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17 16:24:21

아모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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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의 제6대 국왕
즉위명 아모리 1세(Amaury I)
이름 아모리 당주(Amaury d'Anjou)
출생일 1136년
출생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사망일 1174년 7월 11일 (38세)
사망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매장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성묘교회
가문 앙주 (House of Anjou)
부모 부친 풀크 당주
모친 멜리장드 드 레텔
배우자 아녜스 드 쿠르트네
마리아 콤니니 (마리 콩넨)
자녀 시빌라 당주
보두앵 당주
이자벨 당주
종교 로마 가톨릭
재위기간 1162년 2월10일 ~ 1174년 7월 11일 (12년 5개월 1일)

프랑스어: Amaury (아모리)
라틴어: Amalricus (아말리쿠스)

1. 초년2. 재위
2.1. 후계자이자 외아들 보두앵 4세
3. 평가4. 기타5. 참고자료

1. 초년

보두앵 3세1153년 이집트의 영토인 아스칼론을 점령하여 아모리에게 주었고 아모리는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이 되었다. 아모리는 1157년 에데사의 조슬랭 2세의 딸인 아녜스와 결혼했으며 1162년보두앵 3세가 죽자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아녜스의 행실이 나쁘다는 점을 이유로 이혼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아모리는 아녜스와 이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아녜스는 이벨린의 위그와 재혼했지만 그녀가 낳은 시빌라보두앵은 왕위 계승자의 법적 지위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
평판을 잃은 한 여인이 예루살렘의 왕좌승계를 거의 망칠 뻔했다. 보두앵의 동생 지파와 아슈켈론의 백작 아모리(Amaury)가 계승 후보자였지만 대주교는 그가 아그네스(Agnes)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지 않는 한 대관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주교는 둘 사이가 너무 가깝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둘 사이에는 이미 아들도 있었다. 어느 신경질적인 역사가는 진짜 문제는 “아그네스가 예루살렘처럼 거룩한 도시에 어울리는 여왕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그네스는 난혼으로 인해 평판이 나쁘긴 했지만 역사가들이 그녀에게 워낙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여왕 자격이 있었는지는 여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그네스는 분명히 누구나 탐낼 만한 트로피였다. 그녀는 집사와 대주교 등을 애인으로 두었고 네 명의 남편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모리는 충실하게도 아그네스와 이혼했고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그러나 한스 메이어(Hans Mayer)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Mayer has demonstrated that the option advanced by some scholars, that the High Court feared that Agnes, if she became queen, would use he powers of patronage to favour the numerous noble but, landless exiles who had come to Jerusalem from her father's county of Edessa, rests on insufficient evidence. Nevertheless, it remains true that the members of the High Court in 1163 were hostile to the Courtenays of Edessa because they had rank but no land, and felt threatened by the prospect of the influence and patronage with Agnes would exercise if she were allowed to become queen.
메이어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진전된 선택지를 보여주면서, 만약 그녀가 왕비가 된다면, 아그네스가 자신의 후원을 이용하여, 그녀의 아버지의 고향인 에데사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수많은 고귀하지만 땅 없는 망명자들을 지지하도록 하는 것을 고위 궁정회의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63년의 고위 궁정회의 구성원들이 에데사의 쿠르트네 가문에 적대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계급은 있으나 땅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녀가 왕비가 될 수 있다면 아그네스에 대한 영향과 후원이 행사될 것이라는 전망에 위협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Bernard Hamilton, Professor of Crusading History, University of Nottingham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2. 재위

1163년 아모리 1세는 파티마 왕조가 연공을 바치지 않았다는 구실로 이집트를 기습했고 이집트는 나일 강의 댐을 허물어 물바다 작전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은 이 기회로 자신의 부관 시르쿠에게 이집트를 공격하게 하는 한편 아모리가 없는 틈을 타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를 포로로 잡았다. 아모리는 에데사 백국트리폴리 백국의 섭정을 맡고 1165년 보에몽의 몸값을 지불하고 빼내왔다. 한편 아모리 1세는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어 자신의 신부감을 구하고 누르 앗 딘에 맞서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1167년 누르 앗 딘이 다시 한번 이집트를 침공하자 아모리는 이집트 칼리프 알아디드와 협정을 맺고 나일 강에서 시리아군에 맞서 싸웠다. 카이로로 퇴각한 시르쿠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아모리는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여 공성전을 폈고 시르쿠는 협상을 통해 그 도시를 아모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모리는 알렉산드리아에 오래 머물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퇴각했다.

1167년 아모리는 동로마 제국의 마리아 콤니니(Μαρία Κομνηνή)와 결혼했다. 이듬해 아모리와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 콤니노스는 동맹을 맺고 누르 앗 딘에 공동으로 맞서기로 했다. 아모리는 이집트가 누르 앗 딘과 내통한다는 의혹이 일자 마누엘 1세와 함께 이집트를 다시 한번 침공하여 많은 공물을 받았다. 그러나 누르 앗 딘은 시르쿠를 이집트로 보내 1169년 이집트를 손에 넣었고 시르쿠의 조카인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권력을 잡았다. 아모리는 살라흐 앗 딘의 등장을 유럽에 알렸으나 지원군은 없었다. 아모리는 동로마군의 도움으로 다미에타(Damietta)의 살라흐 앗 딘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170년 살라흐 앗 딘예루살렘 왕국을 침공하였고 힘을 더 키워 이듬해에는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아모리는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살라흐 앗 딘의 위협을 알렸으나 역시 도움은 없었다. 이제 예루살렘 왕국은 남쪽으로 살라흐 앗 딘, 북쪽으로는 누르 앗 딘,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이슬람 분파인 아사신파의 위협에 직면했다. 이때 아사신파가 개종 떡밥으로 그와 교섭을 하기도 했는데 아모리 1세는 이에 동의했으나 아사신파의 사신을 성전기사단이 멋대로 살해하여 협상을 방해한 사건도 일어났다.관련 글

1171년경에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동로마 황제와 다음과 같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
Amalric, realising that no military help would be forthcoming from the West, had made a state visit to Constantinople in 1171 and had recognised to Byzantine emperor, Manuel I comnenus, as his overlord in return for his protection.
아모리는,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군사적 도움도 오지 않을 것을 인식했고, 1171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국빈 방문했고,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에게 그를 보호해줄 대가로 그를 그의 상위 군주로 인정하였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1174년 누르 앗 딘이 죽자 아모리는 즉각 바니아스(Banias)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 원정길에서 아모리는 이질에 걸렸고 고열에 시달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의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해 7월 11일 죽었다.
아모리 왕은 누르 알 딘의 죽음을 이용해 북쪽으로 진격했으나 이질에 걸리고 말았다. 아랍인 의사들과 프랑크 의사들은 치료 방식을 두고 논쟁을 벌였고 그는 서른여덟 살에 불과한 나이에 7월 11일 예루살렘에서 사망했다.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King Amalric's death was as unexpected as that of his father and brother. In June 1174 he led his army against Banias, but accepted the favourable peace terms offered by the government of Damascus Before he stuck camp the king complained that he was feeling unwell, and when he reached Tiberias be began to suffer from dysentery. As he returned slowly to Jerusalem his health steadily worse, and he died there on July in the age of thirty-eight.
아모리 왕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와 형제의 죽음만큼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1174년 6월에 그는 바니아스를 향하여 그의 군대를 이끌었지만 다마스쿠스 정부가 제공하는 호의적인 평화 조건을 받아들였다. 야영하기 전에 왕은 자신의 몸이 좋지 않다고 호소했고 티베리아스에 도착했을 때 이질로 고통 받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그때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38세의 나이로 7월에 그곳에서 죽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아모리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콤니니는 이사벨을 낳고[1] 나블루스(Nablus)를 유산으로 받았다. 아모리가 사망한 뒤 마리아 콤니니는 발리앙 디블랭과 재혼했다. '이벨린의 발리앙'으로 불리는 그 사람이다. 이 때문에 보두앵 5세가 사망한 뒤 왕위 계승을 둘러 싸고 발리앙과 기 드 뤼지냥 간의 대립이 있었다. 발리앙은 자신의 양녀인 이사벨을 계승 후보로 밀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발리앙 디블랭기 드 뤼지냥 문서 참조.

2.1. 후계자이자 외아들 보두앵 4세

아녜스가 낳은 아들 보두앵이 아모리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당시 보두앵은 9세부터 징후를 보인 한센병에 걸려 있었다.[2]
Amalric recognised that his heir needed a good education and when Baldwin was nine he appointed as his tutor William, archdeacon of Tyre, one of the most learned men in the kingdom. William was not quite forty at the time. He Had been born in Jerusalem but had not spent twenty years in western Europe studying under some of greatest teachers there, and in 1170 he had just successfully accomplishment a mission to Constantinople on the king's behalf. The prince went to live in the household of this cultivated cosmopolitan churchman, but the archdeacon soon diagnosed illness in his young ward.
아모리는 그의 후계자가 좋은 교육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했고 보두앵(보두앵 4세)이 아홉 살이었을 때 그는 왕국에서 가장 많이 배운 사람 중 한 명인 티레의 부주교인 윌리엄(기욤 드 티레)을 가정교사로 지명했다. 윌리엄은 그때 나이가 아직 마흔이 아니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지만 서유럽에서 20년 동안 훌륭한 교사들 밑에서 공부했으며, 1170년 그는 왕을 대신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왕자는 이 교양 있는 국제적인 성직자의 집에 살러 갔지만, 그 부주교는 곧 그의 어린 피보호자에게서 병(한센병)을 진단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아래의 가설은 보두앵의 병의 근원에 대한 Piers D. Mitchell의 가설이다.
There is no evidence that either Amalric, Agnes or Amalric's second wife Maria Comnena had leprosy, but someone who spent plenty of time with the young prince must have had the disease as he clearly caught it from somebody. It is possible that either a member of his family a wet nurse or other staff from the royal household had the disease with mild or easily concealed symptoms and that the disease spread from them. Whatever the source, the disease was contracted by Baldwin at a young age.
(부친) 아모리, (모친) 아그네스, 아모리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 콤네나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증거는 없지만, 어린 왕자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누군가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옮은 병에 걸렸을 것이다. 땀이 많은 가족의 보모나 왕실 직원 중 한 명이 가벼운 증상이나 쉽게 감춰진 증상으로 병이 옮아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그 병은 어린 나이의 보두앵에게 전염되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그는 이미 아들이 한센병의 징후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3]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아들을 위해 승마 교사를 고용한 이 일화가 그 한 증거이다.
when the first symptoms of Baldwin's illness appeared, his father employed Arab doctors to treat him, among whom was a Christian, Abu Sulayman Dawud. He also engaged Abul'khair, Abu Sulayman's brother, to teach the boy to ride. This was an essential accomplishment for any Frankish noblemen, but Baldwin who was effectively one handed, needed to learn special skills if he intended to fight, because he would have to control his mount in battle with his knees alone. The training he received was clearly first-rate because he remained excellent rider until he became too ill to mount.
보두앵의 병의 첫 증세가 나타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치료하기 위해 아랍인 의사들을 고용했고, 그 중에는 기독교인 아부 술레이만 다우드도 있었다. 그는 또한 아부 술레이만의 형제인 아불케르를 고용하여 소년에게 승마를 가르쳤다. 이것은 모든 프랑크 귀족들에게 필수적인 성취였지만, 사실상 한손이었던 보두앵은 그가 전투를 수행하고자 한다면 특별한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무릎만으로 전투에서 자신의 승마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받은 훈련은 그가 너무 아파서 말에 오를 수 없을 때까지 훌륭한 기수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최고의 수준이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그러나 이외에도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딸 시빌라를 일찍 결혼시키려고 시도했으며, 상스르의 에티엔(Étienne de Sancerre)을 사위로 골랐으나 정치적 사정이 겹쳐서 실패로 돌아갔다.
Amalric's choice of a son-in-law was Count Stephen of Sancerre, a member of the house of Blios. He was extremely well connected his sister, Adela had married Louis VII of France, two of his brothers were married to the daughters of Louis VII by his first wife, Eleanor of Aquitaine, and stephen was also related in his own right to the English royal house. He responded favourably to Amalric's proposals and came to Jerusalem in 1171, accompanied by Hugh III, duke of Burgundy, who brought gifts from Louis VII.
아모리가 사위로 택한 것은 블루아 가문의 일원인 상스르 백작 에티엔이었다. 그는 누이동생인 아델라가 프랑스의 루이 7세와 결혼했고, 그의 형제 중 두 명은 루이 7세의 첫 아내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 의해 루이 7세의 딸과 결혼했으며, 에티엔은 영국 왕실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는 아모리의 제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1171년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고, 그는 루이 7세로부터 선물을 가져왔다.
The Frist symptoms of Prince Baldwin's illness may have appeared by that time and it may have been necessary for Amalric to consider the possibility that Baldwin might not become king. In that case Sibyl and her husband would be the heirs to the throne.
보두앵 왕자의 병의 초기 증상은 그 무렵에 나타났을지도 모르며, 아모리는 보두앵이 왕이 되지 못할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라면 시빌라와 그녀의 남편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다.
Yet, for reasons which are not known, Stephen refused to marry Sibyl and returned to France. His change of heart is unlikely to have been caused by his discovering some scandal about her, since she was still a child and was living under the strict supervision of her great-aunt in the convent of Bethany. It is possible that negotiations broke down because the situation in the Latin kingdom had changed since Stephen had accepted the terms offered to him in the king's name by the archbishop of Tyre: before Stephen reached Jerusalem Amalric, realising that no military help would be forthcoming from the West, had made a state visit to Constantinople in 1171 and had recognised to Byzantine emperor, Manuel I comnenus, as his overlord in return for his protection. Western princes from the time of the Frist Crusade had found great difficulty in accepting Byzantine claims to their allegiance, and it may have been for the reason that Stephen declined to marry Sibyl, because as a possible future regent of king he would not accept Byzantine suzerainty.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에티엔은 시빌라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의 심경의 변화는 그녀가 아직 어린 아이였고 베타니 수녀원에서 그녀의 대고모의 엄격한 감독 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녀에 대한 어떤 스캔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 같지는 않다. 에티엔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 아모리는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군사적 도움도 오지 않을 것을 깨닫고, 콘스탄티노플을 국빈 방문하기 전에, 티레 대주교가 그에게 왕의 이름으로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라틴 왕국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에티엔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아모리는,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군사적 도움도 오지 않을 것을 인식했고, 1171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국빈 방문했고, 비잔틴 황제 마누일 1세 콤네노스에게 그를 보호해줄 대가로 그를 그의 상위 군주로 인정하였다. 1차 십자군 전쟁 당시의 서방 제후 들은 그들의 충성에 대한 비잔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에티엔이 시빌라와의 결혼을 거절한 것은 아마도 미래의 왕 혹은 섭정으로서 비잔틴의 통치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보두앵 4세의 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아들의 치세는 아들의 병으로 인해 여러 가지 산적한 문제(후계자 문제 등)가 많았어도 아들은 의지력 있게 의무에 집중하며 이슬람의 성군 살라흐 앗 딘과의 대결에서 몽기사르 전투 등에서 그를 패배시키는 등의 상당한 성과를 내면서 같이 성군의 평가를 받음으로써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한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했다.

3. 평가

''he was a man of wisdom and discretion, fully competent to hold the reins of government in the kingdom.''
''그는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왕국에서 통치권을 장악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영어위키 Amarlic of Jerusalem
아말리크(아모리 1세)는 훌륭한 왕이었고 시간이 좀더 지나면 위대한 왕으로 우뚝 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통찰력은 왕국의 다른 많은 통치자들을 능가했다. 우트르메르에 대한 그의 공헌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4. 기타

개인적인 성향은 이런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Like his brother Baldwin III, he was more of an academic than a warrior, who studied law and languages in his leisure time: "He was well skilled in the customary law by which the kingdom was governed – in fact, he was second to no one in this respect." ... He especially enjoyed reading and being read to, spending long hours listening to William read early drafts of his history.
그의 형 보두앵 3세처럼, 그는 여가 시간에 법과 언어를 공부한, 전사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웠다. "그는 왕국이 통치되는 관습법에 대해 잘 숙련되어 있었다. – 사실, 그는 이 점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 그는 특히 읽거나 [그의 글을] 읽히는 것을 즐겼고, 윌리엄(기욤 드 티레)의 그의 역사 집필의 초기 초안을 읽는 것을 들으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4]
He had a slight impediment in his speech, not serious enough to be considered as a defect but sufficient to render him incapable of ready eloquence. He was far better in counsel than in fluent or ornate speech.
그는 발화에 약간의 장애가 있었는데, 결함으로 여겨질 만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준비된 연설을 할 수 없을 정도는 되었다. 그는 유창하거나 화려한 연설보다는 협의에 훨씬 능했다.[5]
영어위키 Amarlic of Jerusalem

다음은 그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신의 은총으로 영광스러운 프랑스의 왕이며 가장 탁월하고 고귀한 영웅이신 루이에게 신의 은총으로 예루살렘의 왕인 아말릭이 경배드립니다.
저의 형제이자 주군이신 유명한 보두앵(보두앵 3세 - 아말릭의 형) 왕께서 승하하셨다-오호통재라!-[6]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그분은 성녀 스콜라스티카(2월 10일) 축일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제가 적법한 계승자로서 그분이 다스리는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고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아무런 장애도 없었으며 모든 신하들이 호의를 보였습니다. 동방의 기독교 세계가 심각하게 축소되고 전에 없이 압박받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안티오크의 영주인 르노 드 샤티용이 군사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포로가 되는 불상사가 있었으므로, 이러한 불행과 훨씬 더 애써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 역시 죽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에는 안티오크에서 지진이 일어나 성채와 탑과 시가지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전하, 하느님께서 육신으로 변하시어 방문하시고 그분의 빛으로 축성을 하신 이 땅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의 왕국은 이 땅을 더러운 이교도들을 손에서 빼앗아서 하느님께 바칠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 성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애정과 신념과 연민을 가지고 있는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이 편지의 전령이 말씀 드리겠지만, 지금처럼 당신의 충고와 긴급한 도움이 필요했던 적이 없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만약 전하께서 성묘를 방문하시고자 한다면, 제가 살아있는 한, 전하께서는 다른 나라가 아니라 전하의 왕국을 돌아보시는 것과 똑같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전하를 위대하고 지고하신 주군으로 경애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하의 지배 아래 있었고 지금도 그 아래 있습니다.
김능우, 박용진 편역, <기독교인이 본 십자군, 무슬림이 본 십자군>

여담으로 프랑스어로 아모리는 Amaury 이고 애므리는 Aimery 인데 상당히 헷갈린다. 따라서 본래 둘은 다른 이름이지만 서유럽 사가들도 이를 헷갈려하여 전자를 아모리 1세, 후자를 아모리 2세로 칭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국왕의 계보를 따질 때에 아모리와 애므리 드 뤼지냥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 맞다. 다만 아모리 문서가 캐릭터에게 빼앗겨서 문서명을 유지한다

5. 참고자료

영어위키 Amarlic of Jerusalem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시공사, 2012.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한길사, 2004.
김능우, 박용진 편역, <기독교인이 본 십자군, 무슬림이 본 십자군>,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0.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Cambridge University, 2005.
[1] 두 딸을 낳았으나 장녀는 일찍 요절했다. 살아남은 차녀가 이사벨[2] 이 열세 살짜리 나병환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나병으로 유린된 그의 육신이 우트르메르와 떠오르는 샛별 살라딘과의 사이에 있는 전부였다. 앞으로 놓여 있는 격동기를 헤치며 우르트메르를 제대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었다. 왕국에는 용감함, 남자다움, 신속한 회복력 등은 팽배했지만, 정말로 필요했던 자질인 통찰력과 목적의식을 조화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빨리 나오지 않는 한 왕국에는 끔찍한 최후의 심판일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3] But even though no diagnosis of Baldwin's illness was made, King Amalric must have been told of the possibility that this was incipient leprosy. 하지만 보두앵의 병에 대한 진단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버지인) 아모리 왕은 이것이 초기 한센병일 가능성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4] 아들 보두앵 4세도 지성이 예리하다는 평을 들었으며 역사에 대한 흥미에서도 비슷했다.[5] 이 점은 아들 보두앵도 말을 더듬거렸다는 점에서 비슷했다.[6] ‘아 비통하다’라는 뜻으로 슬플 때나 탄식할 때 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