직후 마스트 사이로 직진해서 그대로 빠져나갔다. 동시에 켐프(Kemp) 대위의 어뢰도 리토리오의 우현 선수에 명중했다. 켐프 대위와 거의 동시에 투하된 마운드(Maund) 대위의 어뢰는 빗나가서 항만 바닥 진흙에 처박혔다. 어뢰조의 명중율은 50%로 높은 성과를 올렸다.
한편 폭탄조는 원 목표물인 중순양함들이 부두가 아닌 항구 바다 가운데에 계류되어 있어 목표물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 돌입한 팻치(Patch) 대위는 2.5km 상공에서 중순양함 트리에스테(Trieste), 트렌토(Trento), 볼차노(Bolzano)가 대공포를 난사하는 것을 발견하고 급강하폭격을 시도했으나[14] 빗나가고 항구 건물들의 지붕을 스치며 도주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중순양함들이 영국 폭격기가 대공포 예광탄으로 위치를 파악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대공포 사격을 중단하면서 어둠에 숨어버리자 후발 폭탄조는 목표 파악을 실패하고 비행정 기지, 경순양함과 구축함들이 정박한 부두를 폭격하기도 했다. 이 중 한 발은 마에스트랄레급 구축함 리베치오(Libeccio)에 명중했지만 불발되었다. 해당 현상이 개인적인 불운이 아니었고 이날 폭탄조의 폭탄중 대다수가 불발탄이었다. 마지막으로 렘 대위는 조명탄 투하 이후 250파운드 폭탄 4발을 유류 저장고에 투하하고 남은 조명탄도 투하해 이탈리아군의 탄약과 체력을 소모시켰다.#1
23분간 진행된 공격에서 손실된 소드피시는 단 한 대였다. 앞서 언급한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를 어뢰로 뇌격한 윌리엄슨(Williamson)과 스칼렛(Scarlett)이 탑승한 소드피시였으며 두 명 모두 추락한 소드피시에서 탈출에 성공해서 이탈리아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차 공격대의 전체 공격시간은 23분이었다.
3.6.2. 2차 공격대
10시 30분 헤일(J.W.Hale) 해군 중령이 이끄는 819비행중대의 소드피시 9대로 이루어진 2차 공격대가 출격했으며 2대는 폭탄, 2대는 조명탄, 5대는 어뢰를 탑재했다.2차 공격대는 이함 당시부터 문제가 생겼는데, 폭탄조의 8~9번기의 이함을 앞두고 9번기의 바퀴 고정장치를 너무 일찍 제거해서 두 기체가 날개를 부딪혔고, 어렵게 날개를 떼어내자 8번기의 동체와 날개를 덮은 캔버스천이 일부 찢어졌기에 9번기를 먼저 발함시키고 8번기를 격납고로 내려보내 수리 후 재이함시키느라 30분을 지체했다. 여기다 9번기가 비행 중 보조연료탱크가 떨어져나가면서 엔진이 꺼져 추락했고, 300m 정도 급강하하다 엔진을 겨우 재점화시켰지만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다 판단해 일러스트리어스로 돌아가던 중 무선침묵으로 아군 인식 표시등을 제대로 켜지 못해 적기로 착각하고 아군 오사를 가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아군 인식 표시등을 뒤늦게나마 켜서 사상자는 없었지만 2차 공격대는 8대로 줄어들었다.#1
23시 10분 2차 공격대가 타란토에서 110km 거리, 2.4km 상공에서 비행하던 중 이탈리아군이 1차 공격대에 난사하던 대공포화를 목표삼아 비행, 23시 50분 도착해 공습을 시작했다. 2차 공격대의 조명탄조 소드피시가 조명탄을 투하하자 이탈리아군의 대공포는 조명탄 불빛을 목표로 삼고 대공사격을 실시한다.
0시 10분 뇌격조 5대가 항내로 진입해 선두의 3대가 리토리오를 노리고 강하하던 중 배일리(Bayley)와 슬로터(Slaughter)의 소드피시가 대공포에 피격당한 후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며 미끄러지는 비행을 하다가 공중폭발하면서 둘 다 사망했다. 나머지 두 대는 리토리오 210m 지점에서 어뢰를 투하해 한 발은 리토리오에 명중했으나 한 발은 불발되어 나중에 항만 진흙바닥에서 발견되었다. 나머지 한 대는 두일리오를 명중시키고 탈출했으며, 마지막 소드피시는 고정된 줄이 끊어지면서 바람에 날아온 방공기구에 충돌했으나 강철 케이블이 아닌 본체에 부딪혔기에 피해가 없었으므로 추락을 모면한 후 비토리오 베네토를 노렸으나 빗나가서 콘테 디 카보우르를 명중시켰다.#1
수리 때문에 어뢰조가 탈출할 때 15분이나 늦게 돌입한 8번 소드피시의 클리포드(Clifford) 대위와 항법사 고잉(Going) 대위의 소드피시는 항만 가운데 중순양함들을 발견하고 6발의 폭탄을 투하했으나 모두 불발, 하지만 한 발은 중순양함 토렌토에 명중해 연료 유출을 일으켰다.[15]
3.7. 전투 종료
타란토를 공습한 영국 해군의 소드피시들이 야간에 귀함하는 것도 큰 문제였으나 이미 영국 해군은 항공모함에서 귀환중인 소드피시에게 전파로 비콘(beacon) 신호를 송신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항공모함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항공모함 주변에 부유식 조명탄에 불을 붙여서 투하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미 레이더로 추격하는 이탈리아 항공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안전한 함재기 귀환을 위해 조치한 것이었다.#1#2타란토 공습이 끝난 후에 전과를 확인하고 필요시 재공습을 하기 위해서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를 포함한 전대가 공습을 실시한 해역 근처에 머물렀다. 이탈리아 왕립공군도 반격을 하기 위해 영국 항공모함을 찾으려고 비행정들을 투입했으나 영국 해군이 먼저 레이더로 찾아내고 페어리 풀머로 요격해서 3대 이상의 비행정이 격추당했다.
물론 비행정들이 격추당한 위치를 역산해서 영국 항공모함이 있을만한 구역을 좁히는 것에는 이탈리아 왕립공군이 성공했으나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기상이 악화하면서 폭격기를 동원해서 영국 항공모함을 공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영국 해군도 이미 기존 위치가 발각난 것 같다고 짐작하고 함수를 돌려서 고속으로 이탈하기 시작했으며 곧 몰타에서 날린 정찰기의 전과확인보고를 밤 11시에 받은 후에 만족하고 완전히 철수하면서 타란토 공습이 마무리된다.#1
3.8. 이탈리아군의 방어 대책
당시 이탈리아군은 타란토 항구를 방어하기 위해 청음소와 방공기구, 어뢰 방어망을 설치했지만 생각보다 허점이 많았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 합리적인 부분도 꽤 존재했다.3.8.1. 방공기구
총 3열로 배치된 90개의 방공기구와 그 사이에 걸린 강철 케이블은 소드피시가 부딪히면 절대 못 살아나가는 강도와 배치로 구성되었다.하지만 11월 6일의 폭풍으로 방공기구 60개가 바람에 날아가서 잃어버리는 등 상당수의 방공기구가 파손되었는데 수소 부족과 취약한 산업기반으로 인해 빠른 복구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11월 11일 오전 기준으로 16개가 전함들의 서쪽과 북쪽에, 11개는 동쪽에 배치되어 총 27개밖에 없었다.
3.8.2. 어뢰 방어망
전함 계류장에는 어뢰를 막기 위한 어뢰 방어망인 방뢰망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모든 전함들을 방어하려면 12.6km 길이로 설치해야 할 것을 실제로는 예정된 포격 훈련 출동을 위해서 4.2km 밖에 설치하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공습 직전에는 폭풍 때문에 2.9km 분량이 해안으로 인양되어 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뢰 방어망의 깊이도 모자라서 항구 바닥까지 철저하게 막지 못했으므로 영국의 항공어뢰는 어뢰 방어망을 60cm 정도의 미세한 차이로 가볍게 통과할 수 있었다.물론 이탈리아 왕립해군이 어뢰 방어망을 부실하게 설치한 것은 문제가 있지만 애초부터 어뢰 방어망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문제가 많았다. 당시에도 어뢰 방어망은 설치 노력에 비해 실전에서 큰 효과를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방전에서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급 전함 세바스토폴. 뤼순항 외곽에 정박한 세바스토폴을 노리고 일본 어뢰정 30여 척이 며칠 동안 100발 가까이 되는 어뢰를 퍼부었는데, 어뢰 여러 발이 방뢰망에 명중하면서 전함 쪽으로 밀려나자 가까운 곳에서 폭발한 어뢰들이 세바스토폴에 피해를 입혀 착저시켰다.
그리고 방뢰망은 정박 중 일단 설치하기만 하면 선창에 보관한 그물을 부표나 현측 지지봉에 매달아두기만 하면 되므로 추가비용없이 어뢰를 거의 완벽하게 막을 수 있지만, 명령을 지시하는 제독이면 모를까 이걸 실제로 치는 수병들에게는 엄청난 중노동이다. 방뢰망은 아연도금한 강철제라서 매우 무거운 데다 이용과 보관 과정에서 엉키고 파손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데 이걸 수병들이 전함 선창에 보관했다가 정박할 때마다 일일이 꺼내서 보트에 옮겨 싣은 뒤 군함에서 적당한 거리까지 끌고 가서 전개하고 고정하는 것도, 반대로 출항하기 전에 그물을 꺼내서 청소하고 선창에 보관하는 것도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게다가 계류장(Mooring)도 넉넉한 공간이 아니라서 전함들이 정박할 수 있는 공간은 생각보다 좁았다.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국 전함들이 전함 열(Battleship Row)라는 2열 종대로 늘어서 있던 이유도 멍청해서가 아니다. 계류장이 생각보다 비좁은 데다 출항을 위한 예인선 작업, 각종 보급품 선적과 보수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세워두는 것이 편리했다. 그래서 각 군함들이 자함에 각각 방뢰망을 설치하고 철거하기보다는 계류나 정박 지점에 항구 단위로 반영구적 어뢰방어망을 치는 방식의 지역방어를 하고 그 구역으로 군함들이 드나들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여기다 이탈리아 해군 전함들은 벌지를 토대로 개량한 퓰리에제 시스템을 갖추었기에 해당 시스템의 성능을 과신해서 방뢰망이 없다고 큰 위험에 노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퓰리에제 시스템의 한계점이나 당시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퓰리에제 시스템이 원할하게 작동할 수준으로 정밀하고 튼튼하게 제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상 타란토 공습이 퓰리에제 시스템의 첫번째 실전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계류장은 수심이 너무 얕아서 항공어뢰를 투하해도 바닥에 처박힐 것이 상식이었지만, 영국이 이를 극복할 무기를 들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3.8.3. 탐조등
공습 당시 타란토의 이탈리아 수비대는 탐조등을 '전혀' 쓰지 않았으며 일러스트리어스 함장 데니스 보이드(Denis Boyd)는 "2회에 걸친 공습 중 적군이 서치라이트를 전혀 쓰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라는 보고를 올렸다.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조명탄 투하를 담당했던 램 대위의 추측으로는 뇌격기인 소드피시들은 초저공으로 날아올 테니 탐조등을 낮게 비춰야 하고, 그러면 항구 계류장 전함들을 비출 테니 전함 대공포 사수들을 방해할 것이었다는 것이다.
3.8.4. 대공포
공습 이전 이탈리아 해군의 항구 내 대공포 운용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항구 내에 정박한 상태에서 공습을 받더라도 자함을 공격하는 것이 확실치 않다면 발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공포 하나가 고픈데 뭔 소리인가 싶지만... 의외로 합리적인데, 당시 대공포는 탄막을 형성해 항공기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이기에 항구 내에서 대공포를 난사하면 상당수의 포탄이 아군 건물과 함선의 머리 위로 쏟아지게 된다. 때문에 탄막 형성은 육상 대공포대에 맡기고 명확히 눈에 보이거나 탐조등에 걸린 적만 조준사격하는 것이 부차적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논리였다.그 외에도 이탈리아 중순양함과 구축함들이 대공포를 난사하다가 이렇게 발생한 예광탄이 역으로 아군의 위치를 노출하는 꼴임을 깨닫고 대공포 사격을 중단하면서 어둠 속에 숨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군함의 대공사격은 어차피 은엄폐가 불가능하게 크고 중요 목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전함같은 주력함에서 실시된다.
그리고 대공포를 조심스럽게 사용했다는 것이지 대공사격을 안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상에 설치된 대공포들은 총계 13,489발의 대공포탄을 발사했으며, 군함에서도 수천발의 대공포탄을 발사했다.
3.8.5. 이탈리아 왕립공군
이탈리아 왕립해군과 별로 사이가 안좋으며 해군용 연료에서 자신의 몫을 억지로 얻어내거나 항공모함 도입을 반대하거나 이탈리아 왕립해군의 항공대에는 정찰기밖에 보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등 이탈리아 왕립공군이 이탈리아 왕립해군에게 끼친 악영향은 엄청나게 많지만, 타란토 공습에 한정하면 방해는 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노력하긴 했다.애초에 레이더가 없는 상황에서는 정찰기나 비행정을 날려도 바로 영국 공군에게 발각당해서 함재전투기에게 격추당하는 통에 손실이 많았으며, 비행정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서 위치를 역산하더라도 이미 영국 해군이 빠져나간 후라서 도저히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영국 해군을 선제발견하거나 추격하지 못한 것이다.
공습에서도 애초에 야간항공전에 대한 개념이 미약했기에 야간전투기를 전혀 마련하지 못했으므로 소드피시에게 대응할 수 있는 전력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공습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능력이 없어서 대응을 못한 것일 뿐, 평소에도 이탈리아 왕립공군이 이탈리아 영토에서 288km 이내로는 영국 해군이 절대로 진입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큰 소리나 치다가 영국 해군이 해당 범위 안쪽까지 몰래 들어와서 타란토 공습을 가한 것 자체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288km라는 거리는 영국 항공모함 함재기의 항속반경을 고려해서 영국 해군이 함재기로 공습을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범위였는데도 그것조차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이런 점을 염려해서 이탈리아 왕립해군이 초계범위를 기존의 288km에서 2배인 576km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탈리아 왕립공군도 비행정을 동원해서 초계범위를 늘리려고 시도했으나 기존 범위를 넘어가면 영국 해군이나 영국 공군에게 레이더로 선제탐지당한 후에 요격기를 만나서 비행정이 격추당하는 비극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애초에 타란토에서 576km 거리면 몰타에 도착하고도 남을 정도니 이탈리아 왕립해군의 요구가 조금 과한 것도 사실이긴 했다.#1
3.9. 공습 결과
3.9.1. 영국 해군
3.9.2. 이탈리아 왕립해군
- 전함 3척의 피해
-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Conte di Cavour): 선체에 12×8미터의 구멍이 뚫리고 착저. 인명 피해는 27명 전사, 100여 명 부상. 이후 인양되었으나 수리 중에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고 남부 이탈리아 군정청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으로 분열하면서 영구적으로 현역으로 복귀하지 못하였다.(영구 손실)
- 전함 카이오 두일리오(Caio Duilio): 11×7미터 크기의 구멍이 뚫리고 좌초. 7개월 만에 수리되어 현역 복귀.
- 전함 리토리오(Littorio): 어뢰 3발에 명중되어 침수. 인명 피해는 32명 전사 외에 다수 부상자 발생. 4개월 만에 수리되어 현역 복귀.
- 트렌토급 중순양함 트렌토 1척 소파, 에마누엘레 페사노, 리베치오 구축함 2척 소파.
- 항공기 2대 지상에서 파괴
- 유류 탱크 파괴 및 사용불능
- 59명 사망, 600명 이상 부상
4. 수습
공습 다음 날 이탈리아 왕립해군은 피해를 입지 않은 함선을 좀 더 안전한 나폴리 항구로 이동시켰다. 나폴리 항구는 서지중해 방면에 있기에 동지중해 방면으로 함대를 보내기 위해서는 메시나 해협을 통과해야 하므로 영국령인 몰타에서 감시하기가 편리해지므로 미리 영국군이 이탈리아 함대의 행동을 예측하고 대응하기에 편리해졌다.#1타란토 공습으로 이탈리아 왕립해군의 전함 3척이 무력화되었다. 리토리오급 전함 1번함 리토리오는 1차 공격에서 2발, 2차 공격에서 1발의 어뢰를 맞았으며, 가장 큰 피해를 준 것은 첫 번째 어뢰였다. 해당 어뢰는 우현 함수쪽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는데, 함체 표면뿐만 아니라 내부의 방수격벽까지 뚫어서 많은 양의 바닷물 침수를 일으켰다. 두 번째 어뢰는 좌현 함미쪽에 상대적으로 작은 구멍을 뚫었는데, 이로 인한 침수는 제한적이라서 내부의 방수구역 2개만 침수시키고 끝났으나, 폭발 충격으로 방향타 및 관련 시스템들이 고장났다. 세 번째 어뢰도 우현 함수쪽에 명중해서 비교적 큰 구멍이 뚫렸고 많은 침수가 발생했다. 그래서 침수를 막을 수 없어서 함수방향으로 기울어지면서 착저한다. 퓰리에제 시스템이 방호하는 집중방호구역이 아닌 함수나 함미같은 비장갑구획에 어뢰가 명중하면서 방수격벽이 관통되었기에 침수를 막을 수가 없었던 것도 착저의 원인이다.
여기에 더해서 1발의 어뢰를 추가로 맞았지만 불발탄이라서 그냥 우현 후미 함체에 명중흔적만 남긴 채 항구 바닥의 진흙에 파묻혔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어뢰를 남겨두고 전함을 예인할 수 없기에 불발탄 어뢰를 안전하게 해체하느라고 1개월이 소요되었으며, 리토리오가 드라이독으로 이동을 시작한 시기는 공습 후 거의 2개월이 흐른 12월 11일에서나 가능해졌다. 그래도 어뢰 3발 명중한 것과 2개월간의 침수에도 불구하고 동력기관이나 용골은 멀쩡했기에 드라이독에서 수리를 한 지 3개월만에 리토리오는 모든 수리를 마치고 1941년 3월에 현역에 복귀한다.#1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 1번함 카이오 두일리오는 어뢰 1발이 명중해서 리토리오처럼 우현 함체 옆부분에 구멍이 뚫렸다. 피격당한 후에 예인선들의 도움을 받아 얕은 모래톱에 신속하게 일부러 좌초시켜 침몰을 피했다. 모든 수리역량이 최신예 전함인 리토리오에 집중되었으므로, 좌초된 상태로 임시 수리만 마치고 1941년 1월에 다시 수면에 부상한 후에 본격적인 수리를 시작하여 1941년 5월까지 수리가 완료되었으며 어려움도 없었다.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1번함 콘테 디 카보우르는 운수가 매우 안좋았다. 리토리오급 전함 2번함 비토리오 베네토를 노린 어뢰 중 1발이 명중했는데 명중구획 자체는 퓰리에제 시스템이 방호하는 집중방호구역인 2번 주포탑 지역이지만 명중한 곳이 함체 바닥부위였고, 자기신관이 정확하게 작동하는 바람에 함체 바닥을 타격하는 버블제트 현상이 일어나면서 1발의 어뢰 명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수준의 대타격을 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함체 바닥에서 폭발한 어뢰는 함체 바닥에 대어뢰용 방어책을 겸해서 설치한 연료탱크 2개를 모두 파괴한 후 내부격벽까지 무너뜨렸다. 함체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면서 막대한 양의 침수가 발생했고 전함 전체에 정전이 발생하는 등 자력으로 회생이 어렵게 된 것이다. 덤으로 용골까지 손상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외부의 지원이 늦게 도착했다. 콘테 디 카보우르의 함장은 즉시 예인선을 보내서 카이오 두일리오처럼 근처에 있는 얕은 모래톱에 전함을 좌초시켜서 침몰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함대 사령관인 브루노 브리보네시(Bruno Brivonesi)가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하고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나중에서야 콘테 디 카보우르가 침몰하는 것을 보고 예인선을 보냈지만 이미 때가 늦어서 수심이 깊은 위치에 착저해버리면서 상갑판까지 바닷물에 잠기게 된다.
콘테 디 카보우르는 워낙 깊은 곳에 잠겼을 뿐 아니라 손상이 심해서 인양 및 수리작업에서 가장 후순위로 밀리게 된다. 몇 개월 뒤에야 구조 작업이 시작되어 먼저 주포 등 무거운 부품들을 떼어내고 함저의 구멍을 철판으로 막은 뒤 펌프로 1달 동안 1만5천톤의 바닷물을 퍼내어 1941년 6월에야 물 위로 다시 부상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그 후에 부유식 드라이도크를 동원해서 콘테 디 카보우르를 일단 올려놓고 조사를 해보니 생각보다 파손이 심하여 제대로 된 정비창인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항구인 트리에스테로 보낼 상태도 아니라는 심각한 판정결과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트리에스테로 보내기 위한 임시 수리에만 6개월이 더 걸리게 되며 간신히 트리에스테로 콘테 디 카보우르를 보냈으나 이미 이탈리아 왕국의 전황이 나빠지고 경제력과 국력이 약화되었으며 연료도 모자란데다가 수리의 난이도도 높아져서 전기 계통의 문제 등 여러가지 난관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때까지도 수리가 끝나지 않게 되었다. 그 상태로 패전을 맞이했고 1952년에 고철로 해체된다.#1
어뢰와 달리 폭탄의 경우에는 영국 해군이 투하한 250파운드 폭탄중 대부분이 불발탄이 많이 발생했기에 효과가 매우 적었다. 장갑판을 관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갑탄이나 반철갑탄 형태의 철갑폭탄들이었기에 장갑이 얇은 군함에 명중하면 불발되거나 탄미에 장착된 신관이 고장나거나 해서 불발탄이 많아진 것이다. 유류탱크의 경우에도 명중탄이 발생하고 폭발이 발생했지만 대규모 화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해당 연료탱크의 내용물이 중유라서 쉽게 발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1
5. 결과
5.1. 공습 자체는 성공
하룻밤 사이에 영국이 뇌격기 2기를 잃는 동안 이탈리아 왕립해군은 전함 3척을 잃었고, 일시적으로 영국의 지중해함대 쪽으로 세력 균형이 이동했다. 덕분에 영국 해군은 이탈리아의 주력함대에 대비해서 단일 부대를 편성하여 뭉쳐다녀야 했던 처지에서 벗어나 각각 항공모함 1척, 전함 2척으로 구성된 2개 전투단을 구성하여 좀 더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그리고 영국 해군이 투입한 전력을 감안하면 고작 항공어뢰 11발 수준의 뇌격으로 전함 3척을 처리한 것 자체가 대성공이었다. 항공어뢰는 상대적으로 일반어뢰보다 작고 가볍기 때문에 보통은 전함 1척에 항공어뢰 11발을 명중시켜도 침몰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타란토 공습의 성공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전함 3척에 준 타격이 실질적으로는 침몰이라는 것도 생각해줘야 한다. 이탈리아 왕국이 신속하게 착저하거나 좌초한 군함을 복구하는 데 성공해서 묻힌 것이지 수심이 깊은 외양에서 동일한 타격을 당했다면 3척 모두 침수를 즉시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침몰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피격된 위치가 각종 시설이 있는 항구였고 수심이 얕은 지역이었기에 살아남은 것 뿐이다.
또한 영국은 공습 바로 다음날인 11월 12일, 경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X 함대를 주축으로 호위전력이 마비된 이탈리아 수송대를 기습, 상선 4척을 가라앉히고 어뢰함 1척에 손상을 입히는 전공을 세웠다.(오트란토 해협 해전(Action in the Strait of Otranto))
이탈리아 왕립해군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고 적극적인 전투에 돌입한 데 비해 베니토 무솔리니와 갈레아초 치아노같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수뇌부들이나 루카 피에트로마르키(Luca Pietromarchi)같은 고위급 외교관들에게는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가져왔다. 이들은 곧 충격을 이겨냈지만 어두운 날(Giornata nera)이라는 표현을 일기장같은 기록에 남길 정도로 당시의 충격에 대해 상당히 심각했음을 공통적으로 언급했다.#1
5.2. 반쪽짜리 승리
그러나 영국 해군은 당초 기대했던 목표인 이탈리아 왕립해군의 활동 위축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다. 비록 전함 3척이 날라갔다고는 해도 이탈리아 왕립해군의 전함은 아직 3척이 남았고 무엇보다 중순양함이 6척이나 살아있었기에 이탈리아 왕립해군의 활동은 그다지 위축되지 않았다.대표적으로 타란토 공습 이후 불과 5일 만에 이탈리아 왕립해군의 노련한 제독 이니고 캄피오니(Campioni) 제독이 전함 2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4척의 대함대를 꾸려 출격. 몰타행 영국 호송선단을 방해하는데 성공했다.(스파르티벤토곶 해전) 결과적으로 타란토 공습은 추축국의 아프리카 호송선단 저지 임무에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탈리아는 리비아 행 호송선단을 증가시켰다. 1940년 10월부터 1941년 1월까지 이탈리아 본토에서 리비아로 향하는 해상 수송량은 월평균 49,435톤으로 증가했는데, 이는 이전 4개월 동안의 월평균 37,204톤보다 증가한 수치다.[16]
그리고 애초에 항공어뢰 11발의 공격으로 그렇게 거대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여기다 소드피시가 투하한 폭탄 대부분이 불발되었기에 타란토 공습의 전체 피해를 계산하면 생각보다는 큰 피해는 아니었다. 공습으로 영국 해군이 당초 기대했던 목표를 달성하려면 진주만 공습 수준의 대규모 공습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는 1년 뒤 이탈리아 왕립해군 잠수정 쉬레(Scire)에 탑승한 제10강습부대가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에 침투하여 영국 지중해 함대의 전함 퀸 엘리자베스(HMS Queen Elizabeth)와 밸리언트(HMS Valiant)를 대파하여 복수를 성공한다. 이게 바로 인간어뢰 작전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습격 사건이다. 이후 두 전함은 각각 9달, 6달씩 전투불능에 빠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영국군은 타란토 공습의 실패보다 이 알렉산드리아 습격(Raid on Alexandria)가 더 뼈아프다고 보았다. 비록 타란토에서 이탈리아 전함을 주저앉게 만들었지만 자신들의 전함도 똑같이 무력화되면 전략적 우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실제 타란토 공습 이후 이탈리아는 패기 넘치게 계속 북아프리카 전역에 대한 보급을 하면서도 몰타섬으로 가는 영국 수송선단을 잡아내기도 하는 여유있는 척을 했지만, 반대로 영국은 항구에서 무력화된 전함 2척이 멀쩡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17]
결국 이탈리아가 항복할 때까지 영국은 지중해 전체의 제해권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그나마 1941년 마타판곶 해전에서 중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을 거의 손실없이 잡는 대승을 거두면서 2개월 정도의 평화(?)를 얻긴 하였다. 하지만 그 직후 크레타 섬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역, 몰타 항공전을 통해 독일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고, 이탈리아 왕립해군도 자국 공군과 독일군과 협력하여 영국군의 호송 작전을 다시 방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국 해군 당국은 타란토 공습이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왕립해군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녹아웃을 먹이는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18] 그리고 1년 뒤, 영국 해군은 Z 함대를 싱가포르에 보내기 위해 함대를 구성하면서, 타란토 공습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탓에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수 없어 처칠의 안을 수용하고, 이로 인하여 영국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 중 하나인 말레이 해전이 벌어진다. 이에 격분한 영국 수뇌부는 지중해 항로를 다시 열기 위해 몰타를 사수하라고 지시하였고, 제3차 몰타 항공전의 막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윈스턴 처칠은 제3차 몰타 항공전 내내 북아프리카에서 방어전을 고수하던 클로드 오킨렉을 잘라버리고[19] 해롤드 알렉산더와 버나드 몽고메리를 부임시킨다.[20]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타란토 공습 이전 항공 어뢰 전문가들은 적어도 수심 23미터가 확보되어야 선박에 대한 어뢰 공격이 가능하다고 평가했었다. 타란토 항구의 수심은 12미터에 불과했으나, 영국 해군은 어뢰가 지나치게 잠수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후 일본 제국 해군은 타란토 공습을 면밀히 연구해서 이듬해 미국 해군을 겨냥한 진주만 공습에 제대로 활용했다. 특히 항공어뢰가 과도하게 잠수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나 미국 해군의 예상 출격범위 밖에서 출격을 감행한 것등에서 타란토 공습의 흔적이 엿보인다. 다만 진주만 공습은 미군의 삽질도 어느 정도 적용했으며 일본 제국 해군이 독자적으로 연구해서 자신들이 보유한 고속 함재기에 걸맞는 항공어뢰 침몰방지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고안해서 적용하는 등 타란토 공습보다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6. 매체에서의 모습
- 모바일 게임 벽람항로에서는 '신성한 프렐류드'의 A구역 파트는 타란토 공습을 포함하여 영국과 이탈리아 해군의 전투를 모태로 했다. 실제 역사의 이탈리아 제국을 모티브로 한 사디아 제국의 입장에서 공격을 막아내는데, 공습이라는 점을 반영했는지 지속적으로 비행기가 아군 항구를 노리고 들어온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1940년 7월 5일 벌어졌는데, 이탈리아군이 프랑스의 영국 기습에서 얻은 전훈과 캄피오네 제독의 존재로 원 역사와 달리 서치라이트를 동원해서 소드피시를 7대나 격추시켰으며[21] 피해도 훨씬 적었다. 하지만 유류 탱크가 날아간 데다 리토리오의 중파는 해결하지 못했다.
7. 같이 보기
- 진주만 공습: 타란토 공습으로부터 13개월 후 벌어졌다. 그럼에도 타란토 공습보다도 유명해진, 항공모함에 의한 함대 공습의 대표격 사례가 되었다.
- 구레 군항 공습: 일본군 전력이 육군이든, 해군이든 거의 거덜나고 있었던 차에 철저하게 은닉된 함정(준요라든지...)을 제외한 잔존 전력에 대한 확인사살이다.
[1]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2] 리토리오, 비토리오 베네토, 콘데 디 카보우르, 줄리오 체자레, 카이오 두일리오, 안드레아 도리아.[3] 전사자 중 27명은 콘테 디 카보우로에서 나왔고 나머지 32명은 리토리오에서 나왔다.[4] 콘테 디 카보우르는 착저, 카이오 두일리오는 좌초, 리토리오는 선수부분만 착저. 이 중 카이오 두일리오와 리토리오는 수리 후 현역에 복귀하나 손상이 심했던 콘테 디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항복 전까지 수리되지 못하고 영구적으로 현역에서 제외되었다.[5]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2척,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 2척, 리토리오급 전함 2척. 3번함 로마와 4번함 임페로는 아직 한창 건조중이었다.[6] 리토리오급 전함 3번함 로마는 1940년 시점에서는 미완공이었으므로 제외.[7] Santoni, Alberto (November 1990), "L'attacco inglese a Taranto" The English attack on Taranto, Rivista Italiana di Difesa (in Italian): 88–95[8] Stephen, Martin (1988). Grove, Eric, ed. Sea Battles in Close-up: World War 2. Volume 1. Shepperton, Surrey: Ian Allanm. pp. 34–38.[9] 방파제와 섬의 지형, 군함들의 정박 위치와 수량, 대공포와 탐조등 진지의 위치, 방공기구나 어뢰 방어망의 위치 등.[10] 그리스 공군의 요구 조건으로 소드피시는 개발할 때부터 급강하 폭격 옵션이 들어가 있었다.[11] 독일도 1917년 개발한 물건이다.[12] 조명탄 투하를 담당한 찰스 램(Charles Lamb) 대위의 표현.[13] 첫 번째는 8시에 청음소에서 뭔가 엔진 소리를 듣고 울린 공습경보로 10분 만에 종료, 두 번째는 9시쯤에 항구를 염탐하던 선더랜드 비행정의 엔진음을 듣고 울린 경보.[14] 이때 폭탄 중 하나에는 이탈리아군을 조롱하기 위해 영국 군화를 달아놨다고 한다.[15] Sturtivant, Ray (1990). British naval aviation: the Fleet Air Arm 1917–1990. London: Arms & Armour Press. pp. 48–50[16] Bragadin, Italian Navy in World War II, p. 356.[17] 다만 이탈리아는 당한 위치가 본토라서 바로 본격적인 수리에 돌입할 수 있지만, 영국은 일단 지중해에서 벗어나야 본격적인 수리가 가능해지므로 상황이 같다고 볼 수 없긴 하다.[18] Caravaggio, A.N, Lieutenant Colonel, 'THE ATTACK AT TARANTO: Tactical Success, Operational Failure', Naval War College Review, 1997.[19] 군인으로서는 좋은 판단이었을지 모르나, 지중해 항로를 다시 열어야하는 전시 내각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20] 그리고 처칠이 깨달은 것은 몽고메리 또한 오킨렉 못지 않은 옹고집이라는 것이다.[21] 한 대는 서치라이트 빛을 정통으로 맞고 균형을 잃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