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pad> |
역사서를 편찬하는 기욤 드 티레 |
1. 개요
기욤 드 티레(Guillaume de Tyr. 영어로는 William of Tyre) (1130년 경 ~ 1186년 9월 29일)는 십자군 시대의 집정대신(執政大臣)이자 연대기 역사가, 티레의 대주교였다.2. 생애
기욤 드 티레는 예루살렘 왕국이 보두앵 2세의 정복 전쟁이 한창인 전성기 시절, 수도 예루살렘에서 1세대의 유럽인들의 자식으로 토종 우트르메르의 첫번째 세대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부모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태생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인이었을 것으로 예상되고 예루살렘 왕국에 상인이었던 형제가 있었으니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귀족에 속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멜리장드의 아들 보두앵 3세와 친구이자 동기로 예루살렘 왕국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묘교회에서 라틴어 및 중세 자유과(Liberal arts)[1]와 그리스어 아랍어 같은 다양한 학문과 문화를 공부했으며, 1145년 무렵에는 장장 20년 동안 파리에서 후세에 파리 주교가 되는 피에르 롱바르(Pierre Lombard)와 인문학을 1155년부터는 오를레앙에서 신학 교회법(Canon law)을, 1161년부터는 중세시대 가장 권위있는 법학대학인 볼로냐 대학교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다.<nopad> |
마누일 1세를 알현하는 기욤 드 티레 |
보두앵 4세[3]의 나병 증상을 의심하는 기욤 드 티레[4] |
3. 유산
기욤 드 티레는 제 3차 라테란 공의회에 대한 기사와 무함마드 시대의 이슬람 국가에 대한 동양의 역사(Historia Orientalis)를 집필했지만 현재까지는 둘다 유실되어 제목만 존재하는 실정이다.[6] 대신에 그는 오늘날 예루살렘 왕국의 역사 저자로 유명한데, 바로 자신의 필생의 역작인 예루살렘의 역사(Historia Ierosolimitana)와 바다 너머에서 행해진 일의 역사(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가 현전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 직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그 후 수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중세 역사가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책에 인용됐다. 그것도 그럴것이 12세기 예루살렘의 원주민이 기록한 유일한 출처이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십자군 연구의 정석이자 개론으로 활용되어 기욤 드 티레의 진술이 액면 그대로 취해졌다. 최근의 역사 학자들은 기욤 드 티레가 왕국의 정치적 분쟁에 개입 한 것이 그의 기록에 편향된 결과를 초래했다고[1] 쉽게말해 인문(人文). 자유 7과라고도 하며 중세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있는 지식인'이 갖춰야할 소양과 그에 관련된 학문으로 시절마다 종류가 변경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문법, 수사학, 변증법,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 7가지이다.[2] 현대는 극심한 병세가 아니라면 리팜핀(리팜피신) 600mg을 1회만 복용하고 여러가지 항생제를 삼키면 완치가 되어 버린다.[3] 아이들 몸과 얼굴에 멍이 잔뜩 들어있고 보두앵이 상대편 아이의 볼을잡고 심판인 듯한 아이가 손을 들고 있다.[4] 확실히 중세 성직자라 그런지 남겨진 그림이 전부 원형탈모소갈머리.[5] 대립교황의 난립의 폐해를 막기 위한 교황 선출권 개정(콘클라베 초기모델), 카타리파 이단 선언, 주교좌성당에 교육교사 상주 등 총 27장의 규정을 결의했다.[6]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불경한 실화묘사(늘그막에 9살의 아이샤와 결혼 그리고 유아와의 성관계...)가 있다고해서 무슬림들이 현상금 걸고 다 찾아내 찢어발겼다훼손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