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945년 프라하에서 일어난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봉기를 다룹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봉기에 대한 내용은 프라하의 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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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d52b1e><colcolor=#FFF> 성격 | 나치 독일의 괴뢰국 |
성립 배경 | 러시아 내전 | 제2차 세계 대전 | 독소 전쟁 | |
주요 이념 | 파시즘 | 반소주의 | 반자본주의 | 러시아 내셔널리즘 | |
주요 인물 | 요제프 괴벨스 | 하인리히 힘러 | 헬무트 폰 판비츠 | |
안드레이 블라소프 | 표트르 크라스노프 | 표도르 아브라모프 | 세르게이 부냐첸코 | 표도르 트루힌 | 이반 코노노프 | 미하일 스코로두모프 | 보리스 시테이폰 | ||
군사조직 | 러시아 해방군 | 15 SS 카자크 기병군단 | 러시아 보호군 | |
주요사건 | 러시아 해방운동 | 프라하 봉기 | 소련의 나치 독일 부역자 재판 | }}}}}}}}} |
프라하 봉기 Pražské povstání Prague uprising |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킨스키 광장에서의 러시아 해방군 소속 T-34-76 | |||
날짜 | 1945년 5월 5일 ~ 9일 | ||
장소 |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프라하 | ||
원인 | 소련군의 프라하 교외 진격 미 제3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입 나치 독일 당국의 학정 | ||
교전 세력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러시아 해방군| ]] |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 저항군[[틀:깃발| | ]][[틀:깃발| ]][[무장친위대| ]]||
지휘관 | |||
[[틀:깃발|카렐 쿠틀바시르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프란티셰크 슬루네치코 [[틀:깃발| ]][[틀:깃발| ]][[세르게이 부냐첸코| ]] | ]][[틀:깃발|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루돌프 투생 [[틀:깃발| ]][[틀:깃발| ]][[카를 프리드리히 그라프 폰 퓌클러-부르크하우스| ]] | ]][[틀:깃발| ]][[카를 헤르만 프랑크| ]]||
병력 | |||
[[틀:깃발| 30,000명 [[틀:깃발| ]][[틀:깃발| ]][[러시아 해방군| ]] 제1보병사단 18,000명 전차 ?대 | ]][[틀:깃발| ]][[틀:깃발| ]] 저항군[[틀:깃발| 40,000명 전차 ?대 항공기 ?기 | ]][[틀:깃발| ]][[무장친위대| ]]||
피해규모 | |||
[[틀:깃발| 3,000명 부상 [[틀:깃발| ]][[틀:깃발| ]][[러시아 해방군| ]] 300명 사상 | ]][[틀:깃발| ]][[틀:깃발| ]] 1,694~2,898명 전사[[틀:깃발| | ]][[틀:깃발| ]][[무장친위대| ]] 380~953명 전사||
결과 | |||
체코슬로바키아 저항군과 러시아 해방군, 나치 독일과 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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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5년 5월 5일부터 5월 8일까지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프라하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발생한 체코 저항군의 봉기. 러시아 해방군도 봉기에 가담했다. 봉기 자체는 휴전으로 끝났지만, 이반 코네프가 지휘하는 제1우크라이나전선군과 로디온 말리놉스키가 지휘하는 제2우크라이나전선군이 각각 북쪽과 동쪽에서 프라하 방면으로 공세를 펼쳐 동월 11일에 해방시켰다.2. 발단
1938년 10월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가 독일계 다수지역이라는 이유로 병합했다. 1939년 3월에는 한발 더 나아가 체코 전역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병합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인들을 인종적으로 아리아인으로 여겨 체코인들을 동화대상으로 여겼지만 전쟁이 격화되자 그 대우는 계속해서 떨어졌다.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벌여 유대인을 학살하고 체코인에게 동화 정책과 강제노동을 강요했다. 특히 질서경찰국장이자 나치당 핵심 간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하자, 히틀러는 그 분풀이를 체코인들에게 풀기도 했다.이후 1945년이 되자 독일의 패색은 매우 짙게 되었다. 서부연합군은 라인강을 건너 루르 지역을 포위하고 있었고, 소련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고, 독일령 오스트마르크로 향했다. 특히 4월 4일 나치 독일의 괴뢰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수도 브라티슬라바가 점령되고, 이어 4월 15일 빈이 점령되자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은 소련군의 공세에 노출되었다. 특히 소련의 스탈린은 중부 유럽의 중요한 도시인 프라하를 점령하길 원했고, 결국 베를린 다음으로 중요한 목표물이 되었다. 그건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동쪽에서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격하고, 서쪽에서는 5월 4일 조지 S. 패튼 휘하의 미 제3군이 체코 지역에 진입하게 되자, 체코 저항군은 프라하를 자력으로 해방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3. 전개
소련군과 미군이 양쪽에서 압박을 하는 가운데, 먼저 선수를 친 것은 미군이었다. 미군은 이미 체코슬로바이키아와 가까운 바이에른 지역의 도시 뮌헨과 뉘른베르크에 있었다.[1] 미 육군 제3군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의 중요 요충지 플젠으로 향했다. 그러자 4월 30일과 5월 1일, 두 번에 걸쳐서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 카를 헤르만 프랑크는 봉기를 하면 "폭동을 일으킨 자는 피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다."라고 경고하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하지만 프라하 시민들은 이 경고를 무시했다. 이미 7,500여 명의 파르티잔들이 독일군 보급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 프라하를 노리기 시작하자, 양측이 충돌할까 봐 염려한 아이젠하워는 소련군과 협상을 했다. 이는 당시 체코를 공격하려던 미국의 오마 브래들리 장군, 그리고 소련의 이반 코네프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베를린이 함락되던 5월 5일 양국이 협상해서 프라하 공략은 소련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다.양국이 협상하던 5월 5일 체코 라디오의 아침 방송을 기점으로 봉기가 시작되었다. 저항군들은 곧장 게슈타포와 질서경찰 본부를 점령하고 프라하 시청을 점령하러 갔다.[2] 도시 곳곳에 있는 독일군이 무장해제되었고, 무기고를 털어 중무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보헤미아-모라비아 공국 총리였던 리처드 비에네트[3]를 시청 방송실에서 잡은 저항군은 항복 방송을 강요했다. 5월 6일 아침까지 저항군은 1,000여 개가 넘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했고 시의 절반을 장악할 수 있었다. 도시 전역에 퍼져 있던 독일 수비대가 포위되었다. 이에 독일군은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5월 7일 미군이 플젠을 점령하자 저항군은 미군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저항군은 미국과 소련의 비밀 협정에 대해 잘 몰라서 이들이 여기서 진격을 멈출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나치의 무장친위대는 중화기와 전차, 폭격기를 동원해 프라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프라하의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피해를 보았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독일군은 몇 대의 대전차 무기와 약간의 탄약만 보유한 저항군보다 우위를 점했다.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무장친위대 사령관인 칼 폰 퓌클러-부르크하우스는 소이탄을 동원해서 저항군을 무참하게 학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반 코네프 휘하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은 엘베강 좌안을 따라 공세를 하기 시작했다. 뢰바우[4]와 괴를리츠를 점령한 소련군은 이어서 도자기로 유명한 마이센을 점령했다. 그리고 일부 병력을 드레스덴을 포위하는 데 보낸 뒤 계속해서 프라하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또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지휘하는 제2우크라이나전선군도 모라비아의 중심도시 올로모우츠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협공을 받자 독일 육군 제49산악사단의 칼 폰 르 쉬어 장군은 버티지 못하고 프라하를 향해 철수했다. 독일군이 프라하로 후퇴하는 사이, 프랑스 랭스에서 알프레드 요들이 항복문서에 서명하자 프라하에 있던 독일군은 미군에 항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군은 카를로비바리[5]를 마지막으로 진군을 멈추었다. 5월 8일 드레스덴을 함락시킨 소련군은 모든 병력을 모아서 프라하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자 소련군에 포로로 잡힐까 봐 두려워한 독일군은 서쪽으로 달아나기로 결정한다. 그때 반공성향의 러시아 해방군이 다른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이들은 저항군을 도와주는 대가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망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저항군과 합세해서 독일군을 토벌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프라하 지척에 도달하고, 대다수가 친소성향이던 저항군은 이들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 사이 독일 프라하 주둔 사령관이었던 루돌프 투생은 저항군과 협상을 시작했다. 서부로 도망치는 대가로 체코의 도시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결국 합의가 성사되자 독일군은 미군이 있는 플젠으로 도망가기 시작했고, 일이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 러시아 해방군도 독일군을 따라서 서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5월 9일 새벽 소련군의 전차부대는 프라하에 입성했다, 이날 오전 10시경 프라하는 독일군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다. 한편 분노에 찬 체코인들은 이들이 얌전히 미군에게 항복하도록 두지 않았다. 독일 군인, 독일 민간인, 프라하를 탈출한 체코 협력자들은 체코 저항군이 공격했다. 그들의 의도나 국적에 관계없이 도망가는 독일군에 대한 적대 행위를 재개했으며, 1945년 5월 무기를 내려놓은 제20무장척탄병사단의 참전 용사들은 이를 체코 지옥 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무사히 미군에 항복하였지만 러시아 해방군 및 독일군 일부는 소련에게 넘겨져 시베리아로 끌려가거나 처형당했다.
4. 결말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 이후 처음으로 독일 점령체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1945년 7월 소련에게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를 양도함에 따라 전쟁 전 국경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소련군은 1945년 말까지 떠나기로 약조했다. 이 두 국가는 떠났지만 전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군대에는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는 미국과 달리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프라하를 온전하게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948년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가 일어나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이 지배하게 되었다.[1] 전후 주테텐란트에서 쫓겨난 독일인들이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지대인 바이에른에 주로 정착했다.[2] 그 사이 체코의 크비슬링이라 부르던 에마누엘 모라베츠는 체코 시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라디오 방송국으로 향하던 도중 차의 연료가 떨어져 오도가도 하지 못하자 자살했다.[3] 독일과의 협력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조기석방이 되었고, 석방 2년 후 지병으로 사망했다.[4] 독일의 유명 피아노 회사 아우구스트 횔스터의 본사가 있는 도시다.[5] 체코 서부 보헤미아 지방의 카를로비바리 주에 있는 도시이다. 체코에서 가장 유명한 온천 휴양지로 큰 온천이 13개, 작은 온천이 300여 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