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6:24:29

베오그라드 공세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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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그라드 공세
러시아어 - Белград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세르보크로아트어 - Beogradska operacija
영어 - Belgrade offensive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기간
1944년 9월 15일 ~ 11월 24일
장소

[[유고슬라비아 왕국|]][[틀:국기|]][[틀:국기|]] 전역
교전 국가 및 세력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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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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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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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밀란 네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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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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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벨리보르 요니치
결과
연합국의 승리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독일 국방군 후퇴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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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 18,838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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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왕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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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왕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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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군
불가리아 왕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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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0명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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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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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5명 사상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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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깃발 명칭
]][[독일 국방군|]]
- 전사자 불명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베오그라드 해방 전(1944/9/15~10/12일)3.2. 베오그라드 해방 (1944/10/12~10/20일)3.3. 베오그라드 해방 후 (1944/10/20~1945/5/15)
4. 결말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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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4년 9월 15일 ~ 11월 24일 나치 독일과 그 괴뢰정부인 세르비아 구국정부로부터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해방시키기 위한 연합군의 작전.

2. 배경

1941년 4월 6일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는 개전 11일 만에 독일에 항복을 선언한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에의해 4분할이 되고 크로아티아 독립국, 세르비아 구국정부를 비롯한 여러 괴뢰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국왕인 페타르 2세는 그리스를 통해 영국으로 도망을 갔고, 35만명의 포로가 발생한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은 사실상 해체가 되었다. 하지만 저항 세력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1941년 5월 4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자그레브에 모여 독일을 몰아내기 위한 봉기를 준비했다. 이윽고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진행하기 위해 세르비아 전역에 대부분 병력을 철수시키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이를 호기로 판단했다. 7월 5일 유고슬라비아 전역에 침략군에 대항하자는 라디오 방송을 함과 동시에 파르티잔들이 내려와 공장, 광물 창고를 불태우고 철도와 통신 시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나치 독일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민족 문제를 이용하기로 결심한다.[1]

먼저 유고슬라비아로 부터 독립을 하기로 원하는 우스타샤를 지원해서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2] 하지만 이는 역효과만 발생했다. 왜냐하면 유고슬라비아 내 다른 민족들은 죽지않기 위해서라도 독일과 우스타샤에 저항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독일은 이념 문제로 봉기군들을 이간질하기로 결심했다. 봉기군의 주요 세력 중 하나인 체트니크는 왕당파이자 자본주의자들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는 물과 기름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독일이 추가 병력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아 영내로 들어서고 1941년 9월 27일, 우치제 작전(Operation Uzice)을 실행. 세르비아 구국정부와 함께 본격적으로 봉기군을 소탕하기 시작한다. 독일 제113보병사단과 제342보병사단이 루드니크 산[3]를 맞이한 체트니크가 격렬히 저항하고, 독일군 10여명이 죽자 독일은 이에대한 보복으로 크랄예보와 크라구예바츠[4]에서 도합 시민 7,000여명을 처형했다. 독일의 보복으로 세르비아인들이 절멸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체트니크의 총사령관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독일과 비밀리에 접촉 파르티잔과 싸울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독일은 이에 응해 무기를 주자 체트니크는 독일군과 싸우기보다는 우스타샤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의 싸움에 열정적으로 싸웠다. 독일군, 이탈리아군, 우스타샤, 세르비아 구국정부, 체트니크의 맹공격을 버티지 못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산악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 대독 저항을 계속했다.

1942년 1월 15일 파르티잔의 새로운 본거지인 보스니아 동부 산악지대를 토벌하기 위해 동남 크로아티아 작전(Operation Südostkroatien)을 시작으로 4월 20일 트리오 작전(Operation Trio), 1943년 1월 20일 백색 작전(Gehäuse weiß), 1943년 5월 15일 흑색 작전(Gehäuse Schwarz), 12월 3일 쿠겔블리츠 작전(Operation Kugelblitz), 1944년 5월 25일 뢰셀스프룽 작전(Operation Rösselsprung)[5]을 연달아 실행했지만 티토와 그를 위시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토벌하는 것이 실패로 끝나고, 티토는 유유히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비스 섬에 터전을 잡아 대독 저항을 계속 이어나갔다.[6] 특히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이 지역의 이탈리아군이 독일군에게 항복을 하거나 몰래 빠져나가자 파르티잔들은 더더욱 활개를 쳤다.

1944년 유럽의 전세는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서유럽에는 미영연합군이 프랑스 해변 노르망디에 상륙함으로서 프랑스가 해방되기 시작했고 소련군은 전격적으로 루마니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루마니아 정부는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자 이제 독일의 승리에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소련군이 루마니아를 침공하기 전에 편을 바꾸려고 했다. 그렇지만 아직 루마니아 영내에는 친독 세력인 전위조국당이 있어서, 당시 국왕이었던 미하이 1세는 자신의 친위 부대를 동원해서 콘두커토르인 이온 안토네스쿠를 위시한 친독파를 체포 구금했다. 그 후 정식으로 소련군에게 항복 후 대독일 선전포고를 날린다. 루마니아가 연합군 편으로 돌아서자 그 이웃국인 불가리아 왕국에서도 독일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1944년 9월 6일 수도 소피아를 포함한 전국에서 휴전을 요구하는 총파업이 일어났고, 9월 8일 소련이 불가리아를 침공하기 시작하고 이에 호응해서 9월 9일 불가리아 조국전선이 쿠데타를 감행, 콘스탄틴 무라비예프[7]를 몰아내고 키몬 게오르기에프를 새로운 총리로 임명했다. 새롭게 내각이 구성이 되자 불가리아는 9월 9일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날렸다. 순식간에 2개의 동맹국을 잃게된 나치 독일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이 카르파티아산맥을 돌파하고 헝가리를 통해 독일 남부로 진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은 동부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를 방어하기 위해 E군과 제2기갑군으로 편성된 또 다른 임시 군대를 편성해서 이 지역을 사수하려고 했다.

한편 독일이 본격적으로 방어선을 건설하기 전이 기회라고 판단한 티토는 9월 21일 모스크바로 날라가 스탈린을 만나 유고슬라비아 해방을 위한 계획을 상의하기 시작한다. 계획의 목적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제1군단과 소련 제3우크라이나군단이 협력을 해서 베오그라드 해방과 동시에 그리스와 헝가리 사이의 독일 통신선을 차단하려고 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남부에서 불가리아 제2군과 유고슬라비아 제13군단이 참여해서 독일의 점령지인 그리스에서 지원이 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독일군은 그리스에서 병력을 빼내려고 시도를 했고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한 소련 제17항공군은 니시와 스코페, 크루셰보의 다리와 철교를 파괴했다. 그리고 티토와 스탈린 사이이 합의가 성공적으로 끝남에 따라 9월 15일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해방하기 위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3. 전개

3.1. 베오그라드 해방 전(1944/9/15~10/12일)

1945년 9월 15일 소련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유고슬라비아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발칸반도 방위를 담당하는 F집단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는 히틀러에게 후퇴를 건의했지만, 후퇴를 병적으로 싫어하던 히틀러에 의해 반려가 되었다. 하지만 불가리아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테살로니키와 베오그라드를 잇는 유일한 철도 노선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8] 그러자 히틀러는 후퇴를 승인했다. 하지만 이미 8월부터 바익스 장군의 독단으로 에게해에 있는 수많은 독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9월 6일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6개 사단을 항공기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9월 15일 소련 제17항공군이 폭격을 퍼붇기 시작하자 항공기로 철수하는 것을 포기하고 육로로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1944년 9월 28일 소련군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자 바익스 장군은 그리스에 있는 더 많은 부대를 베오그라드로 데려고려고 했지만 9월 19일 아테네에서 출발한 44대의 열차 중, 10월 8일까지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열차는 겨우 17대뿐이었다. 독일군과 소련군의 격렬한 전투가 돈지 밀라노바츠(Donji Milanovac)와 클로코체바츠(Klokočevac)에서 벌어졌다. 이 작은 마을들은 여러번 주인이 바뀌었지만, 불가리아 제2군이 7SS의용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을 격파하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체트니크와 세르비아 구국정부군의 혼성부대를 격퇴시켜 그리스와 베오그라드를 잇는 철도를 점령하자 이 지역 독일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러자 소련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독일군은 철수를 하기 시작하고 소련군은 맹렬하게 추격했다.

한편 불가리아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7SS의용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을 위시한 독일군 잔존 병력을 토벌하기 위해 10월 22일 크랄예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빌헬름 뮐러 보병장군은 그리스에 아직 남아있는 아군의 성공적인 후퇴를 위해 이 지역을 끝까지 사수하려고 했다. 불가리아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그리스와의 연결을 완벽하게 끊게 하기 위해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를 점령하려고 했다. 그래서 여러번 공세를 감행했지만 11월 21일까지 그 곳에 도착할 수 없었다.

한편 소련군은 10월 8일 베오그라드 남쪽을 흐르는 벨리카모라바강에 도착을 했고 도하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로 끝나고, 독일군은 소련군이 모라바 계곡을 통해 베오그라드를 공격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세르비아 동부에서 파르티잔에 의해 고립이 된 제1산악사단을 이용해 소련군을 배후에서 공격하려고 했지만 병력 부족으로 계획은 무산된다. 소련군은 모라바 계곡을 성공적으로 돌파했고, 리스코프 대위가 이끄는 부대는 돈제 리바디체 마을에 있는 유일한 다리를 점령, 벨리카 모라바강 서안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한편 부코바르로 본부를 옮긴 독일군 사령부는 아드리아해 해안에 주둔해있는 독일군을 철수시켜 즈르마냐강[9]과 그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삼아 방어전을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철수도중 유고슬라비아 8군단의 공세에 휘말려 크닌[10]일대에서 궤멸되었고, 118사단의 2개 대대만 무사히 철수하게 되었다.

지원군도 오지않고 베오그라드는 점차 고립되었다. 독일군과 체트니크는 포위당하기 전 돌파를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유고슬라비아군 12여단이 스타체보에 교두보를 마련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인해 베오그라드로 후퇴한 체트니크는 독일군의 도움을 받아 크랄예보로 후퇴했다. 10월 12일 소련의 제4근위전차군단이 나탈린치 지역을 성공적으로 점령, 베오그라드를 본격으로 점령 할 준비를 마쳤다.

3.2. 베오그라드 해방 (1944/10/12~10/20일)

벨리카모라바강에 교두보가 성공적으로 마련되자 블라디미르 즈다노프 중장이 이끄는 제4근위전차군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제1군단 일부와 철도를 따라 베오그라드를 향했다. 그리고 소련의 제15근위전차군과 제5사단 1여단은 히틀러의 창끝으로 불린 적지중심 특수부대 브란덴부르크의 진지를 향해 돌격을 했다. 이 공격의 성공으로 독일군은 두개로 나뉘게 되었고, 소련의 제21사단과 제23사단은 진지를 강화해 독일군이 다시 합치는 것을 막았다.

한편 유고슬라바아 파르티잔 소속 제36전차여단과 제4세르비아 여단,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소속 제10크라이나 여단은 토폴라[11]를 점령, 그 후 베오그라드 남동쪽에 있는 믈라데노바크를 점령해 시내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10월 14일 소련군 제4근위전차군은 베오그라드 북쪽 둑 외곽을 공격했고 유고슬라비아 제36전차 여단은 사바강 남쪽을 공격했다. 독일은 베오그라드와 스메데레보 사이 포위된 수만명의 독일군을 구하기 위해 격렬히 저항했지만 이는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소련군은 동맹국인 유고슬라비아를 배려해서 베오그라드에 크나큰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포병과 공군은 거의 전투에 개입하지 않고 7개의 공병 대대가 베오그라드에 있는 건물을 수색했다. 결국 10월 20일 칼레메그단 요새에 있던 마지막 독일군이 항복해 베오그라드는 마침내 해방되었다.

3.3. 베오그라드 해방 후 (1944/10/20~1945/5/15)

베오그라드 점령 후 소련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그리고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에 있던 독일군과 우스타샤, 그리고 체트니크를 하나 둘 소탕하기 시작했다. 베오그라드가 점령당하자 이에 놀란 독일군은 대량의 물자를 남기고 크로아티아로 후퇴했다. 결국 소련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다뉴브강과 드라바강 사이인 바라냐[12]에 도착했다. 이는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이 헝가리 공략을 준비한다고 군을 빼자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잠시 휴식을 한 뒤 겨울이 되자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달마티아 해안을 공격했다. 독일의 몰락이 다가온 1945년 80만명이 넘는 유고슬라비아군과 파르티잔은 독일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점령한 시르미아[13]를 공격했다. 4월 초 사라예보를 점령한 유고슬라비아는 전쟁 전 이탈리아의 영토였던 피우메[14]를 공격했다. 독일군과 살로공화국군 27,000명이 처절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영국이 트리에스테에 먼저 들어가기 전에 먼저 피우메를 점령해야한다면서 전쟁이 끝나감에도 티토는 계속 공격을 감행했다. 그 대가로 도시의 기반 시설이 거의 파괴되고, 당시 시내 5,400채의 건물 중 2890채가 파괴되었다. 결국 독일이 항복하기 사흘 전인 5월 3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피우메에 입성했고 전후 이 도시는 유고슬라비아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영국을 먼저 제치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트리에스테를 점령했고, 다들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독일이 항복하고 날이 지난 5월 14일 독일군과 크로아티아군과 체트니크, 슬로베니아 영토방위군 그리고 독일의 협력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영국에 항복하고 싶었다. 티토는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분노에 차있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이를 듣지않고 약식 처형을 했다. 그래서 폴라냐에서 소규모의 교전이 발생했다. 병사들은 오스트리아로 길을 내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했고, 이는 5월 15일 아침 영국군 전차 20여대가 도착에 이들 사이를 중재함으로써 마침내 2차 대전은 막을 내렸다.

4. 결말

티토는 이 전투를 기반으로 유고슬라비아의 실권자가 되었고, 또한 유고슬라비아 안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통치자로 이미지메이킹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그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건국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한다. 또한 그가 비록 소련군의 도움을 받았지만 동등한 자격으로 싸움으로 인해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제3세계의 맹주이자 독자적인 공산주의 국가가 될 수 있었다.

5. 여담

  • 베오그라드가 독일에 의해 해방이 된 10월 20일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의 국경일이 되었다.
  • 폴라냐 전투에서 항복한 추축군 군인들과 민간인 협력자들은 유고슬라비아로 강제로 송환돼서, 즉결처형을 당하거나 노동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하게 되었다.

[1] 독일이 침공하기 전부터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민족 문제로 골치를 겪고 있었다.[2] 총으로 쏴 죽이거나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고, 심지어 우스타샤 신병에게 팔다리를 묶은 세르비아인 또는 유태인들을 배를 갈라 죽이게 하는 시험을 보게 했다고 한다.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잔혹행위를 하기도 했다[3] 해발 1,132m의 산으로 구리와 아연이 많이 있다.[4] 현재 세르비아에서 인구가 4번째로 많은 도시[5] 우치제 작전에서 시작해서 뢰셀스프룽 작전까지 추축군이 파르티잔 토벌하기 위한 일곱번의 공세를 통칭 칠적공세라 부른다.[6] 윈스턴 처칠은 티토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고문단을 보내었는데 그 중 한명이 윈스턴 처칠의 아들인 랜돌프 처칠이었다.[7] 그는 쿠데타가 일어나기 7일 전인 9월 2일에 제31대 불가리아 총리가 되었다.[8] 이 철도는 그리스 전체 추축군에게 가장 중요한 보급선이다.[9] 크로아티아 리예카 남부와 달마티아 북부를 흐르는 강[10] 크로아티아 동부 도시로 유고 내전 당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였다.[11] 베오그라드 근교 도시로 세르비아 공국의 건국자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가 오스만 제국에 저항한 제1차 세르비아 봉기를 일으킨 도시[12]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경 지대[13]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있는 남부 판노니아 평원 지역[14]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의 리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