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랸스크 공세 영어: Bryansk Offenise 러시아어: Брянская операция[1]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지도 우측 오룔 돌출부에서 하겐 방어선을 거쳐 소즈강의 판터 방어선까지 진격하는 소련군[2] | ||
시기 | ||
1943년 8월 17일 ~ 10월 3일 | ||
장소 | ||
브랸스크 근방 독일군 하겐 방어선 일대 | ||
원인 | ||
브랸스크 탈환 시도 소련군의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단절 시도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알렉산드르 고르바토프| ]] (제3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이반 바그라먄| ]] (제11근위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이반 페듀닌스키| ]] (제11군 사령관) | ]][[틀:깃발| ]][[마르키안 포포프| ]][[틀:깃발| (중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발터 모델| ]] (제9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쿠르트 폰 티펠슈키르히| ]] (제12군단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요하네스 프리스너| ]] (제23군단 사령관) | ]][[틀:깃발| ]][[귄터 폰 클루게| ]]
결과 | ||
소련군의 승리 | ||
영향 | ||
독일 제9군이 판터-보탄 방어선으로 퇴각 독일군이 소즈강 동안지역 상실 | ||
전력 | [[틀:깃발| 병력 530,000명 | ]][[틀:깃발| ]][[틀:깃발| ]] 브랸스크 전선군[[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 9군
피해 규모 | 전사/실종 13,033명 부상 43,624명 | 전사 3,394명[3] 실종/포로 1,901명 부상 12,688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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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랸스크 공세는 쿠투조프 작전에서 하겐 오룔 돌출부를 제거하고 하겐 방어선에 도달한 소련군이 독일군을 소즈강-드네프르강으로 이어지는 판터-보탄 방어선으로 밀어내는 여러 공세 중 하나[4]였으며 브랸스크 전선이 9군을 상대로 진행했다. 비록 독일군이 자발적으로 후퇴한 영향이 크긴 해도 소련군은 브랸스크를 탈환하고 소즈강(Sozh)[5]까지 광활한 지역을 탈환할 수 있었다.2. 전투 서열
2.1. 소련군[6]
- 브랸스크 전선군 ( 사령관 : 마르키안 포포프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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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독일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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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겐 방어선
쿠투조프 작전으로 독일군이 오룔 돌출부를 포기하고 하겐 방어선으로 물러났다. 하겐 방어선은 지즈드라에서 솁스크까지 이어져 있었다. 방어선의 중간지점에 브랸스크가 있었는데 전방 방어선은 브랸스크에서 동쪽으로 불과 20km 떨어져 있었으며 2기갑군이 동부전선에서 철수하여 발칸반도로 이동하면서 2기갑군의 담당 구역은 9군이 담당하게 되었다.[8]하겐 방어선을 돌파하여 브랸스크를 탈환하고 공세를 이어나갈 임무는 브랸스크 전선군에게 하달됐다. 브랸스크 전선군은 쿠투조프 작전이 끝나기도 전인 8월 17일부터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으며 전선군 우익에서는 서부 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이 8월 7일부터 수보로프 작전을 진행중이었고 전선군 좌익에서는 8월 23일까지 벨고로드-하리코프 공세[9]을 마무리한 보로네시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에 중부 전선군이 가세하여 체르니코프-폴타바 공세를 26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브랸스크 전선군의 초기 공세는 9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26일에 중단됐다.
4. 브랸스크 탈환
브랸스크 전선군의 2차 공세는 9월 1일부터 다시 시작됐다. 이 시점에서는 남쪽에서의 공세들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포포프는 전선군 제일 좌익의 63군을 선두로 공세를 시작했다. 9군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격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특히, 9군 우익의 남부집단군은 정말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8월 4일부터 9월 8일까지 중부 집단군에서 남부 집단군으로 11개 사단[10]이 이동했지만 이걸로도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두 집단군을 연결하던 2군과 4기갑군의 연결은 이미 끊긴지 오래였고 독일군의 주의가 남쪽에 쏠리자 9월 7일부터 전선군 우익의 50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독일군 방어선은 무너졌고 소련군은 데스나 강에 도달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전선군 중앙의 3군과 11군도 공세를 이어나갔고 소련군은 9월 17일에 브랸스크를 탈환했다.4.1. 판터-보탄 방어선
9월 8일부터 14일까지 중부 집단군은 남쪽으로 또다시 5개 사단[11]을 지원했지만 소련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고 4기갑군의 전선은 3개로 분할되어 버렸다. 4기갑군은 이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고 남부 집단군은 4기갑군 지원이 문제가 아니라 중부 집단군과의 연결조차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클루게와 만슈타인은 당장 소즈강-드네프르강으로 이어지는 판터 방어선으로 물러나야한다고 주장했다.4기갑군 전선이 붕괴되면서 2군 역시 계속 서쪽으로 물러나야했는데 그렇게 남겨진 구역은 9군이 고스란히 담당해야 했으며 북쪽의 4군 역시 소련군의 압박에 밀려나면서 9군의 전선은 또다시 돌출부가 되었고 브랸스크는 그 중에서도 가장 동쪽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9군은 비교적 성공적인 방어를 하고 있었으나 데스나 강 곳곳에서 소련군이 방어선을 돌파하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동부 전선 독일군 전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후퇴는 불가피했고 16일에 히틀러가 마침내 판터 방어선으로의 후퇴를 허가하면서 9군 역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20일부터 브랸스크 전선군이 추격을 시작했으나 독일군은 10월 2일까지 계획대로 소즈강을 건너 방어선으로 물러났다. 소련군은 고멜 근처에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 그나마 거둔 성과였다.
5. 결과
브랸스크 전선군의 공세는 강력한 전력을 보유중이던 9군의 전력이 타 전역으로 이동하기 힘들도록 만들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남쪽에서의 공세가 큰 성공을 거두자 소즈강까지 서쪽으로 약 250km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동 시기 펼쳐지던 타 공세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진격한 것과 대비해보면 피해 역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12] 또한 브랸스크를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브랸스크 전선군은 임무를 완수하고 해체됐다.전선군 휘하의 3군, 11군, 50군 ,63군은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4전차군은 스타브카 예비로 이동했으며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부는 발트 전선군으로 개칭됐다가 20일에 다시 제2 발트 전선군으로 바뀌면서 11근위군, 15항공군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제2 발트 전선군은 북서 전선군[13]과 제1 발트 전선군[14] 사이에 배치되어 제1 발트 전선군으로부터 3충격군, 남쪽에 있다가 잠시 예비로 빠져있던 6근위군, 북서 전선군으로부터 22군을 배속받게 된다.
[1] 브랸스크 작전[2] 지도 중앙의 1번 화살표를 따라 오룔 돌출부를 제거한 것은 쿠투조프 작전이고 이후 브랸스크 전선군이 2번 화살표를 따라 하겐 방어선을 돌파하여 브랸스크를 탈환하고 3번 화살표를 따라 후퇴한 독일군을 따라 소즈강의 판터 방어선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브랸스크 공세다.[3] 독일 측 인명피해는 8월 21일부터 9월 30일까지 9군이 OKH에 보고한 수치[4] 나머지는 수보로프 작전[5] 드네프르 강과 데스나 강 사이에 있으며 드네프르 강에 훨씬 가깝다.[6] 9월 1일 기준[7] 9월 5일 기준[8] 돌출부를 포기하면서 전선이 짧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다.[9] 루먄체프 작전[10] 2개 기갑사단, 2개 기갑척탄병사단, 7개 보병사단[11] 1개 기갑사단, 1개 기갑척탄병사단, 3개 보병사단[12] 다만 브랸스크 전선군이 직전에 진행한 쿠투조프 작전은 타 작전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으며 브랸스크 공세는 독일군의 자발적 후퇴로 인해 피해가 적어진 것도 있다.[13] 11월 20일에 해체되고 휘하 부대들은 제2 발트 전선군과 스타브카 예비로 이동했다. 사령부는 후방에 잠시 빠져있다가 44년 2월에 제2 벨로루시 전선군 사령부가 되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한다.[14] 10월 20일에 칼리닌 전선군에서 개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