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13:32:28

왈리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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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6대 칼리파
الوليد بن عبد الملك بن مروان | 알 왈리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이븐 마르완
제호 한국어 알 왈리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이븐 마르완
아랍어 الوليد بن عبد الملك بن مروان
영어 Al-Walid ibn Abd al-Malik ibn Marwan
출생 674년
사망 715년 2월 25일 또는 3월 11일 (향년 40~41세)
존호 칼리파
재위 기간 705년 10월 9일 ~ 715년 2월 25일 또는 3월 11일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외치2.3. 내치
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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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마이야 왕조 제6대 칼리파. 아버지 아브드 알 말리크와 함께 우마이야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674년경 메디나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아브드 알 말리크는 쿠라이시 부족의 우마이야 씨족 일원이었다. 어머니 왈라다 빈트 알 압바스 이븐 알자즈는 6세기에 활약한 바누 압스 부족장 주하이르 이븐 자디마르의 후손이다. 684년 가족과 함께 메디나에서 반 우마이야 세력에 의해 강제 추방된 뒤 시리아로 이주했다가 할아버지 마르완 1세가 왕위에 오른 뒤 다마스쿠스 궁정에서 자랐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부관으로 발탁된 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696년 여름 말라티아(오늘날 멜리테네)와 알마시사(오늘날 모프수스티아) 사이의 지역을 급습했고, 697년에는 말라티아 북쪽의 아트마르를 공략했다. 또한 698년 메카로 향하는 순례 행렬을 이끌었다. 701년 또는 701년에 북쪽의 팔미라와 남쪽의 아즈락 오아시스와디 시르한 분지를 연결하는 사막 전초기지인 카스르 부르쿠를 건설 및 확장했다.

2.2. 외치

2.2.1. 호라산 재정복

705년 10월 9일 아버지가 역병으로 사망한 뒤 칼리파로 즉위한 그는 이븐 쿠타이바를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했다. 쿠타이바는 같은 해에 메르브를 재점령한 뒤 707년 아무다리야 강을 건넜지만 현지 부족들에게 포위되어 두 달간 구원 요청도 하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 하지만 쿠타이바는 적의 포위를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뒤이어 파이칸트를 두 달간 포위했다. 파이칸트 주민들이 항복하자 다른 곳으로 이동했지만, 그들이 또다시 반기를 일으켜 쿠타이바가 남겨둔 수비대 장병들을 살해하자 도시로 돌아와서 함락시킨 뒤 군인이 될 연령에 해당하는 모든 남성을 살해했다.

2.2.2. 트란스옥시아나 & 페르가나 정복

708년 엄청난 전리품과 함께 메르브로 돌아간 쿠타이바는 그로부터 동방을 평정하라는 지시를 다시 접수하자 아무다리야 강을 재차 건넌 뒤 부하라를 정복하고 709년 겨울과 봄에 발흐에서 수많은 적을 주살하고 도시를 함락했다. 카불은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고, 화레즘 역시 쿠타이바의 형제 압드 아흐라반에게 공략되어 10만 명의 노예와 많은 비단이 노획되었다. 캄예르드의 왕이 화레즘 인근에서 도발하자, 그는 아흐라반을 보내 왕을 죽이고 4,000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이후 공물을 바치지 않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세우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사마르칸트를 공격하여 며칠만에 함락시킨 뒤, 주민들로부터 연간 10,000,000 디르함을 지불받고 첫 해에 3,000명의 노예를 바치게 했다. 또한 시민들이 모든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자발적으로 파괴하게 했다. 쿠타이바는 전리품의 5분의 1을 다마스쿠스로 보내면서 사마르칸트 공략을 알렸다. 713년 페르가나 계곡을 돌파하고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코젠트에서 현지 부족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2.2.3. 신드 정복

한편, 그는 신드와 편자브 공략에도 착수했지만 바딜 이븐 투파가 이끄는 첫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무함마드 이븐 알 카심에게 일을 맡겼다. 711년, 이븐 알 카심은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편자브 남쪽 멀탄까지 진군했다. 뒤이어 마크란 일대에 숙영지를 세운 뒤, 첫 원정에서 실패한 뒤 포로가 된 무슬림들을 구출하고자 타타로 진군했다. 타타를 탈환하고 포로들을 구출한 뒤 네룬 코트로 진군해 불교를 신봉하는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인더스 강 오른쪽 강둑으로 이동하여 시위스탄으로 진군하면서 다양한 부족장들의 지원을 받았다.

신드의 라자 다히르는 카심을 저지하려 했지만 712년 라오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다히르의 아들 자이샤는 라호르 인근의 브라흐마나바드에서 군대를 모아 대적하려 했지만, 적군이 브라흐마나바드로 몰려오자 도주했다. 6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브라흐마나바드를 공략한 이븐 알 카심은 신드의 고대 수도 아로르(현재의 수쿠르 인근 로흐리)를 잇따라 공략했고, 뒤이어 물탄을 향해 북상하여 그 일대를 평정했다. 이후 왈리드 1세로부터 원정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은 그는 현지 주민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풀고 새롭게 정복한 영토에 질서를 확립하려 노력했으며, 장차 라자스탄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다만 라자스탄은 적어도 14세기는 되어야 이슬람 군대가 진출하게 된다.

2.2.4. 아나톨리아 침공

왈리드 1세는 서방 원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복 형제인 마슬라마 이븐 알말리크는 칼리파의 지시에 따라 아나톨리아로 진군했다. 마슬라마는 안티오키아를 공략했고, 707년 티아나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했다. 708년 아모리움을 공략하면서 아나톨리아의 중심부를 장악했다. 712년 멜리테네 정복을 완료하고 아마세아와 미스티아를 약탈한 후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갈라티아로 진군하여 그 일대를 평정했다. 왈리드 1세는 잇따른 성공에 고무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준비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이를 간파하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전면 보수하고 금각만에서 함선 건조에 착수하고 식량을 대대적으로 비축해 아랍군의 침략을 대비했다.

2.2.5. 서부 마그레브 & 안달루스 정복

한편, 이프리키야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는 서쪽으로 대서양까지, 남쪽으로 시질마사까지 진격했고 탕헤르를 점령했다. 다만 현재의 지브롤터 해협에 해당하는 세우타 공략에는 실패했다. 그러던 중 동로마 제국의 세우타 총독 율리아누스가 무사에게 귀순하고 서고트 왕국 정벌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일설에 따르면, 율리아누스는 자기 딸 플로린다 라 카바를 강간한 서고트 왕 로데리쿠스에게 복수하고자 무사에게 귀순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로드리쿠스에게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이 북아프리카의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에게 밀사를 보내 로드리쿠스를 타도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무사는 가장 신뢰하는 장군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에게 7,000명을 맡겨서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애초에 이베리아 반도를 공략할 마음이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이슬람에 귀의한 베르베르군은 705년경 부터 이베리아 해상에 수시로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고, '알폰소 3세의 연대기'에는 웸바 왕의 재위기간(672~680) 동안 이슬람군이 에르위그라는 귀족의 청탁에 따라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710년 타리크가 이끄는 무슬림군은 율리아누스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 뒤 지브롤터에서 출발하여 카르타헤나 해안 일대를 돌며 약탈을 자행했다. 로드리쿠스는 이에 맞서 가능한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남하했지만, 711년 과달레테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후 타리크는 코르도바, 톨레도, 세비야를 잇따라 공략했다. 그러나 무사가 18,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해협을 건너 탈라베라에서 타리크와 합류한 뒤 타리크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고, 무사의 아들 아브드 알리가 712년부터 이베리아 원정을 맡아 각지의 서고트 귀족들을 순조롭게 복속시켰다. 이로써 우마이야 왕조는 지중해를 3면으로 포위하며 사실상 내해로 만들었고, 기독교권을 서쪽에서도 위협하게 되었다.

2.3. 내치

왈리드 1세는 아버지 아브드 알 말리크의 관료집단의 언어를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에서 아랍어로 대체하는 정책을 이어받았다. 그는 이복 형제이자 이집트 총독인 아브드 알리에게 이집트의 디완(정부 부처)에서 그리스어와 콥트어를 배제하고 아랍어를 사용하게 했다. 또한 제국의 복잡한 조세 제도를 정리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했고, 메카메디나 주민들을 가급적 온건하게 대해서 반 우마이야 정서가 강한 그들을 누그러뜨리려 애썼다.

한편, 그는 정복 전쟁에서 확보한 전리품을 토대로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공공 사업과 사회 복지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형제 및 아들들과 함께 시리아의 도로를 정비하고 우물을 팠으며, 관개망과 운하를 수반하는 간척사업에 정력을 쏟아부었다. 여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조치를 실시하고 장애인 한 명 당 하인 한 명을 배치해 평생 돌보도록 했다. 다만 이러한 공공 사업과 사회 복지 정책은 제국의 중심지인 시리아에 국한되었다. 아울러 건축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특히 다마스쿠스의 우야미드 모스크와 예루살렘의 예언자 모스크가 그의 치세에 재건축되거나 확장되었다. 또한 2차 피트나 때 손상을 입은 카바 복구에도 막대한 지원을 했다.

3. 사망

715년 2월 23일 또는 3월 11일 우마이야 왕조의 피한지인 데이르 무란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다마스쿠스의 바브 알 사히르 또는 바브 알 파라디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칼리파로 지명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동생 술라이만을 차기 칼리파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렀을 때 약속을 어기고 아들 아브드 알아지즈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했고, 술라이만이 뒤를 이어 칼리파가 되었다. 술라이만은 자신을 배제하려 했던 형에게 반감을 품고 형이 임명했던 거의 모든 총독을 교체했다. 훗날 왈리드 1세의 두 아들인 야지드 3세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는 744년에 칼리파로 잇따라 등극했다.