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01 21:58:44

아크레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inverse.png 이스라엘의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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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예루살렘 구시가지와 성벽† 마사다 고대 도시 아크레
텔아비브 화이트 시티 ―모더니즘 운동 성서 텔메기도, 하솔, 베르셰바 향교 교역로―네게브 지역의 사막 도시
하이파와 갈릴리 서부 지역의 바하이교 성지 카르멜 산 인류 진화의 유적지:
나할 메아롯 동굴 / 와디 엘 무그하라 동굴
유대 저지대의 마레샤와 벧구브린 동굴군
―동굴 세계의 소우주
베이트 셰아림의 네크로폴리스:
'유대인의 부활'에 관한 기념비
}}} † 유네스코에는 이스라엘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요르단이 등재 신청을 했고, 유네스코는 별다른 국가 분류 없이 '예루살렘'이라고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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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 아크레의 구시가지
Old City of Acre
국가·위치 이스라엘 북부 주, 아코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1년
등재기준 (ii)[1], (iii)[2], (v)[3]

히브리어 עַכּוֹ‬ (아코)
아랍어 عكّا‎ (아카)
영어 Acre

1. 개요

파일:Israel Acre 1-1.jpg

이스라엘 서북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 하이파 만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세 십자군 최후의 근거지였다. 현재 인구는 4만 8천 명인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지로 한정하면 5천 명이다. 이슬람, 기독교 시대의 성벽이 지중해와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낸다. 신시가지에는 유대인, 구시가지에는 아랍인이 거주한다.

2. 역사

2.1. 고대

아크레, 혹은 아코는 기원전 3,000년경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유적이 발견될 만큼 유서깊은 도시였으며 본래 가나안인의 도시였고, 사실상 페니키아 문화권에 속한 도시였다. 기원전 725년에 아크레가 시돈, 티레와 힘을 합쳐 아시리아 왕국의 살만 에세르 왕에 저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역사는 다른 페니키아 도시들과 비슷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셀레우코스 왕조 사이의 분쟁 지역에 위치한 관계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점령당했다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점령당하기를 반복했다.

기원전 95~55년에는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왕에게 점령당했던 적도 있으며, 로마 공화국이 헬레니즘 제국들과 아르메니아를 차례로 격파하면서 이 지역도 로마의 지배권 안에 들어간다.

2.2. 중세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아크레는 이슬람 제국의 정복 이후 키프로스를 약탈하는 해적들의 거점이 되었다.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 치하에 아크레는 대리석으로 된 이슬람 사원과 요새화된 항구를 지닌 번영한 도시였다는 기록이 있다.

십자군이 항구도시 아크레와 야파를 정복하고 요새화한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을 거치지 않고 십자군 국가에서 동방 물산을 직수입하여 엄청난 이익을 얻고 번영을 누린다.

파일:Acre1291es.png

2.2.1. 1차 공방전 (1189-1190년)

파일:Siege_of_Acre.jpg

파일:Richard_Lionheart_mass_execution-1-1-1-1.jpg
무슬림 포로들을 학살하는 리처드 1세

무슬림의 수비, 십자군의 포위 공격, 무슬림의 역포위

2.2.2. 2차 공방전 (1291년)

파일:736px-SiegeOfAcre1291.jpg

십자군의 무역 거점이자 보급기지로 번영을 누렸던 아크레는 맘루크 왕조에 정복된 이후 지역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사페드[4]에 내주고 서서히 몰락했다. 맘루크 왕조도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도시들과 교역을 활발하게 벌이는 입장이었지만 변방의 아크레보다는 알렉산드리아를 무역항으로 더 선호했던 것이다.

2.3. 오스만 제국 시대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무찌르고 1517년부터 아크레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1596년에 오스만 제국이 시행한 인구 조사에 의하면 고대부터 중세까지 찬란한 번영을 누렸던 아크레 시가 있던 지역의 인구는 겨우 81가구에 독신자 15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697년 이 도시를 방문한 영국인 학자는 십자군 시대에 제노바베네치아와 교역하며 번영을 누렸던 그 유명한 도시에 이슬람 사원 하나에 초라한 오두막 몇개만 버려진 유적지랑 같이 나뒹굴고 있다고 한탄조로 기록했다. 그러나 17세기에 갈릴리 지방의 아랍인 태수였던 자히르 알 우마르가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사람들을 아크레의 폐허가 있던 곳에 정착시키고 요새를 재건했다.[5] 아크레 시는 다시금 항구 도시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거듭났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벌이던 1799년에 시점에 아크레는 아흐메트 자자르 파샤라는 보스니아 출신 군인의 통치 하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아크레에서 누가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하면 바로 코나 귀를 자르는 공포 정치로 악명 높았으며, 자신을 알현하는 유럽인들에게는 종이를 꽃 모양으로 선물해주기를 좋아하는 특이한 취미도 갖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아크레를 공격했으나 영국인 수병 88명의 지원을 받은 자자르 파샤의 오스만 4천 명이 이를 격퇴하였다.

아크레를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시드니 스미스가 이끄는 영국인 수병들은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순례할 권리를 얻게 되는데, 이는 십자군 전쟁 이후 최초로 서유럽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기도 했다.

1799년 아크레 전투는 69일간의 공성전이 되었으나 결국 나폴레옹은 패전한다. 이 패전은 나폴레옹 군사경력 중 최초의 실패 사례였다.

2.4. 영국령 팔레스타인



[1] 아크레는 대표적인 역사적 항구 도시로, 현존하는 18세기~19세기 이슬람 요새 도시 아래 중세 십자군 건물의 중요한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2] 아크레의 십자군 도시 유적은 예루살렘의 중세 십자군 왕국 수도의 배치와 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3] 오늘날 아크레는 성벽을 두른 오스만 제국 도시의 중요한 예로 성채, 모스크, 대상의 숙소, 목욕탕 등 전형적인 도시 요소를 갖추고 있다. 부분적으로 지하의 십자군 구조물 위에 세워졌으며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다..[4]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 내륙에 위치한 소도시[5] 버려졌던 십자군 시절 유적을 재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