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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경에 세워진 다와 이슬라미야 비즈니스 센터 일대
이탈리아 시기 비아 로마를 개칭한 오마르 무크타르 거리
벵가지 (리비아) | ||
1. 개요
아랍어 بنغازي [벤가지]영어 Benghazi
리비아에서 트리폴리 다음으로 큰 리비아 제 2의 도시. 리비아 동부의 키레나이카 지방의 중심 도시로서 시드라만 북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항만도시다. 인구는 약 66만 명.
현대에도 이슬람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전통적인 도시. 아프리카의 다른 주요 도시들에 비해 발전이 늦은 편이었지만 현대에와서는 석유라는 템빨로 인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제1차 리비아 내전의 발원지이며 2012년 주 리비아 미국 대사관 습격 사건이 벌어진 도시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는 'Benghazi Attack'이라고 불리는 정도. 교과서 지도[2]를 보면 Banggaji 또는 Banggazi 또는 Bangazi 등을 볼 수 있는데 잘못된 표기이다.[3] 정식 표기는 Benghazi이다.
2. 기후
벵가지 기후는 온난 스텝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BSh)에 속한다.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따뜻하다. 가장 더운 8월의 최고 기온의 평균은 31.9 °C, 가장 추운(시원한?) 1월의 최저 기온 평균은 8.7 °C 다. 비가 잘 안오는데, 그나마 오는 구간이 겨울이다. 연간 강수량은 268mm밖에 안된다. 우리나라 연간 강수량인 1270 mm 와 비교해보면 얼마나 건조한 지 알 수 있다.3. 역사
에우에스페리데스 (베레니케) 유적
기원전 525년경, 에우에스페리데스 (Euesperides / Εὐεσπερίδες)라는 그리스 식민 도시로 세워졌다. 기록 상으로는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515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레네 반란 진압 당시 키레나이카의 서쪽 끝으로 묘사했다. 이후 도시는 키레네에서 독립하여 자체 동전을 주조했고, 사하라에 이르는 대상로의 기점 역할을 맡게 되면서 번창했다. 한편 키레네 왕국 (바티아다이)의 군주 아르케실라오스 4세는 기원전 462년, 델포이에서 열리는 피티아 제전[4]의 전차 경기에서 자신이 우승한 것을 통해 에우에스페리데스로 이주를 홍보했다. 키레네에서 인기가 없던 그는 유사시를 대비해 기원전 446년 에우에스페리데스를 제2의 수도로 개발했고[5], 실제로 기원전 440년의 민중 봉기 시에 피신하려 했으나 암살되었다. 이로써 2세기 간 이어지던 왕국이 붕괴하고, 키레나이카는 페르시아 산하 자치령이 되었다. 에우에스페리데스는 키레네와 비슷한 헌법과 함께, 국무회의 (에포르스) 및 원로원 (게론테스)를 갖추어 도시 공화정을 유지했다.
에우에스페리데스는 다른 도시들과 동떨어진 위치 때문에 종종 인근 유목민들의 습격을 당했다. 기원전 414년에도 리비아인들에게 포위를 당해 함락 위기에 몰렸고, 시칠리아로 향하다 역풍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당도한 스파르타 장군 글립포스의 함대에 의해 운 좋게 구원되어 파괴를 면했다. 그러던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이집트 정복 후 키레나이카 역시 마케도니아에 복속했다. 그의 인도 원정 및 죽음을 틈타 도시는 기원전 324-322년간 스파르타인 모험가 티브론의 키레나이카 장악으로 도왔으나,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부관 오펠레스에게 제압되었다. 이후 키레나이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편입되었다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사후 그의 의붓아들 마가스가 총독이 되었다. 기원전 276년, 마가스는 의붓동생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시리아 전쟁을 위해 시리아로 출정한 틈에 독립을 선포했다. 기원전 250년, 마가스가 사망한 후 기원전 246년 그의 외동딸 베레니케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 결혼하며 키레나이카는 재차 이집트 산하 자치령이 되었다.
이 무렵, 본래 현 시가지 북동쪽 호수 쪽에 있던 도시는 남쪽의 항구 일대로 이전되었고 베레니케 2세를 기념하여 베레니케로 명명되었다. 시가지 이전은 기존에 바다와 연결되던 석호가 내륙 호스로 분리되어 항구 기능을 잃었기 때문 혹은 주민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복에 반대한 것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후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도시는 해안 평원의 푸른 오아시스에 위치한 덕에 그리스 신화의 정원 요정인 헤스페리데스라 명명되기도 했으나, 적어도 동로마 시대까지는 베레니케라는 이름이 유지되었다. 시가지 이전 후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시나고그가 세워지는 등 유대 구역이 형성되었다. 기원전 96년,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의 사후 키레나이카는 로마령이 되었다. 처음에는 자치령으로 유지되었으나 기원전 78년 크레타와 함께 속주로 편성되었다. 로마 제국기 베레니케는 키레네, 바르카, 아폴로니아, 프톨레마이스 (혹은 타추리아)와 함께 펜타폴리스를 이루었다. 비록 118년 2차 유대 반란 당시 시내의 유대인들이 봉기하긴 했지만 다른 키레나이카 도시들에 비해서는 피해가 덜했다.
이후 베레니케는 점차 쇠퇴하던 키레네와 바르카마저 추월하여 3세기 무렵에는 키레나이카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본래 아폴론 신앙이 주를 이루던 도시는 이집트에서 기독교가 유입됨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산하 주교구가 되어 니케아 공의회 등에 주교가 참석했다. 다만 주민들은 한동안 시벨리우스파, 카르포크라테스파 등 비칼케돈파 영지주의 계열을 주로 신봉했다. 430년대에는 반달 왕국의 습격을 받은 후 그에 복속했으나, 로마식 체제는 이어졌다. 쇠퇴하던 베레니케는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성벽을 재건하고 공공 욕탕을 세우는 등 중건하자 소폭 활기를 찾았다. 6세기 말엽 키레나이카는 이집트 속주에 편성되었고, 조정의 무관심 하에 베르베르 부족들의 습격이 잦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금은 점점 높아져 주민들의 원성이 커졌고, 베레니케는 더욱 쇠퇴했다. 그러던 7세기 초엽 사산 제국의 침공에 이어 643년경 이슬람 제국군에게 별 저항 없이 점령된 후 일부 파괴된 베레니케는 마을 수준으로 전락했다.
3.1. 중세
이슬람 시기 바르카에 밀려 어촌 정도로 유지되던 도시는 13세기 들어 제노바 공화국 상인들과 배후 부족들 간의 교역장이 되어 중시되었다. 한편 베레니케의 아랍어 발음인 바르니크로 불리던 도시는 16세기 무렵 지도에 '성전사 아들의 항구'란 뜻인 마르사 이븐 가지 (مرسى ابن غازي)로 표기되었다. 이것이 축약되어 벤가지 혹은 벵가지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3.2. 오스만 제국기
16세기에 세워진 아티크 모스크 (옛 사원)
1896년, 마울리드 시에 벵가지 시내에 내걸린 오스만 국기
날로 중요성을 더해가던 벵가지는 1578년 오스만령 리비아에 포함되었고, 1711년 ~ 1835년간 트리폴리에서 자립한 카라만리 후국의 지배 하에서 동부의 거점이자 제2의 수도로 여겨졌다. 그 시기 지중해 무역은 쇠퇴했지만 여전히 그리스 및 이탈리아인 어부들이 종종 근해에서 조업했다. 1835년부터 재차 오스만 조의 직접 지배를 받은 벵가지는 1858년과 1874년의 두 차례에 걸쳐 역병을 겪으며 인구가 감소했다. 1911년 기준 벵가지에는 5천여 주민이 거주했고, 그중 절반 가까이가 유대인이었다.
3.3. 이탈리아령 리비아
벵가지 대성당과 해안
벵가지 시청사 건물
1911년 10월 19일 벵가지는 이탈리아-오스만 전쟁 당시 이탈리아 군에게 점령되었고, 유대인 주민들은 점령군에 협조했다. 리비아 해안은 이탈리아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오마르 무크타르가 제압된 후인 1920년대 들어 벵가지는 크게 개발되었다. 우선 근대적 항만 및 등대와 비행장[6]이 세워졌고, 기존 도시를 둘러싸는 신도심이 개발되었다.
1924년의 시청사, 1934년의 벵가지 대성당은 당시 리비아 최대의 건물 중 하나였다. 그외에 여러 거리와 광장, 해변 도로, 기차역 및 철도, 극장, 축구 경기장 등이 세워졌다. 근대적 시가지 건설과 함께 이주도 진행되어 1940년 기준 벵가지에는 아랍인 4만, 이탈리아인 2만 3천, 유대인 3천 등 6만 6천여명이 거주했다. 2차대전 기에는 키레나이카의 이탈리아 인들이 대부분 벵가지로 피신하여 일시적으로 기독교도 다수 도시가 되기도 했다.
3.4. 2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중 벵가지는 북아프리카 전쟁의 주요 전장 중 하나가 되었다. 1941년 2월, 영국군이 도시를 점령했지만 4월에 롬멜의 전차 부대가 점령했다. 그해 12월, 영국군이 재차 벵가지를 점령했으나 1942년 1월 롬멜이 재점령했다. 최종적으로 1942년 12월, 엘 알라메인 전투 후 반격에 나선 영국군이 벵가지를 점령했다. 5차례나 주인이 바뀌면서 시가지의 85%가 파괴되는 등 벵가지는 2차 대전기 아프리카 도시들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1943년 8월에는 미군이 벵가지 비행장을 기반 삼아 플로이에슈티 공습을 감행했다.3.5. 리비아 왕국의 수도
1964년의 샤자라 광장
전후 파괴된 도시는 점차 재건되었고, 영국의 위임통치 후 1949년 이드리스 1세의 키레나이카 토후국의 수도가 되었다가 1953년 키레나이카 주도의 리비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주민은 점차 떠나 수백명 정도만 남았다.
벵가지는 리비아 왕국의 입법 수도가 되었고 1950년대 말 리비아의 석유 채굴이 흥하며 현대적 도시로 발전하였다. 1955년에는 리비아 대학교가 설립되어 1973년 트리폴리와 벵가지 대학으로 나뉠 때까지 유지되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이드리스 1세가 국회의 지위를 없애는 것부터 시작해 무아마르 카다피가 1969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모든 국회 기관을 트리폴리로 옮겨버리면서 수도의 지위를 잃는 등 주도권을 트리폴리에 내주었다.
3.6. 카다피 정권
1970년경 벵가지의 랜드마크로 세워진 이슬람 선교 센터
1986년 4월, 미국의 리비아 공습 당시 벵가지 공항 역시 타격을 받았다. 한편 이드리스 왕가 지지가 강한 키레나이카 지역은 카다피 정권의 차별을 받았다.
일례로 2000년의 반정부 시위 후, 현지 축구 구단 알아흘리의 경기장이 철거되었다. 그럼에도 오일머니로 인해 몇몇 고층 건물이 세워지기도 했다.
3.7. 현대
2011년 이전, 관광 명소 시절 사진
근래 들어서는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의 발원지로서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2012년 9월 테러단체 '안사르 알-샤리아'의 공격으로 미국 대사 스티븐스 등 외교관과 CIA 관계자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2014년부터 세속주의자 정부와 안샤르 알-샤리아/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IS) 사이에 도시를 두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군이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지만 2015년 11월에도 벵가지는 경합지역으로 분류된다.
2015년 제2차 리비아 내전 중의 벵가지
2016년 2월 하순, 정부군이 탈환 작전을 시작했다. 2016년 5월, 정부군이 도시의 90%를 장악하였다. 2017년 정부군의 승리로 벵가지의 이슬람 반군들이 축출되었고 ISIL은 리비아 내 모든 거점을 잃었으며 안사르 알 샤리아는 막대한 피해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예 해체되었다. 그후 칼리파 하프타르의 국민의회 (토브루크 정부) 산하에 있으며, 트리폴리 측과의 통합이 논의되고 있다.
4. 기타
대항해시대4에서는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일정 금액을 투자하면 나무 열매가 교역품으로 산출되게 바뀐 뒤 갑자기 중요성이 올라갔다. 2013년 1월 현재까지 노가다대 최고의 성능비 '소금구이 생선과 나무열매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 열매가 필요한데, 벵가지에서 나무 열매를 살 수 있기 전까지는 개인농장이나 필드 조달을 통해서만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 열매를 교역품으로 얻게 되면서부터 '소금구이 생선과 나무열매 요리'를 찍기가 매우 쉬워졌다. 식료품 거래스킬이 어느 정도 된다면 비동맹항이어도 괜찮은 양으로 살 수 있다. 굳이 행동력 회복음식을 찍는 것 말고도 나무열매는 쏠쏠하게 쓸 데가 많다.
[벤가지] (부를때: Benghazi 벵가지 / 읽을때: Ben/gha/zi 벵가지)[2] 세계지리 등 지리와 관련된 교과서[3] Benghazi를 벵하지 라고 표기한 교과서도 있다고 한다.[4] 고대 올림픽과 함께 헬라권의 4대 단합 대회 중 하나였다[5] 따라서 기원전 446년을 에우에스페리데스의 창건일로 보기도 한다. 키레네 왕의 동생이 창건했다고도 한다[6] 1936년 이후로는 아디스아바바로도 비행기가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