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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요르단 | ||||
주 | 카라크 주 | ||||
면적 | 765km²[1] | ||||
인구 | 4,061,150[2] | ||||
시간대 | UTC+02:00(서머타임 적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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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الكرك영어 Al-Karak
요르단 중서부의 유서깊은 도시. 아랍어 발음은 알 카라크이고, 동명의 주의 주도이다. 십자군 전쟁기 예루살렘 왕국 휘하에서의 지명인 케라크로도 알려져 있다.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100여 km, 사해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져 있다. 도시는 해발 930m 고지에 형성되어 있고, 여름에도 평균 기온이 30도 이하인 선선한 기후를 지니고 있다. 3만 3천명이 거주하는 원도심은 삼면이 협곡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인데, 십자군 시기에 건설된 케라크 성채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남아있어 페트라 & 제라쉬와 더불어 요르단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이다.
원도심 서북쪽에 노아의 무덤이라 여겨지는 성지가 있으며, 1세기에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을 만큼 초기 기독교의 거점들 중 하나였다. 그 영향인지 현재까지도 주민의 25%가 기독교도이며, 요르단의 주요 도시들 중 가장 높은 수치이다. 한편 카라크 남쪽으로도 협곡에 놓인 국도를 따라 마을들이 산개해 있으며, 무타와 무아브 일대까지 그렇게 이어져 있다. 난공불락의 케라크 성채는 수십 번의 공성전을 버텨내었고, 살라흐 앗 딘 역시 두 차례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1260년 몽골군이 레반트 지역을 모두 점령했을 때에도 카라크만큼은 형식상의 복속 이상은 얻어낼 수 없었다.
2. 역사
구도심 서북쪽 외곽 묘지에 위치한 누흐 (노아) 영묘
철기 시대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었으며, 모압의 주요 도시였다. 구약 성경에서는 케르 하레세트 혹은 '모압의 키르'라는 이름으로 열왕기하 16장과 아모스 9, 15장에 아시리아 제국의 영토로 등장한다. 해당 내용은 아람 인들이 레반트 북부에 정착하기 전에 거주하였고, 아시리아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포로들을 보낸 곳 정도이다. 1958년 와디 알 카라크에서 발견된 기원전 9세기 기록에서도 아시리아 지배의 흔적을 옅볼 수 있다. 헬레니즘기에 도시는 아람어 지명인 카르카 (כרכא)로 알려졌고, 나바테아의 지배를 받았다. 106년 가산 왕국의 도움으로 로마 제국이 요르단을 정복한 후 하레케트로 불렸고, 요단강 동쪽의 주요 기독교 거점이자 주교구였다. 536년 카르카 주교 데메트리오스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팔레스티나 지역 공의회에 참가하였다. 이슬람 정복 후에도 카라크는 기독교 도시로 남았고, 최소 9세기까지 주교가 있었다.
629년 9월에는 케라크 남쪽 7km 지점 무타에서 이슬람 군대와 동로마 제국군이 충돌하여 후자가 승리하였다. 초기 이슬람 역사상 몇 안되는 패배 중 하나인 무타 전투에서는 무함마드의 양자 자이드 이븐 하리싸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형 자파르 등이 전사하였다. 다만 3년 후인 632년 6월 무함마드 사후 첫 원정으로 자이드의 아들 우사마가 요르단 중북부 발카 지역을 습격하여 복수하였고, 그후 634년 요르단 일대는 이슬람 제국령이 되었다. 아랍어 지명인 카라크로 불리게 된 도시는 다마스쿠스-카이로 사이의 카라반 교역로이자 시리아에서 메카로 향하는 순례로 상에 위치한 덕에 꾸준히 번영하였다. 약 5세기가 지난 후 1115년 케라크는 십자군에게 정복되어 예루살렘 왕국의 동쪽 변경에 설치된 울트레주르뎅 영지에 포함되었다. 본래 울트라주르뎅의 중심지는 카라크에서 남쪽으로 80여 km 떨어진 언덕에 보두앵 1세가 건설한 몽레알 (쇼우바크) 성채였다. 그러던 1142년에 영주 파간이 천헤의 조건을 갖춘 카라크에 성채를 건설하고 중심으로 삼았고, 후대 영주들도 뒤따랐다. 당시 성채의 이름은 '페트라 데세르티' (사막의 돌)였다.
2.1. 십자군 전쟁기
1140년대 건설되어 울트레주르뎅의 중심이 된 케라크 성채
1147년 파간이 사망한 후 영주로 임명된 모리스는 성채 건설을 이어받아 완성하였고, 1161년 그가 사망하자 사위 필립 드 밀리가 계승하였다. 1168년 필립 드 밀리 역시 딸 에티에네트만을 남기고 사망하였고, 그녀는 옹프루아 3세와 밀레 드 플랑시와 연이어 결혼하였다. 하지만 남편들이 1173년, 1174년 연달아 사망하고 1170년과 1173년 장기 왕조가 케라크 성채를 포위[3]하는 등 위협을 받자 그녀는 전 안티오크 공작이자 장기 왕조 하에서 10여년간 포로로 지낸 후 석방된 르노 드 샤티용과 결혼하였다. 복수에 불타던 르노는 카라크의 입지를 활용하여 이집트, 시리아, 히자즈를 오가는 무슬림 상단을 공격하였다. 이에 술탄 살라흐 앗 딘은 별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휴전이 성사된 후인 1181년 르노가 재차 무슬림 카라반을 습격하자 이듬해 카라크를 공격하였다. 국왕 보두앵 4세의 만류에도[4] 르노는 아카바를 점령한 후 1183년 초엽 홍해를 따라 메카 근처 해안을 습격하였다.
비록 십자군 함대는 목표인 메디나와 메카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많은 무슬림 순례객들이 사망하였고 살라흐 앗 딘의 위세에 큰 타격이 되었다. 격노한 술탄은 1183년 11월 카라크를 포위하였는데, 당시 성채에서는 에티에네트의 아들 옹프루아 4세와 예루살렘 공주 이사벨라 간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에티네에트가 적진에 음식을 보내자 살라흐 앗 딘은 결혼식장 구역은 공격하지 않는 미담을 남겼다. 다만 이듬달 보두앵 4세가 원군을 이끌고 오자 성채를 함락하지 못한 채 철수하였다. 1184년 8월 살라흐 앗 딘과 동생 알 아딜은 재차 케라크 성채를 포위하였으나 이듬달 원군이 다가오자 나블루스와 제닌을 습격하고 철수하였다. 1185년 재차 휴전이 성사되었으나 이듬해 르노가 다시 무슬림 순례단을 학살하자, 분노한 술탄은 1187년 봄 출정하여 카라크 일대를 습격한 후 하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살라흐 앗 딘은 사로잡힌 르노를 처형하였고, 에티에네트는 아들 옹프루아 4세의 석방을 대가로 카라크와 몽레알 성채를 넘겨주었다. 성채의 수비대는 항복을 거부하였으나 고립된 상태였기에 1188년 11월 알 아딜에게 점령되었다.
2.2. 아이유브 왕조
남쪽에서 바라본 케라크 성채
살라흐 앗 딘의 사후 알 아딜은 자지라와 함께 카라크를 거점 삼아 조카들을 누르고 아이유브 왕조를 재통합하였다. 13세기 초의 지리가 야쿠트는 카라크가 강력한 요새라 묘사하였다. 알 아딜의 사후 세 아들이 분봉받았는데, 그중 다마스쿠스를 통치하던 알 무아잠 이사가 1227년 사망하자 이집트의 알 카밀과 자지라의 알 아슈라프 무사가 그 영토를 양분하였다. 이사의 아들 앗 나시르 다우드는 이에 맞섰으나 패배한 후 보상으로 카라크가 주어졌다. (1229년) 다우드는 알 카밀이 사망한 후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계승에 관여하며 영향력을 과시하였고, 1239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하기도 했다. 아이유브는 술탄에 오른 후 다우드를 적대하였고, 1246년 예루살렘을 수복한 장군 파크르 앗 딘을 파견해 카라크를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다. 그후 아이유브가 시리아 각지를 복속시키자 1249년 다우드 역시 이를 따르려 했으나 변심,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와 협상하였다. 하지만 그가 알레포로 향한 사이에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고, 아이유브 휘하 장군 바드르 앗 딘 사와비가 입성하였다. (1249년 9월)
다만 아이유브 역시 곧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투란 샤는 제위 계승을 위해 이집트로 향하며 카라크의 보물을 취하였다. 하지만 1250년 투란 샤가 암살당하고 맘루크들이 이집트를 장악하자 시리아는 진공 상태가 되었다. 그해 6월 카라크의 바드르 앗 딘은 몽레알에 유폐되어 있던 아이유브 왕공 무기트 앗 딘 우마르[5]를 술탄으로 옹립하고 자립하였다. 비록 두 달 후 시리아는 알레포의 유수프 하에 통합되었지만 험준한 카라크 공격을 원치 않던 그는 우마르가 복속하자 형식상의 우위에 만족하였다. 이후 유수프와 맘루크 술탄 아이바크 간의 대립이 이어지던 틈에 카라크는 제3 지대였고, 내분에서 패배한 바흐리 맘루크들이 망명하기도 하였다. 1257년 카라크의 망명 맘루크 중에는 미래의 술탄이 되는 바이바르스 역시 있었고, 우마르는 아이유브가 축적한 보물을 나눠주며 동맹하였다. 같은해 11월과 1258년 3월 그들은 두 차례에 걸쳐 이집트로 진격하나 모두 패배한다.
우마르와 바이바르스는 카라크로 도주하였고, 유수프는 마다바 쪽에 주둔하며 봉쇄에 나섰다. 그는 유수프가 바흐리 맘루크들을 인도한 후에야 철수하였다. 이러한 내전을 틈타 훌라구 칸이 시리아를 침공하자 유수프는 가자로 패퇴하였고,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술탄 쿠투즈에게 망명하였다. 1260년 2월 우마르는 훌라구에 복속하였는데, 이듬달 그가 회군하자 저항을 결심하고 방황하던 유수프를 초청했으나 후자는 결국 몽골에 항복한다. 이어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카라크 군은 시리아-맘루크 군과 함께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다만 술탄에 오른 바이바르스는 1261-63년경 우마르를 소환하여 처형 혹은 유배형을 내렸고, 맘루크 군이 다가오자 후자의 아들 알 아지즈는 항복하였다. 다만 그 후에도 아이유브 왕공 알 카히르가 영주로 봉해졌으며, 1277년 바이바르스는 그를 독살하려다 자신이 그 독을 먹고 죽는다. 1279년에는 바이바르스의 아들 바라카와 솔라미쉬가 칼라운에 의해 폐위된 후 카라크로 유배되었다. 바라카는 이듬해 3월 카라크에서 의문사하였고, 바이바르스의 삼남 알 마수드 카히르는 칼라운의 허가 하에 자치를 유지하였다.
2.3. 맘루크 왕조
맘루크 시대 행정구역. 카라크 주는 작지만 지리/군사적으로 중요했다 |
1281년 맘루크 왕조가 일 칸국을 격퇴한 2차 홈스 전투 때에도 카라크 병력은 승리에 일조하였다. 다만 승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칼라운은 중앙 집권화에 나섰고, 1286년 그에 반발한 바이바르스의 손자들이 카라크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카라크 총독으로 부임한 맘루크 바이바르스 알 만수리는 1291년 아크레 공방전에 참전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기록을 남기는 역사가로 활약한다. 13세기 말의 학자 샴스 앗 딘 앗 디마슈키는 산 정상에 위치한 카라크가 난공불락의 성채이며, 로마 시대 수도원이었으나 현재는 튀르크인들의 금고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아이유브 왕공 아불 피다 이스마일은 카라크가 시리아 최고의 요새들 중 하나이며, 인근에 온천과 좋은 과실수가 있는 정원들이 즐비한 고귀한 도시라 평하였다. 그외에 아랍 기독교도 의사인 아민 앗 다울라 이븐 알 쿠프 알 카라키가 이곳 출신이며, 그는 아랍 최초로 오직 수술에만 관한 논문을 집필하였다.
앞서 바이바르스의 자녀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험준한 카라크는 폐위된 맘루크 군주들의 유배지로 애용되었다. 칼라운의 아들 앗 나시르 무함마드 역시 1294년 폐위된 후 카라크로 유배되었고, 1309년에는 자발적으로 퇴위하여 다시 카라크로 향하였다. 그후 두 맘루크 실권자 간의 내분이 터지고 동정 여론이 일자 그는 이집트로 귀환하여 집권하였고, 역대 맘루크 술탄들 중 가장 안정적인 통치를 하였다. 자신이 두 번이나 피신했던 카라크에 애착감을 느낀 앗 나시르는 아들 아흐마드 (당시 8세)와 아부 바크르 (당시 11세)를 각각 1324년과 1332년 그곳으로 보내어 맘루크 군사 훈련에 임하게 하였다. 13세기 들어 카라크는 동명의 주도로 성장하였고, 젊은 맘루크 아미르들이 기병으로서의 능력을 완성하도록 보내졌다. 총독 바하두르 알 바드리의 감독 하에 둘은 훈련을 받은 후 각각 1331년과 1335년 아미르로 임관하였고, 그 후 카이로에서 돌아왔다. 후임 총독 말릭타무르는 앗 나시르와 이혼한 아흐마드의 모친 바야드와 혼인하여 아흐마드의 양부가 되었다.
2.3.1. 앗 나시르 아흐마드
1342년 맘루크 술탄 앗 나시르 아흐마드가 머문 케라크 성채의 궁전
1337년 아흐마드는 카라크의 하층민과 어울린 혐의로 카이로로 소환되었으나, 오히려 말릭타무르를 대신하여 카라크 주의 총독에 올랐다. 하지만 1339년 아흐마드가 현지 베두인 아이 슈하입과 사랑에 빠지는 등의 모습을 보이자 부왕은 재차 그를 소환하고 아부 바크르를 총독에 앉혔다.[6] 그는 일대 주민들로부터 20만 디르함을 착취해 부왕에게 뇌물로 바쳐 후계자가 되었다. 이후 아흐마드와 슈하입과의 관계를 두고 충돌한 끝에 앗 나시르는 아흐마드를 카라크로 돌려보냄과 함께 말릭타무르를 재차 그 총독으로 봉하였다. 같은해 봄 부왕이 사망하고 아부 바크르가 계승하였으나 곧 장군 카우순에게 폐위되었고, 후자는 5세의 쿠자크를 옹립한 후 아흐마드마저 제거하기 위해 그에게 숥탄으로 옹립할 것이라며 카이로로 청하였다. 음모를 간파한 아흐마드는 주요 아미르들이 카라크로 와서 자신에게 복속하고 상이집트에 유배된 동생들을 데려올 때에만 응하겠다고 답하였다. 이에 카우순은 아미르 쿠틀부가 알 파크리를 보내어 카라크를 포위하였고, 아흐마드는 주민들과 인근 베두인 부족들의 도움으로 버텼다.
한편 20일간의 포위 후 쿠틀부가가 전향하여 아흐마드를 술탄으로 선포하며 되려 다마스쿠스를 장악하였다. 그럼에도 아미르들을 믿지 못했던 아흐마드는 한동안 카라크에 머물렀고, 그동안 한 맘루크가 슈하입을 죽인 후 충격에 휩쌓였다. 1342년 쿠자크가 폐위되고 두 달이 지난 후에야 카이로에 당도한 아흐마드는 카라크에서부터 자신을 수행했던 이들을 요직에 앉혀 기존 아미르들의 불만을 샀다. 이에 공포를 느낀 아흐마드는 5월 말엽 카이로를 떠나 자신이 유일하게 맘루크 군부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긴 카라크에서 통치하려 하였다. 그는 선대의 보물과 아랍말, 가축, 투옥시킨 아미르들, 주요 관료들과 카라크 출신들, 심지어 칼리파 알 하킴 2세까지 대동하고 카이로를 떠나 우선 가자에 당도하였다. 이후 먼저 6일만에 카라크에 당도한 그는 가자 총독 아크순쿠르 앗 살라리를 카이로 부왕으로 봉하였고, 중재자들을 통해 현지 맘루크 아미르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카이로 귀환 요구를 모두 거부하였다. 술탄이 되 것을 후회한 아흐마드는 자신을 부추긴 쿠틀부가와 타쉬티무르를 처형하였다.
이로써 그에 대한 여론이 싸늘해지자 6월 카이로에서는 앗 살리흐 이스마일이 술탄에 옹립되었고, 시리아의 총독들 역시 그를 인정하였다. 사실상 폐위된 아흐마드는 여전히 카라크를 다스렸고, 맘루크 군은 7번이나 공격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1344년 여름 아흐마드의 심복이자 아랍 부대를 이끌던 발리그 이븐 유수프 이븐 타이가 이집트 측으로 이탈, 포위군에게 성채의 약한 부분을 알려주었다. 그 결과 7월 4일 카라크는 점령되었고 아흐마드는 친히 싸우다 부상을 입고 사로잡혔다. 맘루크들을 불신하던 그는 제공된 음식 조차 거부하였고, 카이로로 압송되어 살해되었다. 그의 머리는 카이로 시타델에 효수되었지만 몸은 그가 그리도 사랑하던 케라크 성채 아래에 매장되었다. 아흐마드를 죽인 앗 살리흐 이스마일 역시 이듬해 병사하였고, 맘루크 조는 1363년 알 아슈라프 샤바안이 즉위한 후에야 안정을 회복한다. 그후 1389년 시리아 아미르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카라크로 유배된 바르쿠크가 이듬해 반격하여 복위한 후 다마스쿠스 총독의 권한이 강화되며 카라크의 정치적 중요성은 하락한다.
2.4. 근대
메샤 석판 | 케라크 성채 (시타델) |
1355년 카라크를 방문한 무함마드 이븐 바투타는 '히슨 알 구라브' (까마귀 성채)라는 별명이 있는 요새이고,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하나 뿐인 접근로는 바위굴로 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16세기 오스만 제국기에 들어 카라크는 아즐룬 산작의 일개 나히야 (읍)에 편성될 만큼 쇠락한 상태였다. 1596년 기준 80 가구의 무슬림과 111가구의 기독교도가 거주할 뿐이었고 총 1만 5천 아크체를 납부하였다. 그러던 19세기 들어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가 시리아를 정복한 후 중앙집권화에 발생한 팔레스타인 농민반란 시에 카라크는 그 마지막 전장이었다. 1834년 여름, 헤브론에서 패한 후 카라크의 아니자 베두인들과 합세한 반군 잔당은 곧 이브라힘 파샤의 이집트 군에게 포위되었다. 17일간 이어진 공성전과 포격 끝에 8월 말엽 성벽이 일부 붕괴하였고, 이집트 군은 총공격하여 도시를 함락하였다.
카라크는 대대적으로 약탈되었고, 반군을 도운 주민들에 대한 처벌로 이집트 군은 인근 과수원의 나무마저 뽑아버렸다. 더 큰 보복을 두려워한 아니자 부족장 두와이키 앗 사미르는 반군 지도부를 이집트측에 넘겨주었다. 이브라힘 파샤는 카라크에서 앗 살트까지 요르단 중부 일대를 약탈한 후 다마스쿠스로 향하였다. 원한을 잊지 않고 있던 케라크 주민들은 6년 후인 1840년, 이브라힘 파샤가 오스만-영국군에 밀려 다마스쿠스에서 이집트로 철수하자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그들은 후퇴하는 이집트 군을 '왕의 도로' (핫지 루트)를 따라 카라크 동북면의 카트라나에서 가자까지 지속적으로 습격하였다. 이브라힘 파샤는 병력, 탄약, 군마 대부분을 잃은 채로 가자에 당도하였다. 이 무렵 카라크에는 가산 왕국의 후예인 알 마잘리 가문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데, 동시에 서구 세력의 침투 역시 만연해졌다.
1868년 8월 프랑스 출신 성공회 선교사 클라인이 현지 부족의 안내로 카라크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텔 디반에서 기원전 830년 무렵 작성된 메샤 석판을 발견하였다. 이는 당대까지 팔레스타인-요르단 지역에서 발견된 철기 시대 석판들 중 가장 길었고, 가나안 문자로 성경에서 묘사된 모압 왕국의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던 성경의 역사적 검증에 있어 메샤 석판은 매우 중요한 자료였고, 여러 서유럽 국가들이 탐을 내었다. 그중 독일의 요청에 오스만 당국은 현지인들에게 석판을 넘길 것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얼마전 오스만 군에게 토벌당하여 남하한 베니 함마드 부족이 반항의 뜻으로 석판을 부수었고, 프랑스 영사관이 그 파편을 거두어 가며 현재 메샤 석판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판을 부술 당시 카라크의 지도자 무함마드 알 마잘리 역시 관여했다고 한다. 다만 그는 1896년 영국 선교사들이 카라크에 거점을 마련하도록 허가하였다.
1893년 오스만 조정은 시리아 빌라예트 하에 마안 준주를 신설하며 태수 (무타사리프)의 치소로 카라크를 택하였다. 1893년 태수로 부임한 후세인 헬미 베이 에펜디는 (3년 군복무를 위해)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징발되어 3개 부대로 구성된 1200명의 수비대와 함께 당도하였다. 그는 현지인들을 무장해제시켰고, 유대인 의사가 있는 군병원을 세웠다. 또한 그는 동전 주조와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예루살렘-다마스쿠스-마안을 거점으로 한 주 단위 우편제도 설립하였으며 마데바에 5천 그루의 포도나무를 심는 등 농업 진흥에 나섰다. 당시 마안 주의 인구는 1만이었고, 이는 8천 무슬림과 2천 정교회 기독교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내의 정교회 학교에는 120명의 소년과 60명의 소녀가 있었고 다마스쿠스의 상인들은 매년 두 차례 카라크를 방문하였다.
2.4.1. 카라크 반란
반란 진압 후 카라크 사라이 앞에서 오스만 장교들의 기념 촬영
오스만 조정의 중앙 집권을 싫어하던 아랍인들은 1908년 청년튀르크당의 혁명 이후 추가적인 세금과 징병을 도입하자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요르단 지방에서는 거의 반세기 가까이 중앙 집권력이 미치던 아즐룬과 살트에서는 반발이 없었지만, 중앙 지배가 20년이 채 안된 남부 마을들에서는 거부감이 컸다. 그중 카라크에서도 다마스쿠스 총독 사미 파샤가 무장해제와 주민 등록을 요구하자 반발이 있었다. 베두인들의 습격에 맞서 무기가 필요하다는 주민들의 요청에도 당국은 듣지 않았고, 징병에 대한 의혹에 그저 주민 등록을 한다고 답하면서도 군대를 파병하며 현지인들의 의심을 증폭시켰다. 1910년 12월 4일 주민들은 카드르 마잘리의 주도 하에 봉기하였고, 인근 마을들과 헤자즈 철도역들에서도 호응하였다.
군중은 시리아 상점을 약탈하였고, 오스만 주둔군은 케라크 성채로 피신하였다. 주민들은 사라이 (시청)의 무기고로 몰려가 무장한 후 오스만 은행 지부, 행정 청사, 감옥, 법원, 저택, 심지어 모스크에까지 방화하였다. 10여일 후 사미 파샤는 다마스쿠스 주둔군과 당도, 무차별적인 학살과 지도부의 처형으로 반란을 가혹히 진압하였다. 주민들은 모든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납부해야 했고, 수백여명은 다마스쿠스의 수감되어 수년 간의 강제 노역 혹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세기 후반부터 회복하던 카라크의 인구와 경제는 이로써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비록 1912년의 대사면으로 모든 수감자들이 석방되었지만 여전히 그 잔혹함을 기억하던 주민들은 1916년 아랍 대반란 당시 봉기군을 크게 지지하였고, 오스만 주둔군을 학살하였다.
2.5. 현대
케라크 성채로 들어가는 관광객들
시내 중심부의 살라흐 앗 딘 동상
1918년 1월 샤리프 압둘라 이븐 함자가 70여 기병과 메즈라아를 공격하자 오스만 당국은 사해를 건너 곡물을 운송하는 선단을 파괴하고 철수하였다. 1920년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 하에 카라크에는 소수의 경찰대가 배치되었고, 알렉 커크브릿지 소령이 주도하는 모아브 지방 정부가 세워졌다. 이듬해 1월 아미르 압둘라 후세인은 마안에 병력을 모아 프랑스령 시리아 공격을 선언하였다. 상관들과의 협의 후 커크브릿지는 요르단 군의 입성을 환영하였다. 같은해 3월 압둘라 후세인은 트랜스요르단 아미르국의 군주로 인정되었다.
당시 카라크는 8천 인구가 있었고, 암만과 살트에 이어 트랜스요르단 제3의 도시였다. 1961년 통계에서 7422명의 주민들 중 1622명이 기독교도였다. 1996년 8월에 요르단 정부가 빵 값을 인상하자 카라크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2016년 12월에는 테러 조직 ISIS가 총기 난사로 19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희생자는 13명의 요르단 민간인, 5명의 테러리스트, 1명의 캐나다인 관광객으로 구성되었다.
[1] 도시권 면적[2] 통계인구, 2021년 기준.[3] 1170년 아이유브가 이집트의 아들 살라딘과 합류하러 남하하며 잠시 포위. 1171년에는 누르 앗 딘이 직접 포위 시도하나 살라딘이 주군인 그와 마주키길 두려워하며 몽레알 포위를 풀고 철수하며 무산됨. 그후 서면으로 겨우 해명. 1173년에는 부친 아이유브의 병을 핑계로 철수, 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나 곧 누르 앗 딘이 사망해버림[4] 1174년 아모리 1세가 사망한 후 케라크의 밀레 드 플랑시가 사실상의 섭정에 오를만큼 울트레주르뎅 영주의 권위는 매우 높어져 있었던 상태였다[5] 알 아딜 2세의 아들이다[6] 그후 감옥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맘루크 100명을 주겠다는 제안도 거부한채 버티던 아흐마드는 마침내 후계자위에서 박탈된 대신 맘루크 계급에서 차석인 40인 대장에 임명되었고 슈하입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다만 1341년 슈하입이 소동을 피우자 말릭타무르와 함께 사르카드로 추방되었으나 주변의 만류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