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란드 공세 러시아어: Земланд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1] 영어: Samland Offenise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동프로이센 공세의 일부 | ||
▲ 동프로이센에서 최후의 공세를 펼치는 소련군 | ||
시기 | ||
1945년 4월 13일 ~ 25일 | ||
장소 | ||
나치 독일 동프로이센주 삼란드 반도 서부 | ||
원인 | ||
삼란드 반도에 있는 독일 국방군 잔존 세력 제거 시도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잼란트 방면군 사령관) | ]][[틀:깃발| ]][[이반 바그라먄| ]][[틀:깃발| (동프로이센군 사령관) | ]][[틀:깃발| ]][[틀:깃발| ]]디트리히 폰 자우켄
결과 | ||
소련군의 승리 | ||
영향 | ||
독일 국방군이 비스툴라곶으로 밀려남 북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마지막 공세 종료 | ||
전력[2] | 병력 110,000명 야포 3,000문 전차 824대 | 병력 65,000명 야포 1,200문 전차 166대 |
[clearfix]
1. 개요
삼란드 공세 혹은 젬란트 공세는 북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마지막 공세[3]이면서 마지막 대규모 전투이다. 이 공세는 동프로이센 공세의 마지막 단계였으며 소련군의 공세로 독일군은 삼란드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이후 동프로이센 지역의 유일한 독일군 부대인 동프로이센군은 헬라 반도와 비스툴라 사주에 갇혀서 종전을 맞이하게 되며 동프로이센을 차지한 소련은 칼리닌그라드주를 설치하여 영구히 차지하게 된다.2. 전투 서열
2.1. 독일군[4]
- 육군최고사령부 ( 사령관 : 아돌프 히틀러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동프로이센군[5] ( 사령관 : 디트리히 폰 자우켄 기갑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102보병사단
- 제10자전거여단
- 제9군단
- 제14기갑척탄병사단
-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 제551국민척탄병사단
- 제95보병사단
- 제93보병사단
- 제505중전차대대
- 제511중전차대대
- 제26군단
- 제28엽병사단
- 제58보병사단
- 제1보병사단
- 제21보병사단
- 제5기갑사단
- 제561국민척탄병사단
- 필라우 사령부[6]
- 제6군단
- 제18산악군단
- 제23군단
- 헬라 사령부
}}}
}}} - 공군최고사령부 ( 사령관 :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동프로이센 공군 사령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8대공포사단
- 제6항공여단
- 동프로이센 전투항공여단
}}}
}}}
2.2. 소련군[7]
- 제3벨로루시전선군[8] ( 사령관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연방 원수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전선군 직할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2근위전차군단
- 제4근위전차여단
- 제25근위전차여단
- 제26근위전차여단
- 제4근위차량화소총여단
- 제401근위자주포연대
- 제1500자주포연대
- 제124소총군단
- 제51소총사단
- 제208소총사단
- 제216소총사단)
- 제10돌파포병사단
- 제15돌파포병사단
- 제48대공포사단
- 제13근위포병여단
- 제16근위대전차포병여단
- 제16대전차포병여단
- 제47대전차포병여단
- 제50대전차포병여단
- 제13차량화공병여단
- 제2근위전차여단
- 제120전차여단
- 제213전차여단
- 제66근위중전차연대
- 제75근위중전차연대
- 제77근위중전차연대
- 제81근위중전차연대
- 제82근위중전차연대
- 제337근위중자주포연대
- 제340근위중자주포연대
- 제343근위중자주포연대
- 제345근위중자주포연대
- 제373근위중자주포연대
- 제395근위중자주포연대
- 제1050자주포연대
- 제1294자주포연대
}}} - 제1항공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6폭격항공군단
- 제326폭격항공사단
- 제334폭격항공사단
- 제6근위폭격항공사단
- 제276폭격항공사단
- 제1근위돌격항공사단
- 제182돌격항공사단
- 제277돌격항공사단
- 제311돌격항공사단
- 제129전투항공사단
- 제130전투항공사단
- 제240전투항공사단
- 제303전투항공사단
- 제330전투항공사단
- 제213야간폭격항공사단
- 제406야간폭격항공연대
}}} - 제3군
- 제5군
- 제31군
- 제48군
- 젬란트[9] 방면군 ( 사령관 : 이반 바그라먄 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방면군 직할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전차군단
- 제89전차여단
- 제117전차여단
- 제159전차여단
- 제44차량화소총여단
- 제354근위중자주포연대
- 제1437자주포연대
- 제1514자주포연대
- 제2돌파포병사단
- 제3근위돌파포병사단
- 제45대공포사단
- 제35대전차포병여단
- 제46대전차포병여단
- 제7근위박격포여단
- 제5근위차량화공병여단
- 제9교량여단
- 제43근위중전차여단 가드
- 제35근위중전차연대
- 제76근위중전차연대
- 제350근위중자주포연대
}}} - 제2근위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150포병여단
- 제1근위대전차포병여단
- 제14대전차포병여단
- 제30공병여단
- 제1490자주포연대
- 제11근위소총군단
- 제2근위소총사단
- 제3근위소총사단
- 제32근위소총사단
- 제60소총군단
- 제154소총사단
- 제251소총사단
- 제334소총사단
- 제103소총군단
- 제115소총사단
- 제182소총사단
- 제325소총사단
- 제11근위군 ( 사령관 : 쿠즈마 갈리츠키 상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2대공포사단
- 제12근위포병여단
- 제149포병여단
- 제106고력곡사포여단
- 제21대전차포병여단
- 제23대전차포병여단
- 제29중박격포여단
- 제21근위박격포여단
- 제9돌격공병여단
- 제66공병여단
- 제23근위전차여단
- 제260근위돌파전차연대
- 제338근위중자주포연대
- 제348근위중자주포연대
- 제8근위소총군단
- 제5근위소총사단
- 제26근위소총사단
- 제83근위소총사단
- 제16근위소총군단
- 제1근위소총사단
- 제11근위소총사단
- 제31근위소총사단
- 제36근위소총군단
- 제16근위소총사단
- 제18근위소총사단
- 제84근위소총사단
- 제3항공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3근위폭격항공사단
- 제314야간폭격항공사단
- 제211돌격항공사단
- 제335돌격항공사단
- 제259전투항공사단
- 제6근위돌격항공연대
- 제11전투항공군단
- 제5근위전투항공사단
- 제190전투항공사단
- 제39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67대공포사단
- 제139포병여단
- 제28근위전차여단
- 제32공병여단
- 제378근위중자주포연대
- 제735자주포연대
- 제927자주포연대
- 제1197자주포연대
- 제5근위소총군단
- 제17근위소총사단
- 제19근위소총사단
- 제91근위소총사단
- 제94소총군단
- 제124소총사단
- 제221소총사단
- 제358소총사단
- 제113소총군단
- 제192소총사단
- 제262소총사단
- 제338소총사단
- 제43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4근위중포사단
- 제37근위포병여단
- 제8중박격포여단
- 제153전차여단
- 제4돌격공병여단
- 제28공병여단
- 제1402자주포연대
- 제1491자주포연대
- 제13근위소총군단
- 제24근위소총사단
- 제33근위소총사단
- 제87근위소총사단
- 제54소총군단
- 제126소총사단
- 제235소총사단
- 제263소총사단
- 제90소총군단
- 제26소총사단
- 제70소총사단
- 제319소총사단
- 제50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144포병여단
- 제2근위차량화돌격공병여단
- 제50공병여단
- 제1444자주포연대
- 제69소총군단
- 제110소총사단
- 제153소총사단
- 제324소총사단
- 제81소총군단
- 제2소총사단
- 제307소총사단
- 제343소총사단
}}}
}}}
}}}
}}}
}}}
}}}
}}}
}}}
3. 1945년 봄의 북부 전선
4월 2일에 북부 집단군이 해산되고 4월 7일에 4군이 2군에 흡수되고 2군이 동프로이센군으로 개칭되면서 동프로이센군이 육군최고사령부 직할로 동프로이센과 서부 포메른에 있던 남은 독일군을 모두 지휘하게 됐다. 이 시점에서 소련군은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이 단치히 포위전에서 단치히를 점령하고 베를린 공세를 위해 서쪽으로 이동한 상태였으며 단치히-비스툴라곶으로 이어지는 구역은 제3벨로루시전선군이 인수했다. 동프로이센에서 독일군이 보유한 최후의 구역인 삼란드는 2월 24일부터 제3벨로루시전선군에 배속되어 젬란트 방면군이 된 제1 발트 전선군이 배치되어 동프로이센 공세를 마무리 지을 마지막 공세를 준비했다.4월 초에 동프로이센과 포메른에 있는 독일군은 전부 동프로이센군에 배속되어 있었으며 휘하에 7개 군단 및 군단급 부대가 있었다. 헬라 사령부는 헬 반도에, 제23군단과 제18산악군단은 단치히와 비스툴라 사주 사이에, 필라우 요새 사령부와 6군단은 비스툴라곶 일대에, 제9군단과 제26군단은 삼란드 서부에 배치되어 있었다.
4. 전개
소련군은 북쪽에서는 제2근위군과 제43군이 제9군단을 상대로 조공을 펼칠 예정이었고 주공은 남쪽에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 전투를 방금 마치고 온 제39군과 후방에 있던 제50군이 제26군단을 돌파하여 피슈하우젠[10]에 도달해 두 개 군단의 후방을 차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39군 후방에는 역시 막 쾨니히스베르크 전투를 치른 11근위군이 대기중이었다.독일군이 항복을 거부하면서 바그라먄은 13일부터 공세를 시작했다. 압도적인 전력 차 때문에 독일군은 손쉽게 무너졌다. 제2근위군은 제551국민척탄병 사단을, 데43군은 제93보병사단과 제511중전차대대를 해안으로 밀어냈다. 남쪽에서도 소련군은 16일에 피슈하우젠에 도달하면서 제26군 오른쪽의 제5기갑사단과 제28경보병사단은 페이세 반도에 갇혀 섬멸됐다.
전선이 완전히 돌파되자 바그라먄은 20일에 제11근위군을 투입했고 비스툴라 사주의 입구인 텐키튼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으나 22일에 제16근위소총군단을 앞세운 소련군이 점령했고 25일에 필라우 요새에 도달하여 하루종일 싸운 끝에[11] 독일군이 물러나면서 공세가 마무리됐다.
5. 결과
독일군이 비스툴라곶으로 완전히 밀려나면서 동프로이센 공세가 끝났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동프로이센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동프로이센군은 헬 반도와 비스툴라 사주에 갇혀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에 쿠를란트에서는 3월의 6차 공방전 이후로 별다른 대규모 전투가 없었으므로 삼란드 공세는 북부 전선에서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가 되었다.[1] 젬란트 공세 작전[2] 소련측의 주장으로 언제나 그렇듯 소련군 전력은 축소되고 독일군 전력이 크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3] 쿠를란트에서는 3월을 마지막으로 종전까지 큰 전투가 없었다.[4] 4월 12일 기준[5] 4월 2일에 북부 집단군이 해체되고 집단군 사령부가 12군 사령부가 되면서 휘하 야전군이 육군최고사령부 직할이 되었다. 북부 집단군 휘하에 있던 4군이 2군으로 흡수되었고 2군은 4월 7일에 동프로이센군으로 개칭됐다.[6] 제55군단[7] 4월 1일 기준[8] 제3 벨로루시 전선군 자체는 하일리겐바일 포위망 정리 후 단치히를 비롯한 서프로이센에 있었고 원래 제1 발트 전선군이었던 젬란트 방면군이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고 잼란트 방면에 배치되어 있었다.[9] 삼란드의 러시아어 명칭[10] 러시아 명칭은 프리모르스크[11] 매우 작은 마을이지만 우회가 불가능하고 쾨니히스베르크만큼이나 철저히 요새화된 곳이었기 때문에 점령이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