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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10대 칼리파 هشام بن عبد الملك | 히샴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 ||
제호 | 한국어 | 히샴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
아랍어 | هشام بن عبد الملك | |
영어 | Hisham ibn Abd al-Malik | |
출생 | 691년 | |
사망 | 743년 2월 8일 (향년 51~52세) | |
존호 | 칼리파 | |
재위 기간 | 724년 1월 26일 ~ 743년 2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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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레스타인 아리하(예리코)에 남아있는 히샴의 궁전 모자이크.
우마이야 왕조 제10대 칼리파.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실패 여파와 야지드 2세의 실정으로 흔들리는 왕조를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멸망을 늦출 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우마이야 왕조에서 창건자 무아위야 1세의 뒤를 이어 긴 치세를 누린 칼리파로, 우마이야 왕조의 초반을 무아위야 1세가 대표하고, 전성기인 중반을 아브드 알 말리크와 왈리드 1세가 대표한다면, 후반기는 히샴이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691년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우마이야 왕조 제5대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이며, 어머니는 쿠라이시 부족의 저명한 일족인 바누 마흐줌의 족장 히샴 이븐 이스마일의 딸인 아이샤였다. 이슬람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아부 알 왈리드가 그의 대부가 되어줬다고 한다. 왈리드 1세의 치세에 메카로의 순례를 다녀왔는데, 이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 자인 알 아비딘을 만났다. 706년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었던 아나톨리아 습격 작전을 이끌어 많은 요새를 함락시켰다.717년 제12대 칼리파 술라이만이 사망했다. 이때 술라이만은 사촌인 우마르 2세를 지명했지만, 형제인 그가 반발할 것을 우려하여 수석 고문인 라자 이븐 하이와 알 킨디에게 자기가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숨겼다가 죽은 후에 공표하라고 지시했다. 술라이만 사후 라자가 우마르 2세의 즉위를 우마이야 일족에 통보하자, 그는 "칼리파는 오직 알 말리크의 직계 후손만 이을 수 있다"며 반발했지만 강한 압력을 받고 주장을 철회했다. 10세기의 이슬람 기록에 따르면, 그는 우마르 2세의 치세 때 자신과 형제들이 처한 대우에 대해 불평하는 편지를 칼리파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후 우마르 2세의 후계자인 야지드 2세 치세에서도 별다른 직책을 맡지 않았다.
2.2. 즉위 과정
724년 1월 26일, 야지드 2세가 다마스쿠스의 준드 다미슈크의 발카 분구에 있는 이르비드에서 병사했다. 야지드 2세는 본래 아들 왈리드 2세를 칼리파로 선임하려 했지만, 최측근인 마스라마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복 형제인 그를 칼리파로 임명하고, 그 대신 왈리드 2세를 히샴의 후계자로 세웠다. 당시 알루사파 인근의 카스르 알 하이르 알 가르비에 있던 그는 전령으로부터 칼리파의 반지를 전달받고 즉시 다마스쿠스로 달려가 칼리파로 즉위했다.히샴은 즉위 후 라마단을 치른 뒤 이라즈 총독 우마르 이븐 후바이르를 해임하고 칼리드 이븐 압달라 알 카스리가 새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의 외동 아들인 무함마드가 이집트 총독에 임명되었지만 역병이 창궐하자 몇 달만에 그곳을 떠났고, 사촌의 아들인 알 후라 이븐 유수프가 새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야지드 2세 치세 때 카프카스 방면에서 하자르를 상대로 승승장구했던 알자라 이븐 압달라는 해임되었고, 히샴을 자신을 칼리파로 세우는 데 기여한 마슬라마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총독으로 부임하여 하자르를 상대했다. 야지드 2세 시기의 총독들 중에서 칼리프 즉위식 때 막대한 선물을 가져온 북아프리카 총독 비쉬르 이븐 소판 만이 지위를 유지했다. 724년 메카로의 순례를 떠났다. 역대 칼리파들이 순례길에 들린 도시들에 기부를 아낌없이 했지만, 그는 야지드 2세의 실정으로 재정 위기가 심화된 상황에서 그럴 수 없다고 보고 돈을 절대로 풀지 않아 인색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2.3. 내치
히샴이 시리아의 타드무르(팔미라) 부근 사막에 건설한 히르 샤르키 궁전
히샴은 예술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으며, 더 많은 학교를 짓고 수많은 문학과 과학 저서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감독해 이슬람 제국의 교육 수준을 끌어올렸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하디스 학자인 이븐 시하브 알주흐리에게 자신이 외운 하디스를 글로 쓰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더 많은 재정 수입을 보장받기 위해 피지배인인 마왈리가 개종했더라도 아직 무슬림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고 지즈야를 강압적으로 매기면서 민심 이반을 초래했다.
2.4. 외치
2.4.1. 코카서스 전선
마슬라마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새 총독으로 부임한 뒤 즉시 코카서스를 향한 원정을 떠났다. 725년 코카서스의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고, 726년 하자르의 반격을 격퇴했으며, 727년 후방으로 물러난 하자르를 추격하여 여러 마을을 점거했다. 그러나 그는 원정 결과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알 자라흐 이븐 압달라 알 하캄으로 교체했다.알 자라흐는 728~729년 하자르의 반격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하자르 카칸의 아들 바르직은 대군[1]을 이끌고 테렉 협곡을 건너 아르다빌 인근에서 우마이야 군을 격멸하고 지휘관 알 자라흐를 몰아냈다. 이후 아르다빌을 함락하고 모든 전투 연령의 남성을 죽이고 여성을 포로로 잡았으며, 남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길란, 아제르바이잔, 쿠르디스탄을 침공했다. 사이드 알 하라시가 이끄는 부대가 카프카스로 진군하여 자라흐를 도왔으나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다. 결국 히샴은 730년 마슬라마를 복귀시켰고, 마슬라마는 바르산 근처에서 하자르를 물리쳤다.
이후 마슬라마가 지휘하는 군대는 데르반트 항구로 가는 길을 열었다. 732년, 무슬림군은 데르반트 요새를 공략하여 흑해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마슬라마는 732년 반역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히샴에 의해 해임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군사 총독으로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 민정총독으로 사이드 알 하라시가 부임했다. 하지만 735년 사이드가 백내장에 걸려 사임했고, 마슬라마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무슬림군은 마르완의 지휘 아래 트란스카프카스 일대에 대한 원정을 진행하여 사흐르 알-사칼리바에서 하자르 연합군을 격파하고 카프카스 산맥 너머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하자르의 수도인 사만다르를 함락시킨 이후에는 더 이상 원정을 벌이지 않았다.
2.4.2. 호라산 전선
히샴 재위 초기, 투르크인들이 호라산 일대를 습격하여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는 이에 보복하고자 724년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나스르 이븐 사야르 총독과 장수들간의 불협화음이 발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급기야 나스르가 자신의 여령을 따르지 않은 이들을 체포해 채찍 100대와 머리카락과 수염을 모두 밀어버리는 형벌에 처한 뒤 쇠사슬에 묶어 이라크로 보내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격분하여 나스르를 해임하고 새 총독을 임명했다.그러나 그 역시 투르크군을 상대로 패배했고, 히샴은 다시 우나이드 이븐 압드 아르-라만을 선임했다. 우나이드는 다르야 강을 건너 투르크인 3,000명을 죽이고 투르크에게 지배되고 있던 사마르칸트를 탈환했다. 그러나 투르크군이 다시 돌아와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사이의 경로를 차단해버렸다. 이에 우마이야군은 산길을 통해 이동하던 중 투르크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지만 격파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우나이드는 메르브로 돌아가던 중 사망했다. 이에 부관 한 명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사전에 저지되었고, 히샴은 유스프 이븐 우마르를 호라산의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2.4.3.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히샴은 동로마 제국에 대한 무슬림군의 정기적인 습격 작전을 이어갔다. 728년, 그의 아들 무아위야는 킬리키아의 사말루 요새를 공략했다. 729년에는 사이드 이븐 히샴과 함께 아나톨리아 전역을 약탈했고, 731년 카파도키아의 하르시아논을 검령했으며, 732년 아크로이논을 약탈했다. 무슬림군은 이후에도 734년부터 737년까지 매년 아나톨리아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738년 술레이만 이븐 히샴이 신디라를 점령했고, 738년에서 739년 사이에 마슬라마가 카파도키아의 일부 지역을 공략했다.이렇듯 아나톨리아에 대한 지속적인 습격 작전을 이어가던 히샴은 740년 알 가미르가 이끄는 경무장 기병대 1만 명을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로 보내고 압달라 알 바탈과 아부 말리크 이븐 슈에비브에게 후속 병력을 이끌고 뒤따르게 했으며, 아들 술라이만에게 또다른 병력을 맡겨 카파도키아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레온 3세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출진하여 아크로이논 전투에서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를 휩쓸던 압달라와 아부 말리크를 주살하고 1만여 명의 아랍군을 섬멸했다. 술라이만은 아나톨리아의 시골 지역을 약탈했지만 요새화된 도시 공략에 실패하다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패퇴했다. 그 과정에서 2만에 달하는 인명이 동로마군의 포로가 되었다. 레온 3세는 승리를 기념하여 아크로이논을 '승리의 도시'라는 뜻의 니코폴리스(Νικόπολις)로 개명했다.
2.4.4. 서방 전선
732년, 알안달루스의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은 피레네 산맥의 서쪽을 넘어 북상해 아키텐 공을 격파하고 보르도를 약탈한 뒤 투르의 상 마르탕 교회에 박대한 재보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그곳으로 가기 위해 르와르 강으로 진군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를 격퇴하기 위해 남하했고, 양군은 푸아티에 인근 평원에서 마주쳤다. 이후 벌어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무슬림군은 괴멸되었고 아바드 알 라만은 전사했다. 이후 알안달루스의 현지 지배층간의 정쟁이 심화되면서, 무슬림군은 더 이상 프랑크 왕국을 향한 조직적인 공세를 벌이지 못했다.2.4.5. 시아파의 반란
740년, 시아파의 이맘이었던 자이드 이븐 알리가 쿠파에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쿠파에 주둔하고 있던 수백 명의 우마이야 병사들을 몰아낸 뒤 바스라, 모술 등지에서 추가로 병력을 모집하여 이라크를 장악하고 시리아로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쿠파의 총독은 이 음모를 조기에 적발하고 사람들에게 대 모스크에 집결하라고 명령한 뒤 그들을 안에 가둔 후 자이드를 찾으려 했다. 자이드는 일부 사람들과 함께 모스크에서 빠져나온 뒤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와 항전하자고 소리쳤다.그러나 자이드를 심정적으로 지지했던 이들은 눈앞의 우마이야 장병들이 칼과 창으로 위협하자 겁에 질려 자이드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자이드는 수십 명의 추종자만을 거느리고 우마이야군과 맞서 싸우다가 화살 하나가 이마에 관통하면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추종자들에 의해 쿠파 외곽에 비밀리에 묻혔지만 나중에 우마이야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머리는 히샴에게 보내졌고 몸통은 십자가에 못박혀 3년간 방치되었다. 743년 히샴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왈리드 2세의 명에 따라 시신이 비로소 수습되어 화장된 뒤 유프라테스 강에 뿌려졌다.
2.4.6. 베르베르 대항거
총독들은 하샴의 피지배층에 대한 지즈야 부과 정책을 적극적으로 따랐는데, 특히 북아프리카의 지배자 비쉬르 이븐 소판이 극심한 수탈을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베르베르인들은 740년 카와리즈파 인사인 마이사르 알 마사리의 통솔하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탕헤르를 공략했다. 741년 우마이야 왕조군이 바그두라 전투에서 참패한 뒤 반란의 불길은 급속도로 번졌고, 한때 알안달루스와 북아프리카 대부분이 카와리즈파의 수중에 넘어갔다.히샴은 시리아 최정예부대를 북아프리카로 보내고 이집트 총독 한드할라 이븐 사프완 알 칼비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다. 한드왈라는 알 카른 전투와 알 아스남 전투에서 대규모 격전을 치른 끝에 수많은 베르베르인들을 죽이고[2] 북아프리카 반란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발지 이븐 비슈르를 알안달루스로 파견하여 베르베르 반란군을 마저 섬멸하게 했다.
그러나 반란이 어느정도 진압되었지만 시리아인들이 알안달루스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권력을 장악하려 들자, 현지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시리아군과 알안달루스 무슬림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이에 한드할라는 743년 5월 사촌 아부 알 카타르 이븐 다라르 알 칼비를 알안달루스의 새 총독으로 파견하여 양 세력을 화해시키고 질서를 재정비하게 했다. 알 칼비는 임무를 완수하고 알안달루스에 남기를 원하는 시리아인들을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에 정착시켰다. 이리하여 반란은 수습되었지만, 모로코는 끝내 재점령하지 못했다.
2.5. 사망
히샴은 당초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왈리드 2세가 아닌 아들 마슬라마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이복동생이며 하자르와의 전쟁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둬 명성이 자자했던 마슬라마 이븐 아바드 알말리크. 히샴 이븐 이스마일 알마흐주미와 아들 이브라힘과 무함마드, 시리아 북부의 바누 압바스 족장의 아들 이븐 카일이 그의 계획을 지지했으며, 마슬라마의 어머니 움 하킴도 아들을 위해 로비했다. 그러나 이라크 총독 칼리드 알 카스리 등 여러 지역의 총독들이 대거 반발했고, 마슬라마 이븐 아바드 알 말리크가 730년대 후반에 사망해버리면서 계획이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다 743년 2월 6일 히샴은 임종을 맞이했고, 아들 마슬라마가 장례 기도를 이끌었다. 이후 왈리드 2세가 칼리파로 즉위했다.750년 아부 알 아바스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린 뒤 자이드 이븐 알리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그의 무덤을 파헤친 뒤 유해를 십자가에 못 박아 며칠간 방치한 후 불태웠다. 손자 압드 알 라흐만은, 우마이야 조 멸망 이후 아불 사파흐 주도로 벌어진 야파의 비극(우마이야 왕족 학살)에서 빠져나온 후, 마그레브를 거쳐 이베리아에서 후우마이야 왕조를 건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